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ounce the love of angel
아토 하루키+LDL(논커플링). 세포신곡 온리전 「지고천 연구소 온라인 입교설명회」 참가 회지의 유료 발행 게시글입니다. (※24.10.09 무료로 전환)
인포 목업 제공 젬즈비님(@Gems_Bee)
※샘플 페이지는 아래 주소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https://butterflybox.postype.com/post/10718867
※본 회지는 2024년 10월 9일 이후 무료화되었습니다※
!Attention!
※본 회지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① 세포신곡-Cell of Emperio-의 S+ 엔딩 이후의 시간대.
② 자체적으로 생각한 동인 설정과 타임라인.
③ 등장 캐릭터와 인간관계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④ 세포신곡-Cell of Emperio- 본편에서 막간에 이르는 스포일러.
위 사항을 염두하고 페이지를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1. 10. 09
세포신곡 온리전 『지고천 연구소 온라인 입교설명회』 참가 회지.
Written By Mikyel. (@essqy)
1. 들어라 그 천사의 날갯짓 소리를
2. 보아라 그 천사의 휘광을 신의 영광을
3. 말하라 그 천사의 거룩함을 위대한 궤적을
4. 그러나 그들은 신의 종이므로 마음이 없고
5. 마음이 없는 자는 스스로 사랑할 수 없으니
6. 천사의 사랑이란 그저 상아빛일 뿐이라
7. 그러니 마음이 있는 자라면 차라리
〔후기〕
들어라 그 천사의 날갯짓 소리를
인간은 대체로 세계를 자신의 시야에 맞춰 잘라보려고 해서, 정작 위화감을 감지한 때에는 중요한 이상 징후를 한두 개쯤 흘려보낸 뒤이곤 하다. 전형적인 문제 회피형 인간 이소이 사네미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뒤 자신의 가문을 둘러싼 「인자」를 마주하겠다고 결심한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과 이소이 사네미츠 라는 한 개인이 아토 하루키의 변화에 뭐라고 말을 보탤 수 있는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애초에 피가 이어진 친아들인데 성이 다르다는 시점에서 사네미츠는 산 채로 입이 바느질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호적이란건 자신이 하루키를 아들로 인지하고, 하루키가 자신을 아버지親父라 부르고, 제 자식이나 다름없는 이소이 레이지가 그를 형이라 부른다 해서 저절로 바뀌는 편리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누군가가 아토 하루키라는 인물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본다면 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외톨이로 나올 것이다. 그건 사네미츠가 무언가 비상대책을 동원하지 않는 한 하루키에게 적법한 절차로 유산을 물려주거나 만일의 사태에서 법적인 신분 보호자가 되어줄 수도 없음을 뜻했다. 거기다 이소이 사네미츠에게는 하루키를 냉대하고 방임한 경험마저 있다. 어떤 양육 전문가도 눈앞에서 혀를 차며 펜대를 빙글빙글 돌릴 정도의 중대 사안이었다.
이 업보로 인해, 아토 하루키를 유사 보호자나 다름없이 길러낸 오토와 루이를 마주한 이소이 사네미츠는 지옥과 같은 침묵을 견뎌야 했다. 자리를 당장 박차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여기서 도망쳤다간 두 번 다시 하루키를 마주할 수 없을 거라는 압박감이 뒤섞여 어떤 정신으로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면담 자리였다.
다행히도 그 자리에선 하루키의 곁에 있어도 좋다는 요지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사네미츠는 정말 하루키 앞에 얼씬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복하건데,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저절로 완화시켜 주지는 않았다. 물론 하루키는 사네미츠에게 시종일관 쌀쌀맞고 퉁명스레 굴며 자신이 관계의 우위인 듯 행동했지만… 그런 태도가 아니었다면 사네미츠는 하루키를 볼 때마다 되살아나는 제 안의 감정에 짓눌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형태 이외의 소통은 함부로 시도될 수 없었다는 의미다. 그걸 누구도 참견하거나 교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눈동자가 일순 선명한 붉은 색을 띈 걸 발견했을 때, 사네미츠는 이게 뒤늦은 발견인지 아니면 적절한 깨달음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혼란 속에서 가정이 데굴데굴 굴러 나온다. 눈의 착각. 컬러 렌즈. 알비노 증상. 하지만 자신을 보는 하루키의 눈이 너무나 덤덤해서, 사네미츠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아, 음, 그래. 잘 모르겠지만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루키.”
“뭔데요.”
말을 꺼낸 것은 좋다. 하지만 무엇을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네미츠는 공항의 번잡함 속에서 입을 벙긋거리다가 안약 사줄까? 같은 헛소리를 했다. 아토 하루키는 한심함인지 짜증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괜찮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탑승 수속을 밟기 위해 걸어갔다. 사네미츠는 그 뒷모습을 보며 몇 번인가 입술을 벙긋거리다, 초조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하루키가 탄 일본행 비행기가 푸른 하늘을 날아갈 때까지.
하루키가 떠난 뒤 레이지는 애니의 집에 들러 무언가를 받아오겠다며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고 떠났다. 사네미츠는 제가 본 것을 가늠하다가 어떤 결론에 도달한 뒤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망상, 몽상, 아니면 정답. 사색은 머잖아 사념이 되어 피부를 파고들었다. 나이 먹어도 여전히 얇은 피부가 손톱 모양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을 무렵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사네미츠가 직접 나를 불러낸다니 별일이네.”
“하루키가 오늘 일본으로 돌아갔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한껏 갈라져있다. 사네미츠는 제 말이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진 다음에야 몇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계절은 봄이고 지고세포는 병을 허락하지 않는데 메마른 혀뿌리를 대신하듯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대화는 마치 사전에 서로 합의라도 거친 것 마냥 매끄러웠다.
“알고 있어. 다음엔 또 언제 보게 되려나.”
“요즘 들어 오컬트에 대한 지식이 제법 넓어진 것 같아.”
“일본의 탐정은 큰일이네. 민속학도 건드리고 있는 것 같던걸?”
“다개국어도 왠지 능숙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배움에 나이제한은 없지.”
“오늘은, 그 아이의 눈이 붉어진 걸 봤어.”
“충혈인가?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이뤘는지도 몰라.”
“세오도아.”
“응.”
“하루키에게 뭘 하고 있는 거야?”
저 멀리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농구공을 주고받는다. 주인이 던지는 둥근 원반을 쫓아 검은색과 흰색 털이 섞인 중형견이 공원을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세오도아 리들은 사네미츠의 질문이 그리 급히 답할 것도 아니라는 듯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천천히 빨아들였다. 희미한 사과 향을 머금은 연기가 흐물흐물하게 사방으로 흩어져간다. 지금의 사네미츠에게는 견딜 수 없는 무정형無定形이었다.
“걱정하지 마, 사네미츠.”
무엇을?
“너는 무슨 일이 있던 간에, 그 아이를 네 아들로서 사랑할거잖아?”
완곡한 자백이나 다름없다. 사네미츠는 떨리는 손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은 이렇게 밝은데 와 닿는 바람은 끔찍하도록 미지근했다. 아아, 시간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악몽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시 걸어온다. 힘이 쭉 빠지려는 무릎께에 철심처럼 박혀 무너지려는 몸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 아이는.”
하라다 씨.
“내 아들이야…!”
무엇보다 확고해야 할 외침이, 어째서 이다지도 무력하게 퍼져나가는 걸까. 있는 힘껏 숨을 몰아쉬는 사네미츠 앞에서 세오도아가 미소 지었다.
명백한 가짜 미소였다.
“사네미츠, 이건 나와 하루키 사이의 거래야.”
“거래? 너는 대체, 내 아들에게 무얼 주고, 뭘 받아가고 있는 거야!”
“미래와 죽음.”
공원 바닥에서 농구공이 세게 튀어 오르는 소리가 난다. 사네미츠는 가까스로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 아이는 미래를 받는 대신, 내게 죽음을 줄 거야. 하루키는 그럴 만한 인자를.”
이어지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만년필이 빛났기 때문이다.
아토 하루키가 일본 땅에 발을 디뎠을 때는 짙은 석양이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일본과 이탈리아 사이의 여행도 익숙해졌지만 오랜 비행은 역시 관절을 굳어지게 만든다. 느지막히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피고, 하루키는 제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오토와 루이에게서 도착할 즈음에 공항 주차장으로 가겠다는 메시지가 한 건, 릴리 더 위치에서 VVIP고객에게만 월 한정으로 발송한다는 할인 쿠폰 메시지가 한 건, 세오도아에게서 「알겠어」라는 메시지가 한 건.
조금 고민하다, 배터리의 잔량이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화면을 두드린다. 통화 연결을 알리는 화면이 떠오를 동안 핸드폰 액정을 응시하던 아토 하루키는 자신의 캐리어가 컨베이어 벨트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안으로 들어 가버렸음을 알아차렸다. 아, 음,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는 기척이 난다. 이번에는 딱히 상대의 신상정보를 캐낼 필요가 없었으므로 하루키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여보세요, 세오 씨?”
《응, 무슨 일이야. 하루키?》
“크게 다치진 않으신 것 같네요.”
《걱정해 준거야? 일단은 멀쩡해.》
“일단은, 인가요.”
마른 웃음소리.
《사네미츠도 다친 곳은 없어. 좀 머리가 아플지는 모르지만.》
“그 인간은 머리가 좀 쪼개지더라도 싸죠.”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아토 하루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짐을 찾은 이들이 덜걱이는, 혹은 조용한 바퀴 소리를 내며 하나 둘 공항을 떠나갔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타이밍을 놓친 사람의 노란 캐리어 위에서 공항의 강렬한 조명을 받은 사과 스티커가 빛난다. 좀 작위적인 연출이었다.
《있잖아.》
“번복은 안 합니다. 전 당신의 인자를 전부 인계받을 거예요.”
《…….》
“그때도 말했지만, 당신이 「과거」를 개찬하면 상당히 곤란하니까요.”
《알아. 그게 우리의 거래지.》
“아버지가 방해하면 시간이라도 돌려버리세요.”
《이미 했어.》
“수고 많으시네요.”
컨베이어 벨트에서 다시 짐이 빠져나온다. 하루키는 제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캐리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범한 회색 표면에는 이런저런 흠집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이 얼핏 바싹 마른 날개의 형태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착각인가? 눈을 한 번 깜박이면 흠집은 흠집일 뿐이다. 하루키는 제 눈가를 긁적이다 캐리어의 손잡이를 한 손으로 붙잡고 끌어당겼다. 덜컹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공항이야?》
“공항이죠.”
