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 조각글 모음 11
!!세포신곡 본편델씨은자막간까지의 스포일러!!
공원은 한적하다. 한 아이가 식빵 쪼가리를 뜯어 비둘기들에게 뿌리고 있었다. 아토 하루키는 벤치에 걸터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얼마 보이지 않는 맑은 날씨. 푸른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면 하얀 선을 그린다. 음, 오늘 하루도 평화롭군. 정말 평화로워. 그렇게 생각하고 있노라면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앉는 기척이 있다. 하루키는 옆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됐어, 우리가 바쁜 처지도 아니잖아."
"그래도 늦은 건 늦은거지."
몇 되지 않는 구름이 햇살을 가린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코끝을 스쳐지나가, 하루키는 가볍게 재채기를 했다. 감기인가? 옆에서 걱정스레 물어오는 기색. 아토 하루키는 코끝을 대충 문지르고는 재채기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상대는 그 이상 파고들어오지 않는다. 루이도 긴장했군. 그렇게 생각하는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공교롭게도 목소리가 겹친다. 그제사 고개를 돌린 하루키는 자신과 대비되는 검은색 겉옷을 걸친 오토와 루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안경을 쓴 날카로운 눈매가 살짝 누그러진다. 이 표정을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마도 자신 뿐이라는 건, 아토 하루키가 품은 제멋대로 소견이다. (물론 오토와 루이는 그걸 부정하지 않을 테지만) 하루키는 말을 양보하려다가, 이미 완강하게 마음을 다진 듯한 친우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꺼내야 할 말이다. 질질 끌어도 수확은 없겠지.
"태어난다며?"
"그래."
"세기말의 사탄이라."
분수대에서 물이 솟는다.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아이가 그 물줄기에 옷이 젖은 채 웃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새들도 그 뒤를 따라 분수대에서 도망가는 가운데, 천계의 사자와 지옥의 화신은 담담하게 종말의 징조를 이야기한다. 뻔하게도 각자 하얀 옷과 검은 옷을 입은 채.
"요즘 시대에 좀 촌스럽지 않아?"
"완전히 동의한다."
"역시 안 하면 어때?"
"너도 알지만 그 분의 계획은 빈틈없어."
"나도 알아. 그치만."
깊은 한숨소리.
"아직 어린애에게 사탄의 징표를 남긴다는 게, 뭐랄까, 좀 그래."
"아담과 이브를 천계에서 쫓아내야했던 적처럼 말이지."
"넌 그때 선악과를 먹으라고 꾀어내야 했잖아."
"옛날 일이군."
"옛날 일이지."
인간들이 간신히 사과잎으로 몸을 가리던 시절이었다. 이제 때는 22세기였고 길을 걷는 사람들은 손으로 몸을 가리는 대신 손바닥만한 단말장치를 들고 살아간다. 아토 하루키는 자세를 바꿔 상체를 굽히고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물리치료사가 보면 눈 부릅뜨고 교정 들어갈 자세였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척추측만증도 허리 디스크도 일어나지 않는 몸이다. 따라서 제스처는 온전히 감정표현을 돕기 위한 요소로서 사용되었다.
"안 하면…."
"너와 나에게 그런 선택지는 없어, 하루키."
"알아, 안다고. 그냥 말해봤어."
분수대의 물이 수그러든다. 타일 위에는 물자국만 남았다. 아토 하루키는 몸을 구깃하게 굽힌 자세로 입을 연다.
"이소이 레이지라. 종말을 불러올 존재 치고는 이름이 너무 상냥한거 아냐?"
"그렇다고 아이의 이름이 다이몬이 될 수 없다는 건 너도 알 텐데."
"하… 정말 안 내켜. 안 내킨다고."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분의 뜻에는 절대복종이지."
한 잔 하겠나? 오토와 루이가 그제사 제 옆에서 밀크티 보틀을 꺼내보인다. 하루키는 그걸 정말 석연치 않은 시선으로 마주보다가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리고 손에 쥐었다. 이 악마는 이상한 데에서 배려심이 좋아서 손에 쥔 밀크티는 미지근하지도 않고 적당히 시원했다.
"건배사는 누가 할래?"
"마음 어지러운 하루키 천사님께서 하시죠."
"아~ 그래. 그러면."
"이제부터 멸망할 인간 세상을 위해서, 건배."
보틀이 부딪친다.
인류종말의 시작이었다.
하루키를 돌려줘.
