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커플링Coupling

[레이하루]설익은 사과에 설탕과 술을 더해서

이소이 레이지X아토 하루키 커플링.

본편 S+ 이후의 세계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발단은 사과주였다. 의뢰인에게서 보답으로 받은 사과가 설익어있어서, 버리기는 아까우니 술로 담가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든 사과주는 몇 개월간 아토 하루키의 집 창고에 있다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이소이 레이지에 의해 발굴되었다. 직접 담근 과일주라는 게 아무래도 레이지의 흥미를 동하게 한 모양이다. 너무 아껴도 썩을 뿐이니까 지금 마셔버리죠? 눈을 빛내며 말하는 레이지 앞에서 하루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첫 수제 과일주니까 맛이 이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맛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술에 사과 향이 달달하게 도는 것이 입맛을 자극해서 계속 계속 잔을 채우게 되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매운 쪽이 취향이고 단 것은 힘들다는 레이지도 이건 선물로 들고 가고 싶을 정도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마시는 기세를 보아하니 아토 하루키의 사과주가 이탈리아 구경을 할 일은 없을 성싶었다.

이제 그만 마실까, 했던 것은 새벽의 일이다. 물리적으로 과일주가 모두 동나는 바람에 더 마실 수도 없었다. 이거 꽤 취하녜요. 레이지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빈 잔을 흔들었고 하루키도 취기에 적당히 물든 채로 키득거렸다. 내일 일어나면 혀에서 사과 맛 날 것 같아. 농담 삼아 한 말에 이소이 레이지가 웃었다. 그렇네요. 그럼 지금 키스하면 사과 맛 나는 거 아님까?

술자리 농담은 술자리이기 때문에 성립한다. 평소라면 하지 못할 말이 취기를 업고 뛰쳐나오면 모두가 웃는다. 그런 사회경험이 있는 하루키는 별생각 없이 말하고 말았다.

그럼 해볼래?

레이지는 진짜 할까요? 라고 되묻지 않았다. 대신 웃던 얼굴 그대로 아토 하루키의 어깨를 끌어당겨 그대로 키스했다. 무방비하게 웃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온다. 그대로 얽혀드는 열기가 의외로 능숙해서 아토 하루키는 쿡쿡 웃어버렸다. 입술이 떨어진다. 레이지도 키득거리더니 아예 아토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다시 입 맞췄다. 하루키는 더듬더듬 레이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곤 서투르게 응했다. 평소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달달한 사과 맛이 느껴지다 보니 별다른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왠지 기분 좋다. 여린 부분이 살살 문질러지는 감각이 간지러워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걸 레이지가 더 바싹 잡아당긴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혀를 감싸고 당기고 빨아들이는 감각에 빠져있던 하루키는 그걸 거부하지 못했다. 달달한 맛이 뇌까지 스며들어서 말랑말랑해지는 기분. 몰두하는 순간 균형을 잃고 몸을 얽어 안은 그대로 상체가 무너지고 말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레이지가 꽉 안아준 덕분이다.

대신에 좀 더 거리낄 것이 없어져서, 하루키는 아예 레이지의 몸에 얽힌 채로 입을 맞췄다. 이제는 사과 맛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 몸에 퍼진다. 어쩐지 간지럽고, 덥고, 나른하고... 녹진녹진한 느낌. 하루키는 좀 더, 좀 더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레이지의 품을 파고들었다. 밀착된 몸이 서로의 호흡에 맞춰 맞물렸다. 이거보다 더. 더 깊이 맞물려서 기분 좋아지고 싶어….

까지가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날 감옥에 넣어줘."

"진정해, 하루키. 일단 심호흡을 해라."

시간은 오전 아홉 시 반. 날이 밝았다고는 해도 아직은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하루키의 발치에서 숙취 해소제 세 병이 굴러다닌다. 하루키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조언에 따라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

"역시 신고해줘!"

"넌 지금 이성을 잃었어."

소꿉친구는 냉정하다. 그에 비해 하루키는 지금 어떤 꼴인가 하면 등골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입에서는 숙취해소제의 맛이 감돌고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이라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나 이제까지 어떻게 진정해왔지? 애초에 나의 이성이란 건 뭔데? 던져지는 물음은 철학적인 주제마저 담고 있지만 오토와 루이는 동요하지 않았다.

"상황을 찬찬히 정리해보지. 넌 어제 이소이 레이지와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성적 충동에 따라 서로와 스킨쉽을 나눴다. 그리고 오늘 아침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맞나?"

"루이, 내 자산은 너에게 상속할게. 부디 좋은 일을 위해 써줘."

