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커플링Coupling

[레이하루]신발장 안 비밀 묻기 위원회

감상에 앞서 주의문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레이지가 고백했지만 받아주지 않은 세계의 하루키」와 「하루키가 고백했지만 받아주지 않은 세계의 레이지」가 나옵니다.

※레이X하루 전제지만 이 글에 등장하는 하루키와 레이지는 사귀지 않습니다. 사실 사귀는 레이X하루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괜찮으신 분들은 계속 읽어주세요.


일전에 사두었던 옷을 입는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신발을 신고, 끈을 묶은 다음 가볍게 바닥을 찬다. 어딜 어떻게 봐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모습을 하고, 아토 하루키는 신발장을 열었다. 제법 큼직한 붙박이장의 문이 열린다. 하루키는 크게 망설이지도 않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그대로 문을 닫는다. 달칵.

암흑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먼지 냄새를 비집듯이 어디선가 은은한 홍차향이 흘러온다. 그 향을 쫓아 발걸음을 내디디면 좁디 좁아야 할 공간이 확장되며 밝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변모 속을 거니던 하루키는 약간의 다과와 함께 우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를 발견했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레이지."

이름을 부르면 상대가 고개를 든다. 기색을 보아하니 오래 기다린 것 같지는 않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레이지는 많은 것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니까. 혹시 오래 기다렸어? 그렇게 물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도 방금 도착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얼굴을 빤히 보고 있노라면 레이지가 가볍게 웃었다. 저기, 그렇게 쳐다보시면 쑥스러운데요. 하루키는 아랑곳 않고 상대의 짙은 눈썹, 특유의 눈매, 조금 자란 듯한 갈색 머리카락을 눈으로 훑으며 자리에 앉았다.

"밥은 잘 먹고 있는 거지?"

"물론임다. 형이야말로 거르거나 하는건 아니겠죠?"

"안 그래. 이쪽의 레이지 걱정시키기 싫으니까. 그쪽의 하루키는 어때?"

"가끔 식사를 걸러요. 맘 같아선 늘 곁에서 지켜보고 싶네요."

레이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제 몫의 홍차를 마신다. 하루키는 문득 찻잔을 들고 있는 레이지의 손을 보다가 제 앞에 놓인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무늬가 아로새겨진 잔을 살짝 기울여 입술을 적시면 다즐링 특유의 머스캣 향이 밀려왔다. 그 사이 레이지가 자조하듯 입을 열었다.

"웃기는 소리죠. 그 사람 실연시켰으면서."

"괜찮아. 나도 레이지 거절했잖아."

다른 이가 들으면 의아해 할 대화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 공간에 있는 이들은 아토 하루키와 이소이 레이지 뿐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소이 레이지의 고백을 거절한 아토 하루키와 아토 하루키의 고백을 거절한 이소이 레이지만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상대를 사랑하고 있으면서, 그 마음을 거절한 이들.

"언제나 생각하지만, 정말 묘한 기분이에요. 하루키 씨랑 이런 이야기를 공유한다니."

"나도 마찬가지야. 처음엔 정신이 이상해진 줄 알았는걸."

"그래도 당신을 만나고부터 꽤 기분이 나아졌어요."

"우연이네. 나도 그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웃어보이고는 천천히 근황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쪽 세계에선 어떤 일이 있었다던가, 저쪽 세계에선 저런 일이 있었다던가 하는 화제 사이사이에 자신들이 마음을 거절한 이의 이야기가 잔뜩 배어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본래의 세계에서 꾹꾹 눌러담았던 마음의 반동이다. 저쪽의 하루키를 얘기하던 레이지가 긴 한숨을 내쉴 즈음 하루키 또한 자신이 꽤나 열성적으로 얘기했음을 알고 다시금 목을 축였다.

"지금쯤 뭘 하려나, 이쪽의 레이지."

"말씀해 드릴까요?"

"됐어. 이쪽 세계는 네가 있는 세계와는 다르잖아."

"그 말씀대로네요."

"많이 다치지 않으면 좋을텐데."

"이쪽의 하루키 씨도요. 몸이 약하니까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항상 걱정임다."

"괜찮아. 나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은걸."

"신빙성이 없네요."

"이봐."

….

…….

"하루키 씨."

"왜 그래?"

"저희 비겁하네요."

하루키는 왜? 라고 되묻지 않는다. 지극한 동의에는 별개의 말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서로와 웃으면서 무엇이든지 얘기하는데, 정작 돌아가면 그 상대에겐 마음을 숨기고 표면적인 얘기만 할 뿐이잖아요."

"그게 우리의 선택인걸."

"네. 힘껏 밀어내고, 그런 주제에 행복을 바라고, 그러면서 다른 세계의 우리와는 꼬박꼬박 만나는 거 말이죠."

여기에서 홍차는 식지 않는다.

너무 거대한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그래도 고백하진 않을 거에요."

"알아."

"하루키 씨도 고백하지 않을거죠."

"당연하지."

"……."

"……."

"슬슬 돌아갈까요."

"응."

이 공간에는 시계가 없다. 시계는 커녕 시간의 흐름을 일깨우는 그 어떤 지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시계를 보면 여기로 올 때로부터 약 1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이 공간이 도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레이지도 하루키도 짐작가는 바가 없었지만, 안에서 얼마나 있든 바깥의 시간이 오래 소모되지 않는다는 점은 서로에게 다행이었다. 때로는 하루 남짓한 시간을 몽땅 털어넣어 이야기해도 모자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루키는 찻잔 바닥에 고인 찻물을 잠시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레이지."

"네."

"널 만나서 다행이야."

"저도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응. 그럼 잘 가."

"조심히 가세요."

두 사람 사이에는 암묵의 룰이 있다. 여기서 헤어질 때 또 봐요, 라거나 다음에 만나자,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어쩌면 다음의 만남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없어야 한다는 말이 더 옳을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이상 이곳에 와선 안 된다는 생각이 조용히 발치를 적시다가 물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또 만나게 될 거야.

서로를 이토록 잘 아는 동류는 또 없을 테니까.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몰래 터뜨릴 장소도 달리 없으니까.

하루키는 그 말을 꾹 눌러담은 채 걸었다.

돌아왔을 때는 저녁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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