아토 하루키를 잃은 그날 이후로 오토와 루이는 그런 것만을 생각한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그 마음이 마침내 신에게 닿았다. 신이 말한다. 좋아, 너에게 아토 하루키를 돌려주지. 하지만 그는 이 세상이 아닌 곳에 있어. 그를 이 세상으로 데려오려면 너는 그보다 앞서 걸으며 그가 이 세상에 발을 디딜 때까지 결코 뒤를 돌아보면 안돼. 물론 그를 업어도 안되고 손을 잡아도 안되고 말을 나눠도 안돼. 그냥 걷기만 해.
그리하여 오토와 루이는 자신의 친우가 아닌 친우를 껴안아 주지도 못하고 등 뒤에 놓은 채 앞을 향해 걸어간다. 하루키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지 앞서 가는 루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오랜만이야,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나 목말라, 힘들어, 조금만 쉬다 가면 안될까... 루이는 그 모든 말들을 씹어삼키며 묵묵히 세상과 세상의 경계선으로 나아간다.
"루이."
대답하지 않는다.
"날 위해 기도했어?"
대답하지 않는다.
"나 말야."
대답…하지… 않는다….
"사람을 잔뜩 죽였어."
대답을.
"루이가 기도해줬을텐데도 잔뜩 죽였어."
…….
………….
"미안해."
"사과하지 마라."
오토와 루이는 결국 답한다. 얼굴도 모르는 친우에게, 자신이 알던 것과 어딘가 다른 인기척을 풍기는 이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토 하루키의 목소리를 쏙 빼닮은 존재에게.
"사과하지 마."
뒤를 돌아보면, 아토 하루키의 모습을 한 존재가 있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 끝이 희미한 연보라빛을 물들어있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진한 포도의 냄새가 난다. 오토와 루이는 과거의 석양을 떠올리며 아토 하루키에게 다가가 그 몸을 꽉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사과하지 말랬으면서 네가 사과하는 거야?"
"너를, 하루키의 대신으로 생각했다."
"……."
신의 약속은 이미 깨졌다. 세상과 세상을 잇는 통로는 그게 자연스럽다는 듯 부서지고 흔들리며 위태롭게 무너져내리려 한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어떤 파편들이 빗줄기처럼 쏟아져내린다. 오토와 루이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옮긴 듯한 풍경 속에서.
"나는 너의 오토와 루이가 아니야."
"그런데도 안아주는구나."
"마지막이니까."
"그렇네."
마지막이지.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오토와 루이의 몸을 마주안는다. 심장 고동소리는 느껴지지 않는다. 루이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토 하루키의 모습을 생각한다.
"잘 있어."
"…잘 있어라."
작별인사를 끝으로 세상이 무너진다.
그리고 부스러기였던 것이 부스러기로 돌아갔다.
#멘션온_캐릭터로_단문
1. 카노 아오구
그는 동물을 키운 적이 있다. 무얼 그리 놀랄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이 나라에서 한 번도 동물을 키워보지 않고 자라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겠는가. 하여간 그는 동물을 길렀고… 동물은 죽었다. 딱히 그가 손을 댔거나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었다. 동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나이를 먹었고 당연하게 늙어갔으며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그는 생각한다. 이 거대한 시간과 인류의 망각 앞에서 이토록 작은 죽음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묻히는가를.
좋아했다면 좋아했고 싫어했다면 싫어했다. 하지만 그 작은 동물은 마지막으로 그의 정신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그는 그 동물의 감촉마저 희미하고 이름은 진즉에 잊어버렸다. 하지만 하나의 깨달음은 여전히 그의 정신 한 켠에 얹어져 그가 내리는 모든 선택을 주관한다.
다만 실수로라도 그 동물의 기억이 카노 아오구를 구원하는 일은 없다.
그는 철저하게, 생生에 의해서만 구원받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2. 이소이 레이지
레이지는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아마도 이탈리아로 넘어온 지 삼사년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거리는 축제의 분위기로 넘실거렸고 아직 어렸던 그는 잰체를 하는데에 실패하고 사네미츠의 손을 잡은 채 밖으로 나와있었다. 어딘가에서 잘 익은 빵냄새가 났고 저쪽에선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맑은 햇살, 부드러운 바람. 어쩌면 레이지가 사네미츠를 놓쳐버린 것도 그토록 온화한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손이 빈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주변은 모르는 이의 옷자락으로 가득했고 레이지는 그만 제 머릿속의 많은 언어들을 놓쳐버린 채 홀로 굳어버렸다.
나이 있어 보이는 한 중년 부부가 레이지에게 말을 건다. 그게 부모님이 어디 계신지를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부부의 표정이 심각해지려는 한순간, 레이지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다. 축제의 음악과 떠들썩한 말소리에도 묻히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게 들리는 그 소리는 틀림없는 사네미츠의 목소리였다.
