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아포칼뤼프시스의 아이들

아토 하루키+오토와 루이 / 오토와 루이 생일 기념.

-포스트 아포칼립스 AU.


"루이, 그거 알아? 아포칼립스의 어원."

그날은 비가 내렸다. 다행히 셔터가 채 닫히지 않은 가게의 천장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스며드는 습기와 한기는 피할 수 없다. 마땅히 불을 붙일 장작거리도 없는 상황에서 하루키가 읽고 있는 수첩은 생명 같은 불꽃을 피우기에 안성맞춤이겠지만. 오토와 루이는 그에게서 수첩을 빼앗는 대신 낡은 담요를 함께 두르고 나란히 앉아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천 안쪽에 두 사람분의 체온이 천천히 쌓여갔다.

"그리스어가 시초라는 건 알고 있다. 그 뜻은 모르지만."

"아포칼뤼프시스. 『덮개를 벗겨내다』는 의미래. 요한이 과거 하느님에게서 묵시받은 종말과 심판의 풍경. 그러나 재앙으로 인해 인간의 세상이 징벌과 유사한 형태로 처단받는 것은 비단 요한묵시록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렇게 적혀있어."

"다른 예시가 있나?"

"이를테면「노아의 방주」 이야기 또한 현대의 우리가 볼 때는 훌륭한 아포칼립스라 할 수 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한 대홍수, 선별되어 방주에 탑승하는 제한된 생명, 기약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황의 나날. 그건 훌륭한 재앙 이후의 이야기다. 실화가 아닌 설화이기에 사람은 그 이야기에 더욱 경외 되는 것이겠지. 그 외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말론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정신이란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의 레이어 위에 쌓아 올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분명 종말 이후의 세상을 가리키는 장르의 명칭이었지."

"응. 지금은 우리의 현실이지만."

쉘터에 있었을 때라면 이런 대화는 감히 할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전구의 수명이 다 되어가는지 그리 밝지 못하고 흐릿한 빛 아래에서 수첩을 천천히 읽어내리던 아토 하루키가 눈가를 비볐다. 어둑한 곳에서의 독서는 아무래도 눈을 상하게 하는 법이다. 그걸 알고 있는 오토와 루이는 하루키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잘 걸쳐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눈을 혹사하지 마. 비는 한동안 그치지 않을 것 같으니 한숨 자도록 해."

"아하하, 그러다 갑자기 천장을 부수고 크리쳐가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땐 널 업고 도망가면 되지."

"됐네요. 짐이 되는 건 사양이니까."

"네가 짐이 되려면 지금보다 40kg 정도는 더 살이 붙어야 해. 도전할래?"

"냉정하게 분석하지 마. 그보다 그만한 식량도 없으면서."

"그렇지."

도망치는 와중에 습득한 군용 식량은 솔직히 말해 소박한 식사라고도 하기 힘든 수준의 맛이 났다. 그런데도 이걸 챙겨가라면서 가방 안에 식량 팩과 생수통을 몇 개씩 쑤셔 넣어준 여성은 지금쯤 살았을까 죽었을까.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그 의문을 논의한 적은 없었으나, 은연중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시제가 점점 과거형으로 변해갔다.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었지. 좋은 사람이었는데. 천천히 늘어가는 말끝은 체념과 단념과 체관을 매달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추락해간다. 그래서 오토와 루이는 아토 하루키에게 수첩을 건넸다. 작가 지망생이 남긴 듯한 수첩은 꽤 두꺼웠고 다채로운 정보로 가득 차 있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아토 하루키도 금세 빠져들 정도였다.

"이것도 일종의 묵시록이 되는 걸까."

오토와 루이는 딱히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옆을 돌아보면 아토 하루키가 어깨에 기댄 자세가 무너진다는 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게 사람들이 탕비실로 썼던 것 같은 좁은 공간은 온통 약탈당하고 부서진 흔적으로 가득하여 앉을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큰일이었다. 인간이란 한 꺼풀 벗기면 이런 존재일까. 그렇다면 신은 이런 것에 한 꺼풀을 씌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느 예술가가 그런 코멘트를 남기며 사진을 찍는다면 제법 철학적인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는 풍경이었다.

"인간은 어리석었다. 그래서 멸망했다. 우리는 그 두 문장의 행간 사이에 있는 거지."

"그렇지만 살아있어. 그건 중요한 거다, 하루키."

"알고 있어."

