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언젠가 어느 때에는 이 시절을

LDL+아토 하루키

※세포신곡 본편에서 막간까지의 플레이를 끝낸 후 읽으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아래 글과 살짝 이어지는 부분이 있으나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https://withglyph.com/butterflybox/1808341481


"올해는 납치당하지 않았네요."

"일부러 지금 말하는 거지?"

24일 이브 저녁. 큼직한 칠면조 통구이나 애플 파이 같은 것이 으리으리하게 늘어선 테이블에 앉아있던 하루키가 미간을 좁힌다. 감자튀김은 갓 튀긴 것을 먹는게 맛있다는 이유로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 냄비 앞에 서있던 세오도아가 그 대화를 듣고 큰 소리를 웃음을 터뜨렸다.

"작년의 그거 말이지? 그땐 정말 큰일이었다고~. 사네미츠가 얼굴이 아주 새파래졌었다니까."

"마감이 끝난 시점이었던게 다행이었죠. 아니었으면 저도 일본까지 따라붙었어야 했을 테니까요."

"그나마 무사한게 다행이구만. 이것저것 험한 꼴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거냐?"

뒤이어 테이블을 세팅하던 츠바이크와 애니가 말을 잇는다. 하루키는 츠바이크의 말에는 살짝 쓴웃음을 지어보였고, 애니의 물음에는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라고 답했다. 물론 애니가 하루키의 회복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없지만, 따지고 보면 애니가 레이지를 강인하게 키워준 덕분에 자신이 무사히 구출될 수 있었던 셈이니까. 애니도 그 부분을 시시콜콜하게 파고들 생각은 없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동시에 현관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추워!"

"오, 왔구만."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집주인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라고 하는건 너무하지 않아?!"

"그럼 손님이 하리?"

"애초에 당신이 제깍제깍 비우면 이런 일 없었잖아요, 민달팽이."

"…죄송합니다."

애니의 즉답과 하루키의 지적에 사네미츠의 어깨가 축 쳐진다. 이 멤버 중에서는 그나마 안정적인 사네미츠의 아군은 슬그머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가 소소한 반격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도 일부러 그러신건 아니라구요. 요 며칠 감기 때문에 몸이 안 좋아서…."

"그놈의 감기가 다 나은게 벌써 일주일 전이랍니다, 레이지."

"네… 귀찮아서 내가 당번인거 알면서도 미뤄뒀습니다…."

"알면 빨리 손 씻고 와서 자리에 앉아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축 처져있던 사네미츠의 허리가 쭉 펴지는가 싶더니 그 모습이 얼른 화장실쪽으로 사라진다. 하여간에 부산스럽네요. 하루키가 물잔을 기울이며 보란듯이 한숨을 내쉬자 그새 감자튀김을 끝낸 세오도아가 식탁에 요리 하나를 추가했다. 식탁 한 군데만 본다면 상다리가 꺾이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화롭지만,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의 식성을 생각한다면 살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적지 않게 LDL과 교류해온 하루키가 그렇게 가늠하는 사이, 어느샌가 샴페인을 꺼내온 세오도아가 기세좋게 병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와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건배!"

"너 아직 샴페인 뚜껑도 안 땄어."

"오늘따라 왜 이리 들뜬 겁니까."

옆에서 츠바이크가 샴페인 병을 대신 건내받고는 병따개를 이용해 익숙하게 입구를 틀어막은 코르크 병마개를 뽑아낸다. 영화에서 보면 병마개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아가고 입구에서는 새하얀 거품이 폭죽처럼 쏟아지지만… 아무래도 일반 실내에서 그런 화려한 퍼포먼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그전에 그렇게 기세좋게 날렸다간 전등이나 창문이 깨질테고. 하루키가 묘하게 서민적인 생각을 하는 사이 잔잔마다 샴페인이 따라졌다. 지나치게 휘어져 적힌 이탈리아어인 탓에 라벨을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지만, 투명한 술이 가느다란 잔에 담겨 일렁이는 모습은 퍽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자아냈다.

"자, 그럼 잔도 모두에게 나눠줬고~ 건배하자! 아직은 좀 이르지만!"

"하긴 계속 음식만 노려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멀리 일본에서 온 하루키 씨가 건배사 하시죠."

"제가요? 여기서요?"

"오, 그거 좋은데? 능숙하게 하나 뽑아봐."

"이제 겨우 이탈리아어를 익힌 참인데요?"

"그럼 영어도 괜찮아~"

"이 사람 진짜 왜 이렇게 들뜬 거래요?"

그렇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아무튼 지명은 지명.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몸을 빼려고 해봤자 다른 사람들이 쉬이 물러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있는 사회인 하루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하고 가벼운 탄성이 뒤를 이었다. 근데 왜 거기에 민달팽이도 섞여있는건데. 하루키는 그쪽을 향해서만 날카로운 눈빛을 한 번 보내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지만!"

"짧아서 좋다!"

"건배~!"

