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을 찍지 않을래요?
아토 하루키+이소이 부자.
-SS+ 후일담 시점. DLC 인물명 등장.
-해당 요소의 스포일러에 주의해주세요.
11월, 늦가을. 아토 하루키는 의동생 레이지에게서 가족사진을 찍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좋네, 그 망할 민달팽이는 구석에 원 모양으로 동그랗게 넣어버리자. 그런 말을 들은 동생은 전화기 너머에서 쓰게 웃으며 말했다. 실은 제가 가지고 싶어서요. 좋잖아요, 가족사진.
그런 말을 들었는데 아이 같은 고집을 피울 수도 없어서, 아토 하루키는 순순히 이탈리아로 넘어왔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을 예정이니 평소대로의 차림으로 오면 된다고 했다. 헌데 도착하고 보니 사네미츠와 레이지의 차림새가 아무리 봐도 평소보다 공을 들인 느낌이라, 하루키는 내심 백화점에서 옷을 골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정장 두 사람 사이의 하이넥 복장은 펭귄 사이에 놓인 사막여우 같을 테니까.
사진관은 이소이 부자의 자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전에 예약은 다 끝났는지 내부는 한산했고 거울과 조명이 가득한 대기실에서 실로 뻣뻣하고 어색하게 서 있던 세 부자는 주인의 안내에 따라 알맞은 포지션으로 이동했다. 스튜디오 한쪽 구석에는 사진 촬영에 쓰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가지 소품들이 놓여있었는데, 개중에는 어딜 어떻게 봐도 신혼부부가 쓸법한 하트 모양의 거대한 핑크 액자도 놓여있었다. 하루키가 그런 것들을 별 생각 없이 눈으로 훑는 가운데 주인이 기세 좋게 커다랗고 고풍스런 의자 하나를 꺼내왔다.
의자에는 사네미츠가 앉았고, 레이지와 하루키는 그 옆에 나란히 섰다. 근데, 이거 가족사진이라기보단 마피아 조직 보스와 그 간부들 같은 느낌 아닌가. 평소 같은 차림새였다면 좀 나았겠지만 공교롭게도 오늘은 셋 모두 정장 차림이다. 사진관 주인도 처음 몇 장을 찍어보더니 이건 영 아닌가 싶었는지 모호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빠르게 몇 마디를 하자, 레이지가 무어라 대답하더니 하루키를 바라보았다.
"의자를 바꾸겠데요. 이쪽으로 오라네요."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 거기에는 과연 편안해 보이는 디자인의 소파가 하나 놓여있었다. 주인은 아예 이 3인 가족의 포즈를 처음부터 조정하기로 작정했는지, 가운데에 사네미츠를 앉히고 그 옆에 레이지를 앉힌 다음 아토 하루키에게도 얼른 앉으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자리는 사네미츠의 왼편 자리만이 비어있다. 하루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앉는 동안 어딘가를 뒤진 주인이 커다란 원형 액자 틀을 내밀었다. 레이지가 설명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이걸 나랑 하루키 형이 손으로 잡고, 셋이 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으로 찍어보자는데요."
"직업정신 투철하네."
"하루키 형, 들 수 있겠어요?"
"이 정도는 들거든?"
액자를 손으로 잡으면 의외로 가볍다. 최대한 몸을 안으로 넣을 수 있도록 왼손으로 틀을 잡은 하루키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붙으며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리조, 리조!! 짧은 단어를 연발하며 엄지를 치켜든 사진관 주인이 빠르게 셔터를 누르더니 엄지를 치켜올렸다.
이후로도 주인은 각종 소품을 가져오며 촬영을 이어나갔다. 소품이란 막대로 얼굴을 장식하는 간단한 파티용품이거나 간이식으로 붙이는 검은 콧수염 같은 것이어서, 아토 하루키는 얼굴에 파란 선글라스를 쓰게 된 시점부터 자기가 사실 예능 사진을 찍으러 온 것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인은 그들이 들고 있던 소품을 모두 거두어가고는 무어라 말했다. 간단한 인사를 제외하면 아직 이탈리아어가 능숙하지 못한 하루키는 주인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단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한 사람 건너 앉아있던 레이지가 그 말을 통역해주었다.
"아버지에게 좀 더 몸을 기대듯이 앉아서, 어깨에 손을 올려보라고 하네요."
흘끗 바라본 사네미츠의 어깨는 척 보기에도 경직되어있다. 아토 하루키는 한숨을 내쉬곤 의자에 앉은 사네미츠의 곁으로 조금 더 다가가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져, 하루키는 덤덤하게 생각했다. 지금 놀란 얼굴로 돌아보면 그대로 박차고 나가버려야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없었고 주인은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셔터를 찰칵찰칵 누르고는 다시 무어라고 말했다. 아까와는 발음이나 손짓이 다르다. 레이지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까 하던 하루키는, 제 손에 와 닿는 감촉에 숨을 멈췄다.
사진사는 빠른 발음으로 무언가를 말하며 또 엄지를 치켜올렸다. 바쁜 셔터 소리가 몇 번 더 울려 퍼지고, 마침내 오케이 사인을 받아낸 세 부자는 나란히 긴 한숨을 토해냈다. 분명 레이지도 바싹 긴장하고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사네미츠도.
여기서 결과물 바로 확인할 수 있데요. 레이지의 말에 편집실로 따라간 하루키는 듀얼 모니터에 선명하게 찍힌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온갖 파티용품(솔직히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으로 장식된 사진들이 한참 이어지다, 후반부로 가서야 겨우 분위기가 차분해진다. 그중 몇 사진에서는 중앙에 앉은 사네미츠가 자기 양옆에 앉은 두 사람의 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꽤, 있을 법한, 모습처럼, 보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풍경이야. 하루키가 솔직하게 말하자 레이지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저건 뺄까요? 아니, 됐어. 그냥 뽑지 뭐. 특히 저거랑 저거랑 이건 꼭 현상해달라고 해줘.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 사네미츠의 사진을 귀신같이 골라냈다. 사네미츠가 앓는 소리를 냈다.
"불만이에요?"
"아뇨. 아닙니다."
모든 사진의 현상에는 일주일 정도가 걸릴 거라고 했다. 그라치에! 귀에 감기는 목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오니 바깥은 제법 어두웠다. 들어가는 길에 음식 좀 사서 요리해 먹죠. 파스타랑 빵이랑 닭고기랑 사과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이거 LDL 분들하고도 같이 사진 찍어야 했던 거 아냐? 레이지의 말에 익살스레 답하며 하루키는 사네미츠의 곁을 걸었다.
*
"현상된 사진 데이터로 보냈는데 받았어요?"
"응. 새삼 다시 보니까 굉장하네."
"세오 씨 엄청나게 웃었어요. 정장 입고 찍은 가족사진 처음 본다면서."
"하하."
"다음에는 그냥 평상복으로 찍죠."
"그래, 다음에는 일본에 왔을 때 찍자."
"기대되네요. 그럼 또."
전화가 끊어진다. 아토 하루키는 모니터에 떠오른 일련의 사진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바탕화면에 새 폴더를 만들고, 레이지가 보내온 데이터를 모두 집어넣는다. 뒤이어 F2키를 누른 하루키는 [새 폴더]라는 이름 대신 [사진]이라는 단어를 넣었다가, 그걸 [2015. 11. 13 사진]이라는 단어로 바꾸었다가.
[2015. 11. 13. 가족사진(+민달팽이)]
"응, 이렇게 하자."
소소한 미소를 지으며, 하루키는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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