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커플링Coupling

[막간컾]다섯을 거꾸로 세고 만나러 갈게

DLC 그 사람의 생일을 축..... 기념..... 아무튼 합니다

-막간 등장인물 및 1페이즈 내용 첨가되어있습니다.


영원히 이어지는 시간이란 즉 무한이다. 그 안에 내던져진 자아는 대체로 마모되어서 뭉툭해진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부끄러웠던 것, 자랑스러워했던 것, 마음에 들었던 것,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불쾌했던 것, 기뻤던 것, 그런 것들이 모르는 사이에 잘게 잘게 부스러져 흘러간다. 막아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쥐어 보려고 해도 붙잡히지 않는다. 1953년 7월 19일 이후의 삶은 특히나 그런 느낌이었다.

일력은 무의미하게 뜯겨나갔다. 하지만 그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오도아 리들은 바지런히 움직였다.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무언가를 주기도 했고, 웃기도 했고, 농담도 했고, 여러 사람 앞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그럼 주변 사람들은 감탄하기도 하고 같이 웃기도 하고 두터운 신뢰를 보내주기도 했다. 자세한 상황은 어쨌던지간에 그 흐름은 제법 선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선순환 속에서 세오도아 리들의 자아는 확실하게 마멸했다. 원래부터 그리 튼튼하지 않았던 기반이었다. 루메르트 오토마이어의 금빛 귀걸이는 그 존재감과 별개로 모든 것을 막아주진 못했다. 루메르트 오토마이어의 무덤을 짊어지고 다닐 수 없기에 묘석을 잘라 귀에 걸고 다니는 꼴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오도아 리들의 마음은 이미 죽음으로 접어들었다. 그 마음가짐은 완연한 노인의 것이었는데 비극적이게도 그의 외형은 영원한 25살이었다. 마음이 시간의 흐름 앞에서 곱게 갈려 나간다. 으드득.

필멸의 운명을 지닌 인간이 무한한 시간을 재는 단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필연이다. 따라서 우주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데도 신년이니 크리스마스니 황금 연휴니 백중이니 생일이니 기념일이니 하는 것들이 길 잃은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왔다. 세오도아 리들은 그런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텅 빈 주머니 속에서 긁어모은 먼지 같은 기력으로 방긋 웃으며 익살을 떨었다. 놀랍게도 먼지를 하나도 긁어모으지 못한 적은 없었다. 당연하다. 그에게 시간은 무한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5월 25일은. 5월 25일. 5월 25일! 맹세하건데 그 모든 기념일 중에서 이것만큼 성가신 건 없었다. 세오도아 리들의 자아는 일반적인 감각을 가진 이들의 호의와 선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할 정도로 저급한 기능을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축하해줘서 고마워. 세오도아 리들은 탄생의 기쁨을 티끌만큼도 느끼지 못하는 정신으로 다수의 사람 앞에서 그럴 듯한 표정을 지어야 했고 그때마다 간신히 남은 자아가 비명을 질렀다. 차라리 죽여줘, 난 죽고 싶어! 물론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런 지옥 같은 5월 25일에도 딱 한 가지 유용한 점은 있었다. 바로 그 날 정각이 루메르트 오토마이어의 기일로부터 정확히 55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5월 25일. 55일. 1,320시간. 이렇게 세어보는 사이에도 몇 초인가가 쏜살같이 지나가 7월 19일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세오도아 리들은 정말로 정말로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는 그 사실을 상기했다. 자신 주변을 쏜살같이 흘러가는 이 세상의 최소 입자를 상상했다. 그 입자들이 이루는 거대한 흐름 너머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루메르트 오토마이어를 망상했다.

그럼 놀랍게도 웃음이 나왔다. 얼굴 근육을 의도적으로 비틀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그야 루메르트인데 어쩌겠는가. 세오도아 리들은 그를 사랑한다. 젊던 그가 주름투성이로 늙어 죽어 묘지에 묻히고 장례식이 열리는 것을 모두 지켜보고서도 마음을 과거형으로 바꾸지 못할 정도로 사랑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목격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이라고 말해준 존재를 지금도 아끼고 있다. 그가 살아간 흔적이 남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다 못해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건 영원히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세오도아 리들이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자아였다. 그가 한 명의 인간처럼 기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원이었다. 이것만큼은 시간에조차 내줄 수 없다. 어떤 존재도 빼앗아갈 수 없다. 인간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도망칠 수 없는 세오도아 리들은 그 집념으로 제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자아가 금이 가고 바스러져 무엇도 알 수 없어지기 전에, 사랑했던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전에, 그걸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했던 사실조차 아무래도 좋은 먼짓덩어리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웃는다.

"축하 고마워."

다섯 음절을 말한다. 숫자가 줄어든다. 인간이 제멋대로 창조한 시간 단위가 넓은 우주를 재단하며 여기 이 자리에 과거와 같은 숫자를 가진 그 날이 돌아오리라고 멋대로 예언한다. 세오도아 리들은 기꺼이 그 호언장담에 제 마음을 맡긴다. 눈을 감는다.

만나러 갈게.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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