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아도

아토 하루키+세오도아 리들 / 세포신곡 2023 신년 합작 참가글

2023년 신년 합작 주소 :

https://5iilqstqpkttkcr.wixsite.com/coe-happy-newyear

합작 주최 감사합니다!


아토 하루키가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을 때 공항은 이미 저녁기운이 가득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노을도 밤바람에 밀려 멀어지는 시간. 손목에 찬 시계로 정확한 시각을 확인한 하루키는 익숙한 동작으로 공항 근처의 택시를 잡아타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여기로 가주세요. 그 정도의 이탈리아어는 매끄럽게 말할 수 있었으므로.

택시 운전사는 퍽 쾌활한 사람이었다. 여행객이신가요? 연말 시즌에 나폴리에 오시다니 아주 현명하시군요. 묵을 곳은 정하셨나요? 부디 즐겁고 느긋한 여행 되시길! 하루키의 애매한 맞장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영인사를 남긴 운전사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리려는 하루키에게 기어코 사탕 한 줌을 건넸다. 결국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잡고 한 손에는 사탕을 가득 쥔 꼴이 된 하루키는 한동안 인도에 멍하니 서있어야 했다.

사탕으로 불룩해진 코트 주머니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부스럭 부스럭 마른 소리를 낸다. 구강구조상 사탕 한 줌을 단숨에 녹여먹을 수 없는 탓에 민트 맛 사탕 한 알을 혀로 굴리던 하루키는 눈에 익은 골목길이 나타났을 무렵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낯선 이국의 언어들이 허공을 유영하며 제 뺨 부근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에서 입김이 샌다. 하루키는 몸을 한 번 털어내고 목적지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집의 주인은 자리를 비우지 않은 상태였다. 정확히 두 번의 노크 만에 안쪽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온다. 그가 안에서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루키는 자신이 서있는 복도를 쭉 훑어보았다. 최신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낡은 것은 아닌 건물의 구조가 어떤 정보로 변환되려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흐지부지한 형태로 이지러진다. 또 셜록 홈즈 흉내를 낼 뻔했네. 속으로 혀를 차며, 아토 하루키는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세오도아 씨.”

“어서와, 하루키.”

집 안은 미리 난방을 돌렸는지 꽤 따스한 기운이 돈다. 주인의 안내에 따라 집안으로 발을 들인 하루키는 벽 한쪽에 캐리어를 기대어 세워두고 코트를 주섬주섬 벗다가 묘한 감각에 손을 멈췄다. 불룩한 주머니 때문만은 아니었다. 빈틈없이 발린 벽지와 덩그러니 걸려있는 벽시계, 거의 최소한의 구색에 가까운 느낌으로 놓인 가구 사이를 헤매던 시선이 이유를 금방 찾아낸다. 하루키는 숨을 짧게 들이마시곤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작고 동그란 눈동자가 그를 마주보았다.

“세오도아 씨.”

“응.”

“급한 볼일이라는 거 설마.”

“역시나 탐정. 상황 파악이 빠르네.”

“설마.”

“같이 이 아이 좀 돌봐주지 않을래?”

아토 하루키는 세오도아 리들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금 뒤쪽을 돌아본다. 검은 토끼가 귀를 쫑긋거리고는 거실 안을 폴짝이며 돌아다녔다.

“지금 일본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안 돼.”

“쳇.”

“지금 혀 찼어?”

“바람소리에요.”

택도 없는 소릴 하네.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돌아온다. 하루키는 어깨만 으쓱였다.

세오도아 리들의 설명에 따르면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이웃과의 교류가 적은 이 작은 연립주택에서 한 명의 거주자가 긴급한 상황에 빠졌다. 다행히 함께 있던 가족이 재빠르게 병원에 신고한 덕분에 생명은 건질 수 있었으나, 당분간은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한 그를 지켜보고 돌봐줘야 했다. 물론 가족은 그를 돌봐줄 마음이 가득했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동안에는 집안에 있는 작은 반려동물을 돌봐줄 여력이 도저히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족은 고심 끝에 평소 얼굴을 몇 번 마주쳤던 이웃을 찾아갔다.

“그걸로 승낙했다구요?”

“워낙 간절하게 부탁해서.”

“당신 그런 성격 아니잖아요.”

