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NAITE
아토 하루키 중심 논커플링 재록본. 세포신곡 온리전 「지고천 연구소 온라인 입교설명회」 참가 회지의 유료 발행 게시글입니다. (※24.10.09 무료로 전환)
인포 목업 제작 썬칩님(@sunchip_reiji)
※실물 회지와 일부 편집의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동일합니다※
※특정 단편을 읽고 싶으신 경우 결제 후 단편 제목을 검색하시는걸 추천합니다※
※샘플 페이지는 아래 주소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https://butterflybox.postype.com/post/10718867
※본 회지는 2024년 10월 9일 이후 무료화되었습니다※
!Attention!
※본 회지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포함되어있습니다※
① 세포신곡-Cell of Emperio-의 S ~ S+ 엔딩 스포일러.
② 등장 캐릭터들의 엔딩 이후 행적 및 과거 행적의 날조.
③ 자체적으로 생각한 동인 설정과 타임라인.
④ 등장 캐릭터와 인간관계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위 사항을 염두하고 페이지를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1. 10. 09
세포신곡-Cell of Emperio- 글 연성 재록본.
Written By Mikyel. (@essqy)
목차
1. INTRO
2. 아토 하루키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상냥한 세계
3. 그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지 말아줘
4. 시나노 에이지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지 않는다
5. 가족 사진을 찍지 않을래요?
6. 쿠마자키 와플 메이커 절찬 운영중
7. 제 이름을 남기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바람이라
8. 오랜만이야 웃어줄 순 없겠네 유감일까
9. 찬 겨울에 북서풍 불어올지라도
10. 물은 피보다 진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11. 아이바 이부키 교수님 현재 개인면담중
12. OUTRO
〔후기〕
INTRO
그런 감각이 있다. 한순간의 실수로 아끼던 유리컵을 바닥에 떨어뜨릴 때 찾아오는 아찔한 기분. 후회해도 때는 늦어서 유리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지고 날카로운 소리가 심장에 박힌다. 그건 박살난 조각을 치운다던가, 깨진 물건을 다시 구입하는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가슴에 깊이 박혀드는 참담함과 슬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뽑아낼 방법도 없어서 그 상처에서 배어나온 무언가가 하염없이 흘러내리게 마련이었다.
차량의 문이 닫힌다. 아토 하루키는 미래를 직감한다. 시동이 걸리고 차량이 출발하는 데에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기에 답지 않은 고성을 내며 그 뒤를 쫓아갔으나, 인간의 다리로 자동차를 뒤쫓아 붙잡을 순 없었다. 차량이 멀어진다. 횡단보도나 신호등에 한 번 걸리지 않고 빠르게, 빠르게 하나의 점이 된다. 망연해진 이를 한 번 돌아보는 일도 없이.
아아. 죽는다.
저 사람은 죽어버릴 거야.
그런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달려오는 또 다른 차를 피해 물러난 하루키는 그 이상 제 힘으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도로에는 더 이상 인기척도 없고 그 흔한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을 부정할 수 없어 한 걸음 물러서있는 것 같았다.
“가지 말아줘, 아버지…!”
유리컵은 깨졌다. 아니, 깨질 것이다.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형체를 잃을 것이다. 몇 시간 뒤의 미래에서 산산조각 날 파편이 마음을 찌른다. 그걸 막을 방법이 없어서 아토 하루키는 울었다.
아토 하루키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상냥한 세계
깼다.
천장이 낯설다. 왠지 멍한 머리로 숨을 들이마시다가, 내쉰다. 바깥에선 햇빛이 느긋하게 들어오고 어디선가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주말이던가. 시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떠오른 생각을 더듬다가, 갑자기 몰려오는 두통에 몸을 웅크린다. 뇌를 직접 주무르는 것 같은 압박과 어쩔 도리 없는 두근거림. 틀림없다. 이건, 이건.
“레이 형~. 아직도 자고 있어?”
덜커덩,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쪽을 보면, 생전 처음 보는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가 있었다. 나이는 얼추 10살 정도일까.
“누구?”
이것저것 물어봐야할 것이 많다는 기분이 드는데 입에서는 하나의 의문 밖에 나오지 않는다. 내 질문을 들은 아이는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통탕통탕 복도를 걸어가 버렸다. 열린 문 사이로 ‘하루 형~ 레이 형이 이상해~.’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에는 복도가 있었지. 왠지 엄청나게 당연한 일을, 이제 와서 깨달은 기분이 된다.
“레이 형! 그럴 줄 알고 해장 요리 해놨으니까 얼른 나오래.”
다시금 토다닥, 하는 발소리와 함께 돌아온 아이가 침대까지 다가온다. 다가온 걸로도 모자라 이불을 슥슥 가져가버린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체온으로 잘 데워진 이불이 사라지는 것은 괴롭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그렇다, 이건 숙취다) 엉망진창인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만둬, 레이지….”
주르륵 흘러나온 말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주워 담을 시간도 없었다.
“그만은 무슨. 빨리 일어나! 안 그럼 오늘부터 술꾼 형이라고 부를 거야!”
레이지는 가차 없다. 어릴 때는 좀 더 귀여웠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이럴 때 보면 하루 형이랑 레이지가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게 실감난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하루 형이랑 피가 이어진 (?) 형제니까, 피장파장인 셈이지만.
“알았어, 알았다고.”
별 수 없으니까 침대에서 일어난다. 보이는 풍경은 책상과 책장, 창문과 시계, 쓰레기통 등이 있는 흔한 방 안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이걸 현대 일본인의 생활양식 샘플로 쓸까’라고 결정해도 문제없을 정도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레이지가 내 양쪽 팔을 잡고 앞으로 잡아당겼다.
“넋 놓지 말고 일어나, 일어나! 나 배고파!”
“잠깐만, 잠깐만, 그렇게 잡아당기면…!”
당연하게도, 침대에서 바닥으로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오셨습니까, 주정꾼 아저씨.”
“그렇게 부르지 마십쇼….”
“왠 존대. 아직 술기운이 덜 빠졌나봐?”
레이 형 때문에 넘어졌잖아! 아니, 그건 어딜 봐도 쌍방과실이지. 시시한 얘기를 나누며 부엌으로 나와 보면, 평소와 같은 하루키 씨 (가 아니라) 형이 있다. 이 갈색과 흑발 집안에서 혼자 머리카락이 금빛인 것은 갈수록 아버지를 쏙 빼닮아간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질색팔색을 하던 다음 날의 일…이었다는 기분이 든다. 그때 아버지는 어떤 얼굴이었더라.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역시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식사가 차려진 자리에 앉으면, 하루키 형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자, 진하게 끓인 바지락 된장국. 쭉 들이 키고 정신 차려.”
“하아,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느지막하게 시작된 아침식사는 그렇게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그릇에 젓가락이 부딪치는 소리, 레이지가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소리, 내가 숙취 때문에 앓는 소리, 하루키 형이 웃으면서 답해주는 소리 등등으로 가득 차 있었던 탓이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주말의 아침식사 풍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벽에 걸린 사진에 눈이 닿는다. 하나는 눈에 익숙한 남자와 조금은 낯선 여자가 각각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푸른 정원에 함께 서있는 사진.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두 사람과 우리 셋이 함께 찍힌 사진이다. 그걸 「가족사진」이라고 인식하고 있자니 눈앞에서 누군가의 손이 흔들거렸다.
“왜 그리 넋을 놓고 있어?”
“…….”
손의 주인을 본다. 하루키 형이 이쪽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네미츠 씨는?”
“웬 편집자 말투? 어머니랑 아버지는 이틀 전에 이탈리아로 여행 갔잖아.”
아, 그랬지. 그러고 보면 공항으로 가는 두 사람을 셋이서 배웅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 이탈리아 남부 지역 여행 코스였지. 그거 때문에 나랑 하루키 형이 차곡차곡 돈을 모았었으니까 확실하다. 레이지는 우리가 볼 테니까 두 분이서 신혼 기분으로 다녀오세요. 어머니에게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하루키 형도 떠올랐다.
“두 사람 엄청 즐겁게 지내는 것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랑 아빠한테서 이탈리아 사진 왔어?”
“아직. 나중에 사진 도착하면 보여줄게.”
“응!”
시계 분침이 45분을 가리킨다. 국에 담긴 바지락 된장국은 얼마 남지 않아 잘 익은 조갯살이 그대로 보였다. 젓가락 끝에는 하얀 밥알이 붙어있다. 식탁보의 무늬는 덩굴포도 무늬. 벽에 걸린 액자는 진갈색. 우리 가족의 성은.
“레이?”
아, 젠장. 또 넋이 나가있었다. 정신차려야하는데 왜 이러지. 별 거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레이?! 뭐야, 너 어디 아파?!”
“레이 형!”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말하려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진짜, 사람 놀라게 하지 마. 병원 응급실 가야하는 줄 알았다고.”
“미안….”
“레이 형,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너 오늘 친구랑 숙제한다고 했잖아. 약속시간 아냐? 그렇게 말하면 레이지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나와 하루키 형을 번갈아 쳐다본다. 아무래도 내가 어지간히도 걱정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서 아직 한참 어린 동생에게 걱정을 끼친다니 언어도단이다. 나는 수심 가득한 동생을 몇 번이고 안심시킨 다음, 손수 짐을 챙겨 배웅해주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지만 확실히 활기찬 목소리가 들린 뒤 현관문이 닫혔다. 찰카닥.
“자, 그럼 방에서 좀 더 쉴래?”
“설거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됐네요. 지금도 한창 숙취에 시달리는 얼굴이거든?”
그냥 쉬고 있어. 정 심심하면 거실에서 TV라도 켜서 보고 있던가. 하루키 형은 그렇게 말하며 내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는 부엌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우리가 먹은 그릇들을 바로 씻어내고 있는 모양이다. 가서 접시 닦는 것이라도 도와줄까 싶었지만, 확실히 오늘은 상태가 좀 이상하다. 정신이 흐트러진다고 해야 할까, 꽉 맞물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뭔가가 재구성되는 기분.
가만히 서있다간 주저앉을 것 같아 거실 소파로 걸음을 옮긴다. 깔끔하지만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인테리어가 한 눈에 들어왔다. TV 리모컨은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위치에 있었지만 킬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에 초등학교 저학년용의 공룡 무늬 노트가 눈에 들어와, 그걸 펼쳐보기로 했다.
어린아이다운 글자를 읽으면서 페이지를 넘기면, 중간 페이지에 적힌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숙제 / 가족 이름 한자로 쓰기!」
아빠 : 이소이 미노루/磯井 実
엄마 : 이소이 라이/磯井 來
큰형 : 이소이 하루키/磯井 晴己
작은형 : 이소이 키레이/磯井 樹礼
나 : 이소이 레이지/磯井 麗慈
아, 그래서 나도 레이였나.
묘한 감각으로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면, 선생님이 붉은 펜으로 첨삭한 말이 보인다.
오늘도 열심히 했구나. 매일매일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선생님도 응원하겠습니다.
“이런, 아무리 형제라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야지.”
앗 하는 사이 노트를 뺏겼다. 시선을 돌려보면 어느새 설거지를 끝내고 온 모양인지 하루키 형이 있다.
“진짜 빠르네.”
“양이 얼마 안 되니까. 그보다 앉아서 쉬라니까.”
“아, 응.”
갈색 소파는 너무 푹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다. 나를 따르듯이 자리에 앉은 하루키 형이 기지개를 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일 나가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물어보면 맡은 의뢰도 끝난 참이고 루이가 푹 쉬어도 된다고 했어,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5초 정도의 간격을 두고서야 ‘오토와 루이 씨를 말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되었다.
“루이 씨, 건강한 모양이네요.”
“너 또 존대 쓴다. 오늘따라 왜 그래?”
“음, 어라.”
“이상한 꿈이라도 꿨어?”
“…잘 모르겠어.”
하루키 형이 이쪽을 본다. 그 시선은 예상했던 것보다 따스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레이지는 걱정할 것 없어. 언제나 활기찬 아이인걸. 오늘 만난다는 친구도 아마 카렌이겠지.”
“카렌이라면, 쿠마자키 카렌?”
“그래. 너도 몇 번 얼굴을 봐서 알잖아? 어머니 친구인 스미레 씨의 딸.”
“어.”
“어, 라니.”
너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냐? 그런 걱정을 받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스미레 씨는. 스미레 라는 사람은, 분명 쿠마자키 리쿠 라는 사람의 아내분이시고, 카렌이라는 레이지 친구의 어머니고. 음? 뭔가 달랐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진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술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어디 부딪치기라도 했나. 진지하게 여기저기를 짚어봤지만 혹도 상처자국도 없었다.
“정말로 어디 아픈 거 아냐?”
“완전히 쌩쌩해.”
“정말로?”
“정말로.”
“그럼 대청소라도 할까.”
“일련의 사고방식을 전혀 모르겠는데?”
“어디 아픈 것도 아니라며? 청소하다보면 머리도 정리될 거야.”
자, 일어나! 하고 재촉하는 하루키 형에게 등이 떠밀린다.
설마 진심인가?
진심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와! 레이 형이 소파에 패잔병처럼 쓰러져 있어!”
“하다못해 승전의 흔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냐고.”
“어서 와, 레이 군. 숙제는 잘 하고 왔어?”
아, 내가 레이고 레이지는 레이 군인가. 하긴 「키」는 애칭과 조합하기 어렵다.
“다 끝났어! 있잖아, 오는 길에 선생님들 봤다?”
“선생님들?”
“쟈부치 선생님이랑 야나기 선생님! 손 꼭 잡고 있었어!”
“그렇구나. 하지만 그런 얘기 학교에서 대놓고 하면 안 된다? 곤란해하실거야.”
“절대 말 안 할게!”
“저녁은 먹었어?”
“아직! 그치만 카렌이랑 같이 핫도그 먹어서 배불러.”
레이지는 웃으며 말하고는 후다닥 세면실로 들어갔다. 돌아오자마자 손을 씻으러 들어가는 건 좋은 습관이다.
“그럼 저녁 준비까지는 여유가 좀 있나. 고생했어, 레이지. 좀 쉬어.”
“하루 형.”
“응?”
“아토 하루키라는 이름 알아?”
시계바늘이 느긋하게 째깍거린다. 세면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요란하지 않지만, 나름의 소음을 자아냈다. 석양이 새어 들어오는 바깥에서는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났다.
“모르겠는데. 레이가 아는 사람이야?”
“응.”
시계 소리가 멈춘다. 물소리도 멈췄다. 아이들은 침묵했다.
하루 형은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타이르듯이 말한다.
“아토 하루키라는 사람은 없어, 레이.”
“미안. 아니, 미안함다. 나도 잠자코 있으면 될 텐데. 정말로.”
“레이.”
“그렇지만 머리가 좋지 못한 나라도 눈치 챌 건 눈치 채요.”
“괜찮아.”
“괜찮지 않아. 이건 결국 내가 보는 환상인거지? 마지막 순간에 이런 뻔뻔한 짓을 하다니… 진짜 웃음 밖에 안 나오네요.”
“…….”
하루키 형은, 아니, 하루키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표정은 마치 마지막까지 잘 쌓아올렸던 도미노를 한 번에 무너뜨려버린 인간의 얼굴 같다. 그런 것을 자주 본 적은 아니지만 그럴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나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테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떨어뜨리면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났다.
“아냐, 네가 아니야.”
“아니라니.”
“이건 「내」가 보여주고 있는 거야.”
고개를 든다. 눈앞의 사람은.
“하다못해 네게 평온함만이라도 주고 싶었어.”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얼굴로, 집안 가득한 석양빛을 받고 있었다.
“…언제?”
“같이 종루로 향하던 때. 그때 핏방울이 옮겨갔어.”
“역시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구나, 당신…!”
“남 말할 처지야?”
한 걸음, 상대방이 가까워진다. 부지불식간에 뺨에 닿은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부탁이야. 이대로 속아주지 않을래?”
“…….”
“오래 걸리지 않아. 아니, 이건 영원이 될 수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현실은 아니죠.”
이번에는 그가 침묵했다. 떨리는 손을 붙잡으면 담담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평온한 꿈으로는 안 되는 거야?”
“안됨다. 저는 거기서 나눈 약속이 있거든요. 역량부족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그렇다고 당신 탓도 아니죠.”
석양은 붉다. 마치 핏빛처럼.
“즐거웠어요. 정말로. 하지만 나는 내가 여지껏 쌓아올린 「이소이 레이지」가 좋슴다.”
설령 이루고자 했던 약속이 실패로 마무리 되었다고 해도. 돌무더기와 화염 속에서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도, 당신의 절규를 아득하게 들으며 죽음의 공포에 발밑부터 잠겨가게 되더라도.
─무사히 돌아온다면, 당신을.
그 약속을 나누었던 순간을 부드러운 꿈 너머로 파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는 너의 의지를 존중할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이소이 레이지가 계속해서 10살인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전부 믿었을지도 몰라요.”
“어쩔 수 없지. 나는 레이지가 자란 모습을 모르니까.”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하루키 씨는 이마를 맞대왔다.
“부디 이 꿈이, 조금이나마 네 고통을”
깼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돌과 철근 파편에 짓눌리는 상체가 지끈거렸다. 하체에는 이미 감각이 없고, 입 안의 비린내는 감돈다기보다 넘쳐흐른다고 표현해야 할 지경이었다. 손은… 아, 이거 글렀다. 애초에 척추가 무사한지도 알 수 없다. 희미하게 남은 의식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아서 금방이라도 훅 꺼질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오래 있었으면, 그걸로 끝이었을지도.
정말이지. 딱 한 걸음 정도 남은 지점이었는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울음보다는 웃음이 나온다. 극한의 공포를 앞에 둔 인간은 그만 미쳐버린다고 하는데 그런 걸까. 그래도 후회는 들지 않으니 그걸로 됐다고 하자. 사실 모두 함께 돌아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래서 사네미츠 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아아, 아니다. 이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도를 넘어서 유쾌해졌던 마음이 단숨에 뒤집혀버리고 만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추해지고 만다. 그 꿈을 뿌리치고 나온 의미를 잃고 만다. 그러니까 생각하면 안 된다. 생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도 무의식은 미친듯이 타들어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결국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도와줘, 죽고 싶지 않아.
…멀리, 세 번 빛나는 무언가를 본 기분이 들었다.
그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지 말아줘
아토 하루키는 탐정이다.
그게 뭐야, 외국 소설을 너무 읽은 거 아니야?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하루키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게 자신의 직업을 솔직히 밝혔다가 살짝 마음에 금이 갔던 경험이 있다. 이후 적당한 중소회사에서 사무직을 맡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융통성을 갖추게 되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할지언정 직업 자체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가 회사의 영업소장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게 큰 지분을 차지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탐정이란 무릇 조사하고 추론하여 안개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직업일지니, 천성적으로 몸이 병약하여 인간 관찰이 취미처럼 되어버린 아토 하루키에게는 일반적인 직업보다는 이쪽이 성미에 맞았던 것이다. 현대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일과 적성을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물론 탐정이란 직업에도 디메리트는 있다. 첫째로 근무 시간이 제법 불규칙해질 때가 있고, 둘째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직접 발품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세 번째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친구 오토와 루이의 마음씀씀이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위협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번 의뢰에서 몸싸움이 벌어지진 않을 겁니다.”
