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트위터 조각글 모음 06

!!!세포신곡 본편DLC은자막간까지의 스포일러!!!

-막간컾 분량 있음.


#01

연구원의 방에는 거울이 없다. 아니, 사실 모르는 일이다. 카노 아오구는 다른 이들의 방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행동에 구애될 정도로 그는 박복하지 않다. 적어도 아오구 자신은 그렇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좁은 방에서 누군가와 부대껴 앉거나,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과 마주 본 채로 우울한 독백을 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 타인의 시선은 필요 없다. 그는 오롯이 홀로 카노 아오구이며, 앞으로도 카노 아오구다. 하얀 머리에 파란 눈동자, 안경을 쓰고 히죽히죽 웃음을 띠며 움직이는 지고천 연구소의 특별 연구원(겉보기는 C등급이지만!). 그 외의 정의는 거추장스럽고 그 이하의 시선은 죽여버릴 것이다. 물론 이 이상의 자아 고찰을 하고픈 마음도 없다. 살아가는 의미, 삶의 보람? 그런 것 정도야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서 찾으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그는 이따금 제 방에 놓인 하얀 벽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전등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조금 질이 좋지 않아 살짝 지직거리는 빛 아래의 그림자는 몇 겹으로 겹쳐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엇보다 새까맣기도 하다.

두려운가?

천만에!

스위치를 끄면 창문도 없는 좁은 방이 암흑에 잠긴다. 카노 아오구는 제 침대 위에 드리워진 검은 어둠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꿈은 꾸지 않는다. 악몽도 없다. 어쭙잖은 자기연민도 없다….

평온하다.

낙원이 있다면 이러할 것이다.

#02 멘션온_캐릭터로_단문

[세오도아 리들 (자해 암시 묘사 있음)]

인간의 몸이라는 건 정말로 이상하고 기괴한 모양새다. 물고기에게는 비늘이 있다. 새에게는 깃털이 있다. 짐승에게는 털과 송곳니가 있다. 한데 인간에게 있는 거라곤 그 대단하신 두뇌와 도구를 쓰는 두 팔 정도가 전부다. 몸을 지키기 위한 단단한 뼈도 비늘도 없는 밋밋한 몸. 물에 들어가면 숨도 쉬지 못하고 하늘을 날지도 못하는 사지. 대기 중 산소농도가 너무 짙거나 옅어도 숨을 쉬지 못하는 이상한 호흡기관. 찢어지기라도 하면 저절로 수복되지 못하고 피를 줄줄 흘리는 혈관과 심장.

그런데도 인간이 이토록 번성하는 이유 또한 그 두뇌와 두 팔 덕분이라고 한다. 생각하고 고찰하고 발명하고 논증하고 개발하고 살해하고 개척하고 파괴하고 기만하고 기뻐하는 수많은 인간의 팔들, 팔 끝의 손가락, 그 끝의 손톱들!

그런데 왜 나는 죽지 못하지?

갑자기 의문이 귀결된다. 세오도아 리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박이려다가, 쿨럭이고, 이상한 숨소리를 냈다. 이전에 무엇을 했었더라? 아마도, 예상하건데,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을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은데.

실패했군.

머리 어딘가에서 냉정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있다.

세오도아 리들은 제 목을 멍하니 더듬다가, 정말 금방이라도 터뜨려 버리고 싶다는 듯이 그 피부에 손톱을 세웠다.

붉은 자국이 남는다.

피가 흐르진 않았다.

[세오도아+아토 하루키]

"담배를 좋아하시나요?"

여름 바닷가는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투명하고 아름답다. 세오도아 리들은 햇볕에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라솔 테이블 아래 앉아있는 아토 하루키를 바라보았다.

"미안. 냄새는 확실하게 뺄 생각이었는데 혹시 남았으려나?"

"아뇨, 딱히 지적하려고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

상대방이 머쓱한 듯 뺨을 긁는다. 그 표정에서 딱히 무언가를 숨기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한 아이스 브레이킹의 의도였던 걸까. 이건 내가 좀 부주의했네. 세오도아 리들은 속으로 짧게 반성하고, 잠깐 양해를 구한 다음 하루키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실 좋아하진 않아."

"그런가요?"

"사과 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절대 안 피웠을 거야."