"네가 이렇게 성급하게 구는 것도 처음 보는군."

"당연하지! 상대는 나보다 7살이나 어리고, 게다가 동생이라고!"

"그 부분 말이다만."

"너희는 상호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이 아닌가?"

사고회로가 멈춘다. 하루키가 정지화면처럼 굳어져 있는 사이 오토와 루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생이라 해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난 사이는 아니고, 서로가 성인이며, 상호 호감을 품은 상태에서 가진 스킨쉽이라면 일단 문제는 없다고 보는데."

"……."

"아니면 그건가? 네가 볼 때 이소이 레이지는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라던가."

"그럴 리가 없잖아! 레이지가 얼마나 올바르고 착하고 귀여운 아이인데!"

풀려있던 시동이 단숨에 걸리며 쏜살같이 말이 나가버린다. 얼마나 기세 좋았는지 곁을 지나가던 아이와 어머니가 이쪽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지나갔을 정도다. 아아, 아닙니다. 저는 당신들이 생각하고 웃을 정도로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 하루키는 누구에게 차라리 무릎 꿇고 사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대가 자기 행동을 책임질 수 있다면, 상호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 아닌가?"

"하지만 일을 저지른 건 나라고, 루이…."

그렇다. 사과주의 숙취에서 겨우 깨어났다가 곁에서 곤히 자는 동생을 발견하고 1차 쇼크, 침대 시트 아래 서로의 다리나 팔이 적나라하게 얽혀있는 데에서 2차 쇼크, 아른아른 떠오르는 어젯밤의 기억에 3차 쇼크. 다행히 삽입까지는 가지 않은 게 분명했지만 몰려오는 죄책감과 죄악감을 견디지 못하고 핸드폰만 달랑 들고 집을 뛰쳐나온 지가 벌써 한 시간 째. 아토 하루키에게 어젯밤의 죄인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내가 진짜 무슨 짓을 한 거야, 7살이나 어린! 새파랗게 어린 애한테!"

"네 동생 레이지는 20대를 넘겼다지 않았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다시 떠올려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하루키는 연신 제 뺨을 문지르며 주변 풍경을 힐끔거렸다. 공기 맑은 오전 중의 공원. 부지런히 일과를 시작한 노인분들이나 아이들이 보일 때마다 가슴께가 극렬하게 아픈 것은 양심이 지르는 마지막 단말마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제 느꼈던 그 부드럽고 기분 좋은 감각도 되살아나서.

"역시 나는 파렴치한이야…."

"좋아하는 사람과 닿고 싶어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

"레이지를 싫어하나?"

앉은 자리에서 이마를 눌린 것처럼 꾹, 하고 말문이 막힌다. 하루키는 항변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예상외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에 스스로 기막혀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기 너머의 루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멀리서 자전거가 찌르릉, 벨 소리를 울리며 지나간다. 문서 작업이라도 하고 있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키는 한 손으로 제 뺨을 문지르며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싫…어, 할 리가, 없잖아."

"그럼 레이지는 너를 싫어하는 것 같나?"

"……으."

이가 악물린다. 하루키는 뺨을 주무르던 손길을 그대로 떨어뜨린 채 벤치 아래의 흙바닥을 내려다보다 옷자락을 꾹 쥐었다. 이유도 없이 숨이 갑갑했다.

"그 아이는… 분명히, 나를 그냥 형으로서 좋아한다고 생각해."

"흐음."

"내가 술김에 그만 멍청한 짓을…, 아아, 정말 왜 그랬지!!"

"말하자면 좋아해서 그랬다는 거군."

"감형 사유처럼 말하지 말아줘, 루이. 이건 사형감이라고."

"그렇다면 더더욱 이소이 레이지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것 아닌가?"

"……."

"상대에게 사과하고,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그다음에 마땅한 벌을 받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만."

"그런 말을 하면."

그 아이는 다정하고 착한 아이니까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줄지도 모른다. 그야 승낙을 받는 것 자체는 기쁠지도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역시 그것만큼 미안하고 끔찍한 일은 없어서, 아토 하루키는 조용히 입술 안쪽을 씹었다. 그 탓에 누군가가 자신의 바로 뒤로 다가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루키."

"응?"

"연애는 들켜야 시작이다." "여기 있었네요, 하루키 씨."

두 가지 목소리가 한 번에 들려오는 바람에 하루키는 어느 쪽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니, 한 쪽의 말은 도저히 여기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청각이 수용을 거부한 것에 가깝지만. 굳어버린 하루키의 한쪽 손에서 핸드폰이 그대로 들려 나간다. 주춤주춤 시선을 돌려보면, 당분간은 도저히 마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서 있었다. 그 얼굴이 하루키의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토와 씨. 형 찾았어요."