영업소장의 오토와 루이는 기본적으로 직원들에게 존대를 사용한다. 그건 중학교 시절부터 이어진 친우가 상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키가 이번 의뢰에 쓰일 위장 신분증을 받아들어 살펴보면 프리랜서 강사라는 간단한 명함 타이틀 아래 「오오하라 칸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뒤집어보면 제대로 약력도 적혀있었다. 물론 전부 날조지만.
“하츠기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생, 미미즈 학원의 영어 과목 시간강사…. 어째 이번은 복잡하네요. 그냥 시간강사라고 해도 좋지 않은가요?”
“의뢰인의 부탁입니다. 자신과 같은 학교 같은 학과로 위장하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얘기를 맞춰주겠다는군요.”
“그래주면 저야 편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더.”
달칵, 하고 오토와 루이가 무언가를 꺼내든다.
한 박자 늦게 그 물건을 본 하루키의 몸이 얼어붙었다.
“받아주세요.”
“…….”
“이건 의뢰인이 사전에 부탁한.”
“의뢰인의 물건이라고 먼저 말해주세요!”
최대한 소리 죽여 일갈한 하루키가 긴 한숨을 내쉰다. 마침 바깥에서 야채를 실은 트럭이 천연덕스럽게 지나갔기에 망정이지 조용한 사무실에 오해가 퍼져나갔다면 대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잠시 혼란에 빠진 마음을 진정시킨 하루키는 자신 앞에 내밀어진 반지를 살펴보았다. 살짝 얇은 감이 있는 금빛 반지는 별도의 장식이 없어 심플했지만, 심플한 만큼 상당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설마 이거 진짜 결혼반지는 아니겠지. 하루키가 반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동안 루이가 말을 이었다.
“반지는 예전에 의뢰인이 썼던 커플링 중 하나라더군요. 지금은 결혼한 몸이기에 얘기하는 모습이 잘못 목격되어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니,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동안에는 자기와 같은 기혼자로 위장해 달라는 게 그쪽의 부탁입니다.”
“결혼하고서도 예전 커플링을 가지고 있다니…. 터무니없는 의뢰인이라는 예감밖에 안 드네요.”
“대신 이번 의뢰는 의뢰인이 품은 심증이 사실인지 짚어주기만 하면 되니까 간단하게 끝날 테지요.”
“그건 환영할만한 일이지만요.”
별 수 없다. 이런 데에서 탐정업의 또 다른 단점이 드러난다. 의뢰를 받는 입장에서 의뢰인의 요청을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로 거절하기 어렵다는, 이른바 갑을관계의 설움이라는 것이다.
“의뢰기간은 제가 볼 때 길어봤자 일주일 정도입니다. 그동안은 참아주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죠.”
여기서 고집을 부려봤자 중간의 오토와 루이가 난감해질 뿐이다. 하루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반지 케이스를 받아들었다. 몇 년 동안 탐정이랍시고 신분을 위장하며 돌아다녔는데 이제 와서 반지 하나 낀다고 뭐가 달라지겠냐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루이와 하루키의 예상대로 의뢰는 6일째에서 훌륭하게 마무리되었다. 의뢰인도 조사 결과에 매우 만족해,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서면상의 자료를 제출하고 의뢰비의 잔금을 계산하는 걸로 이야기가 끝난 참이었다.
《그런가요. 별일 없이 끝났다면 다행입니다.》
“되려 너무 평온하게 끝나서 기분이 이상하지만요.”
《당신은 평온한 마무리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들으면 제가 매번 극한상황에 자진해서 뛰어드는 줄 알겠어요.”
《의외군요. 자각은 있었습니까?》
“나 참.”
의뢰를 마치고 오토와 탐정 사무소로 돌아가는 길. 간단한 사전보고 겸 오토와에게 전화를 건 하루키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철의 창문에 기댄 채 통화를 이어나갔다. 의뢰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몸이 살짝 나른했다.
《아무튼 수고 많았습니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그대로 퇴근해도 좋아요.》
“그래도 괜찮은가요? 의뢰 보고서도 써야 할 텐데.”
《어차피 돌아와서 작성하기도 애매한 시간입니다. 쉬고 내일 아침부터 써서 제출하세요.》
“상냥한 건지 엄격한 건지.”
《합리적이라고 해주세요.》
가볍게 웃고 통화를 잇던 하루키는 불현듯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잖아도 사람들이 많이 갈아타는 환승역, 반대편 플랫폼에도 전철이 들어와 있어 맞은편 차량에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보였다.
거기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엇.”
《왜 그러죠?》
“아니, 레이지가 보여서.”
《당신의 의동생?》
“응. 아니, 네. 전철 출발해버렸지만요.”
《흐음, 일본으로 찾아온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 참, 깜짝 놀랐네요. 전에 통화할 때 조만간에 일본으로 놀러오겠다고는 했… 었는데….”
뒤이어 아토 하루키는 번개처럼 깨닫는다.
자신이 핸드폰을 들고 출입문의 창을 향해 몸을 튼 채 서있었으니, 바깥쪽에서는 제 왼손이 아주 잘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제 왼손 약지에는 지난 며칠간 익숙해지는 바람에 아직 손가락에서 빼지 않은 가짜 결혼반지가 있다. 얇은 디자인이라고는 해도 한 번 보면 ‘앗, 저건 반지구나’하고 알아차릴 수는 있을 정도다. 그리고 전철이 출발하며 멀어지는 동안 레이지와 그 망할 아버지가 보였던 (그렇다. 거기 아버지도 있었다) 표정을 다시 떠올려본 아토 하루키는.
《아토 씨?》
“소장님, 일단 끊을게요.”
냉정하게 통화를 끊는다.
아무래도 일이 귀찮아질 예감이 들었다.
《이번 역은 쿠로가와, 쿠로가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내릴 역, 2개는 지나쳐버렸네. 이소이 레이지는 묘하게 냉정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물론 머리 일부분만 냉정해졌을 뿐이라, 이번 역도 전철에서 내리지 못한 채 전철 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이 노선을 영원히 빙글빙글 순환하겠어. 조금 전의 오버 클럭을 견디지 못해 퓨즈가 나가버린 머리에선 놀라울 정도로 단발적인 사고밖에 되지 않는다. 레이지는 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정신을 차릴까 하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좋아, 일단 이 사람부터 정신 차리게 하자.
“아버지,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봐도, 이소이 사네미츠는 전철 창문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바로 조금 전 웃는 얼굴로 통화하는 아토 하루키를 발견했던 자리다. 굳어버린 사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방금 전까지 이소이 레이지도 같은 이유로 의식이 살짝 멀어져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목적지에서 멀리멀리 떨어지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므로, 이소이 레이지는 넋이 나간 아버지의 팔을 끌고 전철에서 내리기로 했다. 본래 내리기로 했던 역을 네 정거장이나 지나친 뒤에 이뤄낸 쾌거였다.
핸드폰을 확인하면 의형 아토 하루키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흔적이 가득하다. 다시 전화를 걸어서 여기가 어딘지 말해줘야 할까. 레이지가 잠깐 고민하던 찰나, 이번에는 단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위치 어디야?」
잠시 고민하다, 자판을 두드려 현재 내린 역의 이름을 보낸다. 답장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돌아왔다.
「지금 간다 거기서 기다려」
이렇게 서둘러서 쫓아온다는 건 역시 상대방도 이쪽의 반응을 눈치 챘다는 이야기겠지. 레이지는 지하철역 의자에 쓰러지다시피 앉아버린 아버지를 곁눈질하며 알겠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다. 「플랫폼 안쪽에서 기다리겠슴다.」 문득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후 4시 8분을 가리키는 참이었다.
지고천 사건으로부터 벌써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관계자들은 다들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을 견뎌내고 더 강인해져 미래를 살아가고 있다. 레이지도 그들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적잖이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그러니까 의형인 아토 하루키에게 어떤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축복해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쓸쓸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뭘까. 오후 4시 8분에서 9분으로 바뀌는 시계를 바라보던 레이지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이지. 너 혹시….”
“저도 들은 게 전혀 없어요. 하늘에 맹세코 진실이에요.”
“……상대는, 그, 오토와라는 친구일까.”
“형의 인간관계를 생각한다면, 네, 제일 가능성 높은 건 그 사람 정도네요.”
“그럼, 그러면.”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여유를 잃은 기색이 역력하다. 멈춰있던 사고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2차 쇼크가 찾아온 모양이다. 의자에 앉은 채 양손을 깍지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걸 보면 분명했다. 한참동안 말없이 입술만 벙긋거리던 사네미츠가 침통한 목소리를 꺼냈다.
“하루키는… 이제, 오토와 하루키가 되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니면 그쪽이 아토 루이가 되거나. 도출된 결론은 쉽사리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토와 루이라는 사람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의형의 정신적 지지대가 되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 이와 남은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살짝 아득해지는 이유는 뭘까.
레이지는 여전히 힘없는 아버지의 곁에 앉았다.
“솔직히 충격이긴 하네요. 서프라이즈로 전해줄 생각이었을까요. 그렇지만 형도 그 사람도 허튼 생각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
“뭐가 어찌됐든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했다면.”
“…축하해줘야 하는 거겠지?”
“네.”
사네미츠가 얼핏 웃는다.
레이지도 그걸 따라하듯이 웃어보였다.
“찾, 았다, 이… 멍청이, 부자…!!”
동시에 아토 하루키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하루키, 축하한다! 같은 소리를 하는 아버지의 명치에 일단 주먹을 꽂아서 조용히 만들고, 하루키는 무릎에 손을 얹은 채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레이지는 불시에 습격을 받고 바닥에 무너져 내린 아버지를 돌봐야 할지, 아니면 급하게 달려와 숨이 몹시 거친 형을 먼저 챙겨줘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해하고 있었다.
“하루키 형, 쑥스러운 건 알겠지만.”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
경황 중에 아직 빼지 못했던 반지를 왼손 약지에서 벗겨낸다. 그걸 본 레이지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 해졌다.
“착각할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이건 그냥 장식이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싶어 빼낸 반지를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레이지와 사네미츠는 그 행동을 엉뚱한 방향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허위결혼입니까? 어디의 어떤 놈이 감히?”
“하루키, 괜찮으니까 성과 이름만 말해보련.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좋아, 둘 다 일단 속에 찬물 붓고 그 사람 하나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부터 풀어볼까?”
부전자전이라더니 어쩜 이렇게 생각하는 것까지 똑같담.
결국 일찍 퇴근하라는 루이의 배려도 무의미하게, 약 반나절가량 카페에서 사태를 설명하는데 투자하고 만 하루키였다.
가족 사진을 찍지 않을래요?
11월, 늦가을. 아토 하루키는 의동생 레이지에게서 가족사진을 찍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좋네, 그 망할 민달팽이는 구석에 원 모양으로 동그랗게 넣어버리자. 그런 말을 들은 동생이 전화기 너머에서 쓰게 웃었다. 실은 제가 가지고 싶어서요. 좋잖아요, 가족사진.
그런 말을 들었는데 계속 유치한 고집을 피울 수도 없어서, 아토 하루키는 순순히 이탈리아로 넘어왔다. 헌데 도착하고 보니 사네미츠와 레이지의 차림새가 아무리 봐도 평소의 몇 배는 공을 들인 상태였다. 정장 두 사람 사이의 하이넥 복장이 어떻게 보였을지 잠시 생각해본 하루키는 눈치 있게 백화점에서 새 정장을 사온 자신을 스스로 칭찬했다.
사진관은 이소이 부자의 거주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촬영은 다 끝났는지 내부는 한산했고, 거울과 조명이 가득한 대기실에서 약간은 어색하게 서있던 세 명은 주인의 안내에 따라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사진관 한쪽 구석에는 촬영에 쓰이는 걸로 추정되는 여러 가지 소품들이 놓여있었는데, 개중에는 어딜 어떻게 봐도 신혼부부가 쓸 법한 하트 모양의 거대한 핑크 액자도 놓여있었다. 하루키가 그런 것들을 별 생각 없이 눈으로 훑는 사이 주인이 기세 좋게 커다란 앤티크 의자 하나를 꺼내왔다.
의자에는 사네미츠가 앉았고, 레이지와 하루키는 그 양 옆에 섰다. 근데, 이거 가족사진이라기 보단 마피아 조직 보스와 그 간부들 같은 느낌 아닌가. 평소 같은 차림새였다면 좀 나았겠지만 공교롭게도 오늘은 셋 모두 정장 차림이다. 사진관 주인도 처음 몇 장을 찍어보더니 애매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빠르게 몇 마디를 하자, 레이지가 무어라 대답하더니 하루키를 바라보았다.
“소품을 바꿔볼 테니 이쪽으로 오라네요.”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 거기에는 과연 편안해 보이는 디자인의 소파가 하나 놓여있었다. 주인은 아예 이 3인 가족의 포즈를 처음부터 조정하기로 작정했는지, 가운데에 사네미츠를 앉히고 그 옆에 레이지를 앉힌 다음 아토 하루키에게도 얼른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자리는 사네미츠의 왼편 자리만이 비어있다. 하루키가 아무 말도 않고 천천히 앉는 동안 어딘가를 뒤져온 주인이 커다란 원형 액자틀을 내밀었다. 레이지가 설명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이걸 나랑 하루키 형이 손으로 잡고, 셋이 이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느낌으로 찍어보자고 하네요.”
“직업정신 투철하네.”
“하루키 형, 들 수 있겠어요?”
“이 정도는 들거든?”
액자를 손으로 잡으면 제법 가볍다. 최대한 몸을 안으로 넣을 수 있도록 왼손으로 틀을 잡은 하루키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붙으며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riso, riso!! 짧은 단어를 연발하며 빠르게 셔터를 누른 사진관 주인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후로도 주인은 각종 소품을 가져오며 촬영을 이어나갔다. 소품이란 막대로 얼굴을 장식하는 간단한 파티용품이거나 간이식으로 붙이는 검은 콧수염 같은 것이어서, 아토 하루키는 얼굴에 파란 선글라스를 쓰게 된 시점부터 자기가 가족사진을 찍으러 온 건지 예능 사진을 찍으러 온 것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인은 그들이 들고 있던 소품을 모두 거두어가고는 또 무어라 말했다. 간단한 인사를 제외하면 아직 이탈리아어가 능숙하지 못한 하루키는 주인이 차곡차곡 말하는 단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한 사람 건너 앉아있던 레이지가 그 말을 통역해주었다.
“아버지에게 좀 더 몸을 기대듯이 앉아보라고 하네요.”
흘끗 바라본 사네미츠의 어깨는 척 보기에도 경직되어있다. 아토 하루키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붙여 앉으며 사네미츠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루키는 덤덤하게 생각했다. 지금 딸꾹질이라도 하면 그대로 박차고 나가버려야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없었고 주인은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셔터를 찰칵찰칵 누르고는 다시 무어라고 말했다. 아까와는 발음이나 손짓이 다르다. 레이지에게 다시금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까 하던 하루키는, 제 손에 닿는 감촉에 숨을 멈췄다.
사진사는 빠른 발음으로 무언가를 말하며 또 엄지를 치켜 올렸다. 바쁜 셔터소리가 몇 번 더 울려 퍼지고, 마침내 촬영종료 사인을 받아낸 셋은 나란히 긴 한숨을 토해냈다. 분명 레이지도 바싹 긴장하고 있었던 거겠지.
여기서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네요. 레이지의 말을 듣고 편집실로 따라간 하루키는 듀얼 모니터에 선명하게 찍힌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온갖 파티용품(솔직히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으로 장식된 사진들이 한참 이어지다, 후반부로 가서야 겨우 분위기가 차분해진다. 그 중 몇 사진에서는 중앙에 앉은 사네미츠가 양 옆에 앉은 레이지와 하루키의 손을 자연스레 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꽤나, 있을 법한, 사진처럼, 보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풍경이야. 하루키가 솔직하게 말하자 레이지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저건 뺄까요? 아니, 됐어. 그냥 뽑지 뭐. 특히 저거랑 저거랑 이건 꼭 현상해달라고 해줘.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 사네미츠의 사진을 귀신같이 골라냈다. 사네미츠가 앓는 소리를 냈다.
“불만이야?”
“아뇨. 그럴 리가요.”
모든 사진의 현상에는 일주일 정도가 걸릴 거라고 했다. gràzie! 귀에 감기는 목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오니 바깥은 제법 어두웠다. 들어가는 길에 음식 좀 사서 들어가죠. 파스타랑 빵이랑 닭고기랑 사과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오늘 혹시 LDL의 다른 분들도 오시기로 했던가? 레이지의 말에 익살스레 답하며 하루키는 사네미츠의 곁을 걸었다.
“현상된 사진 데이터로 보냈는데 받았어요?”
“응. 새삼 다시 보니까 굉장하네.”
“세오 씨 엄청 웃었어요. 이런 가족사진 처음 본다면서.”
“아하하.”
“다음에는 그냥 평상복으로 찍죠.”
“그래, 내년에는 일본에서 찍자.”
“기대되네요. 그때는 잘 부탁함다.”
전화가 끊어진다. 아토 하루키는 모니터에 떠오른 일련의 사진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바탕화면에 새 폴더를 만들고, 레이지가 보내온 데이터를 모두 집어넣는다. 뒤이어 F2키를 누른 하루키는 「새 폴더」라는 이름 대신 「사진」이라는 단어를 넣었다가, 그걸 「2016. 11. 27 사진」이라는 단어로 바꾸었다가.
「2016. 11. 27. 가족사진(+민달팽이)」
“응, 이렇게 하자.”
소소한 미소를 짓고, 하루키는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시나노 에이지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지 않는다
아카네 씨.
이제 계절도 완연한 봄이네요. 그쪽에도 예쁜 벚꽃이 피었나요?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보고하고 싶은 일이 있어 편지를 씁니다.
들어주세요.
지고천 연구소 사건이 일어난 지도 이제 이 년이 지났습니다. 계절은 어느덧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봄이 되었어요. 그때는 나고야 지점에서 신세를 졌던 저도, 지금은 도쿄 본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정말 큰일이었다고 웃어넘기는 것도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전과 비교했을 때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에 걸쳐 해내야 할 과업이 생긴 것. 다른 하나는 둘도 없이 소중한 인연들과 만난 것입니다.
아카네 씨에게는 이미 편지로 적어드렸을 거예요. 지고천 연구소에서 제가 저지르고 말았던 일들을. 비록 그 계기가 지고세포라는 것에 얽힌 질 나쁜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 의사에 따라 움직이고 말았던 것은 저예요. 제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해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말았던 거죠.
