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에게 바꾸는 것도 금지야」
아토 하루키+이소이 부자+오토와 루이
-세포신곡 전력 60분 「해몰이」
-세포신곡 DLC 플레이 이후의 감상을 추천합니다.
아토 하루키는 어느 쪽인가 하면 새해 해돋이에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차라리 아침에 새로 산 홍차를 우려서 마시며 새해의 햇살을 보는 것이라면 모를까, 굳이 밤을 새가며 해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는 않아했다는 뜻이다. 그건 옛날부터 굳어진 버릇 같은 것이었는데, 오토와 가문도 아토 일가도 12월 31일 자정에 인근 신사에서 오미쿠지를 뽑는 것으로 새해맞이를 대신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해돋이를 제대로 챙겨보는건 이번이 처음이야."
"호오, 그건 영광이네요."
12월 31일 오후 11시 30분. 새해가 바로 한 발짝 다가온 상태에서 소소한 담소가 오간다. 아토 하루키의 집은 최신식이지만 겨울의 한기가 한참 강할 시기이기에 아담한 방에는 코타츠가 펼쳐진 상태였다. 거기에 꼬물꼬물 들어가 앉은 이소이 레이지가 정성스럽게 귤껍질을 까선 제 오른편의 아버지에게 건네준다. 마찬가지로 코타츠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던 사네미츠가 그걸 받고는 흘끔흘끔 눈치를 보았다.
"하, 하루키, 괜찮으면 이거…."
"레이지가 당신에게 준거잖아. 제대로 먹으라고."
사네미츠가 귤을 한 입에 먹으려고 애쓰는 사이 이번에도 서툴게 귤껍질을 벗겨낸 이소이 레이지가 깨끗한 귤을 아토 하루키에게 건넨다. 하루키는 그걸 받아들고는 반으로 갈라 한쪽을 레이지에게 돌려주고 귤 하나를 떼어내어 입에 밀어넣었다. 겨울 귤의 달큰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그럼 이번에 같이 해돋이 보러 가기로 한 건 좀 무리수였나요?"
"아니, 괜찮아. 일 사정 상 짧게 자는 정도야 할 수 있고."
"인근에 신사가 있다고 하셨죠?"
"응. 거기서 신년 뽑기도 할 수 있으니까 미리 가서 대기하면 될 거야."
원래는 매년 루이랑 12월 31일 자정에서 1월 1일로 넘어갈 때 뽑았지만 말야. 하루키가 덧붙인 말에 사네미츠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이번 새해에 아토 하루키와 함께 새해 일출을 보면 어떨까 발언한 사람치고는 퍽이나 소심한 반응이었다. 하루키는 그쪽을 향해 시선을 조금 쏘아보내고는 남은 귤을 하나씩 떼어냈다.
"일어나서 준비도 해야하고,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새벽 4시 반에는 일어나야 할텐데 레이지는 괜찮겠어?"
"전 괜찮아요. 거기까지는 차로 가나요?"
"응. 차로 가면 30분 정도야. 짐은 많이 챙기지마, 따뜻하게 가는 걸로도 바쁠 테니까."
"그, 하루키."
이것저것 조율하려던 하루키의 목소리 사이로 쭈뼛거리는 목소리가 끼어든다. 하루키는 귤을 하나 입에 머금은 상태로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귤을 어찌어찌 다 먹었는지 이미 손이 비어버린 사네미츠가 손끝을 초조하게 문지르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대흉 나오면 바꿔줄까?"
"…아직 뽑지도 않았거든. 가서 얘기해."
적당한 볼륨으로 틀어놓은 TV 속에서는 1월 1일의 방문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이어진다. 하루키는 남은 귤을 모두 먹어버리고는 화면에 눈부시게 나타나는 숫자를 응시했다.
3, 2, 1.
*
"하아, 춥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새벽 5시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하다. 코트 안쪽에 옷을 두 겹이나 껴입다못해 안쪽에 핫팩까지 붙여놓은 상태인데도 역시 숨결을 통해 한기가 스며들었다. 하루키는 든든히 감기다못해 거의 꽉 묶인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두께로 새해 해돋이를 볼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각자의 입김을 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가 꽤 많네요."
"이 근방의 신사는 몇 군데 없으니까. 한적한 해돋이는 어렵겠네."
"괜찮아요.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편이 여러모로 즐겁잖아요."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은 역시나 길고 멀다. 하지만 신사 쪽에서 미리 준비한 것인지 일정한 간격의 나뭇가지마다 전등을 설치해놓은 덕에 발치의 계단을 제대로 못 보고 굴러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하루키는 뒤쪽의 두 사람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한 개씩 한 개씩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오고가는 대화는 주로 레이지와 하루키의 것이고, 사네미츠의 말은 레이지가 살짝 북돋워주거나 하루키가 딱 잘라 버리는 식이었다.
힘을 들여 올라간 신사 마당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였다. 별 생각없이 주변을 쓱 둘러보던 하루키는 문득 사람들 저편에서 익숙한 녹색 머리카락이 보이는걸 알아차렸다. 반대편에서도 이쪽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다가오는 발걸음이 올곧다. 그의 성정이 드러나는 걸음걸이였다.