《그래, 들어가서 쉬어.》
“네, 세오 씨도요.”
통화가 끝난다. 아토 하루키는 약간 따뜻해진 핸드폰을 보다가 뒤늦게 새로 도착한 메시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 발신인. 이소이 레이지. 내용. 형이 떠났더니 아버지가 그대로 앓아누웠네요. 첨부 이미지. 소파에 딱 봐도 안 좋은 안색으로 누워있는 이소이 사네미츠. 하루키는 그걸 가만히 응시한다. 핸드폰 액정 오른쪽 위에 표시되는 현재 시간이 소리 없이 바뀔 동안.
「두통약 먹고 자라고 해.」
답변은 짧고 간결하다. 그것이 아토 하루키에게 걸맞은 언행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캐리어를 끌고 필요한 수속을 밟은 뒤 공항 바깥으로 나오면 쏟아지는 석양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하루키는 한 손을 들어 그 빛을 가리고는 오토와 루이의 자동차를 찾아 천천히 주차장을 둘러보았다. 그 등 뒤로 길게 그림자가 진다. 아직은 인간의 형태였다.
보아라 그 천사의 휘광을 신의 영광을
이탈리아로 건너온 지 약 1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이소이 사네미츠는 제 이름을 목 메이지 않고 발음하는 방법을 익혔고 이소이 레이지는 제 이름의 한자를 통일된 형태로 쓰게 되었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로 보이지만 사실 내면으로는 상당한 비관을 품고 있는 하라다 미노루의 성질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지만, 이탈리아의 풍토는 그런 삐죽빼죽한 남성의 자아도 문제없이 받아들였다.
마찰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서는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하나씩 거친 끝에 이탈리아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와 같은 계절이 찾아온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사네미츠는 이곳이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 웃는 때가 있으면 침묵하는 때도 있다. 외로운 순간이 있는가 하면 떠들썩한 순간도 온다. 이른바,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이야기다. 물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에 이곳이 일본과 완전히 같은 환경이 될 순 없었다. 한가한 오전에 이웃집 사람이 회람판을 들고 방문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네미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약간의 친절에 웃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끔씩은 안부를 묻기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소이 레이지가 자라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로 여겨졌으므로.
그리하여 두 사람 앞에 일본과 이탈리아 뿐 만 아니라 모든 거리에서 공평하게 생기는 일이 펼쳐진다. 이소이 레이지가 자신의 손을 살짝 잡아당긴다. 사네미츠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죽어있다. 이따금 레이지가 다가가면 경계하는 눈빛으로 도망가 버리던 길고양이다. 달리던 자동차인지 자전거에 치인 모양이라고, 옅은 밀도로 모여 있던 사람들이 소곤거렸다. 작은 시신의 주변에는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과 공원 관리인이 서있다. 그들은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더니, 미화원의 작업용 수레에서 작은 비닐봉투를 뜯어냈다. 사네미츠는 그 이상 자세한 상황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레이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아이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를 따라왔다.
“사네미츠 씨. 그 고양이, 많이 아팠을까요.”
“…잘 모르겠네.”
“네.”
“하지만 말야, 레이지.”
다음 말을 잇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아니,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일종의 비정함인지도 몰랐다. 과거는 과거라고 잘라 말할 비정함, 이 아이는 그 아이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통보할 수 있을 정도의 잔혹함.
“생명이란 건, 본래 돌고 도는 거란다.”
“돌고 돈다.”
“한자는 나중에 알려줄게. …매장된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저승으로 향해 조용한 휴식을 취하지. 그럼 육체는 꽃이나 열매를 거치며 새로운 형태의 생명을 얻어,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온단다. 그건 슬픈 것도 고통스러운 일도 아니야.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또 당연한 일이지.”
“자연스러운 일.”
“고양이의 영혼은 지금쯤 천국으로 올라 편안한 낮잠을 즐기고 있을 거야.”
“그건 다행이네요.”
레이지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번진다. 이제 아이는 차가운 길바닥이 아니라 폭신한 잔디밭에서 마음껏 낮잠을 자고 있는 얼룩무늬 고양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사네미츠는 죽어가는 벌레처럼 경련하는 입꼬리를 차분히 끌어당기며 레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와 닿는 감각이 부드러웠다.
종이봉투를 안고 두 사람의 집에 도착해, 거실 겸 부엌으로 들어간다. 나갈 때 철저히 불을 끄고 나간 탓에 바깥에서 들어오는 미미한 빛만이 바닥을 어슴푸레하게 밝히고 있었다. 일단 눈에 익은 위치에 봉투를 올리면, 레이지가 전등 스위치 쪽으로 이동하는 기척이 났다.
“사네미츠 씨.”
“왜 그러니?”
“그럼 하루키 형은 어떻게 되나요?”
뭐? 반문하려는 사이 창문에서 거대한 굉음과 빛이 터져 나온다. 사네미츠는 종이봉투를 내버려둔 채 황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저 먼 하늘에서 거대한 여객기가 불길에 휩싸여 맹렬하게 타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달라붙었다. 두 동강 난 기체의 파편이 연기와 불꽃을 두르고 천천히 추락하는 동안 주위에서는 비명과 절규가 들끓었다. 생존자는 있을까? 저기서 생존할 수 있을까? 고장 난 머리가 단순한 의문을 반복한다. 등 뒤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하루키 형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갔을까요?”
“무슨 소리야, 레이지….”
“아니면, 여전히 여기 묶여있을까요?”
“왜 지금 하루키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무슨 소리에요, 사네미츠 씨.”
레이지가 방긋 웃었다.
“거기서 불타는 건 하루키 형이잖아요.”
창고를 정리해서 방을 만들었다. 정리라고 해도 안에 있는 책장이나 서랍장을 임시로 거실 한 쪽에 빼낸 뒤 창고 안에 간이침대와 책상을 들인 정도지만. 작업 효율이라곤 빵점이군요. 일을 도우러 온 츠바이크는 냉정히 잘라 말했지만 작업을 거부하진 않았다. 사네미츠의 본래 방에는 억지로 흔들어 깨울 수 없는 손님이 잠들어 있는 탓이었다.
그 침대에서 사네미츠는 거의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깨어났다.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호흡이 막혀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지고생명체가 호흡곤란으로 사망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만.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와 시계를 본다.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터치하자 어둑한 공간에 현재 시간이 떠올랐다. 새벽 4시 44분. 하필 이런 재수 없는 시간에 잠을 깨다니. 사네미츠는 단절된 꿈의 단면에서 울컥 솟아나오는 두통 기운을 느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최악의 악몽이었다.
다만 모든 것을 꿈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날 아토 하루키가 탄 비행기가 2백 여 명의 승객과 함께 사라진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라졌다는 말은 완곡하고도 동화적으로 표현된 편이다. 공항에서 이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연료 누출에 의한 폭발을 일으킨 비행기는 매캐한 연기와 새카만 철골만 남기고 그대로 연소되고 말았으니까. 국제민간항공기구 소속 항공사고조사팀의 공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해당 사고의 생존자는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해 0명. 그 끔찍한 아비규환으로부터도 벌써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도저히 이대로는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사네미츠는 비척비척 거실로 향했다. 중간 중간 좀 전에 꾼 꿈이 강한 기시감을 일으키며 끼어들었지만 스위치를 켜니 사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레이지는 아직 잠들어있을까. 이런 걸로 깨어나게 만들면 퍽 미안한 일이다. 사네미츠는 아이들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잠시 눈치를 살폈다가, 복도에 깔린 어둠이 몸조차 뒤척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잔에 따른다. 그걸 쉬지도 않고 한 번에 들이키면 식도를 타고 싸늘한 기운이 번져나갔다.
…하루키는 그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사네미츠와 레이지가 직접 마중까지 나갔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비행기는 폭발했다. 이탈리아 뿐 만 아니라 국제뉴스로도 다뤄질 정도의 대형 항공사고였다. 유족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는 한 명도 나오지 못했고 법적공방과 사과와 사직이 흘러간 끝에 공항 인근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질 예정이었다. 당연하게도, 당연하지만, 당연한 일인지, 그 위령비의 일부에는 아토 하루키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새겨질 것이다.
아토 하루키는 즉사했으니까.
잔을 내려놓는다. 사네미츠는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기억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하루키의 시체 없이 장례식을 진행한다는 연락을 받았던 기억이나, 거기에 참석하여 익숙한 면면들이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모습을 봐야했던 경험을, 유골이 없어 뿌릴 것도 묻을 것도 없다고 중얼거리던 오토와 루이의 옆얼굴을, 그 앞에서 변명도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앉아있기만 했던 자신을.
그 모든 기만과 속임수의 순간을.
잠들어있던 어둠을 흔들어 깨우듯이 나아가, 본래 자신의 방이었던 공간의 문을 연다. 안으로 들어가면 방에 놓인 침대 위에 조용히 잠들어있는 아토 하루키의 모습이 있었다. 이불은 가슴께까지 단정히 끌어올려져있고 불투명 시트를 붙인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얼굴 일부를 흐릿하게 비춘다. 사네미츠는 꼭두각시 인형을 연상시키는 걸음으로 침대 옆 의자에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름을 부르면 그대로 미간을 좁히며 눈을 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얼굴은 평온하다. 누가 보면 항공사고로 죽은 아들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한 줄 알고 안타까워하거나 혐오스러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네미츠는 알고 있다.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토 하루키 본인이며, 피가 이어진 자신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세오도아 리들은 이걸 두고 「오리진의 자기보존기능」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했다. 그렇게 말하는 손끝이 다소 떨리던 것은 아마도 예상치 못한 사건에 의한 충격 반응이었겠지. 아무튼 세오도아와 츠바이크에 의해 사고 현장 인근에서 비밀리에 회수되어온 아토 하루키는 이소이 사네미츠의 방에 눕혀지게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 의문점이 생긴다. 하루키가 절망적 사고에서 무사히 돌아왔는데도 왜 사네미츠는 아들의 장례식을 막지 않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정말로, 「상처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항공사고 전문수사팀은 단순히 수사가 번거롭고 귀찮다는 이유로 생존율 0%를 발표하지 않는다. 그만큼 참혹하고 끔찍한 현장이었으며, 아무리 기적적인 확률을 고려해 봐도 어느 누구도 도망칠 길이 없었음을 국제기관 차원에서 인정한 것이다. 거기서 「아뇨, 제 아들은 살아있습니다. 게다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합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건 향후 매스컴과 정부와 민간인들의 주목을 전부 받아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대륙 단위의 컬트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사네미츠는 그런 미래로부터 제 아들을 보호해야했다.