하지만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세간에 상세히 알릴 수 없는 종류였기에 저는 제가 저지른 짓에 대한 법의 심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심판받지 못한 죄의 무게만큼 다른 사람을 돕고 속죄하며 살아가겠다는 게 제 결심이에요.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저의 소중한 인연입니다. 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아, 제가 저지른 죄를 알고, 그럼에도 저를 재앙이 아닌 ‘시나노 에이지’라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봐주는 사람들이에요. 특히나 하루키 선배님과 레이지 씨에게는 정말로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그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이렇게 자리에 앉아 편지를 쓰는 일조차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래서 레이지 씨로부터 갑작스레 「미안하지만 다음 주 주말, 점심 12시까지 아래에 있는 주소로 와줄 수 있겠슴까?」라는 연락이 왔을 때 자세한 확인은 미뤄두고 일단 「네!」라고 답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일련의 소동이 이어질 줄은 손톱만큼도 모르고.
준비는 이쪽에서 끝낼 테니 되도록 편한 복장으로 와달라고 하기에, 저는 평소의 사복을 입고 지시받은 장소로 향했습니다. 근데 향하는 도중에서야 눈치 챈 거지만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버린 거 있죠.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미리 아침 9시에 나온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제가 도착했을 때에는 약속시간을 15분 정도 지나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늦을 걸 안 순간에 레이지 씨에게 죄송하지만 조금 늦을 거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으면 됐을 텐데, 저는 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종종걸음만 치다가 전철에서 튀어나가듯이 내려버렸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내린 제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이런 내용의 플랜 카드였어요.
【히가시야마 식물원 봄 벚꽃 만개중!】
우와, 여기는 벚꽃 명소인가보다! 하고 들떴던 건 아주 잠시였어요. 왜냐면 레이지 씨가 같이 벚꽃을 보자고 불러낸 거라면 당연히 하루키 선배에게도 연락이 왔었을 테니까요. 셋이서 만나자는 약속인데 이렇게 레이지 씨의 연락만 단독으로 오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레이지 씨가 하루키 선배에게 말하기 어려운 어떤 목적이나 사건이 생겨 불러낸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 생각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 방향성은 조금 달랐습니다.
약속 장소는 전철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의 카페였어요. 안으로 들어가니 레이지 씨가 보였습니다. 곁에는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제가 아는 사람인 이소이 사네미츠 씨였습니다. 사네미츠 씨는 레이지 씨의 아버지인데, 반 년 정도 전에 놀이공원에서 같이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얼굴을 익히게 된 분입니다.
듣기로는 하루키 선배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데, 어째 선배 앞에서는 제대로 기를 못 편다는 인상이 강해요. 그런 분이 그때는 침착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레이지 씨의 손짓을 따라 자리로 가면서 이렇게 뵈니까 진짜 연륜 있어 보인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좀 실례였죠.
이후의 대화를 짧게 적어 보겠습니다.
“레이지 씨, 무슨 일인가요?”
“설명도 없이 불러내서 미안함다. 이쪽도 이쪽대로 긴급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빠서요.”
“긴급일정… 대체 무슨 일인가요?”
“음, 설명을 하면 길어지니까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죠. 저희는 오늘.”
“오늘?”
“아토 하루키를 추적합니다.”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제가 목소리를 높이자 레이지 씨는 손가락을 입술에 되며 쉿,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지만 우리가 할 일은 하루키 선배를 어떤 위협으로부터 무사히 지켜내는 거라는 말과 함께.
설마, 지고천 연구소의 잔당이나 그 비슷한 부류가 선배를 노리는 걸까? 선배는 지금 무사하신 건가? 하지만 오래 고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순간이었으니까요. 저는 카페의 런치 메뉴로 점심식사를 대신하면서 레이지 씨와 사네미츠 씨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일단 저희는 기본적으로 하루키 선배가 만나는 상대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때로는 상대가 저지르려는 행동을 비밀리에 저지해야 했습니다. 지금부터 선배가 향할 곳은 인파가 많으니 상대 쪽에서 섣부른 행동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낙관적으로만 보는 것도 금물이었어요. 상대 쪽이 우리를 알아볼 수 없도록 모자와 위장 무늬로 덮인 재킷을 입고 이동한다는 것까지 파악했을 때, 시계는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슬슬 시간이네요. 갑시다, 시나노 씨.”
저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넘겨진 재킷과 모자를 착용했습니다.
선배는 꽤 오랫동안 히가시야마 동식물원의 입구에 서있었습니다. 분명 약속시간은 2시라고 들었는데, 제 손목에 달린 시계는 2시 15분을 넘어가고 있었어요. 누군가를 만날 때는 늦게 나오는 쪽이 권력이 더 강한 쪽이라고 하던 우스갯소리가 떠올랐습니다. 아카네 씨와 데이트 할 때에는 언제나 둘이서 함께 (혹은 셋이서 같이) 나갔으니 의식한 적이 없었지만요. 저희는 하루키 선배가 한 눈에 보이지만 그쪽에서는 우리를 보기 어려운 기둥 뒤쪽에서 상태를 관찰하며 남은 상대가 나타나길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상대가 나타났다며 사네미츠 씨가 신호를 보냈습니다. 재빨리 고개를 내밀어보니 하얗고 팔랑이는 원피스를 입은 긴 갈색 머리의 사람이 빨간색 차에서 내려 하루키 선배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입구 앞에서 약간의 잡담을 나눈 뒤 동식물원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 모습은 멀리서 대강 보기에도….
“데이트?”
“데이트 아닙니다, 에이지 씨. 저 여자의 이름은 히가시하라 유미야. 나고야 근방에서 유명한 쇼핑몰 이스트필드 마트의 총지배인 히가시하라 마츠모토의 막내딸이죠. 하루키 형은 그 권력에 말려든 겁니다.”
“상황을 잘 모르겠는데요.”
“일단 따라오시죠.”
레이지 씨의 말에 따라 장소를 이동해, 두 사람의 동태를 계속 관찰했습니다. 사전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던 것인지 길게 늘어선 매표소 줄에 서지 않고 금방 동식물원의 정문을 통과한 두 사람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식물원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아까 전철역에서 내릴 때 보았던, 【봄 벚꽃 만개중】이라는 플랜카드가 다시금 떠올랐어요. 마침 날은 무척이나 맑았고,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사람들은 하하호호 웃으며 지나가고…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역시 데이트잖아요!”
“진정하세요, 시나노 씨. 저희가 곧 데이트가 아니게 만들어줄 테니까요.”
“저희는 지금 하루키 선배의 연애를 파토내러 온 건가요?!”
“연애라니? 저건 그렇게 새콤달콤한 상황이 아닐세, 시나노 군.”
뒤이어 사네미츠 씨가 설명해준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토 하루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탐정의 업무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토와 탐정 사무소에 개인적으로 의뢰를 하러 찾아온 히가시하라 유미야가 의뢰를 해결한 아토 하루키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무난하게 거절한 하루키였으나, 자신의 집안이 나고야에서 가진 영향력을 내세운 유미야의 공세는 점점 집요해질 뿐이었다. 결국 그 집요함을 견디다 못한 아토 하루키는 유미야의 데이트 신청에 딱 한 번만 응하겠노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게 이번 히가시야마 동식물원 데이트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상대를 철저하게 꺾어야하네. 한 치의 자비도 있어선 안 돼.”
“말과는 달리 지금 당장 상대방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신데요.”
“눈치가 빠르군, 에이지 군. 사실 등 뒤의 이 가방에는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이탈리아 마피아 장르는 2013년에 완결났거든요?!”
저도 하루키 선배에게 저런 사정이 얽혀있다고 생각하면 나서서 뜯어말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을 날려버릴 순 없잖아요. 하루키 선배 정도 되는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연애를 시작하실 것 같지도 않았고요. 지금이라도 제가 두 사람을 데리고 철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한 마음으로 뭉친 두 사람의 팀워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곁에서 있는 힘껏 따라다니고 뜯어말리는 것만으로도 한계였습니다.
이를테면.
“방금 하루키 형이 먼저 걸음을 멈춘 벚꽃나무 앞에서 보란 듯이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마이너스 30점.”
“데이트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쉬지 않고 계속 걷고 있어. 마이너스 45점.”
“정말 참고를 위해서 묻는 건데 이 점수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최종 시점에서 100점 달성이면 연애 인정, 반대로 마이너스 100점 달성이면 이별입니다.”
“지금 마이너스 275점인데요?”
“케케케.”
라던가.
“하루키가 잠시 자리를 비웠군. 그럼 다녀오지.”
“다녀온다니, 어디를요?”
“히가시하라 유미야가 이탈리아 플러팅에 얼마나 익숙할지 궁금하군.”
“많은 의문이 떠오르지만 하나만 물을게요. 그 손의 작은 가방 안엔 무엇이 있나요?”
“안심하게. 코끼리도 잠들게 하는 수면제일 뿐이야.”
“약물 오남용! 그전에 세관은 어떻게 한 거예요!”
“하하하.”
라던가.
기타 등등.
시간이 4시 30분을 가리키고 식물원 폐장 안내가 나왔을 때에는 정말이지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 생각은 너무 물렀던 모양이에요.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 씨가 공원을 나가는 것까지 지켜본 두 사람은 2차전의 시작이라며 검은 천으로 된 가방 같은걸 내밀었습니다. 어리둥절하게 지퍼를 열어보니 정장이 들어있었어요.
“저기, 이건 뭔가요?”
“아무래도 스카이 타워에 우르르 야상 차림으로 들어가면 눈에 띄니까요.”
“스카이 타워?”
“저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이지 씨가 가리킨 것은, 히가시야마 식물원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배경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어서 오히려 그냥 흘려 넘기고 말았던 높은 탑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간을 맞아 불빛이 깜박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네미츠 씨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히가시야마 동식물원의 관광명소 중 하나인 히가시야마 스카이 타워. 해발 200m 정도의 높이에서 인근 경치를 즐기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지. 과연 상업 가문 출신이라고 할까. 일부러 데이트 시간을 늦게 잡아서 자연스럽게 식사 코스로 유도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냐.”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저기에도 잠입할 생각이신가요? 유명 데이트 코스에? 성인 남자 셋이서?”
“요즘은 세간의 시선도 많이 너그러워졌어. 성인 남자 넷 정도의 동석이야 웃어넘기겠지.”
“그야 편견이나 차별은 좋지 않으…. 성인 남자 넷이요?”
“네, 마침 시간 맞춰 오셨네요. 저기.”
이 상황에서 누가 더 추가될 수 있다는 걸까요?
몰려오는 불안감과 함께 입구 쪽을 바라보니.
“미안하다. 조금 늦었군.”
오토와 탐정 사무소 나고야 지점 영업소장, 오토와 루이 씨가 있었습니다.
“하루키에게 그 의뢰를 소개한건 나니까. 책임을 느껴 상태를 보러왔다.”
현재시간 오후 5시 22분. 미리 준비한 정장으로 차려입고 뻔뻔한 얼굴로 자리를 안내받는 것은 꽤나 베짱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정장 입은 사내 4명이 몰려가면 좀 압박이 강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안내직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리로 안내해주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약자명이 ‘안티-이스트필드’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직원의 프로 정신이 아니었다면 전 그 자리에서 돌아가고 싶어졌을 거예요.
아래쪽에서 천천히 경관을 감상하고 올라오려는 건지,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은 우리는 메뉴판을 일단 제쳐놓고 상황파악과 작전논의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작전을 논의한건 레이지 씨와 사네미츠 씨이고, 저는 소장님에게 어떻게든 이 사람들의 폭주를 알리려 필사적이었지만요.
“…해서 지금 히가시하라 유미야의 점수는 토탈 마이너스 2840점. 의심할 여지없이 하루키 형의 짝이 아닙니다.”
“하지만 보다시피 표적의 수완은 보통이 아니다. 이 한 번의 식사자리에서도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닌가요? 상대는 그냥 유복한 집안 출신일 뿐인데!”
“그건 몰라, 시나노. 유복한 집안이든 그렇지 않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는 인간의 집념은 강하다. 설령 무슨 짓을 하더라도 목적을 이루겠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하루키라도 곤란할 거야. 물론 그렇게 된다면 사무소 차원에서 직접 개입할 생각이지만.”
“소장님….”
“과연 오토와 군. 우리와 뜻이 통하는군.”
“다만”
“쉿,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고 있슴다.”
레이지 씨의 말을 잇듯이 고층으로 올라온 엘리베이터에서 두 명의 사람이 내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 씨였습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점이 있다면 유미야 씨가 하루키 선배의 한쪽 팔을 다정하게 붙잡고 손깍지까지 끼고 있다는 점이었을까요.
와, 야단났네.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뭔가가 심하게 구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게 메뉴판을 들고 있던 레이지 씨에게서 난 소리라는 건 돌아보지 않아도 훤했습니다. 그 메뉴판, 졸업장이나 상장을 담아주는 케이스처럼 꽤 두꺼운 재질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말이에요.
“훗…. 방심했나.”
“물잔에 지진 났어요, 사네미츠 씨.”
“……그렇군.”
“소장님, 안경 올리는 손이 덜덜 떨리시는데요.”
이쪽의 혼돈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멀리서 웨이터가 정중하게 메뉴판을 건네고 물잔을 채워주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제사 안 거지만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 씨가 앉은 자리는 야경이 잘 보이는 창가가 아니라 레스토랑의 중앙 자리였어요. 데이트 필수 코스라고는 해도 자리가 꽉꽉 차있는 것도 아니고 안내 데스크에서 직원이 직접 안내하기까지 했는데 왜 저런 자리에 앉은 걸까. 의아함에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습니다.
“아무래도 히가시하라의 막내따님은 상당히 진심이긴 하지만, 그게 올바른 방향은 아닌 모양이군.”
“그 말씀은….”
“간단한 이야기지. 히가시하라는 하루키와 같이 야경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사람들의 주목이 쉽게 모이는 쪽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하루키 선배님이 예약했을 수도 있잖아요?”
“모든 데이트 준비는 히가시하라 측에서 준비했어. 이 정도는 자기가 하겠다고 하더군.”
소장님의 설명을 들은 사네미츠 씨가 탄식했습니다.
“그런 거였나. 젠장, 사전에 예약위치에 대해서도 파악해뒀어야 했어.”
저도 뒤늦게 그 의미를 알아차렸습니다.
마음에 둔 이와 야경을 즐기는 일보다 레스토랑의 중앙에 앉는 것이 더 중하게 여겨질 만한 목적이라면 그건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관계 과시? 단지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일 테지만,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계속 자리에만 앉아있을 수 없어 추천 코스로 4인분을 주문하긴 했지만, 선배에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모처럼의 좋은 요리도 맛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전채 요리부터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하루키 선배와 유미야 씨의 식사는 평온하게 이어졌습니다. 가끔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보면 오히려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요. (물론 선배의 웃음소리보다는 유미야 라는 분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지만)
메인 디쉬가 끝난 뒤에 나온 디저트는 7살짜리 어린아이라도 한 입에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이런 크기라면 얼른 삼키고 저쪽을 다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때.
짝!
순식간에 고개가 돌아갔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식사 중에 손뼉을 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아니었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하루키 선배를 마주보고 앉아있던 유미야 씨는 2인용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어 한쪽 손을 휘두른 상태였습니다. 그 앞에는 유미야 씨의 손바닥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간 하루키 선배의 모습이 보였어요. 벌어진 일을 사고가 쫓아가지 못하는 사이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저질 같으니! 처음부터 우리 집 돈만 보고 접근한 거지? 이 쓰레기 자식, 이런 모욕은 처음이야!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걸!”
그런 말만 남기고, 유미야 씨는 가방을 홱 낚아채듯이 들고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떠나버렸습니다. 뺨을 때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소리나 잔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하던 레스토랑은 그야말로 찬물을 부은 것처럼 조용해져, 유미야 씨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가버리자마자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끓어올랐습니다. 그 속에서 레스토랑 중앙에 남아 뺨을 문지르는 하루키 선배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쫓아 맨몸으로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온 힘을 다해 1층에 도착하고 보니 유미야 씨는 이미 스카이 타워를 나간 다음 차에 올라타 떠나려고 하는 중이었어요. 저는 그 뒤를 쫓았습니다.
막무가내로 차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선배에게 사과해주세요 넌 뭐야 저리 꺼지지 못해 사과해주시기 전까지는 못 돌아갑니다… 뭐 이런 대화의 연속이었죠. 하지만 스카이 타워의 관리원에게 저지당하는 사이 차량은 빠르게 떠나버렸어요. 덕분에 하루키 선배가 눈앞에서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문제의 인물을 보내주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레스토랑으로 돌아와 보니 선배는 딱히 상처받지도 아쉬워하는 눈치도 아니었어요.
주도면밀하다 해야 할까요, 하루키 선배는 처음부터 그 데이트에서 뭔가가 일어나리라고 추측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형 녹음기를 준비해 모든 대화를 녹음하고 있었다고 해요. 직업상 녹음기를 써야할 일이 많기에 이번에도 그만 직업병이 도지고 말았다. 만일 들켰을 때는 그 정도로 변명할 생각이셨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파일 안에는 실례되는 말이라곤 조금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일 히가시하라 쪽에서 항의가 왔을 때에도 이쪽에서 나름의 대처를 할 수 있었어요.
여담이지만, 스카이라운지에 남은 세 분은 현장에서 일련의 장면들을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몇몇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중 행동이 수상한 사람을 약간 추궁했더니, 얼마의 돈을 대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녹화하는 중이었음을 실토했다고 해요. 소장님은 아마도 인터넷에 소문과 영상을 흘려 아토 하루키라는 인간의 사회적 평판을 깎아내릴 생각이지 않았을까 추측하셨습니다. 그게 맞다면 꽤나 음습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저희는 하루키 선배에게 나란히 혼났습니다. 자기가 갓 성인이 된 사람도 아니고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말도 없이 데이트에 따라와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는 거였죠. 특히 루이라면 이해하지만 당신은 대체 여기 왜 있냐는 말은 사네미츠 씨를 완전히 격침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뭐라 항변도 하지 못하고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는 사네미츠 씨의 모습은, 뭐랄까, 바로 조금 전에 약간의 어휘만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녹화 파일을 삭제하게 만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어요. 레이지 씨와 저는 머리에 딱밤을 맞았습니다. 하나도 안 아프다고 했더니 3대 더 맞아버렸어요.
“그래도, 달려와 줘서 고마워.”
선배는 이러니저러니 잔소리를 하시다가도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돌아보았습니다. 스카이 타워를 전부 내려온 뒤였고, 동물원도 식물원도 오래 전에 폐장하여 멀리 보이는 불빛이라곤 가로등의 주홍빛뿐이었습니다. 스카이 타워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등 뒤에서 퍼지는 강한 빛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어서 다행이네.”