보란 듯이 담배갑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탐정의 호기심이나 탐구력의 발로인지, 하루키는 그걸 멀리서 관찰했다. 하지만 문자는 대체로 이탈리아어라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정면에 새겨진 로고 정도일 것이다.

"관심 있어?"

파도 소리.

"…음, 아뇨. 왠지 피웠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요."

세오도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웃었다.

[아이바 이부키]

어떤 작가가 말했다. 소설을 읽는 것은 그 소설을 읽기 이전의 자신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걸 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고천 사건이 벌어진 이후의 아이바 이부키는 지고천 사건을 겪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지 못한다는 건 아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가끔 그곳의 꿈을 꾸기는 한다) 다만, 다만.

돌아가신 숙부는 돌아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것도 공공연히 밝혀지지 않는다.

그 참극은 온전히 드러나지 못한 채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

이따금 아이바 이부키는 확실한 허무감을 느꼈다. 그토록 끔찍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충분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세상 대다수는 여전히 그 일을 알지 못한다. 공공연하게 나서서 밝힐 수도 없다. 그 일의 전모가 정말로 드러난다면 온 세상이 흔들리고 충격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부키는 그저 앞으로도 침묵하고 침묵하며 비밀을 지켜나가야 했고….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키고 확인해보면, 단체 채팅방에 사진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일전에 지고천 사고의 생존자들끼리 함께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이다. 물론 자신의 얼굴도 함께 찍혀있다. 그 미소 어린 얼굴을 바라보는 아이바 이부키의 시야에 다른 이들의 메시지가 하나둘 뛰어 들어왔다. 한결같이 밝고 따듯하고, 어디까지라도 이어질 듯한 언어들. 그걸 바라보던 이부키의 손끝이 움직여, 하나의 메시지를 띄웠다.

『다음에 또 만나기를 기대하겠네!』

아이바 이부키는 2015년 4월 8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대신 2015년 4월 8일 이후를, 동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 말할 수 없는 기억을 더 단단해지기 위한 기반으로 삼자.

지금은 알 수 없는 언젠가의 인연을 도울 수 있도록.

#03

오리에 린은 매일 오전 10시 숫자 싸움을 한다(코무 글이라서 링크 처리)

https://fusetter.com/tw/pAfGC8W6#all

#04 첫번째로_멘션온_캐릭터가_두번째로_멘션온_캐릭터의_상황에서_세번째로_멘션온_캐릭터의_대사를_한다

…….

…… … ……….

………….

……………….

식물에게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언어가 존재하는 순간에 자아는 자신의 유리遊離를 자각한다. 병아리가 알껍데기을 스스로 부수고 나오듯이, 갓 태어난 짐승의 새끼가 다리로 서는 방법을 익히듯이, 인간의 아이가 첫 울음소리를 터뜨리듯이.

산소를 빨아들이듯이 상황을 흡수한다. 눈동자가 굴러간다. 펼쳐진 상황이 정보로서 입력된다. 공기 중에 남은 탄내와 약간의 휘발유 냄새. 타다 남은 불꽃과 터져버린 드럼통의 쇠 냄새. 혈향이 거의 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상당한 고압의 열과 충격으로 핏물조차 증발해버렸기 때문이겠지. 이것 참, 아토 하루키 대신 내 의식이 끌려 나올 만도 하네. 오리진 알파는 속으로 짧게 웃는다. 하필 아토 하루키를 상대로, 인화성 물질이 가득 찬 밀폐공간에서, 폭발을 일으키다니. 약점의 약점을 지나치게 찔려서 도리어 아프지 않을 정도다.

죽이려고 작정한 모양이지. 한 생명을 죽이는 데에 공간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방법은 다소 무식하긴 하지만 그만큼 파괴력은 확실하다. 요 몇 년 동안은 계속해서 잠들어있다시피 했었지만, 하루키가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는 사정을 파악하기에는 기억을 약간 뒤져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 참, 아무리 그래도 너무 방심한 거 아니야? 무의식 속으로 깊이 잠들어버린 제 또 다른 자아를 향해 투덜거린 뒤, 알파는 고개를 들었다. 벌어진 상처가 천천히 아물어간다. 그사이 멀리서 도착하는 엔진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몇몇 발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이 짓도 못 해 먹겠군. 밥 먹자마자 바로 시체처리라니.