꽤 긴 시간이 흘렀고 하루키는 지금껏 깨어나지 않는다. 사네미츠는 가끔씩 자신이 이미 오래 전에 미쳐서 평범한 인형을 하루키라고 여기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루키는 사실 그 사고로 죽어버렸고, 마음 다정한 레이지가 자신의 착각에 온 힘을 다해 어울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럼에도 하루키의 손과 뺨을 어루만지면 느껴지는 미미한 온기가 사네미츠를 끝내 붙들고 마는 것이다.
하루키는 살아있다.
틀림없이, 살아있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제 피를, 제 심장을 하루키에게 먹여서라도 깨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눈꺼풀을 들어 올릴 단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세오도아 리들만이 초조함을 버리고, 세간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동안 하루키를 보호한다고 생각하라며 조언해줬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넌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있었어? 비탄과 슬픔에 절여진 뇌가 그런 말을 내뱉었을 때 LDL의 리더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고 사네미츠는 곧바로 사과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레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아토 하루키의 1주기가 돌아온다. 이소이 사네미츠는 제 아들의 친우와 그 가족들이 품은 애도에 나름의 응답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깊은 수심에 잠긴 오토와 루이를 마주하고, 그 아이의 불단에 천천히 묵념을 올려야한다. 바로 곁에 있건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식사를 함께할 수도 없는 친아들을 향한 기도를.
이것이 형벌이라면 차라리 자신을 불태워달라고 애원했던 것은 이제와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기도를 바쳐도 아토 하루키는 변함없이 눈을 뜨지 않았다. 세상이 그에게 지독한 굴레를 씌우고 빙긋이 웃으며 방관하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하루키가 눈을 떠주기만 한다면….
언제 잠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네미츠는 희미하게 정신이 들고서야 자신이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들었음을 알았다. 하루키가 보았더라면 온갖 싫은 소리는 다 했겠지. 잠긴 목을 큼큼거리다 시선을 든다. 그대로 모든 사고회로가 얼어붙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면 이소이 레이지가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좀 전에 여기서 나간 거 아니었어요? 안으로 몇 걸음 들어온 이소이 레이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진다. 사네미츠는 입술을 뻐끔거리다 겨우 말했다. 레이지, 하루키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레이지가 방을 빠져나간다. 사네미츠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버린 침대를 바라보다가 대피방법을 잊어버린 어린아이처럼 무작정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짧은 복도가 무한하게 확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밀어젖혀진 문 너머의 풍경이 고무줄처럼 늘어진다. 각고의 노력으로 거실에 도착해, 레이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진 사네미츠는 제 눈을 의심했다.
“둘 다 왜 그래? 아랫집에서 올라오겠어.”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부엌 조리대에는 식빵과 계란 몇 개가 올라가 있었다. 사람 사는 집 냉장고가 왜 이렇게 빈약해? 바로 만들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잖아. 흔한 우유도 없고. 그동안 굶고만 살았어? 핀잔 섞인 목소리가 두 사람을 찔렀지만 사네미츠와 레이지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하루키?”
“드디어 눈이 망가졌어?”
“하루키 형?”
“그래, 하루키 형이야. 레이지.”
이 온도차 있는 반응은 틀림없는 본인이다. 사네미츠는 제 볼을 꼬집어보려고 하다가 그대로 하루키에게 달려갔다. 현기증 탓인지 마룻바닥이 진흙처럼 흐물거린다. 그걸 무시하고 하루키를 껴안았다. 하루키는 신기루처럼 펑 하고 사라지지 않고 단단한 감촉으로 붙들렸다. 잠깐만, 왜 이래? 하루키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닿는다. 환청이 아니다. 환각도 아니다. 사네미츠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하루키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그 머리카락에 익숙한 보랏빛이 몇 가닥 섞여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 날, 세오도아 리들이 실종됐다.
말하라 그 천사의 거룩함을 위대한 궤적을
“질문이 있슴다.”
“뭐든지.”
“당신 누굽니까?”
이소이 레이지의 무거운 질문 앞에서 아토 하루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다. 반짝이는 금발 사이에 섞인 보랏빛 머리카락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이제는 적갈색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붉은 기가 진한 눈동자가 잠깐 허공을 맴돌다 이소이 레이지를 응시할 무렵에는, 그 눈매가 가느다랗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아토 하루키, 너의 의형이자 탐정이야. 지금은 전직 탐정이라고 하는 편이 맞으려나. 진즉에 퇴사 처리 됐을 테니.”
“…….”
“무서운 얼굴이네. 꺼림칙한 부분이라도 있어? 하긴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깨어나면 누구든지 간에 놀라겠지.”
“일부러 말을 돌리고 있는 거죠?”
흐흠, 하는 소리는 콧노래와도 닮았다. 레이지는 제 눈앞에서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건 불쾌함보다는 끔찍하도록 깊은 무력감과 비슷했다. 비슷했다, 고 표현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당장 저지르고 싶은 기분이기 때문이다. 눈앞의 포트에 넣어둔 찻잎은 언젠가 아버지가 출판사 쪽에서 선물로 받아온 물건인데 보관이 잘못된 모양인지 향이 거의 나지 않았다. 내려가서 새 홍차를 사오겠다는 레이지를 굳이 만류하고 자리에 앉힌 장본인이 따스한 김이 올라오는 찻물로 입술을 적셨다.
“질문을 좀 더 바꿔봐. 구체적으로.”
“오토와 씨에게는 왜 알리지 않죠?”
그동안 미미하게도 반응하지 않던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하루키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멀리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평화롭게 스며든다. 지금쯤이면 일본에서는 아토 하루키의 명복을 비는 1주기 제사가 치러지고 있을 것이다. 사네미츠는 거기 참석하기 위해 얼마간 이탈리아 자택을 비운 상태였다. 참고로 사네미츠에게 일본으로 가라며 적극적으로 등을 떠민 것은 눈앞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 쪽을 말한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답해줄게. 설명하기 복잡해지니까, 일단은 현상을 유지하기로 한 것뿐이야.”
“설명하기 복잡하다.”
“응.”
하루키가 말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레이지는 제 앞에 놓인 찻물을 보았다가, 하루키의 얼굴을 보았다가,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감쌌다. 출처가 명확한 두통이 두개골을 부지런히 두드렸다. 머리 아파? 두통약 가져다줄까? 와중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괴리감이 인다.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형이 오토와 씨를 상대로 그런 말을 하다니.”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고 싶어?”
“네, 당신이 정말로 형인지도 의심스러워요.”
“너무하네. 그렇지만 타당한 의심이려나.”
변화라는 건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항상 갑작스러운 법이니까.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맞은편에서 그걸 지켜보는 이소이 레이지의 표정이 다소 험악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지만 난 정말로 『아토 하루키』란 말이지. 이걸 어떻게 증명해야 좋을까. 머리카락이랑 눈동자 색은 변해버렸고, 여권이나 신분증을 제시하기도 애매하고, 유전자 검사라도….”
“왜 아무 말도 안했어요?”
바람이 조금 세게 불어서 창틀이 흔들린다. 늘어진 커튼이 크게 나부끼며 펄럭이는 소리를 냈다. 아토 하루키는 장난스레 말하던 표정 그대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내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답할 질문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소이 레이지는 쓴 것을 억지로 삼키는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해를 막기 위해 한 가지만 먼저 말해둘게. 그 비행기 사고는 불상사였어.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나도 몰랐고, 세오 씨도 예상 못했으니까.”
“그럼 그 외에는 무엇을 예상했죠?”
“힘이 인계되면 앞으로는 쉽게 못 죽으리라는 것 정도.”
“힘?”
“그건 비밀. 레이지에게 너무 많은걸 알려줄 순 없어.”
미안해? 라고 말하듯 아토 하루키가 어깨를 으쓱인다. 레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 머리 속의 지끈거림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여유는 없다. 두통약을 먹고 쉬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일이었다. 레이지는 천천히 제 안에서 질문을 골라냈다.
“인계되었다, 는 말은 무슨 의미죠?”
“흔히 말하는 데이터 인계 같은 거야. 레이지, RPG 게임 좋아하지? 거기서 보면 엔딩을 다 본 다음에 장비나 소지금을 다음 회차로 넘길 건지 물어보잖아. 그런 거지.”
“즉 세오 씨가 하루키 형에게 뭔가를 넘겼다?”
“정답~.”
“그럼 그걸 넘긴 세오 씨 본인은 어디로 가신 거죠?”
“명예의 전당.”
“…….”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줘. 사실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인계를 받으면서 세오 씨가 가진 기억이나 감정이 좀 흘러들어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후 행적까지 알진 못하니까. 그 사람이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었기를 빌 뿐이지.”
“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을 같이 앉혀놓고 대질심문을 하고 싶어요.”
“그건 무리네.”
마지막 말이 상쾌하다. 레이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미간 사이를 꾹꾹 문질렀다. 목이 타는 김에 쭉 들이킨 홍차는 따뜻하고 약간 시나몬 향이 나는… 맹물에 가까웠다. 이런 걸 마시면서 불평 하나 안 했어요? 레이지의 질문에 하루키가 어깨를 으쓱인다. 따뜻한 홍차라면 뭐든 상관없었는걸. 썩 마음에 드는 답변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당신은 어딘가 옅어요.”
“옅다는 건, 어떤 의미야?”
당연히 체향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소이 레이지는 제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함께한 시간은 고작해야 이주일 남짓이었지만 위화감을 눈치 채기는 충분했다. 그 사람이 자신들의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면 더더욱.
“자기 감정을 말하지 않게 됐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잖아.”
“아끼던 것에도 더 이상 흥미를 보이지 않고.”
“그 정도로 무심했던가?”
“무엇에도 미련이 없는 것처럼 굴어.”
“어른스러운 태도 아냐?”