얇은 술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이후로는 극히 자연스러운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술과 고기, 야채와 빵. 그리고 약간의 겨울 과일들. 이탈리아어와 영어, 일본어가 뒤섞인 소소한 담소들. 잔은 빠르게 비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늘상 비어있지만은 않았고 시간이 11시를 넘겼을 무렵에는 다들 적당한 취기를 느끼고 있었다. 때문인지 냉장고에서 사네미츠가 어제부터 만들었다는 딸기 크레이프 케이크가 등장했을 때에는 다들 감탄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할 때는 하는군요."

"아들 앞이니까 솜씨 좀 냈다 이거냐?"

야유 비슷한 색깔이긴 했지만.

사네미츠가 직접 케이크를 만든 적은 적었기에 크레이프는 모양이나 크기가 균일하지 못하다. 중간중간에 들어간 딸기도 들쭉날쭉한 모양이 되어있어, 모양은 그야말로 초보자가 갓 만들어낸 물건이다. 그걸 마치 재단하듯이 엄격한 눈으로 바라보던 하루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민달팽이 실력치고는 괜찮네요."

"하루키…."

"왜 쓸데없이 감동먹는 거에요."

"봐주세요 형. 아버지 이거 만든다고 정말 필사적이셨다구요."

하여간에 레이지는 민달팽이에게 약하다니까. 하루키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크리스마스 케이크에는 장식용 촛불이 붙고 누군가가 카운트다운 어플을 켜 식탁 한쪽에 올린다. 약 1분 남짓한 시간이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동안, 하루키는 문득 이게 뭐라고 이렇게 공을 들이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건 살짝 허무주의적이며 앞으로 이어질 많은 사건들에 대한 단념과도 같다. 하루키는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그런 감정들이 느닷없이 치솟는 것을 느끼고.

"형, 이제 곧이에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감정을 순식간에 잊어버린다.

"3, 2, 1…."

"메리 크리스마스!"

츠바이크가 사네미츠의 등을 꾹 누르고, 엉겁결에 앞으로 밀려나온 사네미츠가 반사적으로 촛불을 훅 불어끈다. 당신 생일은 크리스마스도 아니잖아요. 하루키가 어이없어 하는 사이 세오도아가 폭죽을 기세좋게 터뜨린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색색의 종이들이 흩날리더니 크레이프 케이크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어이, 세오도아. 폭죽 각도는 잘 잡아야지."

"미안~! 이런건 기세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그래도 한 두 개만 붙었으니 떼어내면 먹을 수 있겠어요."

도란도란한 말소리와 함께 동그란 케이크가 총 6등분되어 각자에게 분배된다. 조금 전에 마신 샴페인의 미약한 알콜기운이 기분을 살짝 들뜨게 만들었다. 하루키는 공연히 절반 쯤 빈 술잔을 흔들어보다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한 입에 삼켰다. 창 밖이 어둠 속에서는 몇몇 이들이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인지 요란하게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음, 이거 의외로…."

"맛있네요."

"그렇다기보다 달지 않나?"

"생크림에 딸기니까요."

당연할 이야기를 굳이 나누면서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 사람들과 친해졌기 때문일까. 처음 이 사람들을 소개받고 그 관계를 알았을 때 납득하는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에 묘한 기분이 감돌던 시절을 떠올리던 하루키는 다음 케이크 조각을 입으로 밀어넣으며 그 생각을 치워버렸다. 딱히 중요하게 떠올릴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보면 선물은 언제 열어보지?"

"케이크를 다 먹고 열어보는게 어때요? 양이 꽤 많던데."

"5인분의 선물이니까요. 이번달 제 월급과 보너스를 거의 다 털어야 했습니다."

"츠바이크 씨… 그렇게나 진지하게 준비해주신건가요."

"레이지, 그런 눈빛 그만두세요. 두드러기 날 것 같습니다."

"아하하, 기대되네."

그 대화의 사이에서, 하루키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알아차린다. 그게 누군지 일부러 찾아볼 필요는 없었다. 시선이 딱 마주쳐, 상대방이 보기 좋게 굳어버렸으니까.

"……."

"………."

옅은 침묵. 하루키는 시선을 돌리고 반절 정도 먹은 크레이프 케이크 조각을 잠시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직후 짧은 메일을 수신받은 사네미츠가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런저런 변명을 뱉으며 자리를 피했다. 아마도 화장실에라도 들어가서 심호흡을 한 다음에 확인해보려는 거겠지.

"겁쟁이."

하루키가 일본어로 중얼거린 말은 옆자리에 앉은 레이지의 귓가에만 겨우 닿는다. 다만 레이지가 그 말을 듣고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일은 없었다. 그는 그저 약간 취기가 오른 얼굴로 히죽 웃고는.

"죄송해요."

사과인지 뭔지도 모를 말을 했을 뿐이다.

*

자꾸 내 눈치 보지 말고

제대로 크리스마스 분위기 즐겨요

망할 민달팽이

그리고 선물 별로면 내년은 일본에서 볼거야

*

돌아온 사네미츠는 어째 눈이 빨개져 있었고 자꾸 코를 훌쩍거렸지만, 아무튼 제게 온 선물을 보고 기뻐했다. 그 얼굴을 봐서 하루키는 내년 비행기표 값도 미리 준비해 두기로 했다.

아직 1년 남짓 남은 이야기였지만.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