-의뢰주란 인간들은 진짜 제멋대로라니까요.

-얼른 정리하고 돌아가자고. 에휴, 지긋지긋해.

"나를 생물로조차 보고 있지 않은 건가? 너무하네."

가만히 중얼거리고 시선을 던진다. 무너지고 기울어진 철골이 벽면을 뚫고 나가, 딱 인간 한 명이 나갈 정도의 구멍이 휑하니 뚫려있었다. (자, 그럼 저 녀석들이 과연 차 열쇠를 꽂아뒀을지 어떨지 도박을 해보기 전에.)

일단 배후를 들어야겠지?

덜렁이는 문을 걷어차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폭발의 폐허 속에서 신록의 새싹이 피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

[오리진 알파]가 [세오도아 리들]의 상황에서 [무츠시카 미스미]의 대사를 한다.

#05 (카노 플래그 스포 / 카노 생존 IF / 우울 전개)

카노 아오구가 죽었다.

정확히는, 살해당했다.

범인은 며칠 지나지 않아 붙잡혔다. 일대를 몰래 숨어다니며 빈집을 털던 자였다고 한다. 과거 일어난 몇 건인가의 사건도 이 자가 범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붙잡힌 범인은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고 곧장 재판과정에 넘겨졌다. 아토 하루키는 그 모든 일련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루키, 괜찮은가? 오토와 루이가 걱정스레 건네는 말이 피부 위를 미끄러져 툭 하고 떨어진다. 아토 하루키는 그것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감각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어째서… 왜… 어떻게?

직장에 장기휴가서를 제출했다. 아토 하루키는 집에서 푹 쉬겠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범인의 주변 사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가 탐정이었던 탓에 정보를 캐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부 그 범인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어릴 때는 말이 없고 참 착한 아이였는데…. 근데 그 집 아버지가 난폭한 주정꾼이어서….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신흥 종교? 아니, 그런 거에 다닌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도박으로 빚을 졌다나…. 참 딱하게도….

정보들이 취합된다. 논리적 구조를 갖추고 얼개를 맞춰나가면서도 아토 하루키는 내심 숨겨진 조각 하나가 발견되기를 바랐다. 예를 들면 범인이 이화종합연구소의 관계자라던가, 지고천 연구소와 일말이라도 관련되어있다는 증거 같은 것.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모든 정보는 그의 가정사에만 집중되어있었고, 그나마 있었던 외부의 연결고리도 뒷골목의 몇몇 불량배와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범인은 지극히 평범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불행을 겪은 사람이었다.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감정의 근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키는 쿠라치 테루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보통 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부탁을 했다. 쿠라치는 꽤 난감한 기색이었지만 전화 너머 아토 하루키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알아본 뒤 전화해주겠다며 통화를 끊었다. 아토 하루키는 저질렀다는 마음과 죄송한 마음, 그리고 깊은 허무함 같은 걸 느끼며 거실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노 아오구는, 이 집에서 퍽 유령처럼 살았다. 비유로 든 표현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일단 그의 본명은 실종자 명단에 남아있었으나 문제는 그가 카노 아오구로서 저지른 온갖 비인도적인 행위에 있었다. 본래라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겠지만, 지고천 연구소 자체가 폭발하고 터지면서 대부분의 자료나 증거들은 한 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카노 아오구의 죄는 공중에 붕 뜨고 말았다. 이미 무죄 판결이 난 사건을 다시 재판하여 유죄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을 생각할 동안은, 제집에 두도록 할게요. 안심하세요. 그는 어둠을 틈타 도망치는 짓 같은 건 안 할 겁니다.

쿠라치 테루미에게 그렇게 말한 게 누구였더라.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아토 하루키는 짧게 웃었다.

쿠라치 테루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짤막한 내용을 전달하고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하루키는 한동안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다가 천천히 팔을 내려놓았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군.》

《그런데 그 남자가 끝없이, 끝없이 신경을 긁는 말을 했다고 해.》

정신이 들고 보니 죽인 뒤였다. 범인은 그렇게 증언하고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이상한 이야기였다.

그것만 들으면 꼭 카노 아오구가 그에게 살해당하려고 맘먹고 도발한 듯하지 않은가?