마지막에 그런 말을 들어버리는 바람에 감격해서 선배를 번쩍 안고 크게 3회전 정도 돌아버렸어요. 느닷없이 뭐하는 짓이냐고 관자놀이를 엄청나게 눌렸지만 그게 또 아프지가 않았다는 점이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아카네 씨, 저는 분명히 죄를 지었어요. 그건 앞으로 씻을 수 없는 죄로 남아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갚아나가는 길은 고독하지만도 괴롭지만도 않을 거예요. 만약 제가 조금이라도 엇나간다 싶으면 선배님의 데이트에 득달같이 달려온 이 사람들이 똑같이 모여서 잘못되려는 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을 테니까요.
저도, 만약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볼 작정입니다. 원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왠지 마음이 단단해진 느낌이네요. 일단은 그걸 위해서 몸과 마음의 단련을 병행하려고 합니다.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곧바로 달려가서 상대방을 지켜줄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쓰다 보니 어쩐지 길어져버렸네요. 전 편지를 쓰는 데에도 길치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마는 걸까요?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꼭 전하고 싶었으니 만족입니다.
늦었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다음에 또 편지 보낼게요!
쿠마자키 와플 메이커 절찬 운영중
「와플 메이커를 받았어요」
지고천 연구소 생존자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서 쿠마자키 카렌이 그렇게 말한 것은 어느 평일 저녁의 일이었다. 온라인 마켓에서 물건을 구매하면 얻을 수 있는 응모권을 제출해 당첨된 것이라고 한다. 어떤 건지 보고 싶다는 주변인들의 메시지에 답하듯이 올라온 와플 메이커는 제법 두꺼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요즘 나오는 물건에 비하면 투박한 디자인이었지만, 카렌은 적잖이 기쁜 모양이었다.
「여기에 반죽을 넣고 기다리면 와플을 먹을 수 있어요」
이어서 메시지가 올라온다.
「맛있게 만들어지면 모두에게도 나눠드릴게요」
「제 말은, 다음에 같이 만나게 되면요」
아토 하루키는 급하게 수첩을 펼쳐 자기 일정을 확인했다. 아마 그 순간, 단체 채팅방에서 카렌의 메세지를 읽은 모두가 엇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훈훈한 말과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지나간다. 엄지를 치켜드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가장 먼저 띄운 것은 아이바 이부키였다. 그 다음으로 니나의 말풍선이 올라왔다.
「멋진 생각이다. 그 기종이라면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지.」
「저, 다음 주 주말이라면 한가해요!」
「아쉽지만 나는 그때 봉사활동 일정이 잡혀있다」
「택배로 보내드릴까요?」
「마음만 받아두도록 하겠네」
아토 하루키를 비롯한 단체 채팅방의 멤버들은 서로의 일정을 무리하게 맞추지 않는다. 만날 수 있는 타이밍에 만나고, 그게 어려운 타이밍에는 다음을 기약한다. 그리고 다음을 기약했을 때에는 꼭 다시 만난다. 아무리 친한 학창시절 동창이라도 이렇게까지 친밀하게 만나지 않을 거라는 쿠마자키 리쿠의 농담은, 그만큼 서로가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겠지.
일정을 하나로 모아 맞춰보니 다음 주에 만날 수 있는 인원은 쿠마자키 부녀와 야나기 니나, 드물게도 쿠라치 테루미. 그리고 아토 하루키였다.
「현립 미술관에서 유명 작가의 사진전을 개최중이래요!」
「마침 잘됐네요. 사진을 구경하고,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 카렌의 와플을 먹어볼까요.」
「맛있게 구울 수 있게 연습할게요.」
카렌은 언제나 공손하고 예의바르다. 하루키는 이 아이가 가져오는 것이라면 설령 새까만 덩어리라도 전부 삼킬 것을 각오하며 카렌에게 응원의 말을 보냈다. 그 날 이후로 단체 채팅방에는 갓 구워진 와플의 사진이 한 장씩은 올라오게 되었다. 하루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카렌의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공원에서 느긋하게 와플을 먹는 일은 없었다.
「와플이 오래 식으면 맛이 없어져요.」
「그러니까 그냥 저희 집에 오시는 편이 좋겠어요.」
「깨끗하게 청소해둘게요.」
그러니까, 에 쿠마자키 리쿠의 의향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쿠마자키 가家에 발도 들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쁜 추억을 쌓은 것도 아니었기에, 하루키를 비롯한 3명의 어른은 조촐한 선물을 준비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작은 보폭이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열린다. 거기에는 평소처럼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쿠마자키 카렌이 곰돌이 무늬 앞치마를 입고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안녕, 카렌. 오늘 하루 실례할게.”
카렌은 활짝 웃어보이고는 세 사람을 집안으로 안내한다. 이거 어지간히 실력에 자신이 붙었나본데요. 하루키의 소근거림에 니나가 쿡쿡 웃었다. 성실한 아이니까 준비를 많이 했겠지. 그렇게 말하는 쿠라치 테루미의 입가도 조금은 풀려있었다.
거실과 이어진 부엌에서는 쿠마자키 리쿠가 카렌과 같은 무늬의 앞치마를 매고 반죽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머릿수건도 착실히 착용한 리쿠는 테루미가 가져온 넓적한 종이가방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그냥 오면 된다니까 뭘 이렇게 가져왔어요? 설마 쿠라치 씨 와플 메이커를 노리는 겁니까? 하루키와 니나는 그 말에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늘 진중한 쿠라치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잼 선물세트일세. 와플에는 이런 게 어울린다고 해서 우리 셋이 준비해봤네.”
“우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죠. 복숭아, 오렌지, 포도, 라즈베리? 이걸로 거의 반년은 먹을 수 있겠는데.”
“아빠, 감사인사를 해야죠.”
“아아, 그렇지. 감사합니다. 쿠라치 씨. 하루키와 야나기 씨도.”
“맛있게 먹어주세요. 나중에 검사합니다.”
“검사는 뭔데?”
실없는 농담에 웃음이 번진다. 하루키 일행은 자신들이 사온 잼을 잠시 카렌에게 양도하고 리쿠의 안내에 따라 쿠마자키 스미레의 불단 앞을 방문했다. 나무 액자틀 속에서 부드럽게 미소 짓는 고인은 집안을 방문한 3명의 손님에게도 별다른 불평이 없는 기색이었다. 스미레, 이쪽은 그 사고에서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야.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 톤으로 리쿠가 자신의 아내에게 말을 건넨다. 하루키는 그 영정 앞에 향을 조심히 피워 올리곤 묵념을 올렸다. 불단 앞에는 척 봐도 방금 구워진 와플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와플 기계는 전기만 연결되어 있으면 작동이 가능하기에, 손님들과 주인이 모여 앉은 장소는 부엌이 아니라 넓은 테이블이 있는 거실이 되었다. 미리 한 그릇 만들어둔 반죽이 쿠마자키 카렌의 손길을 따라 와플 메이커 안으로 쏙쏙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테이블 위로 반죽 몇 방울이 튀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지고천 사건을 겪은 어른들은 카렌에게 그런 걸 일일이 지적할 정도로 매몰차지 못했다. 미리 끓여둔 홍차의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이건 경찰 아저씨 몫이에요.”
“고맙구나, 쿠마자키 양.”
“이건 아토 아저씨 몫.”
“잘 먹을게.”
“마지막으로 언니 몫.”
“맛있겠다. 고마워 카렌.”
“아빠 몫도 만들었어요.”
“으음, 그래….”
쿠마자키 리쿠의 반응이 영 미적지근한 것은 자신이 제일 마지막이라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단체 채팅방에 일주일 내내 올라왔던 와플 사진과 관련이 있겠지. 초절 쿨한 사회인인 아토 하루키는 일부러 그 부분을 파고들어 쿠마자키 부녀를 민망하게 만드는 대신 와플 먹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와플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제법 두께가 있는지라, 먹성이 그리 좋지 못한 아토 하루키는 동그란 원을 하나 다 먹었을 무렵 저도 모르게 백기를 흔들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반면에 쿠마자키 카렌은 4분의 1로 자른 와플에 각종 잼을 야무지게 발라가며 두 번째 원을 전부 먹어치우고 있다. 역시 성장기의 아이들은 대단하네. 아토 하루키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카렌을 바라보다, 슬쩍 말문을 열었다.
“카렌은 와플 메이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네. 만들기도 쉽고 맛있어요. 주말에는 이걸로 간식을 만들어 드려도 될 것 같아요.”
와플 메이커에 눌어붙은 조각들을 청소하던 리쿠의 표정이 조금 고통스러워진다. 하루키는 대범하게 무시했다.
“지금껏 먹은 것 중에서는 어떤 잼이 제일 마음에 들어?”
“으음. 사과잼이랑 오렌지 마멀레이드요. 와플이랑 같이 먹으면 어쩐지 엄마가 생각나요.”
“엄마가 자주 만들어주셨니?”
“아뇨. 그렇지만 같이 사과잼을 만들까 얘기한 기억이 나요.”
그건 어머니와 아이가 나눈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하루키는 거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인식하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카렌의 어머니는 카렌이 이렇게 잘 먹는 걸 보고 분명히 대견하게 생각하실 거야. 그 말에 카렌이 웃었다.
“네, 분명 그럴 거예요.”
“카렌, 기뻐보였죠.”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잘 되었지. 아이가 언제까지고 의젓한 얼굴로만 있는 건 마음 아픈 일이니.”
와플 시식과 한담을 끝내고 쿠마자키 가를 떠났을 때에는초여름 저녁 기운이 완연했다. 세 사람은 잘 익은 밀가루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겉옷을 입은 채 뱃속을 소화시킬 겸 주택가를 느긋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중학생을 보이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웃으며 세 사람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두 분은 뭘 사셨나요?”
하루키의 돌발적인 질문에 야나기 니나와 쿠라치 테루미가 걸음을 멈춘다. 멀뚱한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역시. 나한테만 말을 꺼냈을 리가 없지. 아토 하루키는 자신도 빙그레 웃으며 말을 꺼냈다.
“참고로 저는 식물용 영양제였네요.”
“전 진드기 청소기를 샀어요.”
“전동 블렌더. 아내가 좋아하더군.”
새삼스럽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온라인 마켓의 사은품이란 그리 쉽게 당첨되는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쿠마자키 리쿠는 단체 채팅방에 존재하는 모든 구매력 있는 어른들에게 접근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 사은품 이벤트가 열리는 한 달간, 이 추천인 코드를 써서 쇼핑해줘!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부탁해!」
저편에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보내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장한 말투였다.
조금 캐물어보자 사정은 금방 밝혀졌다. TV 드라마에서 와플 메이커가 나오는 장면을 본 카렌이,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그와 비슷한 기종이 사은품으로 걸린 온라인 마켓을 알아내 가입해왔다는 것이다. 경쟁자가 얼마나 될 지 알 수 없는 전국 단위 온라인 경합에서 딸아이를 좌절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쿠마자키 리쿠는 필사적인 동시에 강경했다.
“아버지는 딸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쥐어주고 싶은 법일세.”
“그냥 와플 메이커를 사주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카렌은 자기 의지가 강한 아이니까요.”
“부럽네요~. 원하던 상품에 정말로 당첨되는 기쁨은 뭐라 말할 수가 없잖아요.”
“만약 떨어졌다면 리쿠 씨는 그 홈페이지를 위장해서라도 당첨 메시지를 띄웠겠죠.”
“부성애라는 거지.”
한 차례 같이 웃고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하늘은 방금 먹은 와플 색으로 천천히 물들어, 가장자리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계절은 완연한 가을이어서 뺨에 닿는 바람은 적당히 시원하다.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야나기 니나가 입을 열었다.
“신기한 기분이네요. 그 연구소에서 이렇게 살아나와, 다 같이 음식을 나눠먹고 이런 잡담을 나누며 돌아갈 수 있다니.”
“해피 엔딩의 에필로그 같은 거죠.”
“아하하. 맞아요. 아직 이런저런 굴곡이 있지만, 그때 겪은 일만큼 크지는 않으니까요.”
하루키는 쿠라치와 짧게 시선을 교환한다. 석양이 불꽃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이 이제와 조금 신경 쓰였다. 마치 두 사람의 마음을 눈치 챈 것 마냥 니나가 말을 이었다.
“요우 생각도 가끔은 해요.”
“…….”
“그치만 이제 외롭다거나 슬프다는 생각은 안 해요.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다, 부럽지? 하고 약은 올리지만.”
“약 올리는 건가요.”
“네.”
니나가 가벼운 걸음으로 두 사람을 앞질러 나간다. 그대로 뒤를 돌아보는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요우와 함께한 나날은 그냥 세상에서 사라진 게 아니라, 나의 추억으로서 계속 함께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서로의 취향을 생각하고 소소한 선물을 준비하고 일상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며 다가오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아침 메뉴를 고민하고 거울 앞에서 복장을 정리하고 가끔은 색다른 이벤트를 기대하기도 하면서. 아토 하루키와 쿠라치 테루미는 아픔을 딛고 단단한 의지를 얻은 이의 미소를 보고 따라 웃었다. 오늘만 해도 두 번으로 마주치는 강인한 얼굴이었다.
“멋지네요, 야나기 씨.”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온답니다.”
“정말일세. 그런 마음가짐은 쉬이 가질 수 없는 법이니까.”
불꽃같던 석양이 이제는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들며 천천히 어둠을 내리기 시작한다. 그건 그렇고 이 일은 두 분 모두 비밀로 하실 거죠? 아토 하루키가 슬쩍 던진 질문에 다른 두 사람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쿠마자키 리쿠의 범행(유사)는 당분간 완전 범죄가 될 것 같았다.
“언젠가 카렌도 리쿠 씨 몰래 저희에게 뭔가 부탁하게 될까요.”
“그때는 반드시 비밀을 지켜줄 거예요!”
“내용은 듣고 결정해야지.”
잔잔한 이야기소리가 이어진다. 어른들은 마치 아이처럼 서로에게 비밀을 맹세하고는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서로의 삶으로, 그러나 결코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곳으로.
「오늘은 즐거웠어, 카렌.」
「멋진 솜씨였네, 쿠마자키 양.」
「정말 맛있는 와플이었어!」
단체 채팅방에 차례대로 메시지가 올라온다. 잠시 후 쿠마자키 카렌이 공손히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올리며 대답했다.
「네, 저도 아빠도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만나요!」
제 이름을 남기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바람이라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자신의 수명이 33살에 끝난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가 찾아와 그리 예언한 것도 아니고 머리 위에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타이머가 달려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알았다. 그건 본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왜, 어떻게 죽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오기 카나오는 33살에 죽는다】는 명제만이 저 먼 앞에서 한밤의 네온 사인처럼 빛날 뿐.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그에게는 상당히 거지같은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오기 카나오라는 개체에게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호칭에 걸맞는 두뇌가 있었다. 그는 대책을 강구했다. 혹시 모를 병을 예방하기 위해 매일같이 운동을 했고 바보같이 이용당하지 않도록 꾸준히 사고능력을 길렀다. 물론 인간관계를 다지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에게 애꿎게 발목이 잡힐 리스크와 보통의 인간을 가장하여 얻는 사회적 신뢰라는 자원을 두고 정확하게 저울질을 한 결과였다.
작전은 꽤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20대 중반을 넘어설 무렵 아오기 카나오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를 최대한으로 압축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성공했다. 저 빌어먹을 명제대로 자신이 33살에 죽는다 하더라도 단순한 개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방법도 떠올렸다. 업적을 남기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고 대단한 족적을 남기면 아오기 카나오라는 이름은 역사에 영원히 남겠지. 그 기틀이 될 ‘위대한 발견’은 이제 코앞에 있다. 카나오는 기꺼이 그 연구에 제 시간을 바쳤다.
매미 울음소리도 점차 잦아들던 2008년의 어느 가을날, 그의 연구 속도를 따라오기는커녕 수수방관하던 팀원들이 별안간 말을 걸어왔다. 실험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가 2차 검토를 마치고 완성 직전에 놓여있을 때였다. 환경 변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들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아오기 카나오는 순간적으로 그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말야아, 아무리 대단한 발표라도 그걸 신예 나부랭이가 하면 학계에선 싹 묻힌다고오.
─하지만 교수나 상임이사랑 인맥이 있는 우리 이름을 붙여서 발표하면 대우가 확 달라질거얼?
─너한테도 나쁜 얘기는 아니야아. 연봉 협상에서도 유리하도록 우리가 잘 말해줄게에.
─좋은 게 좋은 거잖아아.
“그렇군요.”
카나오는 예의바르게 웃었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다음날 다 찢겨죽었다.
무죄 판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아오기 카나오가 이전과 같은 환경에서 일상을 보내기란 불가능했다. 일단 이름과 얼굴이 알려졌다. 그가 한 행동이 끔찍한 살인이라며 규탄 받았다. 분명한 근거와 자료를 토대로 무죄를 인정받았거늘 무지한 쥐새끼들이 찍찍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살인범이자 정신질환 판정을 받은 아오기 카나오를 선뜻 받아들여주려는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고 여기저기를 떠돌았지만 초조해하지는 않았다. 33세의 명제는 뜻밖에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무죄 판정을 받고 사계절이 두 번 정도 순환했을 무렵일까, 아오기 카나오는 지고천 연구소로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제로 끌려왔다. 예고도 없이 쳐들어온 방문자 앞에서 그의 거부 의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묵비권은 강압으로 변질되었다. 청각과 시각, 발언권을 엄중히 차단당한 채 오랜 시간 암흑 속에 방치되어있다 겨우 구속이 풀렸을 때는 무기질적인 책상과 볼펜 하나, 글자가 빽빽이 들어찬 서류 몇 장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외부출입 불가, 외부연락 불가, 외부유출 불가.
단, 지고세포 관련사항에 관해서만큼은 모든 연구권한을 허가한다.」
당연하게도, 지고세포라는 녀석의 샘플을 미리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오기 카나오는 이미 자신의 힘으로 장애물을 부순 경험이 있었다. 여기가 어떤 엄중한 장소든 누가 상대든 상관없이 다시금 길을 개척할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흔쾌히 사인을 했고, 지정된 방으로 이송되었고, 지고세포를 마주했다.
운명의 이끔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 거라고, 아오기 카나오는 저주와 탄성을 내뱉는다. 지고천 연구소는 일반 윤리와 도덕 개념을 깔끔하게 도려내버린 주제에 구제니 신이니 하는 환상을 쫓는 미친 집단이었지만 동시에 인류사의 위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치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시설이었다.
만약 이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그의 이름과 업적은 말 그대로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름은 아오기 카나오가 아니라 카노 아오구가 되었지만, 그는 쩨쩨하게 한자나 발음에 연연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질이 새겨지는 것이었으니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날이 이어진다. 카노 아오구는 자신의 두뇌 기능과 자아 컨트롤 능력에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으나 데드라인인 2015년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에는 과연 마음이 초조해지고 말았다. 33세의 명제는 그가 언제 며칠 몇 시 몇 분에 이러이러하게 죽는다는 상세지침을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노는 2014년 12월 24일에 시설 내 식당의 철제 나이프 하나를 빼돌렸다. 방 안에 구비된 가구들을 활용하여 매일같이 갈고 닦은 칼날은 들었던 얘기와는 다르지만 희생양 한 둘 쯤이야 가볍게 만들 수 있다는 듯이 반짝였다. 카노 아오구는 그 날에 제 얼굴을 비춰보다가 빙긋 웃어보였다.