아토 하루키가 웃는 기척이 난다. 메마른 소리에 남몰래 신경을 곤두세우던 루이는 옆자리의 웃음소리가 별다른 일 없이 가라앉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의 긴장을 풀었다. 역시 도망치던 와중에 기침약과 진통제를 잃어버린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비가 그친다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길가의 약국을 찾아봐야겠다며 머릿속 체크리스트를 늘리고, 오토와 루이는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신이 키가 큰 덕에 곁에 있는 하루키는 담요에 폭 싸여있는 모양이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감기는 목으로 온다고들 하니까.

"난 말야, 신은 있든 없든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그날 그 순간에 내 충동을 멈춘 것은 신의 계시 같은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두려움이었으니까. 사람을 죽이려 한 나에게 신벌이 내리지도 않았으니까."

"하루키, 그건 두려움이 아니야. 너는 너 자신의 의지로 살의를 멈췄어. 그리고 여태껏 누구도 해치지 않았잖아. 신벌이 내릴 이유 자체가 없다."

"고마워.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도 들어. 사실 신이 없는 거라면, 이 모든 것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

"루이가 그때 해준 말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그냥…."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 오토와 루이는 담요 아래에 놓여있는 아토 하루키의 손을 천천히 쥐었다. 그리고 맞잡아오지 않는 손이 이토록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거지?"

바깥에서는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는 구름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옅은 묵색을 머금은 수분 덩어리가 서로 마찰할 뿐인데 저토록 천지를 가를 듯한 소리가 나는 이유는 구름이란 사실 신의 한숨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어느 문학 선생님이 시적으로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의 한숨 소리를 두려워하며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천둥과 번개를 신의 벌에 비유한다던가. 아토 하루키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선생님이 로맨티스트라며 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하루키."

"그래, 난 상관없어. 한 번은 사람을 죽이려 했으니까. 진심으로 살의를 표출했으니까. 그게 죄가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어. 괜찮아. 하지만… 루이는 아니잖아."

"하루키."

"그렇지 않아? 루이는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올바르지 않은지 알고 있어. 그리고 올바른 것을 지향하며 살아왔지. 루이는 죽이지 않는 것을 선택한 내 의지에 대해서 곧잘 말하지만, 애초에 그런 살의를 품지 않는 쪽이 더 대단한 거야."

"……하루키."

"그런 사람까지 재앙에 밀어 넣는 신은 이상해! 하지만 그런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해!"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결말을 기억해?"

흐름을 가르듯이 찔러 넣어진 말에 아토 하루키가 고개를 든다. 오토와 루이는 살짝 고개를 돌려, 제 바로 옆에 앉아있는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방금까지 곁에 있었던 사람인데도 굉장히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홀로 잡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루이는 말을 잇는다.

"노아는 몇 번이고 새를 날려 보내지. 처음에는 까마귀, 나중에는 비둘기. 까마귀는 그냥 돌아왔어. 비둘기는, 어느 날 올리브 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둘기를 날려 보내자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노아는 홍수가 끝났음을 알게 되었어."

"…그 얘기가 왜?"

"올리브 잎사귀를 발견했을 때, 노아가 어떻게 행동했을까."

"기뻐…하지 않았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모르겠어. 동물들에게 작별인사라도 했을까?"

"노아는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을거야. 그리고 함께 이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음에 감사했겠지. 상상해봐."

상상해보라는 말에, 아토 하루키의 머릿속에 자세한 얼굴도 모르는 노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상 속에서 빚어진 그는 비둘기가 건넨 올리브 잎사귀를 받은 순간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노아의 말을 들은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적과도 같은 올리브 잎사귀를 마주한다. 이윽고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잘 버텼어. 잘 버틴 거야. 이제 끝났어. 그런 말들이 오랫동안 울음소리처럼 이어진다.

"그때 노아가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순간 서로를 부둥켜안았던 이들의 모습이 사라진다. 순식간에 방에 홀로 남은 남자는 무릎을 꿇는다. 아무도 없는 방. 오로지 의로운 자라고 낙인 받은 자는 모든 재앙의 끝에 외로운 마침표처럼 찍혀있다. 그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수고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잘 버텨주었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 동물들의 우짖음 소리만 가득할 뿐.

"그토록 쓸쓸한 일은 없겠지.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곁에 있는 거야."

손을 잡기 위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 위해서.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서로 부둥켜안고 울 수 있도록, 이제야 끝났다며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도록, 거대한 공백 앞에서 허무함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누군가가 건넨 농담에 언제라도 웃을 수 있기 위해서.