그대로 인파를 헤쳐나가 익숙한 품에 매달린다. 그 팔이 자신을 꽉 끌어안아주는 것을 느끼며, 이소이 레이지는 비로소 자신에게 믿을 수 있는 아버지가 생겼음을 실감했다.
축제날이었다.
종이꽃이 미친듯이 휘날리고 있었다.
3. 이소이 하루키
이소이 하루키에는 도대체 제대로 허락된 일이 없다. 그는 집안에서 하루종일 잠만 자거나 학교에도 가지 않고 가만히 쉴 수 있었으나 그것은 자유라기보다 구속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말들은 대체로 금지어뿐이었다. 이래선 안돼. 저런 짓은 하지 마. 기타등등 기타등등. 물론 어머니인 라이는 그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으나… 그뿐이었다. 단지 단지 그뿐이었다.
그래서 동생인 이소이 레이지가 그에게 몰래 건네준 색칠놀이 책과 색연필은 오롯이 하루키만의 비밀이 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생도 모두 집을 비운 날이면, 이소이 하루키는 그 책을 펼치고 비어있는 칸들과 그 칸들이 이루는 형체들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보곤 했다. 어떤 색채도 없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수많은 조각들.
색을 칠하는 것은 어쩐지 망설여졌다. 자신이 무언가를 더한다는 것이, 이 조각들에게 실로 실망스런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감각에서 였다. 그럼에도 동생이 준 선물을 언제까지고 가만히 둘 수도 없어, 하루키는 포도와 과일이 놓인 페이지를 천천히 칠해본다.
결국 그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색색이 다른 칸으로도 이루어지는 형태가 가슴을 괴롭게 한 탓이었다.
4. 오토와 루이
루이는 좋아하는 꽃 없어? 아토 하루키가 그렇게 물었을 때는 여름도 다 넘어간 가을이었고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했다. 루이는 자기보다 낮은 높이에서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보다가 입을 연다. 왜 그런걸 묻지. 약간 앞에서 걸어가는 아토 하루키의 발걸음은 딱히 망설이는 기색도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오토와 루이는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좋아하는 꽃, 이라고 해서 머리에 팟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계절에 맞는 식물이나 꽃을 대라면 몇 가지씩은 얘기할 수 있으나 그걸 루이 자신의 호오와 연결지으려 하면 어쩐지 막연해지고 만다. 굳이 꽃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가 그러했다. 따라서 오토와 루이는 문제를 전문가에게 넘기기로 한다.
"네가 정해다오."
"에엥?"
"어울리는 걸 말해주면 그걸 좋아하기로 하지."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럼, 도깨비부채."
"알겠다."
"여기선 그게 뭐냐고 되물어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오토와 루이가 그렇게 답하면 아토 하루키가 돌림노래를 부르듯이 똑같이 발음한다. 괜찮아? 단지 말끝부분만이 치켜올라간 그 물음은 어쩐지 웃음이 새어나오게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오토와 루이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괜찮아.
앞으론 그걸 좋아하기로 하자.
기이할 정도로 올곧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5. 아토 하루키(E루트)
아토 하루키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하루키는 눈을 몇 번인가 깜박이다가 크게 하품을 했다. 오토와 루이는 그의 목에 검날을 겨눈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새도 우짖지 않는 침묵의 시간.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연하게도 하루키였다.
"지금 몇 시야?"
"글쎄, 아마도 오후 6시 반 정도."
"날이 저무는게 빨라지네."
"이제 슬슬 가을이니까."
음, 그러게. 이제 슬슬 가을이네. 하루키는 나무둥치에 머리를 괸 채 여전히 그렇게 말하고 오토와 루이는 검을 거두지 않는다. 하루키는 그 검날이 마치 강아지풀이라도 되는 것마냥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루이."
"왜 그러지."
"아직도 도깨비부채를 좋아해?"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토 하루키는 농담이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 생각을 접어두고 오토와 루이를 바라보았다. 석양은 그의 등 뒤에서 번져나오듯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어 표정의 맥락은 커녕 윤곽조차 읽기 어려웠다. 그걸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다. 문득 불어온 바람이 시원했다.
"괜찮아."