“정말 간절한 부탁이었다니까.”

세오도아와 하루키 둘 다 음식을 가득 먹는 타입은 아니어서 저녁 식탁은 조촐했다. 차라리 아침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의 구성이었다. 다만 두 사람 다 토끼에게만은 너그러워서 먹이통에는 신선한 채소가 가득 올려졌다. 정작 식사의 주인은 배가 고프지 않은지 푹신한 쿠션 위에서 코를 킁킁거릴 뿐이었다. 하루키는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와인잔을 기울였다

“전 동물 털에 알러지가 있다고요.”

“뭐? 언제부터?”

“원래부터 그랬거든요?”

“별일이네. 지고세포는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기에는 너무 안정적인데.”

“갑자기 경험담인가요?”

“추억담이지.”

그래도 지금은 괜찮지? 확인 차 던져지는 질문에 하루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지고천 사건을 겪기 전에는 동물 털이 날리기만 하면 재채기를 하거나 두드러기가 나곤 했으나, 그 사건 이후로는 알러지 반응이 많이 가라앉은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바로 지금 지근거리에서 털 동물이 뛰어다니고 있는데도 호흡이 불편하기는커녕 술이 잘만 넘어가고 있다. 알러지 핑계를 댈 거라면 토끼를 보자마자 현관문을 닫고 냉큼 도망쳐야 했다고, 하루키는 뒤늦게야 생각했다.

“그래서 토끼를 기르는 법은 아시나요?”

“실은 전혀 몰라! 보호자가 맡기고 가면서 설명하긴 했는데 나 그 정도로 암기력이 좋지 않거든. 먹이는 부족함 없이 받았으니 그 부분만은 다행이지?”

“나에게 메일 보낼 시간에 인터넷으로 조사하면 됐을 텐데요.”

“어차피 곧 연말이잖아. 얼굴 좀 보자 싶었지.”

“말은 청산유수네요.”

루이나 레이지가 알았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바람처럼 흘러나온 이름은 금세 흩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 이름이 가서 닿을 상대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세오도아도 알았고 하루키도 알았다. 따라서 식탁에 침묵이 감돈다. 이미 비어버린 접시와 와인잔들은 텅 빈 화제를 메꿀 만한 대체제가 되지 못했다. 하루키는 애꿎은 식탁만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얼마나 맡아줄 생각이에요?”

“일단은 일주일. 달리 맡아줄 이를 찾을 때까지, 라는 조건이거든.”

“잘하면 더 짧아질 수도 있겠군요.”

“다른 우선순위에 밀리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느긋하게 주현절까지는 있다 가지 그래? 세오도아의 말은 장식이나 허황을 몰라서 간소하고 하루키는 핸드폰 화면을 켜서 오늘 날짜를 확인한다. 12월 28일 저녁 9시 반. 새로운 해가 오기까지 앞으로 삼일 남짓 남은 셈이었다.

“험난할 것 같네요.”

“너무 비관하지 마.”

“누구 탓인데요.”

안경 너머로 노려본다. 세오도아 리들은 과장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릴 뿐이었다.


세오도아 리들과 아토 하루키는 이전까지 토끼를 한 번도 길러본 적이 없는 사람치고는 그럭저럭 임시 보호자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본래의 가족에게서는 자주라곤 할 수 없어도 가끔씩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키는 그 전화를 직접 받지는 않았으나 가끔 세오도아가 통화를 하는 너머로 낯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약간은 낮은 톤. 말의 속도가 빠른 것은 발화자의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일까. 세오도아는 상대방과 길게 통화하지 않아서 대화는 대체로 오 분 내로 끝났고 그 뒤에는 무성한 메모만이 남았다.

“환자분은 어떻대요?”

“아직 고비인가봐.”

“큰일이네요.”

“큰일이지.”

토끼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자며 보냈고 깨어있을 때에도 푹신한 쿠션에서 좀처럼 비키려 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걸까요. 글쎄, 물어볼까? 아뇨, 됐어요. 두 사람은 이틀간 별 영양가 없는 한담을 나누었고 서로 번갈아가며 토끼의 상태를 지켜보는 로테이션에도 익숙해졌다. 상태를 지켜본다고 해도 거실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쳐준 낮은 울타리가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물그릇이 텅 비어버리지는 않았는지, 토끼가 어거지로 가구 밑으로 파고들어가지는 않는지 살펴보는 정도였다. 토끼는 그 이상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정도로 활동적이지 않았다.

