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동秋冬에 북서풍 불어올지라도
중학교 시절의 아토 하루키와 오토와 루이.
-두 사람의 학창 시절을 날조했습니다.
-그 외 동인 설정 다수.
원예부의 수레는 오래되어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지만 바퀴는 무리 없이 굴러간다. 오토와 루이는 인근 꽃집에서 얻은 배양토를 수레 위에 차곡차곡 싣고 원예 부실로 돌아왔다. 넓은 운동장과 학교 담벼락 사이의 아주 작은 공간에 위치한 원예부 건물은, 부실이라기보단 간이온실이라고 말하는 편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 앞에 아토 하루키가 쭈그려 앉아있다. 아마도 몇 년 전 졸업한 선배가 가져왔을 낡은 앞치마에 헐렁한 목장갑을 끼고 화분에 담긴 식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 전에 가을꽃을 한창 다 피워낸 은목서 화분이다. 그 향기가 너무나 진하여 도저히 온실 안에는 두지 못하고 바깥 입구 쪽에 두자, 지나가던 야구부원이 이건 어디서 나는 향기냐며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랬던 화분도 지금은 꽃이 전부 져 나뭇가지와 잎새만이 남아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분명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겠지. 전부 져버린 은목서꽃을 보고 루이가 그렇게 말하자, 하루키는 이건 화무십일백花無十日白이 어울리지 않겠냐며 떨어진 하얀 꽃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아토 토모코의 상을 치르고 다시 원예부로 돌아온 날, 느닷없이 분갈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오토와 루이는 주위로부터 문무 양도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식물을 돌보는 문제에선 자기보다 하루키의 의견을 존중한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그것만? 이라며 어이없는 얼굴을 할 지도 모르지만) 때문에 하루키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렇다면 배양토가 필요할 테니 자신이 구해오겠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장래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화단을 돌볼 때나 가끔 교무실에서 연락이 오는 원예부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것은 오토와 루이와 아토 하루키 정도였으니까.
"하루키, 흙을 구해왔다."
"고마워, 루이."
하루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루이는 그제야 하루키 곁에 놓인 커다란 플라스틱 화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루이가 꽃집에 다녀올 동안 온실 창고 어딘가에 있던 것을 찾아내어 씻어두었던 모양이다. 내가 돌아오고 나서 같이 해도 되었을 텐데. 루이가 그렇게 말하자 하루키는 가만히 있기 심심했을 뿐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을 들여다보면 이미 마사토까지 깔려있었다. 하루키가 한 작업이니 일부러 화분을 뒤집어엎어 거름망이 제대로 끼워져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토와 루이는 자신이 옮겨온 배양토 수레를 한쪽에 세워둔 뒤, 하루키를 도와 은목서 화분을 같이 잡고 거꾸로 들었다. 하지만 안쪽의 흙은 화분과 함께 단단히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 간단히 벗겨지지 않았다. 소년들은 모종삽을 들고 흙을 푹푹 파내고, 물을 뿌려 뿌리를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려는 등 악전고투를 하며 가까스로 화분과 은목서 뿌리를 분리해냈다. 작은 화분 모양 그대로 굳고 뒤엉킨 뿌리가 젖은 흙을 떨구며 뽑혀 나왔다.
"미안. 괴로웠지."
아토 하루키가 얽히고설킨 뿌리를 천천히 어루만진다. 루이는 은목서 나무줄기를 단단히 붙잡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이, 내려놔도 돼. 분갈이 전에 뿌리를 조금 정리해야겠어."
"그래."
은목서가 가로눕는다. 루이는 목장갑을 조금 털어낸 다음 하루키가 찾아낸 화분 쪽으로 다가갔다. 분갈이를 할 때는 옮겨심는 쪽 화분에도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뿌리 정리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니 하루키에게 맡겨도 좋을 터였다. 배양토의 포장을 뜯고 모종삽을 이용해 적당한 위치까지 흙을 도닥도닥 덮고 뒤를 돌아본 루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흙과 한 덩어리로 뒤엉킨 은목서 뿌리가 하나도 정리되어있지 않았다.
"하루키?"
이름을 부르면, 답이 없다.
"하루키."
다시 한번 부른다.
키, 라는 마지막 발음이 혀에서 조금 헛돌았다.