아하하, 하고 웃는 얼굴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게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비행기 사고가 일어난 뒤 처음 눈을 떴던 날 이후로 아토 하루키는 어딘가가 점점 ‘옅어져’ 갔다. 감정표현, 취향,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햇볕 아래로 내려서면 그대로 모든 것을 투과해서 일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건 해변가의 파도가 발밑의 모래를 쓸어내려가는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과도 닮아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요한 무언가가 새어나가는 감각.
“이전의 당신이었다면 오토와 씨에게 어떻게든 연락을 넣으려 했을 거예요. 살아있다고, 나는 무사하다고.”
“그건 이전의 이야기지. 지금의 난 서류상 죽어버린 상태잖아?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섣불리 살아있다고도 말할 수 없어. 휘말리게 만들 테니까.”
“…….”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담담한 말과 함께 잔이 기울어진다. 맛도 향도 연한 찻물이 아토 하루키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천천히, 확실하게, 어떤 농도가 옅어진다. 이소이 레이지는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짓을 한검까.”
그러므로 질문은 조금 다른 형태로 변주된다. 하루키는 한 모금 차를 마시고는 레이지와 시선을 마주했다. 붉은 기 맴도는 눈동자에 동요도 갈등도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얇은 입술이 움직인다. 멀리서 누군가가 연주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느리게 울려 퍼졌다.
“사랑하기 위해서야.”
하얀 커튼이 크게 부풀어 오른다. 음색은 서투르게 이어지며 슈베르츠의 세레나데가 되어갔다. 멀리서 새가 날아가며 작은 울음소리를 남긴다. 이소이 레이지는 생뚱맞게도, 이 순간 자체가 누군가의 작위적 의도에 의해 짜여진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
“당신이 어떻게 그 단어를….”
“방법이 있지. 방법이 있어, 레이지.”
달리 표현하자면, 의동생에게는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레이지가 침묵하는 가운데 하루키가 말을 이어나갔다.
“걱정할 것 없어. 나는 「신의 사랑」에 간섭하진 않을 거야. 애초에 레이지는 그 기록에 대해 딱히 바라는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당신을 모르겠어.”
그것은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하루키는 조금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가벼운 장난에 걸려든 어린 아이가 낼 법한 맑은 울림이었다. 그 부드러운 소리가 레이지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레이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야.”
무슨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다만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는 얼핏 감이 왔다. 이소이 레이지는 지금 제 의형이 하는 말의 함의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뱉은 말의 근간과 저의를 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거부반응이 일었다. 따라서 언어가 뇌세포의 언저리를 맴돈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아무런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굴러 나왔다.
“구하기로 결정하면 구하고,”
“버리기로 결정하면 버려라.”
그런 거야. 의형이 다정하게 웃는다. 레이지는 더 이상 무슨 말을 더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방패를 세우듯 찻잔을 기울였다. 차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밋밋하고 특징이 없고 옅기만 하다. 그것이 눈앞의 사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다음엔 새 찻잎을 사올게요.”
당장 할 수 있는 저항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의 종이므로 마음이 없고
“전 빠지겠습니다.”
“아뇨, LDL에서 아예 나가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권력 최하층 리더가 사라졌다고는 해도 이곳이 「아카식 레코드」에 접근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이제 와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해도 곤란하구요.”
“빠진다고 한건 당신의 의형에게서, 입니다. 사네미츠는 그 사람이 무엇이 되었는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긴 한 겁니까? 제가 볼 때는 이미 인간 따윈 내버렸고 비인간으로서도 까마득히 먼 어딘가로 가려는 중이에요. 말간 얼굴로 「신의 사랑」을 말하는 모습을 보세요.”
“저는 확실히 거기에 닿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제 의지로 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걸 관장하는 자 앞에서 마치 경배하듯이 엎드려 받아내는 것은 사양입니다. 설사 본인에게 그럴 의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최악이에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
……….
“얘기 끝났다.”
“잘은 모르겠지만 꽤나 골치 아픈 이야기가 된 것 같구만. 리더는 어디로 갔는지 소식이 끊겼고, 네 형은 형대로 저 모양이고. 저 모습으로 봐서는 세오도아가 네 형에게 씌였다고 해도 그럭저럭 통할 법해.”
“핫, 그럴 리가 있겠냐. 세오도아 리들은 세오도아 리들, 아토 하루키는 아토 하루키잖아. 네가 아무리 사네미츠를 좋아하고 따른다 해도 그 녀석 본인이 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인계라. 확실히 그런 말을 하기는 하더군.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녀석이 뭐 하러 그렇게 길고 오랜 시간 동안…. 아니, 이건 내 개인적인 견해니까 그만두자. 아무튼 그 녀석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의 목표는 크게 변하지 않아.”
“물론 네 형이 묘한 소릴 하긴 했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정답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경과와 이유야. 그건 누구에게서 부탁해서 얻을 게 아니라 내 힘으로 도달해야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말에는 딱히 관심 없어.”
“문제는 리더가 없으니 표면적으로라도 의견을 모을 녀석이 없다는 거군….”
…….
……….
“흠, 차여버렸네.”
아토 하루키가 테이블에 앉아 홍차를 마신다. 이전 것은 다 비우고 찻잎을 새로운 걸로 바꿨는데, 이번에는 우려낸 맛이 지나치게 강해서 뒷맛이 거칠고 씁쓸했다. 레이지는 그걸 마시고 떨떠름한 표정이 되고 말았으나 정작 우려낸 장본인인 하루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달각이는 소리가 난다.
“예상대로.”
“예상했으면서 일부러 이야기 한건가요.”
“심지가 굳은 사람들이잖아. 하지만 만에 하나 혹시나 혹시나~하는 부분도 있었거든.”
“즉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런 걸 할 정도로 대단한 입장은 아니거든?”
하루키가 슬쩍 입술을 비죽인다. 인간적인 표현이면서도, 무언가를 흉내 내는 인상을 주는 동작이었다. 이를테면 인간의 감정을 잘 모르면서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이런 동작이 효율적이라고 학습한 기계처럼.
“그래도 온건하게 마무리 되어서 다행이야. 두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LDL을 나가겠다고 말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만약을 위해서 묻는 건데 그렇게 대답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했을 건가요?”
“…어떻게도 안 해. 자유의지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은걸?”
부득이한 경우에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완곡한 표현으로도 들렸다. 레이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하루키가 찻주전자를 들어 다시금 잔을 채웠다. 짙은 향기가 나는 액체가 흘러나온다. 그걸 마시는 손길이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다.
“레이지도 한 잔 더 마실래?”
그는 말없이 찻잔을 내밀었다.
공연히 목이 타서 이미 비워버린 잔을.
드레퓌스 츠바이크가 일하는 출판사에는 통칭 ‘피난실’이 있다. 넉넉잡아도 성인 세 명 이상은 들어가 앉을 수 없는 그곳은 미처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작업실을 확보할 수 없게 된 작가들을 위해 비워두는 임시 공간으로, 때로는 마감을 코앞을 두고 도망갔다가 붙잡힌 작가들이 자의와 관계없이 갇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럴 때는 보통 피난실로 연행됐다고 말한다.)
‘피난실’은 총 3칸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수도관 파열로 집이 물바다가 되는 바람에 편집자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출퇴근 원고작업을 하고 있는 한 여행 소설 작가가 쓰고 있고, 또 다른 한 칸은 비어있으며, 마지막 칸에는 츠바이크가 담당하는 작가가 며칠째 틀어박혀있는 중이었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간다. 이소이 사네미츠는 주위에 산더미 같은 자료를 쌓아둔 채 노트북을 앞에 두고 머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가 담배를 피웠다면 문을 열자마자 연기가 물씬 흘러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지만, 이 작가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므로 피난실의 공기는 약간 탁할 뿐이다. 츠바이크는 환풍기의 스위치를 키고 문을 닫았다.
“진전은 있습니까?”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고, 답이라기보다는 신음성에 가까운 소리가 돌아왔다. 어차피 또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을 테죠. 츠바이크는 덤덤하게 말하며 사네미츠 앞에 자신이 사온 샌드위치와 물을 내려놓았다. 퀭한 시선이 힘없이 끌려올라온다. 츠바이크는 그 앞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거꾸로 된 서적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신비주의 입문서』
“…하루키, 만났어?”
“방금 만났습니다. 묘한 이야길 하더군요. 「신의 사랑」에 닿게 도와줄 수 있다던가, 뭐라던가.”
“…….”
“물론 거절했습니다. 저는 타인의 힘을 빌려서 거기에 도달하고 싶은 게 아니거든요. 애니도 같은 입장일 겁니다.”
“세오도아는….”
“여전히 행방이 오리무중입니다. 아토 하루키는 그에 대해서 세오도아 리들은 자신이 인계했다고 말하더군요.”
“……….”
“사네미츠, 지금의 아토 하루키는 대체 뭡니까?”
입술이 벙긋거리다 닫힌다. 그걸 명확히 잘라 말하지 못하는 것은 특유의 비관적인 성격 탓일까. 어차피 인간은 인간인 이상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조차 서로가 살아온 환경이나 사고방식에 의해 인격에 미세한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틈새를 마음이니 감정이니 하는 걸로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혹은 이해했다고 믿으면서 지내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관계라는 것이다.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다음은 전지전능한 신이나 신의 종이라도 되는 수밖에 없겠지.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겨우 사네미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내 아들이야….”
“당연한 소릴 하는군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위에 뭐가 덧발렸는지 알고 있냐는 겁니다.”
“…….”
“알고서 말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알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기억하세요.”
따닥, 하고 페트병의 뚜껑이 열린다. 츠바이크는 겉면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물병을 내밀며 말했다.
“한 가지에만 집착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해요.”
스승님이 부르셔서 잠시 다녀올게요. 레이지의 말에 하루키가 알겠다는 듯이 손을 팔랑였다. 들어올 때는 아버지랑 같이 들어와. 벌써 며칠 째 신작 자료 조사 한다고 못 들어오고 있잖아. 가끔은 같이 식사도 해야지. 하는 말도 함께.
당신, 말은 그렇게 해도 정작 식사를 시작하면 한 두 입만 먹고 끝내버리잖아요. 레이지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모자란 식재료도 좀 사오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집을 나섰다. 슈베르츠의 세레나데는 어느새 끝나있다. 아이들 몇몇이 바닥에 분필로 흰 선을 그려놓고는 요란하게 뛰어다니며 웃는 소리를 냈다. 규칙은 잘 알 수 없지만 땅따먹기 류의 게임인 모양이다.
