네모필라 블루 퀴라소는 메론 맛이 나지 않지만
가명조(아토 하루키+카노 아오구)
-카노 아오구 생일축하 글입니다. (21.10.27)
파란색은 인간의 식욕을 감퇴시키는 효과가 있다. 일반적인 음식을 파란색 계열로 필터 처리하면 누가 봐도 입에 대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되는 게 그 증거다. (라고 시나노가 보여준 인터넷 잡학 사전에 적혀있었다) 식기 업체 중에서는 그 점에 착안해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인 식사용 접시를 만든 곳도 있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얼마나 큰 효과를 주었을지 아토 하루키는 모른다. 접시에 담긴 음식 자체를 푸르게 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에 딱 맞는 접시가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할 뿐.
한편으로 파란색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곳도 있다. 이를테면 칵테일, 레모네이드, 여름철 빙수 같은 것들. 눈에 시원함을 가져다주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파란색의 장점으로 인간이 느끼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최대한 희석할 수 있는 범위는 그 정도가 최선이라는 거겠지.
자, 그건 그렇고 이걸 어떻게 할까.
하루키는 한 뼘 조금 못 되는 크기의 병을 살짝 흔들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네모필라 블루 퀴라소, 라고 라벨에 멋들어진 필기체로 적혀있는 병은 일반적인 병과 달리 아랫부분이 동그란 모양을 취하고 있다. 살짝 흔들어보면 약간 점성이 남는 느낌으로 안에 들어 있는 액체가 출렁였다. 시나노가 본다면 "먹으면 마나가 회복될 것 같아요!"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아토 하루키는 RPG 게임의 캐릭터 같은 게 아니므로 마신다고 딱히 마나가 회복되진 않으며, 그 전에 단맛이 강한 리큐르를 음료수처럼 들이켰다간 혀가 마비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단맛을 즐기지도 않고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파란색을 좋아하는 것도 더더욱 아닌 아토 하루키는 무슨 연유로 이 블루 퀴라소를 손에 넣게 된 것인가. 굳이 이유를 고른다면 라벨에 아름다운 네모필라 꽃의 평원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지만, '굳이'를 들먹이는 시점에서 별다른 이유가 없었음을 자백하는 꼴이다. 아니, 사실 마트에서 리큐르 병을 본 순간에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긴 하지만.
영수증은 있다. 산 지 하루가 넘어가지도 않았으니 마트를 찾아가 환불을 부탁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하루키는 리큐르를 따로 밀어두고 그 아래에 영수증을 끼워두는 대신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부엌으로 향해, 일전에 의뢰인에게서 선물 받은 레몬청을 꺼내 들었다. 가을 기운이 완연하긴 하지만 시원한 음료 한 잔 입에 대지 못할 정도로 뼈가 시리지는 않다고 스스로 되뇌면서.
얼음에 차가운 탄산수를 더 해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것은 딱히 어렵지도 어떻지도 않았다. 그걸 두 잔 만들었다. 하나는 자기 앞에 두고, 다른 하나는 쪽지를 끼워둔 액자와 반쯤 부서진 안경집 앞에 둔 아토 하루키는 잠시 미간을 매만졌다. 자신이 완성한 풍경이 생경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이걸 부엌 개수대에 부어버려야겠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투명한 잔 안에서 탄산이 톡톡 튀어 오르는 소리가 난다. 하루키는 천천히 잔을 들어 푸르게 물들어있는 액체를 마셨다.
탄산이 목을 쓸어내리며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당연하지만, 레몬 맛이었다.
*
그날 밤에는 푸른 버드나무의 꿈을 꾸었다. 아토 하루키는 밤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몽환적인 풍경 사이로 하얗고 얼룩진 가운을 걸친 이가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 있었다. 사방은 조용하다. 사람의 감각 중에서 가장 먼저 희미해지는 것은 청각이라는데 과연 그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죽은 이와 산 이는 서로 교류할 수 없어야 하기에 애초부터 목소리가 가장 먼저 잊히는지도 몰랐다. 손을 뻗어도 닿을 성싶지 않다. 말을 걸어도 답해줄 것 같지 않다. 다만 버드나무의 잎들이 어딘가의 바람에 맞부딪치는 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
문득, 아토 하루키는 그의 손에 눈에 익은 유리잔이 들려있음을 알아차린다. 푸른 버드나무 잎새의 빛을 닮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얼음과 레몬청과 블루 리큐르와 탄산수를 넣고 적당히 섞은 것. 그걸 하얀 머리의 남자가 홀짝이듯 마시고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일부러 하는 짓거리였다.
무언가 말을 건네려고 하다가, 들릴 리가 없음을 직감한다. 아토 하루키는 이것저것 생각 나는 말들을 속으로 골라보다 아무렴 어떻냐는 마음이 들어 어느새 제 손에 들린 잔을 홀짝였다. 저 너머에서는 여전히 푸른 버드나무가 풍경 같은 소리를 냈다.
이상한 변덕에 휘둘린 날치고는, 제법 괜찮은 꿈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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