신경 곤두선 3개월은 천천히 지나갔다.
일이 터진 것은 4월 8일이었다.
카노 아오구의 작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 희생양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정신 나간 악력으로 허리를 붙잡고 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도 거뜬히 성공했을 것이다. 숨을 몰아쉬며 회의실에 뛰어든 카노 아오구는 자신의 몸에 묽은 물감처럼 끼얹어진 피와 검은 액체를 발견했다. 흑색과 적색이 손가락 마디를 따라 서로 뒤엉키며 복잡한 가지를 펼친다. 그걸 바라보던 푸른 시선이 움직였다. 회의실 안쪽에서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던 연구원들은 무언가를 의논하는 중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카노 아오구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카노는 예의바르게 웃었다.
자, 이제 카노 아오구는 반출구의 흙바닥을 밟으며 경쾌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건 자유를 향한 걸음이자 33세의 명제에게 한 방 먹여주기 위한 예비 동작이고,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지고세포 감염체가 맞이하는 뻔하고 뻔한 결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카노는 이대로 탈출하여 이 성공작 모르모트들을 비롯한 바깥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새겨놓을 작정이었다.
다만 그 걸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건조한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제기랄, 정말 몇 발자국 남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허나 상술했다시피 카노 아오구의 두뇌는 만물의 영장에 걸맞은 성능을 지니고 있었고 그가 품은 집념은 일반적인 인간의 갈망을 초월했다. 검은 상념이 소용돌이치며 이성을 갉아먹어가는 최후의 순간에 살아남은 뇌세포로 자신을 낙인찍을 수단을 떠올린다. 카노는 그 작전을 실행하기에 걸맞은 상대가 제 마지막 인간관계라는 것을 확정한 순간 피가 들끓는 흥분을 느꼈다.
그래, 기억되고 유지될 수 있다면 그 영역이 역사 교과서 위든 한 인간의 머릿속이든 차이는 없다.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서!
어서 나를 죽여!
그리고 네 죄책감에 내 이름을 똑똑히 짊어지고 살아!
그게 나의 영생永生이다!
하지만 카노 아오구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쥐새끼는 총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촘촘하게 설치한 죄책감과 자책, 영웅 심리의 덫이 해체된다. 더 이상 죄악감의 대명사가 될 수 없게 된 카노 아오구는 영민한 두뇌로 자신에게 남은 길이 하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33살의 명제가 웃는다. 그건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그건 아소 코지다. 건방진 소리나 지껄이는 아소 짱이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나눴으면서도 그 거짓말을 토대로 서로를 믿었고 마침내 그 믿음으로 카노 아오구를 살해한….
─그래도, 나쁘지 않죠?
“빌어먹을 놈.”
카노 아오구는 쓰러지는 제 몸을 느리게 인식한다. 처리실에서 빠져나온 이래 머리를 들쑤시며 술렁이던 검은 속삭임은 이미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속삭임에 모든 것을 파먹혔던 것 같다. 부서진 제 예상이 최악의 형태로 흩뿌려진 풍경이 언뜻 일렁인 것 같다. 하지만 흐려지는 시야는 그걸 정확히 포착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굳이 붙잡을 생각도 없었다. 다만 생각한다.
아소 짱, 이번에는 성공했나봐?
아소 코지는 틀림없이 자신의 몫까지 살아갈 것이다. 자신을 스치듯이 지나가 멀리 뻗어갈 그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기꺼웠다. 둥근 모래시계의 마지막 한 알이 아래로 추락한다. 【아오기 카나오는 33살에 죽는다】. 마침내 참으로 성립한 명제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한 번 반짝이고는 암흑에 잠겼다.
그대로 지옥으로 떨어진다.
편안한 감각이었다.
오랜만이야 웃어줄 순 없겠네 유감일까
이탈리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들어가기 전, 이소이 레이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긴 통화를 통해 사네미츠가 원고 송신을 코앞에 두고 데이터를 날려먹은 비극적 경위와 그 탓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 노트북 데이터 센터를 찾아가고 있음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는데, 솔직히 하루키가 알바는 아니었다. (“‘안됐네. (웃음)’ 이라고 전해줘. 어차피 귀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지만.”) 하지만 이런 연유로 한데 묶여 행동하게 된 레이지와 사네미츠 대신 LDL의 리더 세오도아 리들이 자신을 마중하러 갈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토 하루키는 잠시 침묵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이소이 레이지가 큼큼거렸다.
“죄송함다. 저라도 같이 가는 게 하루키 형도 마음이 편할 거란건 알지만….”
“아냐, 괜찮아. 세오도아 씨는 좋은 사람이잖아. 게다가 말도 잘 통하고.”
“다개국어 능통이니까요.”
“나도 닮고 싶네.”
“형의 이탈리아 어도 꽤 능숙해졌는걸요.”
시덥잖은 웃음을 나눈 뒤, 아토 하루키는 적당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비행시간 내내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하필 츠바이크는 편집 일로 회사에서 못 움직이지, 사네미츠는 넋이 나가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안 되고, 레이지는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지식이 없어서 허둥지둥.”
“결국 그 민달팽이가 마감을 일찍 지켰으면 되는 일이잖아요. 도대체 몇 명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야.”
“하루키는 사네미츠에게 엄격하네.”
“매정하고 냉정하고 엄정하고 냉혹하고 잔학무도하다고 해주세요.”
“풍부한 어휘력은 좋지. 짐은 이쪽에 실어.”
둥글고 매끈하게 생긴 검정색 벤틀리의 트렁크가 열린다. 아토 하루키는 감사를 표하고는 자신의 캐리어를 차에 실었다. 이번에는 장기휴가를 얻어 이주일 정도의 체류인데다 시나노 에이지가 레이지에게 보내는 『디타검』 관련 자료도 있는 탓에 이래저래 짐이 많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차 트렁크에 들어있는 짐이 애초부터 적다는 점일까. 꽤 가볍게 다니시네요. 아토 하루키가 건넨 말에 세오도아가 웃었다. 무거우면 제대로 달릴 수가 없잖아.
“스피드를 즐기시나요?”
“응, 너무 즐겨서 옛날엔 절벽을 수직으로 들이받았던 적도 있어.”
“그건 전혀 웃을 수가 없는 이야기잖아요.”
텅, 하고 트렁크가 닫힌다. 이어 하루키를 조수석으로 안내하고 운전석에 앉은 세오도아가 품에서 능숙한 동작으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이제 와서 그가 피우미치노 국제공항에서 사네미츠의 집으로 가는 길을 검색할 리가 없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토 하루키가 잘 알고 있다. 이전 하루키가 비행기 시간을 터무니없이 착각해버렸을 때, 온갖 도로를 갈아타고 아슬아슬하게 엑셀을 밟으며 공항으로 가는 소요시간을 극단적으로 단축시켜준 게 다름 아닌 세오도아 리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잖아!’라며 엄지를 들어준 장면은 아직도 영화의 라스트 씬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디보자, 지금 레이지에게 아토 하루키를 픽업했다, 고 전해둘” “세오 씨, 잠깐만요.”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은 있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지나간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일부러 들쑤셔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냐는 감각. 가만히 있으면 그냥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토 하루키는 다른 무엇도 아닌 탐정이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점과 점에 지나지 않는 단편적인 정보 사이에 선을 긋고, 그렇게 만들어낸 조각을 현실의 빈자리에 채워 넣는 자였다. 그러니까 이건 어찌 보면 직업병의 발로인 셈이다.
하루키는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지금 수하물이 안 보여서 공항에서 얼마간 체류하게 될 것 같다, 고 해주실래요?”
“그건 상관없지만, 왜?”
“당신하고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이런, 두근거리네.”
가볍게 웃고, 세오도아는 문자판을 두드린다. 화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보였더라도 이탈리아어를 전부 이해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타자가 길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하루키의 말대로 해준 성 싶었다. 물론, 직후 세오도아가 이렇게 말해온 덕도 있지만.
“오스티아는 이 계절이면 한산하지. 바다 구경이나 할까?”
“그러죠.”
차에 시동이 걸린다. 아토 하루키는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봉투를 의식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바깥 하늘은 여름 기미가 남아있어 아직은 푸르른 빛이었다.
세오도아 리들은 사진을 받아들고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썬팅 처리된 차의 앞유리에서는 겨울 바다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끊임없이 파도칠 뿐이었다. 이따금 계절풍에도 상관하지 않고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이 시야를 가로지른다. 그 외에는 한적한 풍경이었다.
“의외네.”
잘 정돈된 차 안에서는 은은한 라벤더향이 풍긴다. 인조적으로 조합된 향기였지만 아토 하루키의 마음을 조금 안정시켜 주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주 약간밖에 진정되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응, 정말 의외야. 언제 어떻게 봐도 끔찍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래 전에 찍고 잊고 있던 졸업사진이 갑자기 들이밀어진 기분도 있어.”
“그런가요.”
“다만 의문은 있네.”
세오도아가 운전석 시트에 깊이 몸을 기댄다. 품을 더듬던 손길이 부자연스럽게 멈추는 걸 보아하니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피우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비흡연자의 면전에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심기가 불편해지지는 않은 건가. 아토 하루키가 냉정하게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사이 세오도아가 입을 떼었다.
“왜 아무 질문도 하지 않지? 이건 정말로 당신입니까, 왜 모습이 변하지 않은 겁니까, 무엇 때문에 여기 있습니까. 그런 것 정도는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봤자 당신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 것 같다고 판단했거든요. 딱 잘라 말해, 지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도 아니다.”
“네.”
계절을 놓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흥이 올라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것인지 비치발리볼 공으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나타난다. 골대도 관객석도 없는 모래밭 위에서 웃음 섞인 비명과 외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왜 이걸 나에게 보여주지?”
“일단은, 추억의 물건일까 싶어서요.”
“그리고?”
“이걸 이소이 사네미츠에게 넘겨도 상관없을지 묻고 싶어서.”
“……아, 그렇군. 과연.”
세오도아 리들은 다시 사진을 본다. 그리고 또 과연, 하고 중얼거렸다.
“묻지 않는 걸 택한 건 현명해, 하루키. 네게 무엇을 어디까지 부여해주면 좋을지 감이 안 오거든.”
“왠지 불온한 말처럼 들리니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그래, 이런 점이 말야.”
비치발리볼이 힘차게 허공을 가른다. 그 공에 얼굴을 맞은 아이가 균형을 잃는가 싶더니 요란하게 넘어졌다. 한바탕 웃음이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넘어진 아이가 문제의 근원에게 달려가 정강이를 후려친다. 아이들은 왁자하게 웃으며 모래투성이가 된 몸으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일단은, 평범하게 고맙다고 해둘까. 그리운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이런 장소가 아닌 곳에서 갑자기 보게 되었다면 좀 추한 꼴을 보였을지도 모르겠어.”
“그럼 이걸 이소이 사네미츠에게 넘겨도 좋은가요?”
“흠, 어떻게 할까. 너는 그가 이 사진을 받아서 기뻐하리라고 생각해?”
“전 딱히 그 인간을 기쁘게 해주려는 게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말하자면?”
“한 대 패서 날려버리고 싶은 쪽이죠.”
세오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창문을 닫아놓지 않았더라면 사방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이야~ 진짜 무도하구나, 하루키. 사네미츠는 지구 밖까지 날아갈지도 몰라?”
“제가 알 바 인가요?”
“그러게, 네가 알 바 아니긴 해.”
얼마나 큰 업보가 있던, 얼마나 큰 망념이 있던.
그건 결국 그 사람이 품고 가야하는 것이니까.
“그럼 이렇게 할까. 하루키, 나는 잠깐 담배를 피울게.”
“네.”
“그 다음 차를 타고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사네미츠에게 사진을 줘. 그나저나 오래된 사진이었다면서? 조각이라도 모으게 되서 다행이네.”
“…그런가요. 이해했습니다. 그럼 저는 차 안에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있죠. 비행기 안에서 요만큼도 잠들지 못했거든요.”
“그래, 도착하면 깨워줄게.”
“네, 그럼.”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난다. 아토 하루키는 시트를 약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일단 한 번 머리가 편안해지자, 이제까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피로감이 천천히 내부에서부터 밀려올라왔다. 순식간에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토 하루키는 생각한다. 정말로 여기서 질문을 멈춰도 좋았던 걸까.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좋았을까. 어떠한 진실을 파내어 먼지를 털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좋은 것일까.
그러면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이다.
괜찮아. 너는
“너는 이제 역할을 다했으니까. 은퇴 주역에게 대사를 밀어 붙이는 건 꼴사납지.”
세오도아 리들은 해변가의 휴식터에 앉은 채 덤덤히 중얼거렸다. 한 손에는 방금 아토 하루키에게서 받은 아카시아의 신민 시절 사진이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어지간해서는 불이 꺼지지 않는 오일 라이터가 있다. 그걸로 자신이 있는 자리와 이름을 꼼꼼하게 태워 없애며 세오도아는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오랫만이야. 깜짝 놀랐다고 하면 다들 웃으려나?”
“…잊은 건, 아니야. 하지만 그에 수반되어야 할 여타의 감정이 희박해.”
“라이 짱이나 노리유키는 나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느니 그럴 수 있다느니 하겠지.”
“하지만, 그래, 이래저래 해도, 조금은 그리운 기분이 들긴 하네.”
“…….”
“그 이상으로 끔찍하지만.”
까맣게 타들어가는 자리로부터 회색 재가 툭툭 떨어진다. 세오도아는 그 재를 훅 불어 날리곤,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몇 군데를 더 그을렸다. 라이터에서 피어오른 불꽃을 따라 하얀 옷자락들이 까맣게, 혹은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세오도아의 시선이 그 잔재 위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남은 건 나뿐인데, 불타는 것도 나뿐이라.”
불합리하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을 구태여 소리 내어 말하고, 세오도아 리들은 사진을 탈탈 털어내어 다시 봉투에 담았다. 두 조각으로 나뉜 사진이 얌전히 갈색 봉투 속으로 들어갔다. 세오도아는 다시 깔끔하게 접은 그 봉투를 들어, 잠시 바라본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길게 늘어진 그의 피어스를 스쳐지나갔다.
“Ci Vediamo.”
가능하다면 말이지. 짧게 덧붙인 말이 잿조각과 함께 바스러졌다.
찬 겨울에 북서풍 불어올지라도
원예부의 수레는 오래되어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지만 바퀴는 무리 없이 굴러간다. 오토와 루이는 인근 꽃집에서 얻은 배양토를 수레 위에 차곡차곡 싣고 원예부실로 돌아왔다. 넓은 운동장과 학교 담벼락 사이의 작은 공간에 위치한 원예부 건물은, 부실이라기 보단 간이온실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 앞에 아토 하루키가 쭈그려 앉아있다. 아마도 몇 년 전 졸업한 선배가 가져왔을 낡은 앞치마에 헐렁한 목장갑을 끼고 화분에 담긴 식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달 전 가을에 꽃을 한창 다 피워낸 은목서 화분이다. 그 향기가 너무나 진하여 도저히 온실 안에는 두지 못하고 바깥 입구 쪽에 두자, 지나가던 야구부원이 이건 어디서 나는 향기냐며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랬던 화분도 지금은 꽃이 전부 져 나뭇가지와 잎사귀만 남아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분명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겠지. 언젠가 전부 져버린 은목서 꽃을 보고 루이가 그렇게 말하자, 하루키는 이건 화무십일백花無十日白이 어울리지 않겠냐며 떨어진 하얀 꽃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아토 하루키와 오토와 루이는 대학 센터 시험을 쳤다. 하루키가 느닷없이 학교 식물들을 분갈이하러 가자는 이야기를 꺼낸 것은 2월 초순의 일이었다.
오토와 루이는 주위로부터 문무양도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식물을 돌보는 문제에선 자기보다 하루키의 의견을 존중한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그것만? 이라며 어이없는 얼굴을 할지도 모르지만) 때문에 하루키가 그렇게 말했을 때, 배양토는 자신이 구해오겠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센터시험 준비 때문에 부활동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아토 하루키는 여전히 원예부의 식물들을 돌보길 좋아했다. 그걸 돕는 일은 번거롭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하루키, 흙을 구해왔다.”
“고마워, 루이.”
하루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루이는 그제서야 옆에 놓인 커다란 플라스틱 화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루이가 인근 꽃집에 다녀올 동안 온실 창고 어딘가에 있던 것을 찾아내어 씻어두었던 모양이다. 내가 돌아오고 나서 같이 해도 되었을 텐데. 루이가 그렇게 말하자 하루키는 가만히 있기 심심했을 뿐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을 들여다보면 이미 마사토까지 깔려있었다. 하루키가 한 작업이니 일부러 화분을 뒤집어엎어 거름망이 제대로 끼워져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토와 루이는 자신이 옮겨온 배양토 수레를 한쪽에 세워둔 뒤, 하루키를 도와 은목서 화분을 같이 잡고 거꾸로 들었다. 하지만 안쪽의 흙은 화분과 함께 단단히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 마냥 그리 간단히 벗겨지지 않았다. 소년들은 모종삽을 들고 흙을 푹푹 파내리고, 물을 뿌려 흙과 뿌리를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려는 등 악전고투를 하며 가까스로 화분과 은목서 뿌리를 분리해냈다. 작은 화분 모양 그대로 굳고 뒤엉킨 뿌리가 젖은 흙을 떨구며 뽑혀 나왔다.
“미안. 괴로웠지.”
아토 하루키가 얽히고설킨 뿌리를 천천히 어루만진다. 루이는 은목서 나무줄기를 단단히 붙잡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이, 내려놔도 돼. 분갈이 전에 뿌리를 정리해야겠어.”
“그래.”
은목서가 바닥에 가로눕는다. 루이는 흙투성이 목장갑을 조금 털어낸 다음 하루키가 찾아낸 화분 쪽으로 다가갔다. 분갈이를 할 때는 옮겨 심는 화분에도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뿌리 정리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니 하루키에게 맡겨도 좋을 터였다. 배양토의 포장을 뜯고 모종삽을 이용해 적당한 위치까지 흙을 도닥도닥 덮고 뒤를 돌아본 루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흙과 한 덩어리로 뒤엉킨 은목서 뿌리가 하나도 정리되어있지 않았다.
“하루키?”
이름을 부르면, 답이 없다.
“하루키.”
다시 한 번 부른다.
키, 라는 마지막 발음이 혀에서 조금 헛돌았다.
“…이상하네. 뿌리, 잘라내야 할 텐데.”
“…….”
“왠지 못하겠어. 어째서일까.”
“힘들다면 내가 할까.”
“아냐, 아냐…. 루이는 할 필요 없어, 루이는.”
야구부는 연습시합 중이다. 깡, 하고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함성소리가 높아졌다.
“루이는 내가 아니니까.”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지.”
