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I'm Lie It's been a long time
아토 하루키 + DLC의 그 사람(스포일러)
-DLC 등장인물과 SS+ 루트의 단서가 나옵니다.
이탈리아 행 비행기에 들어가기 전, 이소이 레이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긴 통화를 통해 이소이 사네미츠가 원고 송신을 코앞에 두고 데이터를 날려 먹은 비극적 경위와 그 탓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 노트북 데이터 센터를 찾아가고 있음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는데, 미안하게도 하루키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안됐네. (웃음)" 이라고 전해줘. 어차피 귀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지만." ) 하지만 이런 연유로 인해 한데 묶여 행동하게 된 레이지와 사네미츠 대신 LDL의 리더 세오도아 리들이 자신을 마중하러 갈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토 하루키는 잠시 침묵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이소이 레이지가 큼큼거렸다.
"죄송함다. 저라도 같이 가는 게 하루키 형도 마음이 편할 거란 건 알지만…."
"아냐, 괜찮아. 세오도아 씨는 좋은 사람이잖아. 게다가 군중 속에서 찾아내기도 쉽고."
"그건 인정이지만요."
"대신 너무 눈에 띄어서 곤란할지도?"
"그것도 인정."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 뒤, 아토 하루키는 적당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30시간 내내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
"정말 난리였어. 하필 츠바이크는 편집 일로 회사에서 못 움직이지, 사네미츠는 넋이 나가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안 되지, 레이지는 뭔가 해보려고는 하는데 지식이 없어서 허둥지둥거리고."
"결국 그 민달팽이가 마감을 일찍 지켰으면 되는 일이잖아요. 도대체 몇 명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야."
"아하하, 하루키는 사네미츠에게 엄격하네."
"매정하고 냉정하고 엄정하고 냉혹하고 잔학무도하다고 해주세요."
"풍부한 어휘력은 좋지. 짐은 이쪽에 실어."
둥글고 매끈하게 생긴 검정 벤틀리의 트렁크가 열린다. 아토 하루키는 감사를 표하고는 자신의 캐리어를 차에 실었다. 이번에는 장기휴가를 얻어 일주일 정도의 체류인 데다 시나노 에이지가 레이지에게 보내는 『디타검』관련 자료도 있는 탓에 이래저래 짐이 많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차 트렁크에 들어 있는 짐이 애초부터 적다는 점일까. 꽤 가볍게 다니시네요. 아토 하루키가 건넨 말에 세오도아가 웃었다. 무거우면 제대로 달릴 수가 없잖아.
"스피드를 즐기시나요?"
"응, 너무 즐겨서 옛날엔 절벽을 수직으로 들이받았던 적도 있어."
"그건 전혀 웃을 수가 없는 이야기잖아요."
텅, 하고 트렁크가 닫힌다. 이어 하루키를 조수석으로 안내하고 운전석에 앉은 세오도아가 품에서 능숙한 동작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제 와서 그가 피우미치노 국제공항에서 LDL의 아지트로 가는 길을 검색할 리가 없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토 하루키가 잘 알고 있다. 이전 하루키가 비행기 시간을 터무니없이 착각해버렸을 때 온갖 도로를 갈아타고 아슬아슬하게 엑셀을 밟아대며 공항으로 가는 소요 시간을 극단적으로 단축해준 게 다름 아닌 세오도아 리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잖아!'라며 엄지를 들어준 장면은 아직도 영화의 라스트 씬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디 보자, 지금 레이지에게 아토 하루키를 픽업했다, 고 전해둘" "세오 씨, 잠시만요."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은 있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지나간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일부러 들쑤셔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냐는 감각. 가만히 있으면 그냥 즐겁게 지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확신.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토 하루키는 다른 무엇도 아닌 탐정이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점과 점에 지나지 않는 단편적인 정보 사이에 선을 긋고, 그렇게 만들어낸 조각을 현실의 빈자리에 채워 넣는 자였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직업병의 발로인 셈이다.
하루키는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지금 수하물이 안 보여서 공항에서 얼마간 체류하게 될 것 같다, 고 해주실래요?"
"……그건 상관없지만, 왜?"
"당신하고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이런, 두근거리네."
가볍게 웃고, 세오도아는 문자판을 두드린다. 화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보였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타자가 길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하루키의 말대로 해준 듯 싶었다. 물론, 직후 세오도아가 이렇게 말해온 덕도 있지만.
"오스티아는 이 계절이면 한산하지. 바다 구경이나 할까?"
"그러죠."
차에 시동이 걸린다. 아토 하루키는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봉투를 의식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
세오도아 리들은 사진을 받아들고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팅 처리된 차의 앞 유리에서는 가을 바다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끊임없이 파도치고 있었다. 이따금, 계절 바람에도 상관하지 않고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이 시야를 가로지른다. 그 외에는 아무도 지나지 않는 해변 풍경이었다.
"의외네."
잘 정돈된 차 안에서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 풍긴다. 인공적으로 조합된 향기였지만 아토 하루키의 마음을 조금 안정시켜 주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주 약간밖에 진정되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응, 정말 의외야. 언제 어떻게 봐도 끔찍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래전에 찍고 잊고있던 졸업사진이 갑자기 들이 밀어진 기분도 있어."
"그런가요."
"다만 의문은 있네."
