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노 에이지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지 않는다.
시나노 에이지 중심 / 세포신곡 S루트 조건 및 SS+ 스포일러 있음.
-S루트로 들어가기 위한 단서 중 하나와 SS+ 이후의 시간선을 소재로 쓰고 있습니다.
-열람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아카네 씨, 티나.
이제 계절도 완연한 봄이네요. 그쪽에도 예쁜 벚꽃이 피었나요?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보고하고 싶은 일이 있어 편지를 씁니다.
들어주세요.
*
지고천 연구소 사건이 일어난 지도 이제 일 년이 지났습니다. 계절은 어느덧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봄이 되었어요. 그때에는 나고야 지점에서 신세를 졌던 저도, 지금은 도쿄 본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그때는 정말 큰 일이었다고 웃어넘기는 것도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전과 비교했을 때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에 걸쳐 해내야 할 과업이 생긴 것.
다른 하나는 둘도 없이 소중한 인연들과 만난 것입니다.
아카네 씨에게는 이미 편지로 적어드렸을 거에요. 지고천 연구소에서 제가 벌여버리고 말았던 일들을. 비록 그 계기가 지고세포라는 것에 얽힌 질 나쁜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 의사에 따라 움직이고 말았던 것은 저예요. 제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해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말았던 거죠. 하지만 지고천 연구소의 일들은 세간에 상세히 알릴 수 없는 종류였기에 저는 제가 저지른 짓에 대한 법의 심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심판받지 못한 죄의 무게만큼 다른 사람을 돕고 속죄하며 살아가겠다는 게 제 결심이에요.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저의 소중한 인연입니다. 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아, 제가 저지른 죄를 알아주고, 그럼에도 저를 재앙이 아닌 '시나노 에이지'라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봐주는 사람들이에요. 특히나 하루키 선배님과 레이지 씨에게는 정말로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그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이렇게 자리에 앉아 편지를 쓰는 일조차 불가능했을 거에요. 그래서 레이지 씨로부터 갑작스레 『미안하지만 다음 주 주말, 점심 12시까지 아래에 있는 주소로 와줄 수 있겠슴까?』라는 연락이 왔을 때 자세한 확인은 미뤄두고 『네!』라고 답했던 거예요.
그게 일련의 소동으로 이어질 줄은 손톱만큼도 모르고서.
준비는 이쪽에서 끝낼 테니 되도록 편한 복장으로 와달라고 하기에, 저는 평소의 사복을 입고 지시받은 장소로 향했습니다. 근데 향하는 도중에서야 눈치챈 거지만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버린 거 있죠.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미리 아침 9시에 나온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제가 도착했을 때에는 약속 시각을 15분 정도 지나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거면 레이지 씨에게 조금 늦는다고 문자를 보냈으면 됐을 텐데, 저는 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종종걸음만 치다가 전철에서 튀어 나가듯이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급하게 내린 제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이런 내용의 플래카드였어요.
【히가시야마 식물원 봄 벚꽃 만개 중!】
우와, 여기는 벚꽃 명소인가보다! 하고 들떴던 건 아주 잠시였어요. 왜냐면 레이지 씨가 같이 벚꽃을 보자고 불러낸 거라면 당연히 하루키 선배에게도 연락이 왔었을 테니까요. 셋이서 만나자는 약속인데 이렇게 레이지 씨의 연락만 단독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레이지 씨가 하루키 선배에게 말하기 어려운 어떤 목적이나 사건이 생겨 불러낸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 생각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 방향성이 많이 달랐답니다.
약속 장소는 전철로 들어가는 입구였어요. 그쪽으로 향하니 과연 레이지 씨가 있었습니다. 곁에는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제가 아는 사람인 사네미츠 씨였습니다. 사네미츠 씨는 레이지 씨의 아버지인데, 반년 정도 전에 놀이공원에서 같이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얼굴을 익히게 된 분입니다. 듣기로는 하루키 선배님의 아버지이기도 하시다는데, 어째 하루키 선배 앞에서는 제대로 기를 못 편다는 인상이 강해요. 그런 분이 그때는 침착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레이지 씨의 손짓을 따라 자리로 가면서 우와, 이렇게 뵈니까 진짜 연륜 있어 보인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후의 대화를 짧게 적어 보겠습니다.
"레이지 씨, 무슨 일인가요?"
"설명도 없이 불러내서 미안함다. 이쪽도 이쪽대로 긴급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빠서요."