아토 하루키의 손에서 작은 원예가위가 찰칵거린다. 오토와 루이는 문득 짙은 향냄새를 맡았다. 그건 오봉날이 오기 전, 가족들이 한데 모여 현관 앞에서 피우곤 하는 무카에비迎之火의 연기 냄새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슬프고, 무겁고, 타고 남은 재처럼 하얗게 바래있는 것 같은.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니까.”
가위가 움직인다. 엉킨 뿌리가 뜯어진다. 흙이 부스러진다. 새로이 옮겨 심어지는 것은 으레 그렇게 되어야 하기 마련이었다. 털어내야 한다. 잘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 뻗어낼 수 있는 기회를 얻어도 이전의 덩어리에 갇힌 그대로 풀려나지 못하므로.
맞는 말이라고, 루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아토 토모코가 숨을 거두었다는 연락을 받았던 1월 중순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센터 시험이 모두 끝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병원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온 하루키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어딘가 위태로웠고,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무엇을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연락을 받은 오토와 가족이 한달음에 달려간 병원 영안실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하루키는 마치 버려진 씨앗 한 알 같았다. 그런 하루키를 지탱해주며 장례식을 끝내고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한 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하루키.”
“응.”
“그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텐데.”
“…….”
“옮겨 심은 뒤엔 배양토를 넣고 다시 마사토를 덮어야겠지.”
“……….”
“충분한 물을 준 뒤에는 그늘지고 바람 없는 자리에 조용히.”
“…………….”
“식물은 조심히 돌봐야 한다며, 네가 가르쳐 준 것이지 않은가.”
그랬던가. 중얼거리는 하루키의 목소리는 무색투명하여 맑은 하늘 아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원예부실 앞마당에 흩어진 나무뿌리와 흙덩어리들이 무언가를 대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거, 할머니가 가르쳐 준거야.”
“그런가.”
“정원에도 좋아하시던 동백꽃이 가득한데.”
“…….”
“왜 나 혼자 그걸.”
그걸.
하루키가 몸을 웅크린다. 오토와 루이는 아토 가家의 아름다운 정원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는 하루키의 모습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위로 아침햇살, 석양, 어둠, 새벽빛이 차례대로 내려앉는 풍경도.
“그럼 같이 볼까.”
아토 가의 동백꽃은 유달리 붉고 진하다. 그 사이에 딱 하나 하얀 동백꽃이 피어있는 것을 가리키면, 아토 토모코는 ‘특별한 동백꽃을 찾았구나.’라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건 굉장히 따뜻하고 다정하고 상냥한 웃음이어서, 루이는 어쩌다 피어있는 하얀 동백꽃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렸다.
“아니면 피어난 꽃을 전부 따서 토모코 씨에게 바치러 갈까.”
동백꽃은 질 때 꽃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지지 않고 한 송이가 통째로 진다. 그래서 겨울이 지날 무렵 아토 가를 방문하면 동백나무 아래가 붉게 물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퍽 섬뜩할 풍경이었으나 아토 토모코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꼭 붉은 비단같이 아름답지 않니?’ 그런 사람이라면 안치단을 동백꽃으로 장식해도 기뻐하면 기뻐했지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싫다면 뽑아버리마.”
“버리마, 라니. 그거 루이보다 크다고.”
“어떻게든 해보지.”
“식물 학대.”
은목서 잎사귀가 찬 바람을 맞아 흔들린다. 야구부에서는 연습 시합이 끝났는지 우렁찬 인사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토 하루키는 메마른 웃음을 몇 번인가 토해내더니, 루이가 있는 뒤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옹송그리고만 있던 몸을 조금 폈다. 멀리, 학교 어딘가에서 취주악부가 관악기를 불고 있었다.
찬바람이 분다. 이 계절이라면 북서풍이다.
“루이.”
“음.”
“고마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만.”
“충분히 해줬고, 앞으로도 해줄 거잖아.”
오토와 루이는 무엇을,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본 아토 하루키가 살짝 웃었다.
“일단은 분갈이 좀 마저 도와줘.”
“그러지.”
“그 다음에는.”
“다음에는?”
“동백꽃을, 보러갈까.”
“…그래.”
겨울에 피는 동백꽃에는 이따금 작은 새가 날아와서 앉곤 한다. 아직 어린 소년들은 아주 잠깐, 그 새의 날갯짓 소리를 떠올렸다.
물은 피보다 진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레이지.”
“네.”
“무슨 일 있었어?”
한여름의 이탈리아는 햇살이 강렬하다. 그건 이소이 사네미츠와 레이지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닥에 선명한 무늬를 남긴다. 레이지는 먼 길을 찾아온 세오도아에게 얼음 담긴 물잔을 건네던 동작 그대로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눈치 챌 정도인가요.”
“지나친 참견이었다면 미안. 하지만 그냥 지나쳐 보내기에는 슬슬 기간초과라는 느낌이 들어서.”
“아뇨, 괜찮슴다. 세오 씨가 알 정도라면 스승님이나 츠바이크 씨도 알아차렸을 테고.”
“둘도 은근히 신경 쓰는 눈치였어. 하루키랑 사네미츠, 싸우기라도 했어?”
“…….”
그새 물잔 안에서 녹은 얼음이 달각였다. 레이지는 가볍게 웃으려다가, 제 입가가 생각보다 단단히 굳어버린 것을 깨닫고 손끝으로 입술을 쓸었다. 어떤 기억이 툭 튀어나왔다. 자신이 불러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던 사네미츠와, 그 앞에 고요히 서있던 아토 하루키의 모습이었다.
“둘이 싸운 거라면 차라리 간단했을 텐데요.”
“그보다 복잡한 문제야? 너희들의 관계는, 어찌어찌 밸런스가 잘 잡혀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슴다.”
레이지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약 반 년 전, 하루키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온천 여관으로 향했을 때의 대화가 천천히 되살아났다.
“노천탕 딸린 객실이요?”
“응, 물론 대욕탕도 있지만,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온천욕을 할 수 있는 방도 있다고 해서.”
“듣기만 해도 호화로운데요. 비싸지 않나요?”
“걱정 마. 쿠라치 씨의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빠짐없이 할인 받았으니까. 역으로 말하자면 이런 기회가 아니면 못 누리는 호사야.”
차를 운전하며 말하는 하루키의 옆모습이 조금은 뿌듯해 보인다. 일본에 오기 전까지 마감에 시달린 사네미츠는 차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모르게 잠들어 버린 지 오래였고, 상대적으로 팔팔한 레이지만 생존하여 조수석에서 하루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난방이 틀려있어 차 안은 적당히 따스했고 낮게 틀어둔 라디오에서는 경쾌한 음악이 들렸다.
“어째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싶더라니 의도였슴까?”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
“아버지도 들었으면 놀랐을 텐데요.”
“그 인간을 놀라게 해서 뭐하게?”
사네미츠가 들었다면 또 어깨가 축 늘어졌을 테지만 뒷좌석의 사람이 깨어난 기척은 없다. 레이지는 소리 내어 웃고는 창문 너머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켜진 고속도로가 주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고맙슴다.”
“이런 형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것도 있고.”
“있고?”
다음 말은 돌아갈 때 해드릴게요. 레이지가 슬쩍 뜸을 들이자 하루키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다. 너, 뭔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대답하는 대신 그 입에 작은 사탕을 물려주자 하루키는 조금 수상쩍다는 얼굴로 받아먹었다. 슬슬 시야 너머로 그럴듯한 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의 온천은 아무래도 성황하기 마련이다. 주차장에는 색색의 차량들이 이미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한 상태였다. 그 중 한적한 자리를 찾아낸 하루키가 주차를 하고 돌아오는 동안, 레이지와 사네미츠는 접수처에 「아토 하루키」라는 이름을 말하고 예약을 확인받았다.
닫혀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깨끗하게 정리된 좌식 테이블과 산을 마주한 풍경이 한 번에 눈에 들어오는 창문이 있다. 방 한쪽에 짐을 풀고 넓은 방으로 나온 레이지는 오, 하는 감탄사를 내며 창문가로 다가갔다.
“이거 본격적인데요. 풍경 구경만 해도 본전은 뽑을 거 같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크케케.”
“생각보다 엄청 넓은데? 하루키, 무리한건…”
“내가 이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완전 최고야! 우리 아들 멋지다!”
하루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난방을 킨다. 이런 상황이 될 줄 어느 정도 예상했었던 레이지는 또 크케케, 하고 웃고는 제 아버지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온천 이용 안내문을 확인하는 하루키 곁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있던 사네미츠가 그 걸 보고 얼른 달려왔다.
“왜 그러니, 레이지?”
“여기 노천 온천도 딸려있다는데 구경하러가죠.”
“…노천 온천?”
“노천 온천.”
얼이 나가버린 사네미츠를 데리고 방 한쪽에 마련되어있는 바깥 테라스의 문을 열어보면,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나무 데크가 빈틈없이 깔린 길이 나타난다. 작은 전등이 켜진 그 길을 따라가자 하얀 빛깔 도는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노천탕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인 두 명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의 크기였다.
“레이지.”
“네.”
“하루키, 어디 아프다던가 그런 거 아니지?”
“진정하세요. 형이 무슨 수전노도 아니잖아요.”
“아니, 그치만 너랑 온 것도 아니고…. 심지어 시나노 군이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같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이제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레이지는 너무 걱정 말라는 의미를 담아 사네미츠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온천탕 뒤쪽에는 창문이 있어 방 내부가 일부 보인다. 거기서 눈이 마주친 하루키가 유리창 너머의 두 사람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신호 아닌가요?”
“머리가 마비 되서 아무 생각이 안 들어….”
“이건 제 생각이지만요.”
다시 한 번 뒤쪽을 돌아본다. 하루키는 어느샌가 방으로 찾아온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설마하니 방에 이불을 직접 깔아주기 위해 찾아온 걸까.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이 여관의 서비스 정신, 혹은 숙박료가 무서울 정도다.
“어쩌면 아버지를 위해서 일부러 예약한 건 아닐까요.”
“왜?!”
“아버지, 온천 여관에 와도 이런 저런 핑계 대면서 사람이 붐비는 시간에는 가지 않으려고 버티잖아요.”
“그야… 오른손도 이렇고, 좀, 주목받아 버리니까.”
“그러니까요.”
“……우연의 일치 아닐까?”
“흐음.”
사네미츠도 그 발언이 썩 논리정연 하지 않다는 점은 알고 있을 것이다. 레이지는 여기서 더 밀어붙이지 않고 살짝 놓아주기로 했다.
“시간은 넉넉하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사네미츠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움직임이 꼭 녹슨 태엽인형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여관 측에서 준비해준 식사를 먹고 올라온 레이지는 온천욕을 하면서 술을 마시면 꽤 절경이겠네요, 같은 소릴 했다가 아무리 지고생명체라고는 해도 너무 체력을 과신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나 참, 형이 술을 즐겼다면 이 맛을 알아줬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홍차파랍니다.”
“음, 하루키?”
하루키가 고개를 돌린다. 온천 여관은 요리 뿐만 아니라 온천을 즐기는 것이 필수적인 코스나 다름없는 곳이라 셋 모두 여관에서 제공하는 유타카를 입고 있었다. 남색 바탕에 하얀 줄무늬. 허리띠는 똑같은 남색이어서 묶으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레이지는 사네미츠의 손가락이 그 띠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다가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무언가를 크게 결심한 듯이.
“같, 이 온천에 들어갈래?”
“아뇨.”
단칼, 이라는 표현조차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반응속도였다. 마치 전생부터 이런 질문이 날아올 것을 알아서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온천 여관에 묵는 어린 아이 몇 명이 서로 친해진 모양인지 웃으면서 달려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멀어질 때쯤 하루키가 덧붙였다.
“둘이 들어가면 비좁습니다. 대욕탕은 아버지가 꺼려할 테고.”
“하루키 너는 말라서 넉넉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하루키가 부드럽게 웃는다. 아버지를 살짝 도와드릴까 싶어 옆에서 한 마디 거들려던 레이지는 그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
“괜찮습니다. 알겠죠?”
“……네.”
사네미츠는 그 이상 밀고 나가지 못했다. 하루키는 고요한 웃음을 지은 얼굴 그대로 천천히 앞서나갔다. 레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네미츠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이거 혹시 내가 쓸데없는 희망을 불어넣은 건가.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는 레이지 앞에서 사네미츠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긴장했다~.”
다행스럽게도, 깊이 상처받은 기색은 아니다. 레이지는 남몰래 안도하며 사네미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거, 생각보다 가드가 단단하네요.”
“예상은 했어…. 오히려 승낙했다면 놀랐을 거야.”
“그 말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요?”
“…노력은 해볼게.”
“응원할게요.”
진부한 표현이지만 다시금 등을 두드린다. 사네미츠는 멋쩍은 듯이 웃어보이고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 하루키를 따라 걸어갔다. 얼핏 평화로웠다. 이후로도 그럭저럭 온건한 나날이 지나갔다. 온천 여관에서의 숙박이 끝나는 날까지는.
마지막 날이니까 특별히 허락해줄게. 온천을 하면서 마시는 건 금지지만 온천욕을 하고 나온 뒤에는 마음껏 마셔. 그 말에 따라 솔직하게 술을 몇 병이고 비워버리는 게 아니었다고, 레이지는 지금도 생각한다. 만약 술을 마셨더라면 작은 소음 정도는 감지해서 일어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가정은 무의미하다.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한밤중에 목이 말라 일어난 레이지는 노천 온천 쪽의 창문을 통해 주저앉아있는 사네미츠와 그 앞에 서있는 하루키를 보았다. 하루키는 온천욕을 하던 와중에 서둘러 유타카를 입으려고 했는지, 젖어버린 옷자락이 축 늘어져 있었다.
레이지는 본능적으로 노천 온천 쪽을 향해 달려갔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레이지를 보고 하루키가 어딘가를 깊이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채 정리되지 못한 유타카 옷자락 사이로 뭔가가 보인다. 노천 온천의 조명이 환하지 않았던 탓에 레이지는 그걸 금방 인식하지 못했다. 대신에 주저앉아있는 사네미츠를 향해 다가갔다. 아버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이게 대체…?”
“레이지.”
목소리가 흘러내려온다. 고개를 들면 어느샌가 젖은 유타카를 단단히 고쳐 입은 하루키가 있었다. 그 표정은 담담하다. 레이지는 문득, 이 온천에 온 뒤로 형의 이런 표정을 보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 좀 달래드려.”
“잠깐, 형?”
“바람 좀 쐬고 올게.”
계절은 2월 중순이었고, 아무리 바람 불지 않는 밤이라고 해도 젖은 유타카 차림으로 바람을 쐬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레이지는 하루키를 쫓아가 붙잡지 못했다. 무너져내린 사네미츠가 몸을 울컥이며 경련 같은 호흡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심장을 토해내지 않을까 싶은 고통스런 몸짓이었다. 레이지는 필사적으로 그 등을 두드려주고 온갖 위로의 말을 퍼부으며 사네미츠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사네미츠는 쉬이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바깥에서 새어나오지 못한 울음이 방을 가득 채웠다. 레이지, 하루키. 어째서. 그런 발음만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아버지를 진정시켜 자리에 눕힌 레이지는, 그 호흡이 겨우 본래의 리듬을 되찾았음을 확인하고 돌아오지 않는 형을 찾으러 나가기로 했다.
온천 여관은 24시간 운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갈 곳은 한정적이었다. 여관에 들어온 뒤로 벽에 걸어두고 거의 입은 일 없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채 밖으로 나온 레이지는, 제 예상대로 새벽 세 시의 주차장에서 유일하게 시동이 걸려있는 낯익은 차량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고개를 든다. 레이지는 그 창문을 두 번 두드렸다.
답이 없다.
한 번 더 두드린다.
“형.”
창문이 천천히 내려온다. 하루키는 레이지를 쳐다보지 않았다.
“추워. 안에 들어가.”
“형이랑 같이 들어갈 거예요.”
“나 외투 입었어.”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죠?”
“미안해.”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슴다.”
“…아버지는 어쩌고.”
“겨우 진정시켰어요. 계속 형을 찾아요.”
얇은 입술이 달싹인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레이지는 그 모습을 어찌할 도리 없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달래고 진정시킨 뒤, 로비로 내려오는 동안 되살아난 기억이 선명했다. 유타카 옷자락 사이로 보이던.
“사정을 말해준다던가, 불가능하다면 하지 않아도 됨다.”
“…….”
“하지만 아버지는… 틀림없이 지금, 형을 필요로 해요.”
“……….”
“돌아가요, 하루키 형.”
“레이지, 나는.”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갈 곳 없이 핸들 위에 얹힌 하루키의 손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레이지는 주제넘게도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키의 몸에 남은 총상에 대해서,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눈물을 흘리던 사네미츠의 고통에 대해서, 그 흉터를 숨기기 위해 숨죽여 행동했을 하루키의 마음까지도.
오만일까.
알 수 없었다.
하루키는 결국 레이지의 요구대로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발밑에서 쌓인 눈이 뽀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자신들의 방 앞으로 돌아온 레이지는 분명 자리에 눕혔던 아버지가 복도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곁에서 하루키가 움찔 멈추는 기색이 있었다.
“…하루키, 레이지.”
목이 쉬어있다. 설마 여기서 계속 자신들을 찾았던 것일까? 레이지는 자신이 하루키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보고자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사네미츠가 비척비척 다가온다. 레이지가 다가가는 것보다 먼저 하루키가 그 앞으로 다가갔다.
“들어가요.”
“하루키….”
“내일 얘기해요.”
사네미츠가 하루키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군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날 아침햇살이 들어올 때까지 아무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다음날 형과 아버지는 여관 인근의 찻집에서 긴 얘기를 나눴어요. 전 얘기가 복잡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지기로 했습니다.”
“같이 있어도 좋았을 텐데.”
“제가 그러고 싶었어요.”
늦은 아침나절에 시작된 이야기는 점심 무렵을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다. 조금 피곤한 안색으로 레이지가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온 하루키는.
“오래 기다렸지, 레이지.”
그 한 마디만을 했다.
“돌아오는 동안 둘 다 말이 없었슴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명확한 결론이 났던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아무것도 못했고… 우리는 그대로 이탈리아로 돌아왔죠.”
“그리고 줄곧 저런 상태다.”
레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네미츠는 그 사건 이후 묘하게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도피라고 표현해야 알맞을지도 몰랐다. 츠바이크가 일부러 마감을 줄이고 휴일을 내주었을 때에도, 다음 작품의 조사가 하고 싶다며 취재 인터뷰를 제안했을 정도였다. 덕분에 지금 사네미츠는 츠바이크와 함께 프랑스 어느 마을을 취재하고 있다. 연락에 의하면, 밥은 새 모이만큼 먹고 있다는 듯하다.
“하루키랑은 어때?”
“안부를 물으면 답은 해줘요.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얼버무리고 있슴다.”
“답지 않네.”
“네, 답지 않죠.”
