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커플링Coupling

[레이하루]정원 블루 보넷에서 점심을

이소이 레이지 X 아토 하루키.

『요 며칠간 극적인 일만 마주하다 보니 현실감각이 맛이 가버렸슴다. 완전 큰일 났어요.』

「그럼 이번에는 같이 느긋하게 보낼까?」

『저야 좋죠. 하루키 씨 집에서 같이 뒹굴뒹굴 할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탈리아에서 일본까지 와서 보는 게 우리 집 천장뿐이면 아깝잖아. 느긋하게 풍경 구경이라도 해보자.」

『하루키 씨의 추천이라면 믿을 수 있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맡겨줘.」

그런 대화를 나눈 것이 약 한 달 전. 이후로 나고야의 온갖 자연명소와 이동 경로, 볼거리와 식사 자리를 총합하여 일일 플랜을 짜올리는 내내 하루키는 어떤 고민에 빠져있었다. 데이트 코스를 짜는 정도의 일이라면 과거에도 해보았다. 당시 사귀고 있던 상대의 취향, 특성 등을 고려하는 정도는 관찰력을 지닌 아토 하루키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탓에, 어떤 데이트 코스에서도 상대방의 기뻐하는 얼굴만 보았을 뿐 자신이 먼저 기뻐하는 일은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루키 선배는 저를 정말 즐겁게 해줘요. 그런데 선배가 저랑 있는게 즐거운지는 잘 모르겠네요….'

과거 얼마간 교제했다가 헤어진 대학교 후배의 말이 생각난다. 하루키는 수첩에 일정을 메모하던 손을 멈추고 잠깐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일정에는 큰 흠이 없다. 돌발상황을 대비한 플랜B도 고려해두었다. 이대로만 따라가면 큰 무리 없이 데이트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다만….

'하루키는 너무 예의를 차려. 날 좋아해서 사귀는 게 아니라, 그냥 날 배려해서 사귀는 것 같다고!'

1+1 세일처럼, 그때는 미안하다고밖에 답할 길이 없었던 고등학교 동급생의 말이 생각난다. 하루키는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대학생 때의 연애 이후로 거의 8년에 가까운 세월을 연인 없이 살아온 시간이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설마하니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7살이나 어린 연인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설령 미래의 누군가가 알려줬다 하더라도 이전의 아토 하루키라면 허튼소리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연하 애인이 생겼다.

그것도 저돌맹진형.

심지어 쌍방애정으로.

얼굴이 홧홧해진다. 아토 하루키는 마치 첫사랑과의 데이트를 앞둔 사춘기 청소년처럼 구는 자신이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소이 레이지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지는 이번 달로 약 삼 개월째. 그동안 있었던 데이트 코스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다 예약해둔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와 밤이면 잠에 드는 것이었다. 흠잡을 데는 없지만, 그만큼 어딘지 매끈매끈하다고 해야 할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지만… 이대로는 쉬이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때, 퍼뜩 생각난 것이 있었다.

"도시락을 직접 만들까…."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의 동급생도 대학교 때의 후배도 데이트를 할 때 이따금 자신이 만들어왔다면서 2인분의 도시락을 자랑스럽게 내밀었었다. 그때는 상대방이 도시락에 담은 애정과 기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요리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실망하지 않도록 전부 먹어야겠다.' 밖에 생각하지 못했었던 자신의 미숙함도 같이 떠올라 조금 괴로웠지만, 아무튼 애정의 표현 방법이 떠오른 셈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제까지의 야외 식사는 전부 품질이 보증된 깔끔한 식당에서의 주문품. 집을 떠난 상태에서 직접 만든 도시락을 대접해주는 것도 꽤 색다른 이벤트일 것이다.

"좋아, 초절 쿨한 사회인 아토 하루키. 요리 정도야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이지."

무엇이든 마음가짐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아토 하루키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데이트용 도시락을 만들기에 적절한 메뉴와 레시피를 알아내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

"하루키, 오늘도 샌드위치인가?"

"아, 네. 요즘 빠져버려서요."

"알 것 같아요~! 저도 메뉴 하나에 꽂히면 한 달 내내 그것만 먹거든요!"

"코테츠 씨. 그건 좀 지나친 거 아닐까요."