"긴급일정… 대체 무슨 일인가요?"
"음, 설명을 하면 길어지니까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죠. 저희는 오늘."
"오늘?"
"아토 하루키를 추적합니다."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제가 목소리를 높이자 레이지 씨는 손가락을 입술에 되며 쉿,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지만 우리가 할 일은 하루키 선배를 어떤 위협으로부터 무사히 지켜내는 거라는 말과 함께. 설마, 지고천 연구소의 잔당이나 그 비슷한 부류가 선배를 노리는 걸까? 선배는 지금 무사하신 건가? 하지만 오래 고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까운 순간이었으니까요. 저는 카페의 런치 메뉴로 점심을 대신하면서 레이지 씨와 사네미츠 씨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일단 저희는 기본적으로 하루키 씨가 만나는 상대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때로는 상대가 저지르려는 행동을 비밀리에 저지해야 했습니다. 지금부터 하루키 선배가 향할 곳은 인파가 많으니 상대 쪽에서 섣부른 행동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낙관적으로만 보는 것도 금물이었어요. 상대나 하루키 씨 쪽에서 우리를 알아볼 수 없도록 모자와 위장무늬로 덮인 재킷을 입고 이동한다는 것까지 파악했을 때, 시계는 무정하게도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슬슬 시간이군요, 갑시다 에이지 씨."
저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넘겨진 재킷과 모자를 착용했습니다.
*
선배는 이미 히가시야마 동식물원의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분명 약속 시각은 2시라고 들었는데, 제 손목에 달린 시계는 2시 15분을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는 늦게 나오는 쪽이 권력이 더 강한 쪽이라고 하던 우스갯소리가 떠올랐어요. 아카네 씨와 데이트 할 때에는 언제나 둘이서 함께 나갔으니 의식한 적이 없었지만요. 저희는 아토 선배의 위치가 한 눈에 보이지만 그쪽에서는 우리를 보기 어려운 기둥 뒤쪽에서 상태를 관찰하며 상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상대가 나타났다며 사네미츠 씨가 신호를 보냈습니다. 재빨리 고개를 내밀어보니, 하얗고 팔랑이는 원피스를 입은 긴 갈색 머리의 사람이 차량에서 내려 하루키 선배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약간의 잡담을 나눈 뒤 동식물원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 모습은 멀리서 대강 보기에도….
"…데이트?"
"데이트 아닙니다, 에이지 씨. 저 여자의 이름은 히가시하라 유미야. 나고야에서 유명한 쇼핑 마트인 이스트 마트의 총지배인 히가시하라 마츠모토의 막내딸이죠. 하루키 형은 그 권력에 말려든 겁니다."
"저기, 상황을 잘 모르겠는데요."
"일단 따라오시죠."
레이지 씨의 말에 따라 일단 장소를 이동해, 두 사람의 동태를 계속 관찰했습니다. 사전에 예약을 해두었던 것인지 길게 늘어선 매표소 줄 뒤에 서지 않고 금방 동식물원의 정문을 통과한 두 사람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식물원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아까 전철역에서 내릴 때 보았던, '봄 벚꽃 만개 중'이라는 플래카드가 다시금 떠올랐어요. 마침 날은 무척이나 맑았고,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사람들은 하하호호 웃으며 지나가고…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역시 데이트잖아요!"
"진정하세요 시나노 씨. 저희가 곧 데이트가 아니게 만들어줄 테니까요."
"저희는 지금 하루키 선배의 연애 사정을 끝장 내러 온 건가요?!"
"연애라니? 저건 그렇게 새콤달콤한 상황이 아닐세, 시나노 군."
뒤이어 사네미츠 씨가 설명해준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토 하루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탐정의 업무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토와 탐정 사무소에 개인적으로 의뢰를 하러 찾아온 히가시하라 유미야가 의뢰를 해결한 아토 하루키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무난하게 거절한 하루키였으나, 자신의 집안이 나고야에서 가진 영향력과 자기 자신의 매력을 총동원한 유미야의 공세는 점점 집요해질 뿐이었다. 결국 그 집요함을 견디다 못한 아토 하루키는 유미야의 데이트 신청에 딱 한 번만 응하겠노라는 조건을 걸고 나선 것이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상대를 철저하게 꺾어야 하네. 한 치의 자비도 있어선 안돼."
"눈빛은 지금 당장 상대방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신데요."
"눈치가 빠르군, 에이지 군. 사실 등 뒤의 이 가방에는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이탈리아 마피아 장르는 2013년에 완결났거든요?!"