하루키는 의사가 명확하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점이 답답했다. 그만큼 역린이라는 것일까. 쉬이 말해주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말해주고 싶어도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 걸까.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조만간에 담판을 지어볼까 싶기는 해요.”
“든든하네, 레이지.”
“전 제 가족이 좋으니까요.”
올해 가족사진도 새로 찍어야 하구요. 마지막 말은 자신을 향해 되뇌인 것에 가깝다. 강렬하던 여름 햇살은 어느새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사네미츠가 취재에서 돌아오려면 앞으로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시각, 아토 하루키가 일본에서 차에 치였다.
하루키는 눈을 깜박였다. 밤하늘에 구름 몇 조각이 떠가고 있었는데 달빛이 강해서 그 윤곽이 그대로 보였다. 바람은 조금 강하다. 멀리서 매미 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풍경이다.
아소 짱, 주마등 볼래?
아뇨.
지금이라면 할증요금이 붙어서 20% 이득이야.
당신 할증요금의 뜻 모르지?
카노 아오구가 히죽 웃는다. 하루키는 깊은 숨을 들이쉬려다 실패했다.
무리하지 마. 상처 벌어져.
당신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심각해요?
내출혈은 답도 없어. 지고생명체가 아니라면 즉사였을지도?
의식은 또렷한데요.
그럼 버텨. 구급차 올 때까지.
언제쯤 올까요?
나도 모르지.
도움이 안 되네요.
저주에게 뭘 기대했어? 긴급전화연결?
구름이 달을 덮는다. 옅은 테두리에 달빛이 어우러지면서 미미한 무지갯빛이 보였다. 차에 부딪쳐 튕겨나간 채 보는 풍경이 아니었더라면 사진이라도 찍었을 것이다. 찍은 사진은 단체 채팅방에라도 올리면 됐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는 하루키의 눈가가 경련했다.
그런데 딱히 구급차가 오지 않아도 지고세포가 있으니까, 일단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소 짱은 혹시 바보야?
왜요.
마음이 죽는 건 생각하지 않는 거야?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아니면 마음을 죽이고 싶은 건가?
노코멘트.
정곡인가 보네.
“이봐요…. 살아있어요? 저기요?”
멀지 않은 곳에서 당혹한 목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머리카락을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번에 사건을 의뢰했던 의뢰인이자, 아토 하루키가 조금 전 몸을 던져 구해낸 사람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손에는 이미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아토 하루키는 침착하게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에서는 말 대신 축축한 뭔가가 터져 나왔다.
“히익!”
비명소리를 낸 의뢰인이 한 두 걸음 물러서는가 싶더니 서둘러 몸을 뒤로 돌리고 무언가를 조작한다. 시체 은닉이나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경찰에 신고하거나 구급차를 부르려는 거겠지. 하루키는 그제서야 제 숨이 조금 갑갑하다는 걸 인식했다.
카노 씨.
왜?
저 좀 기절할게요.
아소 짱, 근성 20점이야.
불평은 나중에 해줘요.
그대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하루키는 잠이 들기 직전의 얇은 피막 같은 안정 속에서 얼핏 주위의 소리를 들었다. 그건 누군가의 필사적인 목소리기도 했고, 지직이는 잡음이 섞인 무전음이기도 했고, 들것에 실려 어딘가로 이송되는 소리기도 했고… 무기질적으로 이어지는 기계음이기도 했다. 눈꺼풀을 움직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암흑이 신기할 정도로 포근했다.
하루키.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하루키는 눈을 뜨지 않았지만 거기에 누가 있는지는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작은 온기가 제 손을 천천히 쥐어온다. 하루키는 손가락을 굽혀 그 움직임에 답했다. 의사意思가 천천히 흘러나갔다.
난 괜찮아, 알파.
알아, 나는 너를 이루는 세포니까.
나도 무모한 짓을 했다고는 생각해.
소식을 들으면 모두가 걱정할거야.
응.
레이지나 사네미츠도, 말야.
…….
하루키.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두려워?
무슨 소리야? 하고 말을 의문형으로 되돌려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오리진 알파는 곧 아토 하루키를 이루는 근간이자 또 다른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려면 아토 자신의 마음에 거짓말을 빈틈없이 둘러야 한다. 진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영원히 계속해야 한다.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
두려워.
그래서 하루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손길이 느릿했다. 알파의 손을 마주잡은 채, 하루키는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나는… 들켜버렸어.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야.
날 기만자라고 생각할거야.
너는 너의 최선을 다했을 뿐이잖아.
하지만 이소이 하루키는 죽었어….
하루키.
나는 『진짜 아들』이 아냐.
너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잖아.
…….
너를 만든 것은 이소이 하루키의 의지, 너에게 건넨 것은 이소이 하루키의 기억. 네가 받아들인 것은 이소이 하루키의 마음. 끊어진 것은 없어. 전부 연결되어있지.
……아버지, 울었어.
지혜열 같은 거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있잖아.
왜 그래?
받아들여지지 못하면 어쩌지.
어미가 완전한 의문형이 되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답이 명확한 형태로 돌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차마 눈뜨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작은 온기가 몸을 기대왔다.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에 살며시 다가앉듯이.
그럼 우리가 직접 찾아가자.
우리가?
그래. 찾아가서, 나는 틀림없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못을 박아버리는 거야.
안 만나주면….
부수고 들어가자. 도와줄게.
과격하네.
네가 하염없이 우는 것 보단 나아.
…미안, 응석부려서.
괜찮아. 내가 너를 이루는 세포인 것처럼, 너 또한 나를 이루는 세포인걸.
응.
쉬어, 하루키. 눈을 뜨면 아침일 거야.
피로가 몰려온다. 아토 하루키는 이번에야말로 깊이 잠들었다.
그 총상을 지웠더라면 간단했을지 모른다. 이소이 하루키는 공항에서 쫓기던 그날 총을 맞고 강에 빠졌습니다만, 기적적인 확률로 오리진 알파의 세포를 받아들여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잘된 일이죠. 그렇게 진실을 바꿔 끼울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하루키는 그러지 않았다. 그 연구소에서 진실을 알고, 자신 이전의 『이소이 하루키』에 대해서 알고, 그가 총상과 익사로 인해 사망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일련의 일들을 완전히 잘라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상흔이 남았다. 묘비조차 세울 수 없는 소년을 위해서. 자신을 여기로 이어준 작은 아이를 위해서.
그렇다. 기억은 이어진다. 또한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겨우 제정신을 차린 병원에서는 오토와 루이와 사건 의뢰인, 탐정 사무소의 식구들을 시작으로 지고천 연구소 생존자들의 문병이 이어졌다. 저녁을 한참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산해진 병실에서 조금 한숨을 쉬고, 하루키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창밖은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하다.
3인실 병실 한 쪽에는 자신보다 어린 청년이 입원해있었지만, 이번에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면서 오늘 아침에 짐을 챙겨 퇴원했다. 병실의 인연도 인연이긴 하지만, 솔직히 다른 사람이 있는 것보다야 이쪽이 편하다. 이 기회는 행운으로서 즐기기로 하고, 하루키는 흘끗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소식 들었슴다. 많이 다친 건 아니죠?」
「지금 아버지랑 곧바로 갈게요.」
너무 서둘러서 오지 않아도 돼.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답장은 약 하루가 지난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급하게 오고 있는 거라면 차분하게 핸드폰을 만지고 있을 여력도 없을 것이다. 그 외에는 단체 채팅방에서 하루키의 쾌유를 기원하는 메시지가 여럿. 화제가 정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얼른 낫겠다는 답장을 보낸 하루키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20분 정도가 지났다.
토독, 토독. 작은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보였다. 여름비의 특성 중 하나는 처음엔 별 거 아닌 것처럼 시작된 빗줄기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굵어진다는 점에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단숨에 커지는 빗소리와 함께 멀리서 잘 안 닫히는 창문을 억지로 닫는 쇳소리가 들려온다. 창가로 다가가보면 색색의 우산이 펼쳐진 가운데 불운한 몇몇 사람들이 신문이나 가방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큰일이네. 한참 창밖을 구경하며 남 일처럼 생각하던 하루키의 등 뒤에서 (실제로 남 일이기는 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사네미츠가 서있었다.
서있었다, 고 하는 건 조금 부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균형을 잃고 무너질 것 같은 몸이 문틀을 붙잡은 손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은 한껏 몰아쉬고 있고, 안색은 엉망진창이고, 머리카락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끄트머리가 빗물에 젖어있다. 지금 이 순간의 모습만 잘라본다면, 병원에 입원한 환자에 어울리는 몰골은 하루키가 아니라 사네미츠였다.
레이지는 어디에 있지? 아버지를 이런 꼴로 혼자 보냈을 리가 없는데. 탐정의 사고회로가 빠르게 회전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익숙한 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사네미츠가 한 발을 내딛었다. 하루키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다가, 자신의 뒤에 창문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도, 그날도 이렇게 비가.
“하루키.”
새어나온 목소리는 그때처럼 심하게 메말라있다. 오는 길에 오열이라도 했던 걸까? 방금까지는 별 무리 없이 돌아가던 머리가 삐걱인다. 무려 반년만의 재회였다. 두 사람 사이의 중재역인 레이지가 없으니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있더라도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하루….”
“정말 하루키라고 생각해요?”
결국 나온 말은 그런 식이었다. 이제는 거의 신경 쓰이지도 않던 뱃속 어딘가가 갑자기 욱신거렸다. 하루키는 그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요, 당신의 이소이 하루키는 죽었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야.”
“…….”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 거라면, 차라리….”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쓸데없는 마음 소모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토 하루키도 그런 인간 중 한 명이었고 실제로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하는 편에 속했으나.
아무래도 이건 다른 문제인 모양이다.
목이 붓는 듯한 감각이 있었다. 눈시울에 저절로 열이 몰린다. 하루키는 그 감각이 무엇인지 알아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창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냐, 아냐, 난 울고 싶은 게 아냐.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러나 눈물을 관장하는 것은 뇌세포가 아니어서 단호한 내지름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루키는 숨을 들이쉬려다가 실패했다. 그것이 흐느낌이 되었다.
“돌아가, 가버리라고.”
알파와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전부 꺼내 보인다고 해서 이소이 사네미츠가 전부 받아준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가 전부 받아줘야 한다는 의무도 없다. 오리진 알파는 자신의 일부이지만 이소이 사네미츠는 자신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아토 하루키의 타인이다. 그 사실이 아프도록 가슴을 조여 왔다. 오래도록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숨이 떨린다. 하얀 바닥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하루키는 떨리는 손을 움직여 눈가를 문질러 닦아내고는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쫓아내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토 하루키는 아버지에게 살갑게 군적도 없으니까. 금방 끝날 일이다.
금방 끝날 일인데.
“…아니야.”
“뭐?”
“사라진 건, 아니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사네미츠가 병실로 걸어들어 온다. 미닫이 형태의 문이 소리도 내지 않고 닫혔다. 위태로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설 뻔했던 하루키는 무언가를 부정하듯이 몸을 뒤로 물렸다. 벽은 단단하다. 사네미츠는 힘겨운 얼굴로 다가오면서도, 하루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건, 죽는다고 끝나지 않아. 영혼은 어딘가로 떠나더라도, 몸은 이 세상을 순환해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언젯적 이야기를….”
“기억하는구나.”
뺨에 천천히 손이 닿는다. 젖은 피부에 닿는 온기가 선명했다. 하루키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을 깜박이는 사이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이 툭 떨어져, 사네미츠의 손가락 사이로 번져나갔다.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 수 없어.”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하루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비는 거침없이 내리고 있었다. 어떤 감정을 구체적으로 대변해주는 일 없이.
“하지만 하루키의 기억은, 세포는 확실하게 누군가에게 계승된 거야…. 그렇지?”
“그런 말장난 같은 소리를.”
“나는, 하루키를 한 번 버렸어.”
사네미츠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이다. 손은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하루키의 손을 쥐고 있다. 눈물에 젖은 손가락이 축축하다. 하루키는 차마 그걸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버리고, 변명하고, 외면하고. 그렇게 하루키의 마음을 죽여 버린 거야. …분명, 이제 더는 용서받을 수 없겠지.”
“그래, 이제 당신이 내 곁에 있어봤자.”
“그러니까.”
손을 잡는 힘이 강해졌다.
“더 이상 버리고 싶지 않아.”
“……자기만족이야.”
“알고 있어, 알고 있어, 하루키. 하지만.”
이마가 품에 닿는다. 뻗어나온 사네미츠의 팔이 천천히 하루키의 몸을 감싼다.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라리 애원이었다.
“부탁이야, 가지 말아줘.”
“……….”
“외톨이가 되지 말아줘….”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하루키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듯이 주저앉은 사네미츠는 여전히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방금 전 흘러내린 눈물자국이 희미하게 당기는 기분이 든다. 시계바늘이 째깍거리다 침묵하는 동안,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새삼스레 생경했다.
“그런 말을….”
비난은 아니었다. 탄식도 아니었다. 하루키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무엇으로 정의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하얀 벽을 보다가, 자신을 끌어안고 꼼짝도 않는 사네미츠를 바라보다가.
“어떻게 당신이.”
그 이상의 감정을 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토 하루키는 타오르는 불꽃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려는 사람처럼 팔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그 등을 천천히 붙잡았다. 깊은 물에 빠진 아이가 제 아버지에게 매달리듯이.
“어떻게 당신이 해…?”
사네미츠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기실 대답하는 것이 무의미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 질문을 던지는 당사자가 원하는 것은 어떤 매끄러운 대답이 아니었으므로.
빗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울기에는 적당한 날이었다.
“그래서, 어디에 있었어?”
“병실 앞에 있었어요.”
“들어오지도 않고?”
“중요한 분기점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레이지와 사네미츠는 그대로 병실에 하룻밤 묵었다. 본래 간병인은 한 사람만 묵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네미츠가 어떻게 해서든 하루키의 곁을 지키려고 했던 탓이다. 나중에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제대로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하루키의 말에 사네미츠는 머쓱하게 웃다가 매점에서 마실 것을 사오겠다며 후다닥 나간 참이었다.
“분기점은 뭔데?”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는 뜻이에요.”
“네가 오기만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런 것 치고는 꽤 사이가 돈독해진 것처럼 보이, 아야.”
비는 그친 지 오래였다. 창문 바깥으로는 어제 내린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푸른 하늘과 깨끗한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손날로 의동생의 이마를 때린 하루키는 한숨을 내쉬고는 위문품으로 받은 사과를 깎았다. 자신에게 맡겨봤자 유사 사과주스가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레이지는 얌전히 과도의 주도권을 포기한 상태였다.
“죄송해요.”
“뭐가? 별로 화 안 났어.”
“아버지를 좀 더 빨리 만나게 해드리지 못한 거요.”
균일하게 껍질이 벗겨진 사과가 통, 하고 잘린다. 하루키는 솜씨 좋게 깎은 사과를 당연하다는 듯이 레이지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환자에게서 위문품을 받아먹게 된 레이지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그런 걸 사과해? 회피하고 고민한건 아버지잖아.”
“으어이아오.”
“다 먹고 말해.”
“그렇지만요.”
“빨라.”
0.3초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속도로 사과를 먹어치운 레이지가 말을 이었다.
“형이 너무 크게 다쳐버렸으니까.”
“인과관계를 착각하면 안 돼, 레이지. 아버지가 반년 동안 나랑 연락도 거의 안 한 건 내가 당한 사고랑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야.”
“그래도요. 기분 문제랄지.”
“레이지는 잘못 없잖아. 아버지가 지지부진했던 게 문제지. 그렇게 본다면 사고를 당한 것도 나쁘지는 않네.”
“그런 말을?”
하루키는 웃고는 다음 사과 조각을 자신의 입에 밀어 넣었다. 붉게 잘 익은 사과에서는 적당한 단 맛이 난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말야.”
“네.”
“옛날이야기를 해줄게.”
레이지는 조금 침묵하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제가 들어도 되나요?”
“들어줘. 가족이잖아.”
네, 믿음직한 동생이죠. 레이지가 금새 능청을 떤다. 하루키는 가볍게 웃고는 그 입에 사과 조각을 또 넣어주었다.
접시 위에 사과가 반절 정도 남았다.
그게 누구의 몫인지는 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이바 이부키 교수님 현재 개인면담중
카미토모 대학 인간과학부 사회복지학과 소속 신입생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이 있다. 그건 외모에 혹해 아이바 이부키 교수의 수업을 수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단정한 외모에 늘 깔끔한 복장,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한 호감을 수업을 향한 열정으로 착각했다가 성적표가 너덜너덜해진 학부생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던가. 그러나 선배들의 진심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직 순수한 신입생들은 모닥불로 모여드는 부나방처럼 재앙 속에 스스로 뛰어들고 마는 것이니 사회복지학과 과실에는 언제나 한탄과 눈물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으음.”
응접용 테이블에 앉아 빙긋이 웃는 아토 하루키 앞에서 아이바 이부키가 침음을 낸다. 그 앞에 놓여있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로 커피를 별로 즐기지 않는 하루키를 위해 이부키가 준비해두는 홍차였다. 어딜 어떻게 봐도 상당한 고가로 보이는 찻잔은 백색 바탕에 아름다운 흑녹색 무늬가 그려져 있어, 안에 담겨있는 연한 찻물을 도드라지게 한다. 하루키는 그 차로 잠시 입술을 축이곤 장난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교수님을 찾아뵐 생각이냐?!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차분하게 생각해! 라면서.”
“그것 참. 무어라 해야 할지. 나름 학생들과는 양호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건가.”
“이부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보다는 신입생에게는 버거운 상대다, 같은 마음이겠지.”
“어렵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교육의 길이란 건 역시 어려워.”
아이바 이부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찻잔을 들었다. 그 뒤에는 책으로 가득한 책장이 있다. 비단 그 뒤쪽만 아니라 연구실 전체를 감싸듯이 놓인 책장은 모두 그의 전공 혹은 연구와 관련된 서적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물론 방의 안쪽에 놓인 연구용 책상 위에도 몇 권인가의 책이 놓여있다. 언젠가 이 모든 책의 위치를 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가 책장의 위치별로 분류한 도서목록을 엑셀로 보여주던 이부키를 떠올리고, 하루키는 조금 그리운 기분에 잠겼다.
“그래도 잘해내고 있잖아? 아이바 이부키 교수님.”
“다 학생들이 지지해주는 덕분이지. 교육이란 받는 이가 저어하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니.”
“아이바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울면서 나온 학생이 한 둘이 아니라는 말에는 과연 놀랐지만.”
“프흡.”
이부키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하루키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칠칠치 못한 아이처럼 차를 마시다 사레가 들려버린 이부키가 찻잔을 내려놓은 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입가를 가렸다.
“설명하게 해주게.”
“해보세요.”
“맹세컨데 모진 말을 하진 않았네. 연구실까지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각자의 고민을 안고 있는 법이기에 진지하게 마주하며 심도 있는 질문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자신의 내면 깊숙한 부분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 거기에 닿게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울어버리고 말더군. 학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그건 분명 이부키가 자신들의 결여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주어서겠지. 사람들은 그런 부분을 본능적으로 감추려고 하니까.”