이소이 레이지가 일본으로 건너오기까지 앞으로 약 일주일. 이탈리아에서 나고 자란 연인에게 밥과 반찬이 들어간 도시락을 준비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양식에 가까운 쪽을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메뉴는 샌드위치로 정했다. 뒤이어 종류를 알아보고 여러가지 재료를 시험 삼아 다듬어본 결과, 아토 하루키의 점심 메뉴는 삼 일 동안 속 재료만 살짝 다른 샌드위치 일렬병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햄과 계란, 양상추에 베이컨, 참치 샐러드, 닭고기, 아보카도, 새우 등등…. 기본적인 속 재료만 넣으면 완성되는 요리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할 정도의 바리에이션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모든 메뉴를 전부 먹여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모든 샌드위치 메뉴를 만들려 했다간 데이트에 나가기도 전에 골병이 들어서 침대 신세만 지게 될지도 모른다. 익숙하지도 않은 주제에 섣불리 도전해, 그대로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기본기에 충실한 샌드위치가 나을까. 아아, 그렇지만 조금쯤은 보기 좋은 메뉴를 먹여주고 싶은데. 어차피 뱃속에 들어갈 거라고 해도 기왕이면 예쁘게 만들어서 기뻐하거나 감탄하는 얼굴이 보고 싶다. 이런저런 고민 속에서 하루키는 생뚱맞게 헤어진 과거의 인연들을 떠올렸다.

미안해, 너희의 마음도 모르고 내가 어리석었어.

현재의 연인이 들으면 당신이 무슨 회개하는 카사노바입니까? 라고 어이없어할 발언은 일단 뒤로 미루고, 아토 하루키는 점심으로 준비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최종 후보로 선정할 샌드위치 메뉴를 떠올렸다. 일단 한 가지 메뉴로만 통일하는 건 어쩐지 멋이 없으니까 제외. 두 가지로만 채우는 것도 어쩐지 밋밋하니까 제외. 그렇다면 종류와 맛을 구분 지어서 세 종류 정도의 샌드위치를 만들어두면 적당하겠다 싶었다. 메뉴는 달걀 샐러드, 양배추, 그리고 참치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기실 세 가지 메뉴를 한 번에 다 만들어보겠다고 정한 시점에서 이미 심상찮은 플래그가 설락 말락 하고 있었으나, 이 시점의 아토 하루키는 아직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지가 찾아올 그 날이 왔다. 레이지는 일단 일본에 밤 비행기로 도착한 다음, 하루키의 집에서 하룻밤 푹 쉬고 야생화 정원 블루 보넷을 찾아가 준비된 길을 느긋하게 산책할 예정이었다. 너무 일찍 만들어버리면 샌드위치의 상태가 이상해진다는 것은 확인했다. 그러므로 요리를 하려면 레이지가 오기 직전의 아침부터 저녁까지가 최적이었다. 그다음에는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하루 정도 재워둔 다음 도시락통에 담아 같이 나간 뒤, 점심시간에 같이 먹으면 일단락되는 셈이다.

"그럼, 해보자. 어렵지 않으니까."

세 가지 샌드위치의 레시피는 미리 출력해서 꼼꼼히 읽었고, 재료도 엄선하여 마트에서 장을 봐왔다. 요 며칠간은 무슨 일 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무업무를 고집했기에 체력도 충분하다. 아토 하루키는 앞치마를 두른 채 깊은 숨을 들이쉬고는, 우선 양배추와 당근을 채썰기로 했다. 도마가 통통 울리는 소리가 나며 재료들이 얇게 잘려 나간다. 그릇 하나를 채울 정도의 양을 준비하고, 재료를 찬물에 담가둔 다음 물기를 깨끗이 제거한 다음에는 빵을 구울 차례였다. 식빵을 그대로 쓰면 수분이 하룻밤 내내 흡수되어서 물러질 우려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빵을 단단하게 만들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프라이팬 위에서 식빵이 천천히 익어가는 좋은 소리가 난다. 하루키는 따끈한 냄새를 들이마시며 네 장의 빵을 굽고 접시 위에 잘 쌓아두었다. 맨손으로 만지기에는 뜨거우니 한 단계 식힐 동안에는 양배추를 살짝 절여 속을 만들 차례였다. 잘 마른 양배추와 당근에 일전에 조절한 레시피대로의 양념을 넣고 골고루 섞는다. 맛을 봐서 간이 적당하다 싶으면 도마에 랩을 깐 다음, 빵에 치즈와 햄을 순서대로 깔고 양배추 속을 올린다. 이거 지나치지 않은가, 잘못하면 무너지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러고 나서 남은 빵으로 위를 덮고 랩으로 전체를 감싸면…."