그야 저도 하루키 선배에게 저런 사정이 얽혀있다고 생각하면 나서서 뜯어말려 버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를 추적하고 상대를 날려버리고 싶진 않았어요. 하루키 선배 정도의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연애를 시작하실 것 같지도 않았고요. 지금이라도 제가 두 사람을 데리고 철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한 마음으로 뭉친 두 사람의 팀워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곁에서 있는 힘껏 따라다니고 뜯어말리는 것만으로도 한계였습니다.
이를테면.
"방금 하루키 형이 먼저 걸음을 멈춘 벚나무 앞에서 보란 듯이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마이너스 30점."
"데이트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쉬지 않고 계속 걷고 있어. 마이너스 45점."
"정말 참고를 위해서 묻는 건데 이 점수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최종 시점에서 100점 달성이면 연애 인정, 반대로 마이너스 100점 달성이면 이별입니다."
"지금 마이너스 275점인데요?"
"케케케."
라던가.
"하루키가 잠시 자리를 비웠군. 그럼 다녀오지."
"다녀온다니, 어디를요?"
"유미야라는 사람이 이탈리아식 플러팅에 익숙할지가 궁금하군."
"많은 의문이 떠오르지만 하나만 물을게요. 그 손의 작은 가방 안엔 무엇이 있나요?"
"안심하게. 코끼리도 잠들게 하는 수면제일 뿐이야."
"약물 오남용! 그전에 세관은 어떻게 한 거에요?!"
"하하하."
라던가.
기타 등등.
시간이 4시 30분을 가리키고 식물원 폐장 안내가 나왔을 때에는 정말이지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라고 무릎이라고 꿇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 생각은 너무 물렀던 모양이에요.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라는 사람이 공원을 나가는 것까지 지켜본 두 사람은 2차전의 시작이라며 갑자기 저에게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어리둥절하게 지퍼를 열어보니 왠 캐주얼 정장이 들어있었어요.
"저기, 이건 뭔가요?"
"아무래도 스카이 타워에 재킷으로 들어가면 눈에 띄니까요."
"스카이 타워?"
"저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이지 씨가 가리킨 것은, 히가시야마 식물원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배경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어서 오히려 그냥 흘려보고 말았던 높은 탑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간을 맞아 불빛이 깜박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네미츠 씨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히가시야마 동식물원의 관광명소 중 하나인 히가시야마 스카이 타워. 해발 200m 정도의 높이에서 인근의 경치를 즐기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곳이지. 과연 상업 가문 출신이라고 할까. 일부러 데이트 시간을 늦게 잡아서 자연스럽게 식사 코스로 유도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냐."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저기에도 잠입할 생각이신가요? 유명 데이트 코스에? 성인 남자 셋이서?"
"요즘은 세간의 시선도 많이 너그러워졌어. 성인 남자 넷 정도의 동석이야 웃어넘기겠지."
"그야 편견이나 차별은 안되니까… 아니, 잠깐만요, 성인 남자 넷?"
"네, 마침 시간 맞춰 오셨네요. 저기."
이 상황에서 누가 더 추가될 수 있다는 걸까요?
몰려오는 불안감과 함께 입구 쪽을 바라보니.
"미안하다. 조금 늦었군."
"소장님?!"
오토와 탐정 사무소 나고야 지점 영업소장, 오토와 루이 씨가 있었습니다.
*
"하루키에게 그 의뢰를 소개한 건 나거든. 일말의 책임을 느껴 잠시 상태를 보러왔다."
시간 오후 5시 12분. 미리 준비한 정장으로 차려입고 뻔뻔한 얼굴로 자리를 안내받는 것은 꽤 베짱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정장 입은 사내 4명이 우르르 몰려가면 좀 압박이 강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안내직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리로 안내해주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약자명이 '안티-이스트필드'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직원의 프로 정신이 아니었다면 전 그 자리에서 돌아가고 싶어졌을 거에요.
아래쪽에서 천천히 경관을 감상하고 올라오려는 건지,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 아직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라운지에서 구석이면서도 적당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은 우리는 메뉴판을 일단 제쳐놓고 상황 파악과 작전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작전을 논의한 건 레이지 씨와 사네미츠 씨이고, 저는 소장님에게 어떻게든 이 사람들의 폭주를 알리려 필사적이었지만요.
"…해서 지금 히가시하라 유미야의 점수는 토탈 마이너스 2840점. 의심할 여지 없이 하루키 형의 짝이 아닙니다."