레이지는 자신들의 집에서 약간 떨어진 광장으로 향했다. 적당히 그늘진 벤치에 앉아있던 애니가 레이지의 모습을 보고 한 손을 들어보였다. 그 곁에 평범한 종이봉투가 놓여있다. 이것 때문에 부르셨어요? 레이지가 다가가며 물어보자 벤치 등받이에 양팔을 올리고 쉬고 있던 애니가 가벼운 코웃음을 쳤다. 설마 그것만 주려고 여기까지 불렀겠냐.
“네 형 얘기 좀 하자.”
“네.”
“꺼림칙한 부분이 있어. 본래 인계라는 건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냐. 그건 권리나, 직책이나, 사물 같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로 건네줄 때나 쓰는 표현이라고. 그런데 그 녀석은 세오도아를 ‘인계’ 받았다고 했지.”
애니는 실전 경험이 있는 덕인지 상황 파악 능력이 날카로운 편이다. 레이지는 잠자코 그 말을 들으며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인격 쪽은 괜찮은 거냐?”
“……언행이 약간 세오 씨를 닮아가요. 그리고 희노애락이나 호불호가 이전보다 옅어졌다는 감각이 있어요. 희미해졌다고 해야 할까.”
어릴 적부터 자신을 이끌어준 스승님 앞에서 허세를 부려봤자 의미는 없다. 레이지의 솔직한 증언 앞에서 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벤치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서 슬쩍 빠져있는 모양새여서 누군가가 대화를 엿들을 염려는 없었다. 행여 엿듣고자 하는 자가 있더라도 애초에 그게 무슨 맥락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테세우스의 배」로군. 알고 있냐?”
“들어본 적 있어요. 유명한 역설이죠.”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청년들이 탄 배가 있다. 그 배는 부식된 널빤지가 있으면 떼어내고 새로운 널빤지를 붙여 보수하기를 오랫동안 반복했다. 널빤지가 하나 교체된 시점에서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다. 두 개가 교체되어도 그렇다. 하지만 배의 모든 널빤지가 새로이 교체된 이후에도 그 배가 가장 처음에 만들어진 테세우스의 배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토 하루키라는 인격이 떨어져 나가고 세오도아 리들이라는 새 인격이 덧대어지고 있다, 그런 비유인가요?”
“이해가 빠르네. 난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니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야. 사실 이건 어느 게 정답인지 정해져 있지 않은 역설이니 누가 어떻게 주장하더라도 그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어. 인간의 관점은 제각각이니까. 그럼 너와 사네미츠에게는 어떻지? 널빤지가 전부 교체된 아토 하루키는 여전히 이전의 아토 하루키라고 말할 수 있나?”
“…….”
“만약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너무 뜸들이지 마라. 그 녀석, 어쩌면 아직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단계일지도 몰라.”
과연 이런 이야기는 현재의 아토 하루키가 듣는 곳에서 할 법한 내용이 아니다. 레이지는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듣다가 굳게 주먹을 쥐었다.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곁에서 상황을 소리 내어 정리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분명 저도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에요.”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도, 애니는 대충 제자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지도 구태여 거기에 설명을 더 덧붙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 괜한 말을 했군.”
“아니에요. 스승님이 말씀해주신 덕분에 좀 더 확신이 섰는걸요.”
의연해진 레이지의 표정을 본 애니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스승으로서 일단 말해두겠는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그렇게 말하며 제자의 등을 세게 두드려준 애니가 이제 무거운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이 종이봉투를 건넸다. 슬쩍 들여다보면 당근, 양상추, 감자 같은 것들이 가득하다. 치킨 스톡만은 없으니까 그건 알아서 해결해. 그런 말이 들려왔다.
오늘은 억지로라도 돌려보낼 테니까 마중나와 주세요. 츠바이크가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기에 레이지는 긍정의 답장을 보내고 두 사람이 있는 출판사 앞으로 찾아갔다. 야채 가득한 종이봉투를 본 츠바이크는 조금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애니에게서 받았다는 레이지의 설명에 납득한 얼굴을 했다.
오늘은 가족끼리 돌아가서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겠네요. 가끔은 아버지로서 서비스 좀 해주세요. 츠바이크의 담담한 말에 사네미츠의 얼굴 근육이 경련한다. 레이지는 조금 씁쓸하게 웃고는 비어있는 한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사네미츠는 조금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걸음을 따라 돌아왔다.
집 근처로 돌아왔을 때에는 석양도 지고 서서히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 하루키 형 오래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레이지의 시야에 집 앞 테라스에 서있는 아토 하루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언제쯤 돌아오나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손엔 종이봉투, 한 손엔 아버지의 손을 잡느라 빈손이 없었던 레이지는 대신 사네미츠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어보라 말했다. 아버지, 저기 형이 있어요. 그 말에 축 처져있던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간 순간이었다.
어두운 거리마다 서있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거리는 어디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밝아지며 사람들의 발치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사이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하루키가 느긋하게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건 시간상으로는 몇 십 초도 되지 않을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으나, 두 사람이 하루키의 등 뒤에 드리워진 한 쌍의 날개 그림자를 목격하기에는 정말로 충분했다.
그림자는 하루키가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그 거대한 몸집을 작게 접으며 모습을 감췄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소음을 내며 잘 포장된 길 위를 흘러간다. 레이지와 사네미츠는 거기에 멈춰선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없는 자는 스스로 사랑할 수 없으니
다음 주에 같이 가족여행을 갈까요. 레이지의 제안에 하루키는 가볍게 응했다. 그러자, 재밌겠네. 목소리의 높낮이가 거의 없는 목소리는 흥얼거림 같기도 하고, 혹은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소리 같기도 하다. 레이지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꾹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테이블 위에는 미리 구해놓은 마을 관광 책자가 펼쳐져 있었다.
“이탈리아 서쪽, 작은 호숫가 근처의 마을임다.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에요. 아버지, 요 며칠간 마감에 시달렸잖아요.”
“집에도 거의 못 들어왔지.”
“네, 그래서 주어진 포상휴가라는 모양이에요. 일주일 정도는 느긋하게 쉴 수 있다고 하네요.”
“그렇구나. 기대되네.”
생각난 듯이 덧붙인 억양이었다. 이소이 레이지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 여행을 갔을 때 필요한 식료품이나 예정된 일정, 챙겨야할 짐 따위로 화제를 돌렸다. 아토 하루키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 물건이라면 집안 어딘가에서 보았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 형은 어디가 제일 기대되나요? 레이지가 설핏 지나가듯이 던진 질문에 하루키의 시선이 허공을 살짝 배회했다.
“호수. 아니면 성당.”
평범하다면 평범한 대답이었다.
출발하는 날의 아침은 맑았다.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한 대 빌려온 레이지는 아버지와 형을 도와 짐을 차에 실은 뒤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는 사네미츠, 뒷좌석에는 하루키가 타는 형태였다. 형, 혹시 피곤하면 누워서 자도 괜찮아요. 레이지의 말에 하루키가 웃었다. 괜찮아. 바깥 구경이라도 할 테니까. 그 말대로 운전하는 내내 하루키는 별다른 잡담 없이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약 반나절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산중 깊이 위치한 마을이었다. 마을 중도에 위한 작은 호수와 호수 인근에 세워진 성당의 풍경이 조화로워 옛날부터 신실한 자들이 기도와 명상을 위해 자주 찾은 곳이라고들 했다. 다만 최근에는 다소 교통이 불편하고 멀지 않은 곳에 다른 관광지가 개발된 탓에 인적이 드물어졌다고 한다.
하루키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조용한 호숫가를 거니는 발걸음이 퍽 가벼웠다. 그 곁에는 사네미츠가 나란히 서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호수와 펼쳐진 숲의 풍경, 그 뒤편의 하늘을 바라보느라 잠시 두 사람과 떨어져 있던 레이지는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어떤 음색이 들려온다.
아토 하루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3층짜리 성당은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 숙소의 주인에게서 중앙 종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볼 수 있는 풍경이 일품이니 꼭 가보라는 추천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갯수의 계단을 모조리 걸어 올라가야 했지만. 그나마 지고세포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나이가 나이인 사네미츠는 중도에서 탈락했을지도 모른다. 반면 하루키는 마치 구름 위라도 거니는 듯한 속도였다. 어쩌면 천사라는 속성이 성당에서 더 힘을 얻는지도 몰라. 멀찍이서 자신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는 형을 보며, 레이지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종탑의 바람은 조금 강했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저 하늘 위에서 누군가가 촘촘한 채로 거른 것처럼 고왔다. 호수 위에서 부서지는 햇빛이 눈부시다. 타일이 깔린 도로와 건물들은 일정한 높이를 넘지 않아 마치 누군가가 공들여 만든 미니어처처럼 보였다. 계단 아래에서 품었던 조금 무거운 생각을 잊어버리기에는 충분한 풍경이다. 아토 하루키는 그걸 등지는 자세로 앉아 다른 두 명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종탑, 종이 없네.”
“있으면 울리러 갔을 건가요?”
“농담하긴.”
하루키가 옅게 웃었다.
“원래는 중세부터 만들어진 종이 있었는데, 몇 년 전 심한 태풍이 찾아왔을 때 그만 고정하는 고리가 끊어지면서 호수에 가라앉아버렸다고 하네요. 따로 관리할 사람도 없어서 그대로 방치되었다는 모양이에요.”
“그렇구나. 아버지는 어때요?”
“………응?”
“좋은 풍경이죠?”
“……아, 그래. 아름답구나.”
하루키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 뒤로 흘러가는 구름만이 바지런히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날이 맑은 만큼 종탑의 그림자는 짙어서 말없이 서있는 세 사람을 충분히 삼키고도 남았다. 관광객은 없다시피 한 곳이라 종탑 주위에는 침묵과 바람소리가 감돌았고.
“……미안하다. 조금, 먼저 내려가 볼게.”
사네미츠는 그렇게 말하고 벽을 짚으며 종탑을 도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레이지는 그 모습을 말리지도 못하고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하루키는 여전한 얼굴로, 사라져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구름이 흘러간다. 바람이 불어온다. 햇살은 여전히 곱다.
“몸이 안 좋으신가봐.”
“…차멀미를 하시는 건지도 몰라요.”
“큰일이네. 심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심하지 않을 거예요. 분명.”
“응, 그렇다면 다행이고.”