세오도아가 운전석 시트에 깊이 몸을 기댄다. 품을 더듬던 손길이 부자연스럽게 멈추는 걸 보아하니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피우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비흡연자의 면전에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심기가 불편해지지는 않은 건가. 아토 하루키가 냉정하게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사이 세오도아가 입을 뗐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이건 당신입니까, 왜 모습이 변하지 않은 겁니까, 무엇 때문에 여기 있습니까. 그런 것 정도는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봤자 당신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 것 같다고 판단했거든요. 딱 잘라 말해, 지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도 아니다."
"네."
계절을 놓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흥이 올라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것인지 비치발리볼 공으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지나간다. 골대도 관객석도 없는 회색 모래밭 위에서 웃음 섞인 비명과 외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왜 이걸 나에게 보여주지?"
"일단은, 추억의 물건일까 싶어서요."
"그리고?"
"이걸 이소이 사네미츠에게 넘겨도 상관없을지 묻고 싶어서."
"……아, 그렇군. 과연."
세오도아 리들은 다시 사진을 본다. 그리고 또 과연, 하고 중얼거렸다.
"묻지 않는 걸 택한 건 현명해, 하루키. 네게 무엇을 어디까지 부여해주면 좋을지 감이 안 오거든."
"왠지 불온한 말처럼 들리니 못 들은 거로 할게요."
"그래, 이런 점이 말이야."
아이 중 하나가 비치발리볼을 얼굴로 들이받는다. 그 공에 맞은 여자아이가 균형을 잃는가 싶더니 요란하게 넘어졌다. 한바탕 웃음이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넘어진 아이가 문제의 근원에게 달려가 정강이를 후려친다. 아이들은 왁자하게 웃으며 모래투성이가 된 몸으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일단은, 평범하게 고맙다고 해둘까. 그리운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이런 장소가 아닌 곳에서 갑자기 보게 되었다면 좀 추한 꼴을 보였을지도 모르겠어."
"그럼 이걸 이소이 사네미츠에게 넘겨도 좋은가요?"
"그건… 흠, 어떻게 한다. 너는 그가 이 사진을 받아서 기뻐하리라고 생각해?"
"전 딱히 그 인간을 기쁘게 해주려는 게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말하자면?"
"한 대 패서 날려버리고 싶은 쪽이죠."
세오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창문을 닫아놓지 않았더라면 사방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음, 아니, 미안. 이야~ 진짜 너무하네, 하루키. 사네미츠는 지구 밖까지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제가 알 바인가요?"
"그러게, 네가 알 바 아니긴 해."
얼마나 큰 업보가 있던, 얼마나 큰 망념이 있던.
그건 결국 그 사람이 품고 가야 하는 것이니까.
"그럼 이렇게 할까. 하루키, 나는 잠깐 담배를 피울게."
"네."
"그다음 차를 타고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사네미츠에게 사진을 줘. 이야~ 그렇지만 오래된 사진이었다면서? 조각이라도 모으게 되어서 다행이네."
"…그런가요. 이해했습니다. 그럼 저는 차 안에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있죠. 비행기 안에서 요만큼도 잠들지 못했거든요."
"그래, 도착하면 깨워줄게."
"네, 그럼."
그리고 아토 하루키는 시트를 약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일단 한 번 머리가 편안해지자, 이제까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피로감이 천천히 내부에서부터 밀려 올라왔다. 문득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토 하루키는 생각한다. 정말로 여기서 질문을 멈춰도 좋았던 걸까.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좋았을까. 어떠한 진실을 파내어 먼지를 털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좋은 것일까.
그러면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이다.
괜찮아. 너는
*
"너는 이제 역할을 다했으니까. 은퇴 주역에게 대사를 밀어붙이는 건 꼴사납지."
세오도아 리들은 바닷가의 휴식처에 앉은 채 덤덤히 중얼거렸다. 한 손에는 방금 아토 하루키에게서 받은 아카시아의 신민 시절 사진이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어지간해서는 불이 꺼지지 않는 오일 라이터가 있다. 그걸로 자신이 있는 자리와 이름을 꼼꼼하게 태워 없애며 세오도아는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라이 짱인가. 응, 오랜만이야. 깜짝 놀랐다고 하면 너는 웃으려나?"
"…잊은 건, 아니야. 하지만 그에 수반되어야 할 여타의 감정이 없어."
"라이 짱은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느니 그럴 줄 알았다느니 하겠지."
"하지만, 그래, 이래저래 해도, 조금은 그리운 기분이 들긴 하네."
"……."
"그 이상으로 끔찍하지만 말이야."
까맣게 타들어 가는 자리로부터 회색 재가 투둑 떨어진다. 세오도아는 그 재를 훅 불어 날리곤,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몇 군데를 더 그을렸다. 라이터에서 피어오른 불꽃을 따라 하얀 옷자락들이 까맣게, 혹은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남은 건 나뿐인데, 불타는 것도 나뿐이라."
불합리하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을 구태여 소리 내 말하고, 세오도아 리들은 사진을 탈탈 털어내어 다시 봉투에 담았다. 두 조각으로 나뉜 사진이 얌전히 갈색 봉투 속으로 들어갔다. 세오도아는 다시 깔끔하게 접은 그 봉투를 들어, 잠시 바라본다. 바닷바람이 길게 늘어진 그의 피어스를 스쳐 지나갔다.
"Ci Vediamo."
가능하다면 말이지. 짧게 덧붙인 말이 잿빛 조각과 함께 바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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