“너 그거 아니? 이제 곧 새해가 올 거야.”

어느 오후에 아토 하루키는 세오도아가 잠시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그렇게 속삭인다. 토끼는 눈을 조금 깜박이는가 싶더니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했다. 토끼의 하품을 정면으로 본 적이 없는 하루키는 그 모습에 잠깐 움찔했다가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너무 힘이 실리지 않도록 조심한 탓에 도리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끝이 까맣고 보송보송한 털 위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세오도아가 돌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가본 하루키의 눈에 모르는 사람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살짝 피로한 안색의 중년이 잿빛 코트를 걸친 채 세오도아의 뒤에 서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차가운 겨울 공기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세오도아는 현관에 반쯤 들어선 채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누다 하루키를 바라보았다.

“토끼, 데려가려 왔대.”

“아.”

토끼는 조심조심 케이지에 넣어졌고 낮은 울타리는 철거되었다. 먹이나 쿠션과 같은 자잘한 집들을 모두 챙겨든 이는 다소 버거워보였지만 두 사람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했다. 짧은 감사인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힌다. 하루키는 세오도아와 나란히 그를 배웅하던 자세 그대로 별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돌봐줄 사람을 찾은 건가요?”

“아니.”

“그럼 다 나아서 돌아오신 건가요?”

“아니.”

하루키는 고개를 돌린다.

세오도아 리들이 빙긋 웃었다.

“죽었대.”

12월 31일 오후 8시의 일이었다.


신년축하주라도 딸까? 시간이 열 한 시쯤 되었을 무렵에 세오도아가 그렇게 물었고 새해맞이 방송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루키는 홍차나 한 잔 타주시죠. 라고 대답했다. 다분히 품이 많이 드는 주문이었지만 세오도아는 딱히 싫은 티도 내지 않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도착한 홍차는 머그컵에 담긴 티백이었다.

“혹시 찻잔의 온도까지 신경 쓰는 타입?”

“세오도아 씨에게 그걸 기대하는 게 가혹하다는 건 알아요.”

“너무하네.”

다과는 없다. 따지고 본다면 마른 입이 안주거리였다. TV 속에서는 정장을 갖춰 입은 리포터가 상기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했다. 옆에는 무슨 연예인이 있는 것 같은데 이탈리아 연예계에 무지한 하루키는 그가 굉장히 쾌활한 무드 메이커라는 것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카메라가 시점을 바꿔 광장에 가득한 사람들을 비춘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알았어요?”

“뭘?”

“그 사람이 오래 못 버틸 거라는 거.”

세오도아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중계화면 하단에 표시되어있던 타이머가 요란스레 깜빡이며 이제 새해까지 15분 정도가 남았음을 알렸다. 하루키는 그 순간에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런 맛도 향도 형체도 없으나 분명히 사람들의 피부 위를 쓸고 지나가는 것. 그런데도 자신들에게는 주름 하나 선사하지 못하는 무형의 개념에 대해서.

“노인이었어.”

“…병이었나요?”

“응. 아마도 노환이 원인일거야.”

“…….”

“내가 너무 매정해보여?”

“전 루이가 숨을 거둘 때 곁에 있었어요.”

이제 새해까지 십 분이다.

“나름대로 생각했었어요.”

“뭘?”

“왜 나는 어렸을 때 동물 털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던 걸까.”

“하루키 스스로 네 몸이 약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죠.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인간보다 오래 사는 동물은 없어서 그랬을지도 몰라요.”

“다가올 죽음을 보는 게 두려웠다?”

“그런 것도 있고.”

하루키는 손끝을 매만진다. 테이블에 놓인 머그컵 안에서는 아직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데 그 둥근 손잡이가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마치 어떤 별과 별 사이의 거리처럼.

“아끼는 존재를 잃는 건 괴롭잖아요. 무의식적으로 이 이상은 싫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시적이네.”

“하하.”

“지금은 어때?”