“그들이 필사적으로 숨기려하는 부분에 발을 들였다는 자각은 있어. 이야기 도중에 항의하거나 화를 내면서 나가버린 학생도 있으니까. 가끔은 학생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그들을 단순한 상담 이론의 모르모트로 삼은 건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들어.”
“…….”
“그래도, 가끔씩 나를 다시 찾아와 ‘그때는 감사했습니다.’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학생들이 있어. 그때만큼은 나도 내가 교육자가 되어 누군가를 이끌 수 있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끼네.”
“쑥스러워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학생들은 분명 많을 거야.”
“그렇다면 기쁠 텐데.”
이부키가 미소짓는다. 그 모습은 몇 년 전에 본 것과 같으면서도, 동시에 한없는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하루키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응접용 테이블에 놓인 전자시계가 아무런 소리 없이 오후 3시 24분을 띄웠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음, 실은 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여러모로 공사다망할테니 택배로 보내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직접 건네고 싶어서 조금 욕심을 부렸어.”
“이부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뭘까. 조금 기대해도 되려나?”
“거창하게 기대 받을 만한 역작은 아니지만, 이것일세.”
그렇게 말하며 이부키가 작은 종이 가방을 내민다. 그것을 받아든 하루키는 종이 가방이 작은 크기에 맞지 않게 의외로 묵직한 무게를 가졌음을 알아차렸다. 뒤이어 들여다본 내부에는 제법 두꺼운 책이 들어있다. 손으로 잡아서 꺼내보면, 단순하지만 세련된 표지에 새겨진 제목과 저자명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당신의 마음에 그림자가 지더라도』
『저자 - 아이바 이부키』
“월간지에 1년간 실었던 칼럼을 한데 묶어 만든 책일세.”
“그러고 보면 수업에 시험에 강의에 마감까지 겹쳐서 큰일이라고 했었지. 이부키가 책을 냈다니 신기하네. 이걸 나에게 그냥 줘도 되는 거야?”
“괜찮네. 저자 증정용으로 온 게 있으니까. 안에 사인도 했는데 한 번 볼텐가?”
“이부키의 사인? 그건 궁금하네. 어디 보자.”
약간은 두꺼운 표지를 넘긴다. 차분한 회백색의 면지가 넘어가면 책의 제목과 저자명, 출판사명 등이 간략하게 적힌 표제지가 있었다. 거기에 적힌 「초판 인쇄」라는 문구를 다소 감명 깊게 바라본 뒤 또 한 장을 넘긴다. 온통 새하얀 페이지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한 줄의 문장이 보였다.
【나의 친구 아토 하루키에게 바친다】
시야에 담기는 문자열은 더없이 간결한데 뇌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다. 하루키는 일단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웃음은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한숨 비슷한 것이 되었다. 입가를 가리기 위해 들어 올린 손끝이 아주 약간 떨리고 있었다.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알 수 없는 열기가 모여든다. 하루키는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쉰 다음에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부키, 이건.”
“그 칼럼은 출판사측의 요청으로 쓴 것일세. 하지만 카미토모 대학의 사회복지학과 교수라기보다는 아이바 이부키라는 내 개인의 이름을 걸고 집필했어. 내용도 일종의 인간심리 연구에 가까워.”
“…내용을 요약하자면?”
“「언제고 자신을 잃지 말라」정도일까.”
아이바 이부키는 웃는다. 날은 흐린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누군가가 붓을 휘둘러 그린 듯한 새털구름들은 푸른 하늘을 더 높아보이게 했다. 연구실 창가에 놓인 극락조 화분의 잎사귀가 열린 창문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맞아 잔잔하게 흔들린다. 하루키는 문득, 이부키의 눈가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주름을 보았다.
이제는 그도 마흔 다섯이다.
눈가를 스치는 바람이 시리다. 하루키는 창문을 닫을까, 같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고개를 숙였다. 내지 위의 글씨는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하얀 여백 위로 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이제는 정년퇴임하여 고향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 쿠라치 테루미,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된 야나기 니나, 검도 도장의 사범이 되어 늠름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쿠마자키 카렌, 자신만의 시스템 엔지니어링 회사를 꾸려나가는 쿠마자키 리쿠,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관록이 붙은 얼굴로 휘하의 직원들을 이끌고 있는 친우 오토와 루이까지.
26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바뀌지 않았다.
“일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 하나의 시나리오였고 내가 그대를 도운 일이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저 시나리오가 원활히 흘러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작위적 연출 중 하나라면 어떨 것 같냐고.”
“그랬었지.”
“그때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하나?”
“너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등장인물을 살해하는 시나리오는 없어. 모든 일에는 크건 작건 나름의 인과가 존재하네. 그날 그 장소에 존재했던 나는 그 순간 그대를 도울 수밖에 없는 인과로 이루어져 있었던 거겠지. 나는 그렇게 행동했던 나 자신에게 큰 부끄러움과 약간의 자랑스러움을 느껴. 그때의 체험이 지금의 나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좋아.
─그러니 안심하고 들어주게, 하루키 공. 나는 그대를 만났기에 비로소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 모든 것이 시나리오의 연출이었다 하여 후회나 회의감 같은 걸 느끼겠는가?
“그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나는 그대를 만난 끝에 ‘아이바 이부키’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대도 우리를 만난 인과의 연장선에서 존재하고 있는 ‘아토 하루키’인거야.”
“…….”
“그대는 혼자가 아니야. 언제 어느 때라도, 결코.”
“………그.”
그렇다고 해도 너무, 너무 크잖아 이건.
하루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오열이 흘러내렸다.
아토 하루키는 거의 늙지 않는다. 지고천 연구소 사건이 일어날 무렵에도 종종 학생으로 오인 받던 외모는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아, 올해로 54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면 재학생 정도로 인식되었다. 한 번은 오토와 루이와 같이 있다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냐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말을 건넨 사람은 사교를 위해,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의례적으로 건넨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 사건은 하루키의 마음에 꽤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자신이 자신으로서 발버둥치고 끝까지 연기해낸 희극의 마지막은 당연히 사랑스러웠다. 하츠토리 하지메에게서 오리진을 인계받은 일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과 점점 벌어져가는 어떤 격차는 하루키의 마음속에 작은 확신을 심어주었다.
자신이 그들과 같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같이 존재하지 못할 시간보다 짧으리라는 확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음을 나눌 이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부러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로 쿠라치 테루미를 만나고, 야나기 니나를 만나고, 쿠마자키 카렌을 만나고, 쿠마자키 리쿠를 만나고, 오토와 루이를 만났다.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탐정이라고 해도 좋을 시나노는 얼굴이 젊어보이니 좋지 않냐며 이런저런 농담을 건네온다. 레이지는 이따금 일본으로 건너오거나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탈리아로 건너와 같이 LDL 활동을 하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권유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루키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천천히, 한 걸음씩, 단절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모두의 장례식을 맞이해도 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긴 장례행렬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모든 사람들이 물러간 뒤에야 비로소 무덤 앞에 서서 몇 마디 말을 건넬 수 있겠지. 어떤 종류의 체념과 예감은 너무나 견고하여 그 자체로 완성된 미래도가 되기도 한다. 아토 하루키는 그 모든 것에 어떤 유감도 느끼지 않았다. 않을 생각이었다.
쿠라치 테루미는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 샀는데 영 쓸 일이 없다며 금빛의 넥타이핀을 건넸다. 야나기 니나는 보자마자 당신이 생각났다며 덩굴식물 모양의 커프스 단추를 선물했다. 쿠마자키 부녀는 효험 좋다는 부적과 함께 인상적인 열쇠고리를 보내왔다. 오토와 루이는, 그에게서 받은 것은 셀 수조차 없다.
그렇다.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다.】
그 마음이 그들이라고 하여 다를 리가 없었는데.
“그대의 걸음은 분명 길겠지.”
이부키의 목소리는 조용하다.
“하지만 그 걸음에 있는 모든 것이 그대의 일부가 되어갈 거야. 한껏 끌어안고, 잊지 말게.”
다른 모든 학생들도 이런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대를 잊지 않아.”
자신의 상처를 조용히 쓸어주고, 같이 아파하고, 그래도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이끌어주는 목소리를.
“…이부키. 완전히 달변가가 되어버렸네.”
“내면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화술도 필요하니까.”
“정말이지, 뭐가 책에 사인을 해뒀다야. 보기 좋게 휘말렸어.”
“기껏 준비한 말인데 바쁘다고 그냥 가버리면 의미 없지 않은가.”
“교활하긴.”
“연륜이라고 듣지.”
찻잔은 비어버렸다. 그러나 전기포트에 남아있는 찻물은 아직 따뜻한 그대로였다.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비어있다면 다시 채우면 된다. 식어버렸다면 다시 데우면 된다. 모자라다면 채우면 된다. 남겨질 것 같다면 기억하면 된다. 잊어버릴 것 같다면 다시금 떠올리면 된다. 그것은 자신을 이루는 일부이므로,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세포이므로.
괜찮다고 했는데도 이부키는 굳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아토 하루키를 배웅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는 그를 보고, 아토 하루키는 충혈된 눈으로 웃어버렸다. 문이 닫히자 아이바 이부키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한쪽 손에는 그가 건네준 책의 무게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루키는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자세를 바로 했다.
언젠가 어느 순간에, 이 때를 떠올리면 웃게 되겠지.
상상해보면 썩 나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나왔을 때, 아이바 교수의 개인면담 피해자가 또 나왔다며 사회복지학과 과실로 불려가 많은 위로를 받은 것은 덤이었다.
OUTRO
그런 감각이 있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인데도 이전에 본 것처럼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느낌, 「데자뷰」라는 호칭으로도 유명한 기시감이다. 아토 하루키에게는 그날의 도로가 그러했다. 일본에서의 긴 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아버지와 동생을 택시로 배웅해 보내려던 때였다. 젊은 기사는 두 사람의 캐리어를 보고 트렁크를 열어 손수 짐을 옮겨주었다. 선물을 품에 안은 레이지와 사네미츠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아토 하루키는 거기에 화답하듯이 손을 흔들다 멈칫했다.
차량의 문이 닫힌다. 어째서인지 얇은 유리잔이 깨진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가슴이 철렁였다. 하지만 무엇을 불안해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일본과 이탈리아를 왕복한 사람들이다. 이제 와서 길을 헤맬 염려도 없거니와 행여 강도를 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만약 당하더라도 강도 쪽을 걱정해야겠지) 그런데도 아토 하루키는 도로 중간까지 걸어 나가 멀어지는 택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앞으로 나가 있었던 탓인지 뒤에서 경적이 들린다. 그 소리에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하루키가 서둘러 인도로 돌아가 민망해하는 사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차량이겠거니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설마 하고 시선을 뒤로 돌려보면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가 보였다. 이소이 사네미츠가 다급한 듯이 걸어오다가, 어정쩡하게 멈춘다.
“…그, 하루키.”
“뭔가요.”
“혹시, 불렀어?”
아뇨, 안 불렀는데요. 그쪽의 자의식과잉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주는 대신 아토 하루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음엔 가디건 제대로 챙겨오라고 생각한 게 들렸나보죠?”
“앗, 응. 미안하다. 다음부턴 잘 챙길게….”
사네미츠가 머쓱한 얼굴로 택시로 돌아간다. 하루키는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타이밍 좋게 뒤를 돌아본 사네미츠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괜히 민망해져 시선을 돌린다.
“또 올게, 하루키.”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키는 그쪽을 흘끔 바라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이 상쾌했다.
〔후기〕
안녕하세요. 미키엘Mikyel입니다.
세포신곡 2차창작 연성 재록본 『나이테NAITE』를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토 하루키를 메인으로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읽으시면서 즐거우셨다면 기쁩니다. 여기서는 기념비적인 재록본이기도 하고 각 단편들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적어보고자 합니다.
【INTRO】
도달점 S의 전개는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레이지에게도 하루키에게도 사네미츠에게도…. 특히 마지막 희망의 끈과 같았던 아버지가 먼저 떠나버린다는 점에서 하루키에게는 정말 마음이 갈갈이 찢기는 경험이었을 거에요. 저는 울거나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최애를 정말 좋아하지만 그때는 정말 슬펐습니다. 하루키는 머리가 좋으니까 분명 눈치챘겠죠.
【아토 하루키가 존재하지 않는 상냥한 세계】
시간배경이 조금 애매해서 INTRO 앞에 넣어버릴까 고민했습니다. 여러모로 생각을 거듭하여 현재의 위치가 되었습니다. 하루키의 지고세포가 레이지에게 이어져, 일종의 비전을 보여주게 되었다는 동인설정입니다. 다정한 세계임에도, 현재를 택하는 레이지(=키레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명에서 모 장르의 유열 신부를 의도하진 않았습니다. (진짜로) 제목 구성은 아카키 히로타카 작作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 따왔습니다. 내용적 공통점은 없습니다.
【그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지 말아줘】
약지에 반지 낀 아토 하루키가 보고 싶다는 일념에서 출발한 이야기입니다. 루이의 유사청혼(joke), 하루키의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이소이 부자 등등 파생될 수 있는 상황을 모조리 밀어 넣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손에는 반지가 정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지하철 창문으로 보이는 그 풍경은 충격의 강도는 차치하더라도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았을까요? 주접 발언 죄송합니다. 반지는 의뢰인에게 제대로 돌려주었습니다.
【가족사진을 찍지 않을래요?】
사네미츠와 레이지와 하루키의 우당탕탕 가족사진 찍기. DLC를 보면 레이지의 사진이 찍힌 앨범이 있던데, 그 연장선상에서 가족사진을 원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네미츠가 하루키에게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네요. (매우 간단한 행동이기는 합니다만) 스냅 사진은 같이 찍었겠지만 정식으로 스튜디오에서 찍는 건 처음 해보는 일이라 하루키는 뻣뻣하고 사네미츠는 긴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레이지가 남몰래 힘냈겠죠. 장해. 이후로 셋이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시나노 에이지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지 않는다】
시나노는 마음이 정말로 강하고 올곧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저지른 죄들을 제 일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보통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저라면 현실 도피했습니다.) 티나와 아카네도 분명 시나노를 지탱해주는 이들이겠지만, 살아있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편지는 제대로 아카네에게 전해졌을 거에요. 해당 소재는 트친인 이소님과의 대화에서 구체적 형태를 얻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합니다.
【쿠마자키 와플 메이커 절찬 운영중】
재록본을 위한 신규 단편입니다. 기존 작품에서 언급이 적었던 이들을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쿠라치 테루미, 야나기 니나, 쿠마자키 부녀가 앞으로 마음 꺾이는 일 없이 평온하고 강인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약간 넣었습니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경쾌하게. 얘들아 행복하자…. 소재에 대해 한 마디 하자면, 별 생각 없이 들렀던 집 근처의 와플 가게가 엄청나게 맛있어서 감명 받은 것이 계기입니다.
【제 이름을 남기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바람이라】
이전 제목은 ‘스페셜 제로 다이브 33’입니다. 하루키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단편이라 조금 고민했지만 결국 넣게 되었습니다. 카노 아오구(=아오기 카나오)에 대한 동인 설정을 아낌없이 넣었어요. 이러한 오독이나 재편을 카노 본인이 알게 된다면 히죽히죽 웃을 것 같네요. (아니라면? 안녕히 계세요.) 하지만 친구가 생겼으며, 그에게 기억될 수 있다면 이제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공식이니까! 그 부분은 지켰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지옥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손을 흔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꽤 나쁘지 않은 일이겠죠.
【오랜만이야 웃어줄 순 없겠네 유감일까】
이전 제목은 ‘Hello I'm Lie It's been a long time’입니다. 세오도아 리들과 아토 하루키를 마주치게 만든 최초의 글 연성이네요. 저는 이상하게 이 둘의 조합이 너무너무 마음에 듭니다. 전 사실 불멸자 조합을 끝내주게 좋아하는 걸까요? (하루키를 불멸자로 해석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르고, 상이하지만 살짝 연결되어있는 두 사람이 좋습니다. (논커플링적인 의미로) S루트를 들어가는데 필수 요소인 아카시아의 신민 시절 사진을 세오도아가 본다면 어떤 반응일까를 생각한 결과입니다.
【찬 겨울에 북서풍 불어올지라도】
이전 제목은 ‘추동秋冬에 북서풍 불어올지라도’입니다. 처음에는 지고천 연구소 사건보다 한참 과거 시점이라 그냥 뺄까 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하루키 중심의 이야기를 하는데 루이가 빠질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서 넣었습니다. 여러모로 전개를 수정하고 덧붙여서 한겨울의 이야기가 되었네요. 어떤 꽃은 혹독한 추위를 보냈을 때 비로소 아름답게 핀다고 합니다. 하루키에게는 그 해 겨울이 그런 의미였겠지만,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어 마냥 쓸쓸하고 괴롭진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물은 피보다 진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재록본을 위한 신규 단편 두 번째입니다. 재록본 단편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졌기에, 처음부터 후반부를 장식하는 단편이 될 것을 상정하고 만들었습니다. 분량도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아토 하루키에게 남은 이소이 하루키의 마지막 사인死因의 흔적.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무겁고 복잡한 소재라고 생각해 다른 것을 생각했습니다만 결국 정면 돌파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단편과 비슷한 결말에 도달했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바 이부키 교수님 현재 개인면담중】
많은 분들이 특히 좋아해주신 단편입니다. 올리고 나서 이렇게까지 반응이 나올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아이바 이부키를 대학원 루트로 보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이부키라면 잘 견뎌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해) 사람들이 성장하고, 변해가고, 그럼에도 바뀌지 못하는 것들과, 그 곁에 남아있을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전의 단편이 가족의 손을 잡는 이야기라면, 이 이야기는 동료들을 의지하는 이야기입니다. 해당 연성은 트친인 벚꽃바님과 대화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얻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OUTRO】
지고점이 진정한 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S의 기억이 휘발되어 날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소이 사네미츠에게도 어느 정도 잔재가 남아있지 않을까요? 깨끗하게 날아갔다면 용서 못해. 이 다음에는 하루키가 가족들을 만나러 이탈리아로 가게 될 겁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같이 웃고, 다시 돌아오고, 또 만나게 되겠죠. 그게 해피 엔딩이라는 거니까요.
타이틀인 『나이테NAITE』가 영문명 Growth-Ring으로 병기되지 않은 것은 일본어 발음 나이테(ないて)와 발음이 겹치는 것을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해석하자면 『울고서泣いて』 라는 의미입니다. 나무에 나이테가 한 겹 한 겹 쌓여가는 것처럼, 울고서 나아가고, 그렇게 나아간 끝에 언젠가 다시 웃게 되기를. 그런 마음을 담았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hanks to : 표지 및 내지 편집을 맡아주신 썬칩님.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는 많은 분들.
이 책을 구매해주신 여러분.
서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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