"하지만 보다시피 표적의 수완은 보통이 아니다. 이 한 번의 식사 자리에서도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닌가요? 상대는 그냥 유복한 집안 출신일 뿐이라고요!"
"그건 몰라, 시나노. 유복한 집안이든 그렇지 않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는 인간의 집념은 강하다. 설령 무슨 짓을 하더라도 목적을 이루겠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하루키라도 곤란해할 거야. 물론 그렇게 된다면 사무소 차원에서 직접 개입할 생각이지만."
"소장님…."
"과연 오토와 군. 우리와 뜻이 통하는군."
"다만" "쉿,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고 있슴다."
레이지 씨의 말을 잇듯이 고층으로 올라온 엘리베이터에서 두 명의 사람이 내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 씨였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유미야 씨가 하루키 선배의 한쪽 팔을 다정하게 붙잡고 손깍지까지 끼고 있다는 점이었을까요. 와, 야단났네.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뭔가가 심하게 구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게 메뉴판을 들고 있던 레이지 씨에게서 난 소리라는 건 돌아보지 않아도 훤했습니다. 그 메뉴판, 졸업장이나 상장을 담아주는 케이스처럼 꽤 두꺼운 재질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말이에요.
"후…. 방심했나."
"물잔에 지진 났어요, 사네미츠 씨."
"……그런가."
"오토와 소장님, 안경 닦는 손이 덜덜 떨리시는데요."
이쪽의 혼돈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멀리서 웨이터가 정중하게 메뉴판을 건네고 물잔을 채워주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제야 안 거지만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 씨가 앉은 자리는 야경이 잘 보인다기보다 레스토랑의 중앙 자리에 더 가까웠습니다. 데이트 필수 코스라고는 해도 자리가 꽉꽉 차 있는 것도 아니고 안내 데스크에서 직원이 직접 안내하기까지 했는데 왜 저런 자리에 앉은 걸까. 의아함에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습니다.
"아무래도 히가시하라의 막내 따님은 상당히 진심이긴 하지만… 그게 올바른 방향은 아닌 모양이군."
"네? 무슨 뜻이신가요?"
"간단한 문제야. 히가시하라는 하루키와 같이 야경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사람들의 주목이 쉽게 모이는 쪽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거지."
"하루키 선배님이 예약했을 수도 있잖아요?"
"모든 데이트 준비는 히가시하라 측에서 준비했어. 이 정도는 자기가 하겠다고 하더군."
소장님의 설명을 들은 사네미츠 씨가 탄식했습니다.
"그런 거였나. 젠장, 사전에 예약 위치에 대해서도 파악해뒀어야 했어."
"어… 뭔가 안 좋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앞으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죠."
계속 자리에만 앉아있을 수 없어 주방장의 추천 코스로 4인분을 주문하긴 했지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선배에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모처럼의 좋은 요리도 맛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전채 요리가 나오고 메인 디쉬가 나올 때까지, 하루키 선배님과 유미야 씨의 식사는 평온하게 이어졌습니다. 가끔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보면 오히려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요. (물론 선배의 웃음소리보다는 유미야라는 분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지만) 하지만 그때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의 수심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누가 보면 우리 쪽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을 거에요.
컨셉인지 무엇인지 몰라도, 식사가 끝난 뒤에 나온 디저트는 7살짜리 어린아이라도 한입에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거 하나 정도 먹는 사이에 별일은 생기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습니다.
짝!
순식간에 고개가 돌아갔습니다. 철 모르는 어린아이가 식사하다가 손뼉이라고 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아니었어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하루키 선배를 마주 보고 앉아있던 유미야 씨는 2인용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어 한쪽 손을 살짝 위로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한쪽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간 하루키 선배의 모습이 보였어요. 벌어진 일을 사고가 쫓아가지 못하는 사이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저질 같으니! 처음부터 우리 집 돈만 보고 접근한 거지? 이 쓰레기야! 이런 모욕은 처음이야!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걸!"
그런 말만 남기고, 유미야 씨는 가방을 홱 낚아채듯이 들고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떠나버렸습니다. 뺨을 때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소리나 잔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하던 레스토랑은 찬물을 부은 것처럼 조용해져, 유미야 씨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가버리자마자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끓어올랐습니다. 그 속에서 레스토랑 중앙에 남아 뺨을 문지르는 하루키 선배의 모습이….