던진 말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토 하루키 또한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번째로_멘션온_캐릭터가_두번째로_멘션온_캐릭터의_상황에서_세번째로_멘션온_캐릭터의_대사를_한다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미래를 죽이는 살해자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게 누구였더라. 아토 하루키는 짓눌리는 폐부와 뭉개지는 피부 따위를 생생하게 느끼며 거친 숨을 뱉는다.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보다 더 짧은 사이에 벌어진 행동의 결과치고는 꽤 무겁고 둔중했다. 하긴 당연하다. 아토 하루키는 지금, 지하에서부터 이어지는 지고천 연구소의 견고한 건물을 모조리 깨부수고 올라온 오리진 베타에게 기꺼이 습격당했으니까.
불시에 팔이 잡아당겨져 균형을 잃고 바닥을 뒹군 이소이 레이지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더니 당혹한 표정을 짓는다. 뒤이어 그의 얼굴을 낭패나 절망같은 감정들이 뒤덮지만 아토 하루키는 그 모습을 전부 눈에 담지는 못한다. 피와 먼지와 울음소리로 뒤덮인 오리진 베타─ 시나노 에이지가 자신을 쥐어틀어댄 탓이다. 핏줄이 터진 눈은 흰 자와 검은자의 구분을 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검붉고 벌어진 입으로 새어나오는 것은 짐승의 경고음에 가깝다. 아토 하루키가 거의 들어쉬어지지도 않는 숨을 꿈틀거리는 사이, 이소이 레이지가 외친다.
"젠장! 이게 무슨 생각이야! 지금 당장…."
"안돼."
폐부가 짓눌려도 한 마디를 뱉을 여력은 있다. 언뜻 자살 선언이나 다름 없는 아토 하루키의 선언에 레이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신기하게도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형편없는 예언가 흉내를 낼 생각인 탓이다.
"난 말야…."
우득우드득. 뼈가 뭉개지고 살이 터져나가는 소리 사이로 명백히 다른 것이 섞여든다. 이를테면 식물이 싹을 티우는 소리, 덩굴을 뻗으며 생장하는 소리, 자신의 가지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뒤틀어버리는 마찰음.
"책임을 져달라고 할 정도로 연약하지 않거든."
그리고 아토 하루키는 예언을 실행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살아서 함께 돌아간다'는 엉터리같은 자가예언을.
*
>[아토 하루키]가 [이소이 레이지]의 상황에서 [오토와 루이]의 대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멘션_온_단어로_짧은_글_연성
01.와이셔츠
간부복은 기본적으로 안에 무엇을 입어도 상관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래서 쟈부치 요우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의복을 선택했다. 깃이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색 와이셔츠. 호스트는 대체로 땀을 흘리지도 않기에 와이셔츠는 오래 입을 수 있었지만 쟈부치 요우는 일부러 제 자신의 옷을 세탁실에서 세탁했다. 지하 1층에 있는 세탁실에는 쟈부치 외의 인물들도 오고가기에 그는 자주 타인과 얼굴을 마주한다. 다만 살가운 인사는 오고 가지 않는다. 계급상 쟈부치 요우는 그들의 상위에 속하고 일반 연구원들은 하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라, 쟈부치님. 직접 세탁인가요."
대부분은 그렇다.
"카노인가. 보는 대로다."
"간부분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카노 아오구는 태연하다. 쟈부치는 와이셔츠를 단단히 입은 채 윙윙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를 듣다가, 낮은 한숨을 뱉는다. 간이샤워실에는 사람이 없어서 별도의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너도 옷 정도는 갈아입을 것 아닌가."
"네, 저는 인간이니까요."
"나도 와이셔츠 정도는 갈아입는다."
"그렇군요."
위잉위잉 돌아가던 세탁기가 멈춘다. 쟈부치 요우와 카노 아오구 사이에 세탁 종료의 알림음이 울려퍼지다가 사그라들었다. 침묵은 어색하진 않으나 다소 거북한 감이 있다. 쟈부치 요우는 그게 자신의 감각 때문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호스트가 되기 전, 휴게실에서 나누었던 카노 아오구와의 대화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탓이다.
"…세탁기, 쓸 거면 써라. 나는 이제 다 썼다."
"신경도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그대로 지나쳐서 모퉁이를 꺾는다. 그 뒤를 카노의 목소리가 툭 쫓아왔다.
"내일 실험, 기대되네요."
중요하고 중요한 오리진 베타의 실험을 앞두고 저런 말투라니. 쟈부치는 그걸 조금 지적할까 생각하다 그만두기로 한다.
"그래, 기대되는군."
자신 또한 그걸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02. 마리모
"마리모, 루이가 뭔지 알아?"
"실수는 일부러인가?"