떨어진 종을 삼켰다는 호수는 고요하다. 천사와 신의 모습이 조각된 종에서는 낡았어도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했다. 어떤 맑은 날에는 호수 수면 아래를 들여다보면 잠긴 종의 윤곽이 반짝이는 날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그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레이지는 천천히 하루키의 곁에 앉았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그래 보여?”
“노래도 부르시던 걸요.”
아, 하고 반응한 하루키가 조금 전과 같은 음색을 흥얼거린다. 투명한 바람에 실려 환희의 송가가 흘러갔다. 베토벤은 그 노래를 지을 때 이미 귀가 멀어있어서 연주회에서 자신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박수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잠깐 생각났다. 오감 중 하나만 망가져도 사람은 쉽게 세상과 유리된다. 그렇다면 아토 하루키는 어떨까. ‘천사’가 된 지금, 그가 느끼는 세상은 어떤 형태가 되어있을까.
“여기, 마음에 드나요?”
“응. 조용하고, 왠지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야.”
“그건 다행이네요. 열심히 조사한 보람이 있어요.”
시선을 먼 방향으로 던진다. 어디까지고 푸르게 뻗어있는 하늘은 문득 두려움과 경외심마저 품게 만들었다. 세상이 너무나 넓고, 푸르고, 고요하다는 공포감과 함께.
내려갈까. 아버지가 기다리겠어. 하루키가 느릿하게 말을 꺼낸 것은 해가 조금 기울어졌을 때의 일이다. 레이지는 옅게 잠겨있던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서는 이 비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예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모처럼의 여행인데 아쉽게 됐네. 식사자리에서 그렇게 말을 꺼낸 것은 이소이 사네미츠다. 하루키는 짧게 웃고는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아? 같은 소리로 답했다. 높낮이가 잘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레이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사네미츠가 만든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긴장하면서 만든 탓인지 간이 살짝 미묘했지만 그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숙소에는 트럼프 카드와 몇 권인가의 소설책이 놓여있었다. 레이지와 하루키는 1층 로비에 앉아 오랫동안 카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전적은 레이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형 어째 많이 약해지지 않았어요? 레이지의 농담 섞인 질문에 하루키가 대답한다. 그러게. 생각하는 게 조금 어렵네. 카드 게임은 결국 조커 뽑기 게임으로 바뀌었다.
저녁이 되었다.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레이지는 조금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오겠다며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뺨에 닿는 공기는 습하긴 했지만 적당히 시원했고, 무언가를 생각하기에는 딱 좋았다.
성당의 문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비가 내리긴 했어도 폭우는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레이지는 천천히 우산을 접은 뒤 성당의 옥상을 향해 올라갔다. 하늘에 깔린 회색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바람이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냈다. 종탑에 비하면 낮은 높이의 옥상은 휑하니 비어있었고 허리쯤 오는 난간 너머에서는 짙은 푸른빛의 호수가 넘실거렸다. 들여다보아도 종은 보이지 않겠지. 레이지는 그 난간에 팔꿈치를 기댄 채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빗물과 호수와 숲의 냄새가 한데 뒤섞여 스며들었다.
곁에 우뚝 솟은 종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빗줄기는 저녁에 조금 약해졌다가 밤이 되면 다시 강해질 거라고 하던가. 레이지는 겉옷을 조금 추스르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잠깐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빗방울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우산을 접는다.
“춥지 않아?”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토 하루키가 천천히 성당 옥상으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실내에 있을 때와 비슷하게 가벼운 셔츠와 가디건 차림이었다. 거칠지는 않지만 꽤 힘이 실린 바람에 옷자락이 나부꼈다.
“형이야말로 안 추워요?”
“안 추워. 그런 거랑은 조금 멀어진 기분.”
“그것도 예의 그 ‘힘’이랑 관련된 건가요?”
“응.”
돌아오는 대답이 제법 순순하다. 레이지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이내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머리 위의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버지는요?”
“피곤하다고 일찍 쉬러 들어가셨어.”
“과연. 그래서 저를 마중 나온 건가요?”
“귀여운 동생이니까.”
뻗어 나온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레이지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친애의 표시였지만, 그 동작이 어딘지 어색하고 서툴렀다. 레이지는 제 의형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가, 양손을 상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난간에 걸어둔 우산은 짙은 초록색이었다.
“오랫동안 생각해 봤어요.”
“뭘?”
“당신이 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답은 이미 말해줬잖아, 레이지.”
“네,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려고 그런 일을 했죠.”
그게 정답이야. 아토 하루키가 낮게 속삭인다. 레이지는 멀리 숲 속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들이 거친 바람에 휩쓸려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를 들었다. 악보에 옮긴다면 단조밖에 될 수 없을 음색이었다.
“하루키 형.”
“왜 그래?”
“돌아올 수는 없나요?”
“안 돼.”
짐짓 다정한 말투였다. 레이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하잖아요. 혼자 그렇게 가버리는 건.”
“난 여기에 있어, 레이지.”
“우리에겐 아무 말도 하지도 않고서.”
“결과적으로 너와 아버지가 손해 볼 일은 없어.”
“그런 문제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왜 그런 식으로, 당신이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야. 우리는 가족이잖아.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사이잖아. 그런 식으로. 혼자 짊어지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화났어?”
“화 안 났어요.”
굳이 말하자면 속상한 쪽이었다. 레이지는 주머니 속 손을 꿈지럭거리다가 하루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딱 마주친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레이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하루키가 눈을 깜박였다. 오는 길에 빗물을 맞았는지 보랏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관자놀이 근처에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가까운데요.”
“가까우면 안 돼?”
“네, 다섯 걸음 정도 멀어져주세요.”
“야박하네.”
“야박한 동생입니다.”
하루키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빙글 몸을 돌린다. 일단은 제가 지은 죄가 있으니 물러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나, 둘, 세엣, 하루키가 느릿하게 숫자를 세며 한 걸음씩 멀어진다. 레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단숨에 난간 위로 올라섰다. 주변은 흐려서 그림자도 드리워지지 않는다. 넷, 다서엇. 하루키가 마지막 숫자를 세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레이지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있었다는 듯이 허공으로 몸을 기울였다. 마주치는 시선에 순식간에 경악이 번져나갔다.
“레이지!”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하긴 당신에게는 끔찍한 장면이겠지. 이소이 레이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중력에 몸을 맡긴다. 갑자기 굵어지기 시작한 빗줄기가 뺨을 두드렸다. 자신과 아토 하루키 사이에 벌어진 간격은 약 다섯 걸음. 인간의 보폭으로는 도저히 타이밍을 맞출 수 없다. 그대로 놓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천사라면?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르듯이 하루키의 등에서 투명한 날개가 펼쳐진다. 그건 거룩한 성경 속 한 장면 같기도 했고 누군가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이미지 같기도 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순수하게 감탄했을 것이다. 그대로 하루키가 비상한다. 물방울이 흩뿌려진다. 한쪽 손을 내뻗어, 떨어지는 이의 옷깃이라도 붙잡으려는 손길이 간절했다.
그걸 그대로 붙잡는다. 하루키의 얼굴이 안도에 물들었다가, 어느 순간 의문으로 뒤바뀌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야, 보통의 경우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스턴트맨마냥 난간에 갈고리 와이어를 걸고 버티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하겠지. 우선 의도를 알 수 없다. 의미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모르는 편이 좋다. 레이지는 제 형의 팔을 꽉 붙든 채, 슬쩍 웃어보였다. 빗줄기가 점점 강해진다. 강하게 바닥을 때린다. 빗방울이 연주하는 거대한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미안해요, 형.”
“레이지…?”
젖은 바닥을 차는 소리.
“하지만 형이 먼저 시작한 거예요.”
그대로 몸을 끌어올려 허리를 잡고 단단히 붙든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런 눈빛을 하던 하루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좀 빠른 타이밍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놓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여기서 레이지의 역할이란 미끼이자 고정핀이었으므로. 하늘에서 구름이 서로 맞부딪친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묵직한 천둥소리가 그르렁거린다. 그 사이로 아토 하루키의 비명 같은 외침이 번져나갔다.
“이소이 사네미츠!”
사네미츠는 그 외침에 대답하는 일 없이, 제 손에 들린 빛을 크게 휘둘렀다. 비 오는 허공에 펼쳐져있는 한 쌍의 날개. 그 뿌리를 향해서.
높은 종탑에 벼락이 떨어진다.
날개 잃은 천사가 추락했다.
천사의 사랑이란 그저 상아빛일 뿐이라
“있지, 하루키.”
“말씀하세요.”
“붙잡혀 끌려내려 온 기분이 어때?”
“최악이네요.”
“거짓말.”
“나팔을 불 수 있었잖아.”
“아직 미숙해서 실수했어요.”
“시간을 돌릴 수도 있었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하다못해 공격할 수도 있었는데.”
“…….”
“어찌되었건, 너는 광휘를 잃었어.”
“타락인가요?”
“추락이지.”
“죄송합니다. 믿고 맡겨주셨는데.”
“뭐…. 그것도 너의 사랑이라는 거지.”
“「신의 사랑」에는 닿지 못했네요.”
“어쩌면 그 편이 인간으로서는 행복할지도 몰라.”
“이제 어떻게 될까요?”
“으음~ 어떻게 되려나.”
“당신은 돌아오게 되나요? 세오 씨.”
“글쎄. 나는 세오도아 리들 본인이 아니라 네가 인식하는 세오도아 리들의 일면에 불과하니까. 정확한 답변은 불가능해.”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치사하지 않아요?”
“네가 할 소리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래. 어쩌면 이대로도 괜찮을지 모르지.”
“과연 그럴까요. 날개는 보기 좋게 잘려버렸는데요.”
“일단 잘리긴 했어도 잃어버린 건 아니니까.”
“무슨 의미에요?”
“그거, 두 사람이 먹었어.”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실래요?”
“음~ 「먹었다」는 너무 노골적인가. 그렇다고 「집어넣었다」는 좀 어색하고, 교양 있게 「빵과 와인으로 삼았다」는 어때?”
“진실로 인식해야 마땅한 건가요?”
“사실이야.”
“…………….”
“진짜 열 받는다는 얼굴이네.”
“돌아가면 가만 안 둘 겁니다.”
“돌아갈 생각이긴 하구나?”
“…….”
“걱정 마. 딱히 널 비난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야.”
“다만, 그래. 조금은 부럽다고 해둘게. 그렇게 기를 쓰고 끌어내려주는 사람이 있다니, 좋은 일이야.”