"…이상하네. 뿌리, 잘라내야 할 텐데."
"……."
"왠지 못하겠어. 어째서지."
"내가 할까."
"아냐, 아냐…. 루이는 할 필요 없어, 루이는."
깡, 하고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난다. 함성이 높아지며 운동장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루이는 내가 아니니까."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지."
아토 하루키의 손에서 작은 원예 가위가 찰칵거린다. 문득, 오토와 루이는 짙은 향냄새를 맡았다. 그건 오봉 날이 오기 전, 가족들이 한데 모여 현관 앞에서 피우곤 하는 무카에비迎之火의 연기 냄새와는 조금 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슬프고, 무겁고, 타고 남은 재처럼 하얗게 바래있는 것 같은.
"잘라내지 않으면, 안되는 거니까."
가위가 찰칵거린다. 엉킨 뿌리가 뜯어진다. 흙이 부스러진다. 새로이 옮겨 심어지는 것은 으레 그렇게 되어야 하기 마련이었다. 털어내야 한다. 잘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를 새로 뻗어낼 기회를 얻어도 이전의 덩어리에 갇힌 그대로 풀려나지 못하므로.
맞는 말이라고, 루이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키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루키."
"응."
"그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텐데."
"……."
"옮겨 심은 뒤엔 배양토를 넣고 다시 마사토를 덮어야겠지."
"………."
"그리고 물을 준 뒤, 그늘지고 바람 없는 자리에 조용히."
"……………."
"식물은 조심히 돌봐야 한다며, 네가 가르쳐 준 것이지 않은가."
그랬던가. 중얼거리는 하루키의 목소리는 무색투명하여 맑은 하늘 아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온실 앞마당에 흩어진 나무뿌리와 흙덩어리들이 무언가를 대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거, 토모코 씨가 가르쳐준 거야."
"그런가."
"이제 곧 정원에 좋아하던 동백꽃이 필 텐데."
"……."
"왜 나 혼자 그걸."
그걸.
하루키가 몸을 웅크린다.
그게 마치 씨앗으로 되돌아가려는 모습 같아서, 오토와 루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같이 볼까."
아토 가家의 동백꽃은 유달리 붉고 진하다. 그 사이에 딱 하나 하얀 동백꽃이 피어있는 것을 가리키면, 아토 토모코는 '특별한 동백꽃을 찾았구나.'라며 소리를 내 웃었다. 그건 굉장히 따뜻하고 다정하고 상냥한 웃음이어서, 루이는 어쩌다 피어있는 하얀 동백꽃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렸다.
"아니면 피어난 꽃을 전부 따서 토모코 씨의 무덤에 바치러 갈까."
동백꽃은 질 때 꽃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지지 않고 한 송이가 통째로 진다. 그래서 겨울이 지날 무렵 아토 가를 방문하면 동백나무 아래가 붉게 물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퍽 섬뜩할 풍경이었으나 아토 토모코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꼭 붉은 비단같이 아름답지 않니?' 그런 사람이라면 무덤을 동백꽃으로 장식해도 기뻐하면 기뻐했지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싫다면 뽑아버리마."
"버리마, 라니. 그거 루이보다 크다고."
"어떻게든 해보지."
"식물 학대."
이제 얼추 뿌리만 남은 은목서 잎사귀가 찬 바람을 맞아 흔들린다. 야구부에서는 연습 시합이 끝났는지 우렁찬 인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토 하루키는 메마른 웃음을 몇 번인가 토해내더니, 루이가 있는 뒤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옹송그리고만 있던 몸을 조금 폈다. 멀리, 학교 어딘가에서 취주악부가 관악기를 불고 있었다.
찬 바람이 분다. 이 계절이라면 북서풍이다.
"루이."
"음."
"고마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만."
"해줄 거잖아."
오토와 루이는 무엇을,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본 아토 하루키가 살짝 웃었다.
"일단은 분갈이를 마저 도와줘."
"그러지."
"그다음에는."
"다음에는?"
"동백꽃이 필 때까지, 기다려볼까."
"…그래."
겨울에 피는 동백꽃에는 이따금 작은 새가 날아와서 앉곤 한다.
아직 어린 소년들은 아주 잠깐, 그 새의 날갯짓 소리를 떠올렸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