…음, 여기서부터는 사실 기억이 애매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어두겠습니다. 레이지 씨는 그 장면을 본 순간에 머리 퓨즈가 거의 끊어질 뻔했다고 들었어요. 저는 뭘 하고 있었냐면 하루키 선배를 다른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쫓아 맨몸으로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여기 엘리베이터는 좀 느리게 내려오는 모양인지, 온 힘을 다해 1층에 도착하고 보니 엘리베이터에서 유미야 씨가 막 내리던 중이시더라고요.
그 이후에는 선배에게 사과해주세요 넌 뭐야 저리 꺼져 사과해주시기 전까지는 못 돌아갑니다…뭐 이런 대화의 연속이었다가, 보디가드로 보이는 남자에게 순식간에 저지당해 버렸어요. 덕분에 하루키 선배가 눈앞에서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문제의 인물을 보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레이지 씨가 달려 내려왔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늦은 뒤였어요. 그렇지만 레스토랑으로 돌아와 보니 선배는 딱히 아쉬워하는 눈치도 아니었습니다.
주도면밀하다 해야 할까요, 하루키 선배는 처음부터 그 데이트에서 뭔가가 일어나리라고 추측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전에 소형 녹음기를 준비해 데이트 내내 모든 대화를 녹음하고 있었다고 해요. 직업상 녹음기를 써야 할 일이 많기에, 이번에도 그만 직업병이 도지고 말았다. 만일 들켰을 때는 그 정도로 변명할 생각이셨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파일 안에는 실례되는 말이라곤 조금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일 히가시하라 쪽에서 항의가 왔을 때에도 오히려 이쪽에서 강하게 나갈 수 있었어요.
유미야 씨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네미츠 씨가 그 현장에서 뺨을 맞은 하루키 선배의 반응을 계속해서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을 약간 추궁했더니 얼마의 돈을 대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녹화하라는 아르바이트를 받았다고 실토했다고 해요. 오토와 소장님은 아마도 인터넷에 소문과 영상을 흘려 아토 하루키라는 인간의 사회적 평판을 깎아내릴 생각이지 않았을까 추측했습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꽤 음습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에 든다고 했던 사람을 그렇게 험하게 대하다니.
그렇지만 저희는 하루키 선배에게 나란히 혼났습니다. 자기가 갓 성인이 된 사람도 아니고 서른줄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말도 없이 데이트에 따라와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는 거였죠. 특히 루이라면 이해하지만 당신은 대체 여기 왜 있냐는 말은 사네미츠 씨를 완전히 격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뭐라 항변도 하지 못하고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는 사네미츠 씨의 모습은, 뭐랄까, 바로 조금 전에 약간의 어휘만으로 남자가 스스로 녹화 파일을 삭제하게 만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레이지 씨와 저는 머리에 딱밤을 맞아버렸어요. 하나도 안 아프다고 했더니 3대 더 맞았습니다.
"그래도, 달려와 줘서 고마워."
선배는 이러니저러니 잔소리를 하다가도 그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스카이 타워를 전부 내려온 뒤였고, 동물원도 식물원도 오래 전에 폐장하여 멀리 보이는 불빛이라곤 가로등의 주홍빛 뿐이었습니다. 스카이 타워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등 뒤에서 퍼지는 강한 빛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어서 다행이네."
마지막에 그런 말을 들어버리는 바람에 감격해서 선배를 번쩍 안고 3회전 정도 돌아버렸어요. 물론 느닷없이 뭐 하는 짓이냐고 관자놀이를 엄청나게 눌렸지만 그게 또 아프지가 않았다는 점에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아카네 씨, 저는 분명히 죄를 지었어요. 그건 앞으로 씻을 수 없는 죄로 남아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갚아나가는 길은 고독하지만도 괴롭지만도 않을 거예요. 만약 제가 조금이라도 엇나간다 싶으면 선배님의 데이트에 득달같이 달려온 이 사람들이 똑같이 모여서 잘못되려는 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을 테니까요. 저도, 만약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자포자기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볼 작정입니다. 원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왠지 마음이 단단해진 느낌이에요. 일단은 그걸 위해서 몸과 마음의 단련을 병행하려고 합니다.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곧바로 달려가서 상대방을 지켜줄 수 있도록.
*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쓰다 보니 어쩐지 길어져 버렸네요.
전 편지를 쓰는데에도 길치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마는 걸까요?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꼭 전하고 싶었으니 만족입니다.
늦었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다음에 또 편지 보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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