화면 속의 사람들이 기대와 설레임을 감추지 못하고 인터뷰에 응한다. 어느 가게에서는 사람들이 새해 카운트다운 방송을 보며 술잔을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다섯 살배기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커다란 어른의 어깨에 목마를 탄 채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다가올 새로운 한 해를 고대하며 환영할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지금은 괜찮아?”

그리고 어떤 이는 영원히 과거에 남는다. 넘어간 페이지의 글자들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듯이 그대로 지나간 흐름 속에 고정되어 하나의 마침표가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몇 명이고 몇 명이고 모여서 과거에 파묻히고 굳어지다 보면 과거는 하나의 거대한 점묘화가 되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오래된 흔적들.

“전혀요. 그냥 견딜 뿐이죠.”

“장하네.”

“세오도아 씨도요.”

“낯간지럽게.”

“오래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 법이에요.”

조금, 이나 꽤, 같은 말로는 그 긴 시간을 척도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온 이는 하루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일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비슷한 정도로는 오래 살아온 하루키는 드디어 팔을 움직여 머그컵 속의 홍차를 마실 수 있었다. 적당한 수준으로 식은 찻물이 천천히 입 안을 데웠다.

“얼른 죽고 싶네.”

“저도요.”

카운트다운이 남은 시간 10초를 가리킨다. 닫아놓은 창문 너머에서도 카운트다운을 헤아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분명 많은 것에 무뎌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런 순간을 맞이하면 괜히 마음이 고무된다. 이것도 자신이 아직 인간이라는 증거일까. 아니면 단순히 지난 시간동안 학습된 경험이 반복되고 있을 뿐인 걸까. 루이가 들었더라면 당연히 전자 아니냐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리라. 하루키는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0을 가리켰다.


같이 산책할래?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하루키는 대강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고요했으나 지난밤에 일었던 흥분과 설렘을 전부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특히 주택과 가까운 인도에 떨어진 오래된 가구들의 파편이 적나라했다. 나무 의자, 장식장, 테이블, 체스판…. 나폴리에서 이런 새해맞이 문화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하루키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어딘가 먼 골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멋진 풍습이지?”

“LDL에서도 이런 걸 했나요?”

“적어도 나랑 츠바이크는 안 했고 애니는 이런 거 아예 신경 안 썼어. 사네미츠나 레이지는 그런 걸 하기에는 대담함이 부족했지. 해보고 싶어?”

“아뇨. 만에 하나 누굴 다치게 하면 어쩌나 걱정되서요.”

“하하.”

그대로 두 사람은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금기 섞인 바람과 함께 탁 트인 항구의 모습이 드러났다. 배들은 항구를 따라 나란히 정박되어 있었고 오가는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부로 보이는 몇몇은 배 위에 앉아 무언가를 손질하고 있었다.

“무서웠어요?”

따라서 질문은 바닷바람에 금세 휘말려 멀어진다. 세오도아는 겉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짧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루키는 그걸 긍정의 의미로 해석하기로 했다.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가 절대적인 이별을 무던히 넘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결국 본인만이 알 일이니까. 하루키는 코트 주머니에 들어있던 사탕 반절을 세오도아에게 건넸다. 붉은 눈의 이탈리아인이 그걸 건네받고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택시기사에게서 받았어요.”

“담배 피우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야?”

“새해가 왔는데 좋은 일 하나 쯤 있으면 좋잖아요.”

“좋은 일이라.”

사탕껍질을 까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세오도아가 약간 뭉개진 투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사과 맛이잖아.”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익숙한 코트를 발견했다. 회색 코트를 입은 이는 차도에 세워진 차량에 큼직한 종이박스들을 옮겨 담고 있었다. 둘은 처음에 그 사람을 모르는 척 스쳐지나가려 했지만, 우연찮게도 박스를 다 담고 허리를 피던 이와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약간은 창백하고 피곤한 기색이 만연한 주름진 얼굴. 하루키는 그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탈리아어로 위로의 말을 어떻게 건네야하나 생각했으나 그건 곧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Felice anno nuovo.”

주름진 눈가가 두 사람을 바라본다. 하루키와 세오도아는 아주 잠깐 서로를 곁눈질했다가, 이내 나란히 입을 열었다.

“Felice anno nuovo.”

“Buon anno.”

바야흐로 새해였다.

* Felice anno nuovo = Buon anno : 이탈리아의 새해 인삿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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