여차저차 양배추 샌드위치가 완성되었다. 하루키는 도마 위에 정사각형으로 포장된 샌드위치를 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괜찮네. 하나만 더 만들면 양배추는 끝."

호기롭게 말하며 다시 도마에 랩을 깔고 빵을 올린 뒤 재료를 올리고 랩을 포장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완성된 양배추 샌드위치 쌍둥이는 준비한 도시락통에 알맞게 들어갔다. 물론 세로 두께 때문에 뚜껑은 닫히지 않지만, 빈자리에 방울토마토를 넣어두니 제법 구색이 맞는다. 하루키는 뿌듯한 마음으로 다음 요리에 착수했다.

"다음은 참치 샌드위치. 어디 보자… 참치랑 옥수수는 물을 따라내고, 양파랑 피클은 다진다…."

도마 소리가 열심히 울려 퍼진다. 하루키는 준비된 재료를 큰 그릇에 담고 마요네즈와 후추를 넣어 열심히 저었다.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인 계절인데도 요리에 집중한 탓인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걸 손등으로 훔쳐낸다. 지금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레이지가 잘 먹어줄 걸 생각하면 어딘지 모를 곳에서 기운이 샘솟는 듯했다. 그렇구나, 너희들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에야 과거 인연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하루키가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빵을 구웠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란히 따끈해진 빵 위에 머스타드 소스가 발린 뒤, 치즈와 참치 속이 듬뿍 올라갔다. 그 위에 파릇파릇 신선한 치커리를 덮은 뒤 다시금 빵으로 마무리. 그리고 형태가 뭉그러지지 않도록 랩으로 감싸는 작업을 반복한다. 도시락통에는 잘 씻은 포도알도 데굴데굴.

"좋아, 참치 샌드위치도 이걸로 완성. 다음은…."

앗차, 계란이랑 감자 미리 삶아놓는다는 걸 깜박했네. 아토 하루키는 자신의 과실에 머리를 긁고는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 냄비에 넣고 삶기 시작했다. 감자 또한 껍질을 벗긴 다음 냄비에 넣고 불을 올리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요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루키는 제 집중력에 조금 놀라며, 절반이 비어버린 식빵은 조금 내버려 두고 오랫만에 계란 프라이와 함께 밥을 먹었다. 따스한 된장국이 요리의 피로를 조금 날려주는 듯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미리 세팅해둔 타이머가 울린다. 하루키는 그릇을 싱크대에 잘 담가두고는 우선 계란을 삶던 냄비의 불을 껐다. 팔팔 끓어오른 물을 따라내고 작은 그릇에 약간의 물과 계란을 넣어서 빠르게 흔들면 일일이 껍질을 부수고 까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매끈한 속 알맹이가 나온다. 그런 식으로 계란의 껍질을 모두 벗겨 한 그릇에 모아둔 뒤, 보글보글 삶긴 감자를 젓가락으로 찔러 잘 익었는지를 확인한다. 폭 들어가는 감촉을 확인하고 물을 따라낸다. 그런 다음 기합을 넣고, 감자와 계란에 당근과 오이, 파프리카 같은 야채를 썰어 넣은 다음 마요네즈와 소금을 넣고 감자와 계란을 으깨가며 마구마구 섞는다. 팔이 빠질 것 같아도 한결같이 섞는다!!

"계란 감자 샐러드는, 이렇게나, 노동집약적인, 음식이었구나…."

다음에 식당에서 샐러드가 나오면 남기지 말아야지. 지금까지도 충분히 남기지 않고 다 먹는 주의긴 했지만 정말로 남기지 말아야지. 아토 하루키는 이마에 번지는 땀을 닦아내며 홀로 다짐했다.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가 한 그릇 가득한 감자 달걀 샐러드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아차, 넋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제는 익숙해진 손길로 식빵을 꺼내 굽는다. 그걸로 식빵 한 줄이 거의 다 소모되어 바닥이 드러나게 되었다. 평소라면 작은 포장이라도 일주일은 갈 텐데. 잘 먹는 연인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하루키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구운 빵을 아래에 깔고 매끈한 햄과 치즈를 올렸다. 그 위에 감자 달걀 샐러드를 두툼하게 올린 다음, 다시 빵을 덮고 랩으로 감싼다. 그렇게 두 조각을 만든 뒤 썰어둔 키위를 넣어 마무리.