하루키가 키득키득 웃고는 읽고있던 잡지의 페이지를 보여준다. 루이는 책을 읽고있던 손을 멈추고 하루키가 가리키는 한 페이지 분량의 칼럼을 읽어보았다. 「귀여운 식물 마리모에 대해 알고계신가요? 이 식물은…」이하로 글쓴이가 마리모를 키우면서 겪은 헤프닝이 가벼운 어투로 이어진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장기여행을 갔다가 마리모가 말라죽었다는 슬픈 엔딩까지 읽은 뒤, 루이는 슥 시선을 들어 하루키를 보았다. 표정에 제법 생기가 가득한걸 보면 이걸 재밌다고 생각한게 분명했다.
"왜 그렇게 재밌다는 표정이지?"
"그치만 재밌잖아."
"어떤 부분이?"
"봐봐, 마리모도 녹색에 동그랗고, 루이도 동그랗고 녹색이니까."
"어이없는 연상법이로군."
읽고있던 문고본을 덮고 머리를 툭, 때리면 하루키가 어깨를 움츠리며 도망친다. 그 서슬에 잡지가 툭 떨어졌다.
"그래서, 키워보고 싶어졌나?"
"재밌을 것 같잖아. 어디서 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보니까 담수성 녹조류라고 되어있더군. 마트에 가면 팔 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암기한 거야? 진짜 대단하다."
"가는 길에 널 닮은 강아지도 구경할까."
넌 갈색에 폭신하게 생겨서 포메라니안이랑 자주 헷갈린단 말이지. 그렇게 덧붙인 말에 하루키가 장난 치지 말라며 어깨를 팍 두드렸으나 아프지는 않았다. 하루키의 근력은 그리 단단하지 못한 탓이다. 루이는 가볍게 몸을 움츠리는 시늉만 하고 떨어진 잡지를 주워들었다.
"넌 식물을 좋아하니까, 어쩌면 10미터 크기로 커질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되면 타고 다녀도 되겠네. 루이도 태워줄게."
청소년기 특유의 허언장담이 마구잡이로 터져나온다. 하루키와 루이는 의미없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잡지의 다음 칼럼 따위를 같이 넘겨보며 느긋하게 오후를 보냈다.
03. 12월의 세 번째 토요일
12월의 세번째 토요일에는 야근 일정이 잡혀있었다. 에노모토 노아는 호스트의 일원으로서 새벽을 꼬박 지새우는 근무도 각오했으나, 노아 자신의 굳센 각오에도 불구하고 야간 실험의 일정은 놀랄 정도로 깔끔하게 끝났다. 에노모토님께서 지켜봐주신 덕분인가봐요. 어느 연구원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으나 에노모토는 얼떨떨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이전부터 지고천 연구소에서 연구를 맡아온 에노모토 부부의 장녀, 로서 의욕이 넘쳤건만 실험은 단순한 결과값을 기록하거나 서류를 복사한 뒤 도장을 찍는 정도로 끝났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업무도 중요하다는건 알지만, 호스트라는건 뭔가 더~.
"아휴, 모르겠다."
간부복을 입은 채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간다.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일단 엄마아빠에게 얘기할래. 모르지, 혹시 내가 미속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모르는 실험규율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그 전에 규칙이나 방법 같은 건 완벽하게 숙지했었으니 사고가 날 일도 없었을 거라구! 아, 그렇게 따지고 보면 원래 위험했을 수도 있는 연구가 내 덕분에 원활하게 흘러간건가?
에노모토가 살짝 들뜬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 네모난 홀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믿어주지 않는거야!"
놀라울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그걸 자신의 어머니가 내는 목소리라고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소리치고 있어서는 아니다. 그 목소리에 짙게 서린 공포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아, 아아, 우리, 지옥, 지옥에 떨어질 거야, 하지만, 어째서?!"
일련의 대화는 마치 악몽의 강물처럼 에노모토 노아의 발치를 흘러간다. 노아는 그 유속에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두 다리로 있는 힘껏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알지 못했던 사실,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 알아버린 사실들이 마구잡이로 발목에 휘감긴다. 그만둬, 날 건드리지 마, 나에게 뭔가를 알려주지 마. 나는, 나에게는, 이 연구소에 있는 모두가 누구보다도.
"세오도아 고문을 죽인 건 접니다."
…….
………….
방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벽에 걸어놓은 달력에 쳐놓은 동그라미가 눈에 들어왔다. 12월의 셋째 주 토요일. 처음으로 지고천 연구소의 간부이자 호스트로서 단독 야간 근무를 하게 되는 날. 그 주변에 붙여둔 앙증맞은 스티커들.
노아는 그걸 바라보다가, 모래성이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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