“당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래, 있었지.”
“세오 씨.”
“돌아가야지, 아토 하루키. 너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눈을 뜨면 낯선 천장이다. 아토 하루키는 마른 눈꺼풀을 깜박거리다가 숨을 들이쉬었다. 이불을 덮은 몸은 적당히 따뜻하다. 손끝을 움찔거리고 있자면 명백히 자신의 것이 아닌 온기가 와 닿았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자신의 의동생, 오른쪽으로 돌리면….
망할 아버지.
투덜거리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푹신한 감촉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지만. 기껏 쌓은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 보기 좋게 유실된 기분이다. 플러스로 거기에서 아름다운 조개껍데기가 하나 나온 느낌.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하루키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깜박였다.
등은 미미하게 아릿하다. 호수에 등부터 떨어진 탓일까. 그러고 보니 아까 꿈에서 세오도아 리들이 무어라고 말한 것 같은데….
…….
……….
“레이지! 망할 아버지! 당장 일어나!”
“으헉.”
“흐어억?!”
노호성에 잠들어있던 이소이 부자가 재깍 일어난다. 깊은 잠에서 막 깨는 바람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레이지와 사네미츠가 하루키의 얼굴을 보고 난처하다는 듯이 눈썹 끝을 떨어뜨렸다. 물론 그런 표정을 본다고 마음 꿈쩍할 아토 하루키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아주 무모한 짓을 해주셨어요?”
“하루키 형,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자처한.”
“레이지는 잠깐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볼래?”
“네. 다물겠습니다.”
이소이 레이지가 무력하게 탈락했다.
“게다가 내 날개를 놀라운 방법으로 처리한 것 같은데?”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하지 않으면 네게로 다시 돌아갈 것 같아서….”
“그래서 맛있게 먹어버렸다?”
“하나씩 몸에 넣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해요? 천사 가브리엘의 인자거든? 고작 날개라고는 해도 그 역할이…. 아, 진짜!”
“역시 「인자」에 대해 알고 진행한 거구나.”
“…….”
사네미츠의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일부러 격양된 태도로 그를 대하던 하루키는 어디선가 감정의 바람이 새어나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 말대로고, 어떻게 반박할 거리도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가브리엘의 인자는 이런 상황을 모면할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지 않는 탓이다.
“어째서, 어째서 네가 그걸 알고 있는 거지? 「저주」는 내가 끝맺고,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미리 말해두는데, 또 혼자 땅 파고 들어가지 말아요. 그건 정말로 우연히 알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걸 알았을 때, 당신들을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도 나야.”
“…….”
“그래서 세오 씨와 거래한 거예요. 내가 천사의 인자를 받아가고, 역할을 계승한다. 대신에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룬다. 나도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룬다. 윈-윈 전략이죠.”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죄악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홀가분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던 그 얼굴을. 그걸 누군가가 본다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라 했겠지. 자신도 아마 비슷한 얼굴이 아니었을까. 하루키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뻔뻔한 얼굴이네요.”
“실제로 그랬잖아. 지금은 보기 좋게 허사가 됐지만.”
“거래가 깨진 셈이네요. 그럼 세오 씨는 돌아오나요?”
“잘 모르겠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
“…하루키.”
“네.”
상황을 냉정히 판단하는 레이지와 달리 사네미츠의 목소리는 마치 추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여관 벽에 걸린 시계가 조용히 똑딱거린다. 창밖의 빗줄기는 이미 그쳐있어서 오전 10시의 맑은 햇살이 안쪽을 기웃거렸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레이지에게 못 들었어요?”
“들었어. 하지만 너에게서, 직접 듣고 싶어.”
비가 내린 뒤의 하늘은 평소보다 더 맑고 깨끗하다. 어딘가에서 노점 장사를 하는 장사꾼이 목소리를 높여 무어라고 외쳤다. 아마도 무언가를 사라는 호객 멘트일 것이다. 하루키는 그 소리를 쫓듯이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체념한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야.”
“…….”
“지금의 나는 이것저것 신경 쓰게 되니까. 싫어도 떠올리고 신경 쓰고, 쓸데없는 생각을 덧붙이게 되어버리니까, 하다못해.”
하다못해.
천사가 된다면 그저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진짜 제멋대로인 이유네요.”
“미안하네, 한창 제멋대로일 나이라서.”
가볍게 투덜거린다. 동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쪽을 응시하고 있던 하루키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끌어안는 사네미츠를 막지 못했다. 몸에 타인의 온기가 닿는다. 한데 어우러져서 경계선이 녹는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랬구나.”
“…….”
“그랬구나, 하루키….”
뭐하는 거야. 그렇게 핀잔을 주고 싶은데 혀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만 벙긋거리는 하루키를 보고 눈을 굴리던 레이지가 그 반대편에 찰싹 달라붙었다. 어쩌다보니 양옆으로 이소이 부자에게 둘러싸인 아토 하루키가 침묵했다.
“더워.”
작게 투덜거린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하루키의 손은 그들의 옷깃을 조심스레 붙들고 있었다.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듯이 양쪽에 앉은 사람들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하루키는 그걸 차마 뿌리치지 못한 채 살짝 고개를 기댔다.
마치 어느 종교화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니 마음이 있는 자라면 차라리
“인간인 편이 낫군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신가요?”
“네.”
휴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다음 마감을 위해서라며 이소이 부자의 집에 눌러앉다시피 한 츠바이크는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에서 치즈와 각종 부재료를 꺼내 브런치를 만들고 있었다. 정말 출근 안하셔도 되는 거예요? 전 사네미츠 선생님의 전속 편집자 같은 거라 괜찮습니다. 실없는 대화가 오고간다. 말랑말랑한 빵에 햄과 야채가 올라가는 동안 하릴없이 구경만 하던 하루키가 입을 열었다.
“츠바이크 씨, 그렇다고 제 힘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네, 그렇겠죠. 의식 못하는지도 모르지만 당신 지금 저랑 이탈리아어로 의사소통하고 있어요.”
“……그렇기도 하고. 애초에 인간이면 그 비행기 사고에서 죽었겠죠.”
여전히 아토 하루키의 이름은 비행기 사고로 인한 사망자 명단에 들어가 있다. 그건 어떻게도 바꿀 수 없는 분명한 증거였다. 밤에 몰래 숨어들어가 훼손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지도 않은 것. 사실은 어찌어찌 살아있었습니다, 잘됐죠? 하고 슬그머니 넘길 수도 없는 것.
“그러니까 세오 씨의 역할은, 아마도 저에게 그대로.”
“음~ 근데 제가 꼭 알아야 하는 사항인가요?”
“…….”
“일단 저에게 중요한 건 「신의 사랑」, 다시 말해 「아카식 레코드」에 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보라머리는 일종의 편법을 쓴 모양인데, 그걸 똑같이 제가 쓸 수 있을 것 같진 않군요. 맞나요?”
“네, 만약 츠바이크 씨와 동일한 인생을 겪은 사람이 발견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의미 없네요~. 저는 제 손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는지라.”
톡, 하고 계란이 깨진다. 계란 흰자가 뜨거운 기름에 익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 한가운데서 츠바이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냥 당신인 그대로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뭣하면 여기서도 탐정 일을 해보실래요?”
“아하하…. 고민해볼게요.”
그러는 사이 애니가 안으로 들어온다. 부엌 근처에 서있는 하루키를 본 그가 아는 체를 했다.
“어, 돌아왔냐.”
“네. 이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됐어. 그런 세세한 거 신경 쓰는 건 성미에도 안 맞아.”
애니가 손사래를 치고는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츠바이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앞에 샌드위치를 내려두었다. 새삼스럽긴 한데, 이 사람들 정말 여기를 아지트처럼 쓰고 있구나. 혹시 그동안은 나 때문에 일부러 오지 않은 건가? 거의 정답에 가까운 추측 앞에서 하루키가 고민하는 사이 츠바이크가 하루키 앞에 샌드위치를 올려두었다.
“앗,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면 레이지는 어디 있어?”
“사네미츠 선생님의 자료를 구하기 위해 도서관에 갔어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본인 마감에 왜 레이지가 동원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요.”
“신랄하구만.”
“신랄하군요.”
하루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마침 현관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레이지가 거실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타났다. 한 손에 척 봐도 도서류가 담긴 종이가방을 든 채였다.
“다녀왔습니다. 아, 스승님도 계셨네요.”
“오냐. 수고했다.”
“어서오세요, 레이지. 마침 점심이 다 된 참이니 선생님 좀 끌고 나와 주시겠습니까. 아마 지금쯤 나오지도 않는 원고 때문에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을 거예요.”
“네엡.”
잠시 후 끌려나온 사네미츠는 아니나 다를까 죽을상이었다.
“글이 안 나와….”
“네, 예상했습니다. 됐으니까 밥이나 먹으세요. 저작운동으로 뇌를 자극시키고 다시 마감하러 들어가는 겁니다.”
“내 취급 너무하지 않아?”
츠바이크의 단호한 말에 사네미츠가 투덜거린다. 그 사이 식탁에 샌드위치와 치킨 샐러드 외에도 양송이 스프가 올라왔다. 전부터 생각한 거긴 한데, 드레퓌스 씨 혹시 LDL의 식사 담당이야? 어쩌다보니 레이지와 나란히 앉게 된 하루키가 소리죽여 물어보자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레이지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애초에 가짓수가 많은 식탁도 아니었기에 식사는 약간의 잡담과 함께 금방 끝을 맞이했다. 그나마 집주인의 가족 된 도리로 접시들을 씻으려고 하던 하루키를 츠바이크가 제지한다.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은 하루키 앞에서 애니가 짧은 헛기침을 했다.
“앞으로 나서는 건 취향이 아니긴 한데, 상황이 상황이니 별 수 없군. 이봐, 아토 하루키. 세오도아 리들의 행방에 대해선 너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네. 혹시 그 사람을 찾을 생각이신가요?”
“찾을 수 있다면야 뒷목 잡고 끌어내고 싶지. 하지만 지금 LDL의 활동을 그 녀석의 수색에만 할애하긴 어려워. 안 그래, 츠바이크?”
“네, 솔직히 말하자면 제보가 밀렸어요. 평소에는 시간 많은 보라머리가 처리했는데 부재중이니까요. 그렇다고 저희가 하루 종일 매달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말인데 아토 하루키, 너 한가하지?”