완성된 도시락통을 나란히 두고 바라본다. 모양을 잡아야 해서 아직은 좀 두툼하고, 반으로 자르지도 않아 도시락통에서 비죽 튀어나온 모양새긴 하지만 통 안에 차곡차곡 들어가 있는 모습은 어떤 충족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이대로 잘 넣어뒀다가, 밖으로 나가기 전에 반절 잘라 가방에 넣어둔 다음 보냉재랑 같이 차에다 넣어두면 되겠지. 하루키는 과도한 업무집중량으로 인해 뻐근함을 호소하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네 시가 약간 넘은 시간이다. 레이지가 도착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하루키는 아침부터 쌓인 피로를 해소할 겸 침대에서 잠깐 잔 다음, 공항으로 연인을 마중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들켰다.

*

레이지를 마중 나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문제는 없었다. 이래 보여도 하루키는 운전면허를 소지하고 있고 차량 점검도 주기적으로 받는 사람이다. 한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는 정도야 어려울 게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주차 문제로 먼저 들어간 손님보다 몇 분 늦게 집에 들어왔을 때, 레이지가 부엌 식탁 위에 놓인 샌드위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것은 명백한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그제사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른다. 마지막에 달걀 샐러드 샌드위치를 만들고, 통에 넣어 뿌듯하게 본 다음, 두 개를 먼저 넣고 나서 나머지 하나를 넣는다는 게 갑자기 내린 소나기 때문에 집안 창문을 닫고 다니느라 깜빡…!

"하루키 씨, 이거 직접 만든 건가요?"

이를 악무는 사이 그 샌드위치에 얽힌 사연을 알 리 없는 레이지가 궁금한 듯이 물어온다. 하루키는 일하기 싫은 소가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긍정했다.

"음, 응, 그렇긴 한데."

"맛있어 보이네요. 혹시 지금 먹어도 되나요?"

"그건, 좀."

"문제라도 있나요?"

그거 원래 내일 너랑 데이트하러 나가서 먹으려던 거야. 라고 뻔뻔스럽게 말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만약 지금이 내일 블루 보넷의 벤치에서 나누는 대화였다면 얼마든지 밝힐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상황은 크리스마스에 주려고 산 선물을 12월 22일에 들킨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뻘쭘하다는 거다.

"……혹시."

아, 레이지. 제발.

"내일 먹을 도시락이라던가."

"……."

"지금 표정 관리 안 되고 있어요."

될 리가 있겠어? 연인 앞에서 몰래 준비한 도시락을 들켰는데? 그것도 명백한 이쪽 과실로.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가렸다. 도저히 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말할 베짱이 생기지 않았다.

"레이지… 추리 잘하네."

"어라, 진짜로?"

"진짜입니다, 네. 연상의 도시락은 취향 외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부엌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난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하루키는 제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는 손길을 느끼고 머뭇머뭇 시야를 열었다. 약간 아래쪽에서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레이지가 보였다. 빳빳하게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그 모습에 스르륵 녹아내렸다.

"연인의 수제 도시락은 로망 아닌가요?"

"기왕이면 좀 더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엄청 놀랐어요. 얼굴 근육이 이 모양이라 그렇지."

"내가 그 정도도 못 읽을 것 같아? 지금 기쁘고 흐뭇하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라고."

"음, 역시 하루키 씨에게는 못 당하겠네요."

"…지금 먹을래?"

아아, 모르겠다. 레이지는 귀엽고, 작전은 다 들켰고, 얼굴도 뜨겁고. 설마하니 이런 걸로 들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역시 세 종류씩 만들려고 무리해서 그런 걸까. 자포자기한 마음 반,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됐다 싶은 마음 반으로 그런 말을 건네면 레이지의 한 손이 뺨을 감싸왔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연인의 손.

"참을게요."

"아니, 괜찮은데."

"참을래요. 하루키 씨가 데이트를 위해서 준비한 거니까 저도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죠."

좀 치사하지 않냐고, 하루키는 생각한다. 그토록 다정한 눈으로 부드럽게 속삭이면서 말하면….

가벼운 입맞춤이 입술 사이로 떨어진다. 그걸 쫓듯이 레이지가 입술을 마주 댔다. 마치 작은 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퍼져나간다. 종국에 하루키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레이지, 간지러워. 참으세요. 지금 누구 씨가 마구 애태워서 그렇잖아요. 키스해줄 때까지 이대로 안 놔줄 거에요. 하루키는 마지막 말에 키득거리고는 레이지와 이마를 마주 댔다. 기분 좋은 온기가 퍼져나갔다.

"샌드위치, 냉장고 넣게 해주면 마저 해줄게."

그 이후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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