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커플링Coupling

[레이하루]이따금 우리는 계산치 못한 일을 마주하고

이소이 레이지X아토 하루키.

아토 하루키는 온라인 홍차 동호회에 적을 두고 있다. 그리 거창한 규모도 아니지만, 대학생 시절부터 이래저래 연이 있던 곳이라 애착만큼은 남들 못지않게 가지고 있다고 (나름) 자부하는 곳이다. 홍차에 이제 막 입문한 사람이나 전문 카페를 운영할 정도로 노하우가 쌓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 동호회에는 이따금 재밌는 에피소드나 이런저런 해프닝에 대한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 말이다.

「친구가 제가 마시는 건 밀크티가 아니라 슈가티라고 따로 창업하래요ㅋㅋ」

「딸아이가 홍차 선물한다고 해서 봤더니 들꽃을 말려서 통에 넣어왔네요^^」

「녹차가 상한 게 홍차의 기원 아니냐고 하는 남친한테 두 시간 강의해주고 왔어요」

동호회의 분위기는 대체로 그런 편이다. 너무 모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끈끈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홍차라는 공통 관심사를 나누는 공간. 이따금 오프라인 모임이 있다는 공지가 뜨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토 하루키는 홍차에 대한 리뷰 글을 읽거나 댓글을 남기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하진 않는다. 별생각 없이 모임에 얼굴을 비췄다가 낯이 익숙해진 사람과 의뢰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껄끄럽고 난감한 일도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평소처럼 일과를 끝내고 동호회의 글을 죽 둘러보던 하루키는 짧은 제목의 게시글을 발견하고 잠깐 스크롤을 멈췄다. 「가게를 정리하게 되어 홍차를 나눔해드리려 합니다.」라는 제목을 클릭하자 담담한 문체로 적힌 장문의 글이 펼쳐졌다. 생전 홍차를 좋아하여 홍차 판매점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게에 갈 곳 없이 남겨진 재고상품이 많다. 가게를 인수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본업이 따로 있어 그럴 순 없고, 생전 홍차를 좋아하셨던 분이셨다 보니 재고를 전부 폐기하는 것도 죄송스럽다. 그러므로 홍차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얼마씩 나누어드리고 싶다. 대강 그런 내용이었다.

「저 같은 문외한보다는 홍차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돌아가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요.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하루키는 그 글에 남은 방법을 따라 나눔을 신청하고 약간의 배송료를 입금했다. 며칠 뒤 도착한 상자에는 예상한 것보다 더 든든하게 포장된 홍차가 들어있었다. 살짝 과장해서 최소 반년은 거뜬할 것 같은 양이다. 기껏해야 샘플러 몇 개라던가 틴 케이스 선물 세트 정도를 생각했던 하루키는 당황했지만, 동봉된 편지에 「상태가 좋은 것으로 포장해 보내드립니다. 부디 맛있게 드셔주세요」라고 정갈히 적혀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정성껏 보내주셨으니까 반품할 수도 없는 일이지. 감사한 마음으로 마시자!

이소이 레이지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의 일이었다.

"그런 일도 있군요."

"덕분에 접해보지 못한 홍차도 마셔보게 됐어."

"덩달아 저도 횡재하네요."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바람이 선선하다. 찬장에서 아끼고 아끼다가 레이지가 찾아오기 직전에 꺼내 정성껏 닦아낸 깨끗한 찻잔에서 찻물이 은은하게 일렁였다. 하루키가 따라주는대로 향긋한 차를 홀짝이던 레이지가 문득 궁금하듯이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차인가요? 꽤 맛있네요."

"맛있지? 그건……."

말이 어색하게 멈춘다. 고개를 기울이는 레이지 앞에서 하루키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홍차 동호회에서 올릴까 말까 하다가 너무 유난 떠는 것 같아서 결국 올리기를 그만 둔 글의 제목이 떠오른다. 「애인에게 이런 차를 대접하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일까요?」

"하루키 형?"

"……아, 음, 미안. 잠깐 생각이 안 나서. 《하니 앤 손즈》라는 브랜드에서 만든 『로얄 웨딩 티Royal Wedding Tea』라고 해. 영국에서 윌리엄 왕자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기념으로 만들어진 차라고 하던걸."

"자세하게 알고 계시네요."

"…맛이 좋아서 이래저래 조사했거든."

"과연."

레이지가 슬쩍 웃는다. 하루키는 그것만으로도 두근거리고 말았다. 아니, 우리 지금 사귄 지 5년은 지났거든? 애인의 웃는 얼굴 같은 건 질리도록 봤다고! 그런데도 가슴의 설레임이 멈추지 않는 것은 괜시리 차의 이름이 신경 쓰이는 바람에 대접할까 말까 고민했던 탓인지도 몰랐다. 아아, 정신차려 아토 하루키! 레이지가 이상한 오해를 하면 안 되잖아! 정말로, 솔직하게, 차의 맛이 좋아서 대접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하루키 씨."

"응. 차 맛있지? 한 잔 더 줄까?"

"저희 결혼할까요."

하루키는 작은 포트를 향해 손을 뻗던 동작 그대로 정지했다.

"아니지. 말을 좀 더 명확하게 고칠게요. 저희 결혼해요."

"……."

"너무 멋없나요?"

"멋 없는게 문제가 아니라……."

온갖 말과 생각이 한 데 뒤엉켜 소용돌이친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오래된 연인들은 이럴 때 재치 있고 위트있는 말로 되받아치곤 하던데. 평소의 순발력은 어디 갔는지 하루키의 뇌는 성대하게 파업했다. 결국 나온 것은 상투적이고도 재미없는 말이었다.

"괜찮겠어?"

"하루키 형~. 5년이나 진득하게 연애했으면서 아직도 저를 모르시나요."

테이블 너머의 손이 천천히 뻗어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하루키는 새삼스레 그 손이 가진 열기에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마치 정면에서 뺨을 쓰다듬어진 것처럼 얼굴에 천천히 열이 오른다. 아무 말도 못 하는 하루키 앞에서 레이지가 느긋하게 웃었다.

"전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앞으로도 같이 있고 싶어요."

"……나도."

"실은 약혼반지도 준비해놨어요."

내일모레, 꽃다발이랑 같이 성대하게 프러포즈하려고 했는데 오늘 하루키 씨가 너무 귀여운 얼굴을 하는 바람에. 레이지가 장난스레 속삭인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하루키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고 판단했다. 애초에 입가에 슬그머니 피어나는 미소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반지 끼워줘."

"허락하시는 거예요?"

"레이지."

"네."

"내가 너랑 있는 미래를 거절할 리가 있겠어?"

"그럴 리 없죠."

알았으면 얼른 가져와. 네, 조금만 참아주세요. 레이지가 손끝에 키스를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루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손님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무렵 양 뺨을 감싸고 테이블 위에 이마를 박았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이거 혹시 레이지가 준비한 고도의 서프라이즈인가? 하지만 레이지는 내가 그 동호회에 들어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텐데. 애초에 그 소매점은 나고야에서 2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주소였다고!

심장의 박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방에서 돌아온 레이지가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에메랄드 박힌 반지를 끼워주었을 때, 하루키는 더 참지 못하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따스한 열기가 번진다. 영원히 잠겨있고 싶을 정도로 다정한 물결이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