"하루키."
"루이, 어쩐 일이야? 너희 집은 해돋이를 안 보잖아."
"네가 해돋이를 본다기에 기다리고 있었다."
"엑, 진짜로?"
"당연히 아니지. 가끔은 해돋이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온 거다. 너는 가족들이랑 같이 온 거겠지?"
"응."
"그렇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라. 내일은 바로 출근이니까."
"미리 새해인사를 하는 편이 좋을까?"
"아니, 그런 아부는 제대로 직장에서 하도록."
짧은 웃음소리가 오가고 대화가 끝난다. 곧장 두 사람이 있던 자리로 돌아온 하루키는 어떤 위화감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소이 레이지가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둘이었던 사람이 반절로 줄어버려서야, 눈치채지 못하려고 해도 어렵다.
"그 민달팽이는 어디로 갔어?"
"손 씻는 곳이 어쩌니 하면서 어디로 가버리셨어요."
"참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설사 한다 해도 다같이 가야지 왜 개인행동을 하는거람."
"봐주세요. 아버지는 오토와 씨가 약점인걸요."
"마주서서 극복하라고 해. 일전에는 제대로 이야기도 나눴잖아."
"옷을 식은땀으로 흠뻑 적셔가면서 말이죠."
입술을 비죽이고, 하루키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뺨에 와닿는 공기는 차갑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떠한 비중도 가지지 못하고 주변을 흘러간다. 해돋이를 혼자서 볼 셈인가. 무의식중에 새어나온 목소리는 퍽 어린아이의 투정을 닮아있었다.
"같이 찾아보실래요?"
"음, 아니. 내가 가볼게. 찾으면 전화할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레이지."
"넵. 너무 매몰차게 대하진 말아주세요."
"선처할게."
하지만 사네미츠를 찾는데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금 전 헤어졌던 사람이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와 루이와 이소이 사네미츠. 어지간해서는 볼 수 없는 그 조합에 하루키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가로등이 선 자리 근처, 인기척이 드문 구석에서 이쪽을 등지는 상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다가가서 들을까 아니면 모른 척 지나갈까 고민하던 하루키는 자신이 뭐라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사네미츠 쪽에서 먼저 몸을 돌리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굳혔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사네미츠의 시선이 문득 하루키의 옷자락을 타고 올랐다가 파득 튀어올랐다.
"……."
"…………."
"…새해 인사라도 했어요?"
"응? 아, 아니. 조금은 했지만."
"조금은, 이 뭔데요. 하면 한 거고 안 하면 안 하거지."
"음, 하하. 그렇지…."
"설마 사과한건 아니죠?"
푹, 하고 바늘로 찔린 것마냥 사네미츠의 허리가 움찔 떨린다. 하루키는 긴 한숨을 내쉬곤 (하얀 입김이 목도리 사이로 사정없이 흘러나와 부스러졌다) 이소이 사네미츠의 어깨를 세게 후려쳤다.
"멍청이."
"신랄하네…."
"나도 내 생각을 가진 성인이에요. 스스로 생각해서 선택한 걸 후회하거나 섭섭하게 여길 정도로 속 좁지 않아요."
"…그렇지."
"당신은 후회해요?"
"응?"
반문이 돌아오지만 하루키는 답하지 않고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졸림과 성가심을 물리치고 일부러 새해 해돋이를 챙기러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족이고 사이가 단란하게 마련이었기에 주변을 오가는 목소리는 온화하고 생기가 가득하다. 그 사이에서 오랫동안 침묵하던 사네미츠가 살짝 시선을 떨구는가 싶더니,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자격이 있을 리 없잖아."
"후회하냐 안 하느냐를 물었어요. 자격이 있니 없니가 아니라."
"……안 해."
"그럼 됐어요."
신사에서는 사람들의 몸을 덥혀주기 위해 도수가 낮은 감주나 따뜻한 커피 따위를 나눠주고 있다. 하루키는 어떤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종이컵을 나눠주는 모습을 바라보다 사네미츠와 시선을 맞췄다. 지독할 정도로 못났고 그럼에도 여전히 하루키의 혈육인 사람.
"레이지가 기다려요.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 해돋이를 볼 건 아니겠죠."
"…하루키."
"왜요."
"……………고맙다."
"……그래요."
아버지와 자식 사이 치고는 퍽 서걱서걱한 대화지만, 두 사람은 그 이상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레이지가 있던 자리로 돌아와 함께 새해 해돋이를 보았다. 둥글고 붉은 열기 덩어리가 산맥 너머로 처음 고개를 내미는 것은 과연 인상깊은 장면이었으나 그 광경을 보았을 무렵에 세 사람의 귓불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세 사람은 날씨에 관한 농담 따위를 나누고는 오미쿠지를 뽑았고, 보란듯이 사네미츠가 「대흉」 을 뽑았다.
물론 하루키는 바꿔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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