"결과론적이잖아."

"그렇지. 하지만 결과 또한 과정이니까. 그리고 조금 더 사견을 더하자면."

"더하자면?"

"하루키, 너는 혼자 살아남기에는 연약해."

"나도 나름대로 힘은 있거든?!"

전혀 아프지 않은 주먹이 등을 때린다. 오토와 루이는 통증을 느꼈다기보다 비즈니스 합의에 가까운 느낌으로 신음했다. 창밖의 빗소리는 아까까지의 기세가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점차 가늘어지고 있었다.

"루이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이 이상 바란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의지라고 생각한다."

"……그래."

홀로 잡고 있던 손의 주인이 천천히 손을 맞잡는다. 그 온기가 어쩐지 천천히 줄기를 뻗는 덩굴식물을 연상케 했다.

"그럼 약속해. 멋대로 혼자 떠나거나 없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하지만 한쪽만의 일방적인 선언은 다소 불합리하다고 보는데."

"아아, 정말. 알았어. ……나도 말없이 떠나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을게."

"그래."

새끼손가락을 거는 대신에 그대로 몸을 기댄다. 멈추지 않는 빗소리가 처음보다는 조금 따스하게 들렸다.

*

"루이."

거미줄이 가득한 약국의 찬장을 둘러보다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아토 하루키가 서 있다. 한쪽 손을 뒤로 돌리고 있는 자세를 보건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딱히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다. 오토와 루이는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먼지투성이가 된 손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았다.

"무슨 일이지, 하루키?"

"잠깐 눈 감고 손 내밀어봐."

"음."

시키는 대로 순순히 눈을 감고 손을 앞으로 내민다. 검붉은 암흑 속에서 하루키가 눈 앞에서 손을 흔드는 기척이 나더니, 이내 손바닥 위에 무언가 작은 것이 얹히는 감각이 있었다. 눈을 떠도 된다는 말에 눈꺼풀을 들어 올려보면, 거기에는 서툰 솜씨로 접었으나 어쩐지 안쪽이 불룩한 종이쪽지가 있다. 이어 쪽지를 건넨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헛기침 소리를 냈다.

"아까 여기 들어올 때 전자시계를 봤거든."

"전자시계? 아… 벽에 걸려있던 것 말인가."

"응, 근데 보니까 오늘이 5월 6일이라고 되어있더라고. 그래서."

"5월…… 아."

그 말을 듣고 새삼스레 쪽지를 보면, 겉면에 무엇이라고 적혀있다. 『아포칼뤼프시스』. 그걸 소리 내어 읽어보자, 아토 하루키가 조금은 장난스러운 투로 키득키득 웃었다.

"자, 부디 열어봐."

"…사양 않고."

하루키의 손재주가 범인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쪽지는 어렵지 않게 열렸다. 오토와 루이는 안에서 드러난 것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하루키가 쑥스러운 듯, 겸연쩍은 듯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먼지투성이로 굴러다니던 걸 우연히 주웠어. 누가 떨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어제 했던 얘기가 떠올라서."

"…올리브 가지, 라는 건가?"

"난 비둘기는 아니지만."

루이의 손바닥 위에서 원형으로 휘어진 잎가지 모양의 브로치가 반짝인다. 테두리는 은빛. 몇 번인가 험한 취급을 받았던 모양인지 잎사귀를 장식하는 큐빅은 절반 정도 이가 빠져있지만, 어쩐지 궁핍한 인상은 주지 않았다. 오히려 비어있는 자리가 여백의 미처럼 남아있는 것들을 빛나게 한다. 루이는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고맙다, 하루키. 설마하니 이런 상황에서 생일선물을 받을 줄은 예상도 못 했어."

"그래서 서로의 곁에 있는 거잖아."

오토와 루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토 하루키도 이끌리듯이 큭큭 웃었다.

약속은 연약하다. 그것이 스무 살도 되지 못한 아이들의 약속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아이들은 신이 열어젖힌 덮개 너머의 세상 속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언제 어떻게 산산이 깨질지도 모르는 것을 소중히 껴안는다.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종막 앞에서 서로에게 웃어주기 위해서 걸어간다.

"참, 아까 봤는데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있었어. 나와봐."

"무지개인가. 초등학교 이후로는 거의 보지 못했군."

어제 비가 오래도록 내린 탓에 공기는 조금이나마 맑다.

오토와 루이와 아토 하루키는 그것을 깊게 들이마시며, 어둑한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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