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커플링Coupling

[시나하루]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평온이므로

A루트 기반. 시나노 에이지 X 아토 하루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방에서 나와보면 부엌에 시나노가 서 있었다.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지만, 위쪽으로는 탱크톱 차림. 거기에 줄무늬 앞치마. 그 차림이 어쩐지 낯뜨거워 하루키는 앓는 소리를 냈다. 달걀이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 사이로 그 소리가 들린 것인지 시나노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루키 씨! 일어나셨나요? 금방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으음, 응. 너무 서두르다 태우진 말고."

"걱정 마세요!"

꾹, 하고 뒤집개를 잡아 보이는 포즈는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하루키는 살짝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은 뒤 천천히 부엌 식탁에 앉았다. 본래라면 시나노가 요리를 하는 사이 이런저런 것을 준비했겠지만, 샐러드나 구운 빵이 준비된 것을 보아하니 자신이 여기서 부산하게 돌아다녀봤자 방해만 될 것 같아서였다. 이윽고 보기 좋게 스크램블드 에그를 구워낸 시나노가 짠짜짜잔~ 하는 효과음을 내면서 식탁 위에 두 개의 접시를 내려놓는다. 식탁 위에 놓인 우유병의 이슬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나란히 인사하고 천천히 아침 식사를 시작한다. 오늘은 같이 느긋하게 영화 볼까요? 나야 상관없지만 디타검 극장판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제대로 된 히어로물 시리즈예요! 하루키 씨는 절 너무 디타검 오타쿠로만 보는 거 아닌가요? 물론 맞지만! 거기서 긍정하는구나. 웃음과 가벼운 투닥거림이 섞인 식사가 끝나고 같이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정리한 뒤 하늘을 보면 구름이 끼어서 흐리다. 그걸 바라보는 하루키 곁에서 시나노가 천천히 손을 잡아 왔다. 하루키 씨.

"응."

"영화, 준비할 테니까요."

같이 거실 가요. 그 목소리가 부드럽다. 하루키는 느슨한 제 손을 천천히 맞잡고, 시나노의 걸음에 맞춰 거실로 향했다.

*

누군가 언제부터 둘이 그런 사이가 되었냐, 고 묻는다면 아토 하루키는 휴대전화를 켜서 달력을 확인할 것이다. 11월, 쌀쌀한 빗줄기가 내리던 금요일의 일은 아직 정확한 날짜와 함께 얽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시나노라면 11월 27일이에요! 라고 확실하게 대답할테지만) 그날은 종일 비가 내렸고, 늦은 작업을 마무리하고 시나노와 같이 사무소를 나선 하루키는 시나노가 자신 있게 펼친 우산이 공중분해 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실컷 웃다가 시나노가 사는 곳까지 같이 돌아가기로 한 건 좋았지만,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빗줄기가 태풍급으로 굵어진 건 예상외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일단 빗줄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까지 시나노의 아파트에서 쉬기로 했다. 시나노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 아토를 위해서 디타검과 콜라보레이션을 했다는 홍차 브랜드의 차를 내왔다.

맛이 어떠세요?

음, 온도 조절이 안 돼서 엉망진창인데.

어라~?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아파트 전체의 불이 나가버린 것은 그 순간의 일이었다. 아토 하루키는 놀라긴 했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겁먹기도 전에 일어난 일에 잠시 얼이 나가 있었다. 단단한 가슴, 자신의 몸을 꽉 안고 있는 팔, 정수리 쯤에서 느껴지는 온기. 저기, 시나노?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내려는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하루키는 그걸 들은 시나노가 놀라서라도 자신을 떼어놓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루키 씨, 괜찮아요. 제가 옆에 있어요.

아니, 알아. 아는데.