아토 하루키는 카노 아오구가 쓰던 작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얼마 되지 않는 물건들을 뒤진다. 하지만 물건들에는 약간의 먼지만 쌓였을 뿐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일까.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거실로 걸음을 옮겨 주위를 돌아보던 아토 하루키는, 문득 서랍장 위쪽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지고천 연구소 사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다 함께 모여 찍은 사진. 하지만 거기에 카노 아오구는 찍혀있지 않다.

액자를 뒤집어, 고정핀을 움직인다. 받침대가 달린 합판을 떼어내면 척 보기에도 부자연스러운 종이 쪽지 하나가 끼워져있었다. 아토 하루키는 천천히 그것을 펼쳤다. 손끝이 떨린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글자를 피워냈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아소 짱에게.」

「이제야 찾았어? 바보네.」

「아마 이걸 보고 있는 아소 짱은 세상에서 제일 얼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겠지.」

「'어떻게? 어째서? 기껏 모든 일이 잘됐는데 왜?'」

「친절한 카노 씨가 답을 알려줄게.」

「너, 너무 오만했어.」

「물론 카노 씨는 아소 짱의 그런 극도로 멍청한 점을 좋아하지만」

「호의와 짜증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버렸지 뭐야.」

「애초에 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걸 정말 싫어해.」

「해피엔딩을 맞이했다고 만족하고 있었어?」

「이제 걱정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

「모든 것이 경사스럽게 마무리될 거라고?」

「어이없네, 아소 짱. 자기가 무슨 위대한 극작가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사람을 해피 엔딩의 파츠 취급하는 데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고.」

「그래도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지?」

「이걸 보는 아소 짱의 얼굴을 못 보는 게 아쉬울 뿐이야.」

「그럼 안녕☆」

편지는 끝났다. 열어둔 창문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와 집안을 유령처럼 맴돌았다. 아토 하루키는 마치 누군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거푸집처럼 서 있다가 간신히 생각했다. 자신은 아마 얼마나 시간이 지나든 그를 잊을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의 오만이 무참히 부숴버린 흔적 앞에서 결코 꼼짝할 수 없으리라고.

여기에 저주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인과응보이므로.

그렇게 하나의 희극에 얼룩이 남았다.

#06 트친이_주는_첫문장으로_글쓰기

1.

유독 안개가 짙은 새벽, 뿌연 창문 너머로 ■■이 보였다. 불확실하고 흐릿하고 그늘진 것. 가까이 다가가 창문을 닦으면 ■■가 무엇인지 확실히 볼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선 졸렸다. 어쩌면 그건 내 눈의 착각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아무튼, 안개가 짙었다. 어쩌면 가까이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를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잠들었다. 다시 깨었을 때는 아침이었고 안개는 약간 걷혀있었다.

창문으로 다가간다.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하는 한편으로 깨닫는다. 여기는 2층 주택의 2층이고, 내 창문 아래에는 발 받침대가 될만한 공간이라곤 없다. 사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아이 정도만 서 있을 수 있는 돌출부에 매달릴만한 사람이 있을까? 설령 어떤 아이가 여기에 있었다고 해도, 그 아이는 대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올라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창문을 열면 서늘한 바깥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하루키- 일어났니?"

문 너머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찬 바람에 뺨을 식히다 뒤늦게 대답했다. 네, 일어났어요.

작은 돌출부에는 물 자국이 흥건했다.

그 냄새가 어쩐지 익숙하단 생각이 들었다.

2.

「크아아아아 흑염룡이 울부짖엇다. 흑염룡의 울부짖음은 아무도 이길 수 없었따. '으악 젠장' 사람들은 도망쳤다. '으악 시바' 마수들도 도망갓다. '존나 쎈 흑염룡이다!' 드래곤들도 도망갔따.」

"시나노."

"네!"

"왜 이런 걸 읽고 있는 거야?"

"이런 거라뇨! 요즘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짱센 흑염룡』인데요!"

"초등학생이 쓴 듯한 그 제목은 차치하고… 이게 소설이라고?"

"물론 하루키 씨에게는 아직 생소할 수 있어요! 하지만 판타지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소설 문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작품이라고 불리고 있다고요!"

"소설이란 건 심오하구나."

"하긴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아할 수도 있겠네요! 『디타검』시리즈로 입문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초심자도 쉽게 읽을 수 있고 감동도 있다고요!"

"은근슬쩍 네 장르 영업하지 마."

3.