…….

"네, 이후는 저희 둘이서."

삑, 하고 통화가 끝난다. 이상할 정도로 적막해진 청각 사이로 이소이 레이지가 자박자박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벤치 뒤쪽에서 앞쪽으로 돌아온 레이지는 아토 하루키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자리에 앉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마음과 이대로 약간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서로 뒤섞여서 엉망진창이 된다. 하루키가 숨을 들이쉬는 것과 동시에 레이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함다."

"어?"

"그게, 조금 들떴슴다. 하루키 씨도 같은 마음인가…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혀끝이 마른 입천장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한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듯이 깜박거리는 눈동자에 이소이 레이지의 표정이 하나하나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쪽을 잘 쳐다보지 못하는 옆얼굴, 초조한 듯 마른 침을 삼킬 때마다 움찔거리는 목젖, 천천히 목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평소보다는 약간 열이 오른 것처럼 보이는 귓불이나 뺨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하루키는 뒤늦게 거기서 시선을 떼려고 했지만 몸이 말이 듣지 않았다. 굶주린 듯이 옆선을 훑고 상대가 하는 말을 빨아들이고… 그리고 손을 잡고 싶다. 불합리한 충동이 고동 속에 섞인다. 아토 하루키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 제 손을 움찔거리다가, 가까스로 쥐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레이지가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 하루키 씨가 좋아요."

"……."

"무드 없는 고백이라 죄송함다. 하지만 정말로 정신없이 찾아다녔으니까요."

그제야 레이지의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 집에 들어올 때까지는 깔끔하던 그것은 뒤축이 엉망으로 구겨지고 군데군데 물기와 얼룩이 남아 지저분해져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찾아 주변을 돌아다녔던 걸까. 그걸 상상하면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도 꽉 조여드는 기분이 든다. 하루키는 달아오르는 제 뺨을 문질러 식힐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음 말을 들었다.

"혹시나 늦어져서 하루키 씨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지는 바람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는데."

"지난밤에 그런 짓을 벌여놓고 그러는 건 좀 뻔뻔하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하나하나 빼앗기고 있다. 하루키는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여전히 단단히 주먹을 쥐고 있는 레이지의 손 위에 천천히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레이지가 깜짝 놀라 흠칫하는 모습이 보인다. 손등과 손가락을 잇는 관절뼈를 쓰다듬으면 그 이상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지만 마음과 마음의 제일 연약한 부분이 천천히 맞닿는 기분이 들었다. 그걸 기분 탓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손가락 위를 덧그리듯이 매만진다.

"레이지."

"네."

"……기분 나쁘지 않았어?"

"전혀요."

"그, 렇구나."

"하루키 씨는?"

"……."

"하루키 씨는 기분 나빴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제야 레이지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져나간다. 하루키는 레이지의 왼손 엄지께에 겹쳐져 있던 새끼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뿌리께를 간질이듯이 건드렸다. 작은 장난 같은 움직임에 레이지가 이쪽을 돌아본다. 그 얼굴이 그늘에 잠겨있는데도 발간빛을 띄고 있는 것이 너무나 잘 보여서 그만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레이지가 특유의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그건, 승낙의 웃음인가요?"

"어느 쪽이면 좋겠어?"

"제 맘대로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응."

약간은 도발에 가까운 말에 레이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놀렸나. 하루키가 사과하려고 하면, 그 깜박임에 가까운 찰나의 순간에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커진 시야 사이로, 레이지가 슬쩍 웃는다.

"싫은가요?"

"……."

"싫으면 지금 뺨 때리고 도망가주세요."

"진짜로 그럴 경우, 어떻게 돼?"

"다시는 일본에 오지 않겠습니다."

"그건 싫어."

싫은가요. 응. 아까와 같으면서도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천천히 손을 깍지낀다. 하루키는 애매하게 벌어져 있던 두 사람 사이를 메우듯이 자리를 조금 가까이 옮겼다. 레이지가 물었다.

"하루키 씨, 지금 키스해도 사과 맛이 날까요?"

"안 날걸. 숙취해소제 세 병이나 마셨으니까."

"그렇게나 마셨나요."

"얼른 깨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럼."

데이트를 할까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긴장한 티가 역력해서 하루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젠장, 웃지 마세요. 이래 보여도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다고요. 그렇게 투덜거리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워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분명히 말하건대, 근시일 내에 풀릴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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