단도직입적이다 못해 목 밑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말투였다. 하루키가 그 위압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애니가 말을 이었다.
“네가 LDL에 들어와 줘야겠다. 임시 리더로.”
“네?”
“스승님?”
“애니?”
이소이 부자와 아토 하루키의 아연한 반응이 쏟아진다. 정작 츠바이크는 사전에 이미 귀띔을 받았는지 별달리 동요한 기색이 없었다.
“생각해보라고, 츠바이크는 편집자 일이 있어. 사네미츠는 작가지. 레이지가 DM을 처리하기에는 아직 어리고,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선별할 정도의 성격이 아냐. 근데 듣자하니 너는 이전에 탐정사무소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며? 그럼 제보에 답하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스승님…. 저도 이제 스물 중반인데 어리다는 말은 좀.”
“어허.”
“말씀은 감사하지만, LDL 경력으로 치자면 츠바이크 씨나 애니 씨가 저보다 선배실텐데요. 그걸 제치고 제가 꿰차도 되는 자리인가요?”
“그건 걱정 마세요. 여기 리더는 기본적으로 피라미드의 최하위거든요. 이른바 비명예직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누가 맡더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키가 임시 리더라니…. 물론 일반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힘들다고 할까 아슬아슬하게 아웃일지도 모르지만….”
“아버지는 잠깐 입 다물어요.”
냉담한 아들의 말에 이소이 사네미츠가 침묵했다.
“임시 리더라고 해도 큰 건 바라지 않아. 너는 그냥 LDL의 제보를 정리하고 답한 다음, 우리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충분해. 일정 조율이나 준비물, 현지 조사 멤버 같은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물론 인력이 부족할 땐 너도 포함해서.”
“스승님,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단숨에 정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하다못해 어느 정도 시간을 주셔야죠.”
“흐음, 그렇다는데 어때. 아토 하루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냐?”
모두의 시선이 아토 하루키에게로 향한다. 따갑다기보다는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하루키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저, 신분 위조 가능한가요?”
“지인 할인 적용도 가능하지.”
“그럼 할게요.”
“좋아, 결정이다.”
애니가 한 손을 내민다. 하루키는 슬쩍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성정만큼이나 거칠고 단단하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형, 괜찮겠어요?”
“괜찮아. 사무업무에 접대라면 이전에도 질리도록 했는걸.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걸 거절하면 나는 이 집에 얹혀사는 셈이야. 그건 사회인의 영혼이 용납 못 해.”
“사회인의 영혼.”
일련의 회의와 작업 배분이 끝난 뒤 애니는 다른 곳에 볼일이 있다며 돌아갔고 사네미츠는 그대로 츠바이크에게 뒷목이 잡혀 작업실로 끌려들어갔다. 결과적으로 레이지와 둘만 남게 된 하루키는 식기를 깨끗이 씻은 뒤 건조대에 올려둔 참이었다.
“그리고… 루이도 만나러 가고 싶으니까.”
“…….”
“물론 만나면 엄청 소동이 벌어질 것 같긴 하지만.”
“괜찮아요. 만나러 가죠. 반드시 만나게 해드릴게요.”
“별스럽게 의욕이 가득하네.”
“크케켓.”
둘이 그러는 사이 다시금 거실로 돌아온 츠바이크가 업무용으로 가져왔다는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그 준비성을 볼 때, 하루키가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초절 쿨한 사회인답게 츠바이크가 알려주는 LDL의 SNS 계정과 ID, 암호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며 듣던 하루키에게 노트북의 마우스가 넘어간다. 하루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척 봐도 숫자가 쌓일 만큼 쌓인 제보함을 눌렀다. 순식간에 세계 각국의 언어로 이루어진 제보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굉장하죠?”
“굉장하네요. 세오 씨는 이걸 다 처리한건가요?”
“기본적으로 한가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동안은 츠바이크 씨가 처리했고요?”
“네, 리더가 없어서 중간에 정신줄을 몇 번인가 놓을 뻔 했지만요. 당신이 들어 와줘서 정말로 얼마나 다행인지.”
농담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세계 각국의 언어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뜻과 의미가 정확히 해석되어 머리에 들어오는 감각은 꽤나 낯설고 기이한 경험이었다. 몸을 푸르르 떨고 스크롤을 내리던 하루키는 문득 제보함에 들어와 있는 메일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깜박였다. 마우스가 천천히 그쪽으로 움직였다.
제목을 더블 클릭한다. 츠바이크나 레이지가 그것을 막지 않아서 약간의 로딩 후에 메일 내용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아, 어쩐지 눈에 익숙한 문자다 싶더라니 일본어였구나. 하루키는 본문을 읽었다.
【안녕하세요. LDL 여러분. 처음 뵙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일본에서 일어나는 「신기루 사건」에 대해 제보하고자 합니다….】
〔후기〕
안녕하세요. 미키엘Mikyel입니다.
『Renounce the love of angel(천사의 사랑을 버려라)』
약칭 천사 인계본을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토 하루키와 세오도아 리들. 두 사람이 지닌 여러가지 공통점에서 문득 떠오른 단발성 아이디어를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일단 아토 하루키와 LDL 조합이라고 적기는 했는데 메인은 이소이 부자와 아토 하루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세로만 달리며 만든 작품이었는데 읽으시면서 즐거우셨나요?
개인적으로 천사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궤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자가 신의 것을 투과하여 이루어지는 상아빛 사랑이라면 후자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며 다양한 색채를 빛내는 사랑이 아닐까요. 더불어 천사는 자신의 의지나 마음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있는 인간이라면 차라리 인간답게 사랑해야한다…그런 생각을 골조로 썼습니다. 그래서 목차랑 제목이 이어진답니다. 짜잔.
이번 책의 첫 모티브가 된 것은 고린도 전서 13장입니다. 원래는 제목도 거기서 따오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기면 여러모로 복잡해질 것 같아서 지금의 제목이 되었네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전체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거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결국 인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이지와 사네미츠가 하루키를 가브리엘이라는 자리에서 추락시킬 수 있었던 것도 서로에게 가족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토 하루키는 천사에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사네미츠가 하루키의 날개를 자르려고 했을 때 하루키가 ‘아버지’가 아니라 ‘이소이 사네미츠’라는 이름을 부른 이유는 그 순간에 세오도아가 DLC 인트로에서 겪은 기억이 플래시백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어떠한 반격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는 바로 앞 문단에서 설명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1편과 2편을 생각했을 때에는 솔직히 뒷이야기가 더 이상 어떻게 이어질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막상 소제목을 정하고 내용을 정리하다보니 꽤 깔끔한 엔딩이 만들어진 것 같아 만족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원작의 타임라인을 따라가게 되었네요. 이제 남은 건 COM 존버 뿐.
개인적으로는 맨발로 땅을 밟을 수 없어 공중을 떠다니는 하루키도 보고 싶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완전히 천사로 끌어올려진 다음일 것 같아서 넣지는 못했습니다. 작중의 하루키는 일단 데이터는 다 넘겨받았는데 실제 사용에 익숙지 못한 상태였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다 퇴고하고 나서야 안 것입니다만, 아토 하루키와 세오도아 리들이 같은 5월생 쌍둥이자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전 이걸 알고 30분 정도 기절하다 깨어나서 머리가 아직 어질어질하네요. 인자는 대체 어디까지 부여되어있는가…? 답은 역시 코무 존버 뿐(2).
덧붙이자면 하루키의 날개가 가로등 불빛에 비춰져서 그림자로만 보이는 장면은 미국 드라마 슈퍼내추럴에서 나오는 천사 연출을 참고한 것입니다. 이런 거 너무 간지 나고 좋지 않나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인외의 특징☜진짜 환장하는 요소에요. 보고 싶은 걸 마음껏 넣어서 만족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어딘가에서 뵙겠습니다.
다들 건강 조심하세요!
Thanks to : 표지 분양해주신 젬즈비(@Gems_Bee)님.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는 많은 분들.
이 책을 구매해주신 여러분.
서식지 :
https://butterflybox.postype.com/
https://withglyph.com/butterflybox
-BONUS TRACK-
#도대체가 말야
하 “그런 무모한 계획을 잘도 시도했네.”
레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요. 답사도 하고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하 “망할 아버지에게는 운동량 과다였던 거 아냐?”
레 “…….”
레 “건강수준은 형이랑 비슷했다고 생각해요.”
하 “뭐라고?”
레 “기적 같은 성공이었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어
하 “앗! 두 사람 술 마셨어요?!”
사 “하루키이~ 아빠 원고 끝냈어~.”
츠 “어서 오세요. 네, 한잔 했습니다.”
하 “이거 한 잔 정도가 아니잖아요. 우와, 술 냄새.”
사 “하루키~.”
하 “네, 뭔가요? 주정뱅이 아저씨.”
사 “하루키는 내 아들이야~.”
츠 “…….”
하 “…더 할 말이 있을 텐데?”
사 “레이지도 내 아들입니다!”
하 “좋아.”
레 (솔직하게 기뻐해도 될 텐데.)
#아버지는 방에 집어넣었다
하 “그나저나 그 만년필은 결국 뭐였던 거야.”
레 “아버지 말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저주라던데요.”
하 “나 참, 그걸 그렇게 쓴다고?”
레 “우리도 형에게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죠.”
하 “왜 그렇게 벼르고 별렀다는 표정이야?”
#해피엔딩
레 “아무튼 잘 돼서 다행이에요.”
하 “앗, 어느 틈에 술 한 잔을.”
레 “이 정도는 괜찮아요. 기쁨의 한 잔인 걸로.”
하 “너 그때도 그렇게 말하면서 엄청 마셨잖아.”
레 “그만큼 큰 기쁨이란 거죠.”
하 “어휴.”
레 “반드시 구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하 “…….”
레 “다른 걸 버려서라도.”
하 “아주 건방진 소릴 해.”
레 “아하요.(아파요)”
#과몰입 주의
레 “형, 과자 사왔는데 먹을래요?”
하 “먹을래. 어떤 거야?”
레 “프라파*요.”
하 “…….”
레 “…….”
하 “레이지.”
레 “네.”
하 “너무 노골적이잖아.”
레 “케케케.”
(* 프라파frappa : 이탈리아에서 사육제 때 먹는 과자. 지역마다 이름이 다르며 천사의 날개angel wing라고도 불린다.)
진짜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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