너, 너무 가까워. 그런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리는 소리, 이따금 멀리서 천둥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슴푸레한 어둠에 물든 시나노의 숨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심장 소리가 규칙적으로 두근거린다. 아니, 조금은 빠른가. 하루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했다. 이상하게도 뺨이 간지러웠다. 시나노, 이제 됐으니까 그만 놔주지 않을래. 난 정말로 괜찮으니까. 최대한 평소와 같은 어투로 말하며 살짝 고개를 든 순간, 암흑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입술이 닿는다. 빗소리 속에서 이뤄진 키스는 달다기보다는 깊었다. 하루키는 조금 깊은 숨을 들이쉬고는 제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시나노를 받아들였다. 경악이나 놀라움보다는 새끼손가락을 나누며 나눈 약속을 지키는 듯한, 묘한 충족감이 있었다. 세포의 의지, 세포의 공명성. 그런 단어가 살짝 떠올랐다가도 키스의 쾌감에 밀려 가라앉는다. 점막 안쪽을 문질러져 한 차례 몸을 떨었을 무렵 아파트 천장의 빛이 다시 돌아왔다. 입술을 뗀 하루키와 시나노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열등의 빛은 실로 정직하게 풍경을 비춘다. 하루키는 반사면 없이 제 얼굴을 살피는 재주를 익히지 못해 시나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볼이 조금 붉다. 숨도 살짝 거칠었다. 제 몸을 살짝 붙잡은 손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착각이 아니다. 하루키는 침착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볼과 귀가 간지럽다. 심장이 시끄럽다. 「흔들다리 효과」라는 말을 육백 번쯤 되뇌여야 했다.

시나노.

하루키 씨.

이 타이밍에 말이 겹치냐고. 하루키가 입을 벙긋거리는 사이 시나노가 주도권을 양보했다. 하루키 씨가 먼저 말씀하시면 제가 나중에 말할게요. 하루키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할래?

아, 잘못 말했다.

하지만 번복할 틈은 없었다.

*

영화는 흔한 내용이었다. 별달리 능력도 없던 무능한 주인공이 어느 날 강한 힘을 손에 넣어, 사랑하는 이들을 위협하는 악당을 물리친다. 도시의 위기 앞에서 악당을 물리친 주인공이 영웅의 이름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스태프 롤이 올라갔다. 찜찜한 뒷맛이 없는 깔끔한 결말을 두고 하루키와 시나노는 곧장 다음 편을 재생했다. 2편은 1편이 가진 영웅 서사 구조의 변주였지만, 3편에서는 1편의 적이었던 악당의 가족이 등장하며 고뇌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영웅의 힘이란 무엇을 위해 있는가. 나는 그저 힘에 취해 세상이 원하는 영웅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세간이 영웅에게 이를 드러낸다. 사소한 실수와 음모에 휘말려 언론의 뭇매를 맞고 뒷골목으로 쫓겨 들어간 주인공이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루키는 그 장면에 몰입하는 한편 자신의 손을 꼭 잡는 시나노의 손길에 피식 웃으며 몸을 기댔다. 화면 속에서는 남루한 행세의 노숙자가 주인공에게 말을 걸었다. 큼직한 깡통을 뜯어 만든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노숙자와 주인공 사이에 대화가 오간다. 영웅은 힘이 있기에 영웅인 게 아니야. 선한 마음을 계속해서 믿기에 영웅인 거지.

이제 주인공은 대도시의 시상식대에 기자들을 위해 미소지으며 서지 않는다. 대신 뒷골목에서 어려움을 마주한 이들을 위해 손을 뻗는다. 그런 주인공의 행동을 지지하는 이들이 복지 단체를 만들고, 몇 년 후에는 번듯한 비영리단체가 생겨난다. 주인공은 여전히 자신이 가진 힘으로 재난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며 말한다. 영웅은 나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모두 영웅이란다.

스태프 롤이 올라간다. 뭐랄까, 상당히 깊이 있는 내용이었네. 그렇게 말하는 하루키의 곁에서 시나노가 종알거렸다. 원래 1편과 2편의 감독은 같았는데 3편부터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데요. 그래서 단순한 히어로물 서사를 원하던 팬층에선 불호반응도 있었지만 대체로 호응이 좋았다고 해요! 그래, 그렇구나. 하루키는 시나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그 목소리를 듣는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생각했는지 시나노가 침묵한다. 잠시 후 들려온 목소리는 제법 진중했다.

"…있죠. 전 하루키 씨를 정말로 좋아해요. 분위기에 휩쓸렸다던가, 지고세포의 공명성이 어쩌고 하는 것에 이끌렸다던가 하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어, 시나노. 나도 진심으로 좋아해."

"네, 하루키 씨가 하는 말이라면 믿어요."

소파에 함께 두르고 앉은 모포는 적당히 따뜻하다. 하루키는 맞잡은 손을 살짝 간질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스태프 롤의 잔잔한 음악에 실려 말랑말랑한 수면기가 밀려왔다. 이 편안하고 설레는 마음이 지고세포의 착각으로 인한 것이라면 평생 착각 속에서 살아도 좋잖아, 그런 마음이 고요한 호수의 수면처럼 일렁였다. 그것이 아토 하루키가 도달한 평온.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이어질 일상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지켜드릴게요."

"응."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정하다. 아토 하루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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