그날의 추억은 한 조각의 이야기로. 그날의 비탄도 한 조각의 이야기로. 그날의 후회도 한 조각의 이야기로. 오팔은 경도가 약하여 잘 깨지고 부서지기 쉽다는데 그날 밤 사네미츠가 꾼 꿈에서는 부서진 오팔 조각 같은 온갖 이야기가 휘날렸다. 정제되지 않은, 가공되지 않은 파편들이 피부를 찢고 머리카락을 끊어낸다. 그런데도 이소이 사네미츠는 눈을 감지 않았다. 시린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암흑 속에서 빛나는 이야기의 조각들은 영원히 빛날 형벌 같기도 하고 어떤 희망의 조각 같기도 하다. 이소이 사네미츠는 자신이 그걸 함부로 판단하는 건 오만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풍경은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 안에 담긴 선도 악도, 의지도 비명도, 무엇 하나 변함이 없는데 모두 모아서 보면 여러 가지 빛으로 반짝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면 연약한 인간의 정신이 그 안에 휘몰아치는 온갖 감정을 견디지 못하여 억지로 아름다운 것으로 뭉뚱그려 보고 있는 걸까.

이 얼마나 제멋대로 자기중심적인 인간인가.

숨조차 크게 들이쉴 수 없다. 망연한 자 앞에서 온갖 반짝임이 흐르고 합쳐지다 다시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며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냈다. 그건 숭고한 날갯짓 같기도 하고 결코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발버둥같기도 해서.

차마 손을 뻗어 붙잡을 수도 없었다.

4.

《이제 내가 그대의 검이 되었으니 그대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네.》

전학 온 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는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를 정말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 아이가 최근에 깊이 빠져있다는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며, 쿠마자키 카렌은 생각한다. 아뇨, 당신이 그 사람의 검이 되었다고 해도 그 사람은 계속해서 번민하고 고뇌하고 슬퍼할 거에요. 함께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건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실로 무관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의 파트너가 당신의 말에 반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그 사람은 당신을 걱정하는 거예요. 짐을 한쪽에게만 주고 싶지 않은 거에요.

그런 생각을 말하자, 친구는 감탄했다.

"굉장해~ 카렌은 엄청 어른스럽구나!"

"아냐. 나는 그냥 생각이 많을 뿐인걸."

"그래도 뭔가 존경스러워!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친구가 방긋 웃는다. 카렌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따라서 방긋 웃어 보였다.

아버지가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괜찮아. 카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아빠가 전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지금 전부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5. (막간컾)

가끔 너무 큰 애정은 병이 된다. 식물에 너무 많은 물을 주면 죽어버리고, 어항에 너무 많은 공기를 넣어주면 죽어버리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상대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면서, 알맞은 애정을 적절히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 균형을 잡지 못해서 결국 자신의 거대한 애정으로 상대를 짓눌러 버리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 혹은 자기 자신을 짓눌러버리거나.

그런 점에서 보면 루는 정말 균형을 잘 잡는 사람이었지. 세오도아는 어딘가의 테라스에 몸을 기댄 채 느릿하게 회상한다. 의뢰를 끝내고 주어진 하루 정도의 여유시간. 시장을 구경하러 간다느니 고서점을 둘러보러 간다느니 하며 각자의 계획을 세운 멤버들을 배웅한 세오도아는 체크인한 방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담배만 태우던 참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풍경이 아름다웠지만 그뿐이었다.

어쩌면 예전에 루랑 같이 와봤던 마을이라서 그런지도 몰라. 세오도아는 냉정한 것 같기도 하고 엉망으로 뒤엉킨 것 같기도 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한다. 아직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고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던 때 관광 목적으로 방문했던 작은 마을.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우연도 있다는 생각과 너무 오래 지난 세월이 일으키는 마찰감이 머릿속에서 맞부딪쳤다.

함께 고양이를 보았던 담장 길.

자잘한 물건을 파는 걸 구경했던 시장.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거닐었던 바닷가.

밀려오는 추억은 너무 많고 품은 사랑은 줄어들 줄을 모른다.

아아, 역시 너무 큰 애정은 병이다.

그래도 당신이 병이라면 나는 기꺼이 앓다 죽을 테지요.

세오도아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떠오른 생각은 쓴웃음을 불렀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추가태그
#조각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