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커플링Coupling

[막간컾]우리는 끝내 반지를 교환하지는 않았지만

DLC은자막간 스포일러 함유 / 장례에 앞서 시신을 수습하는 단계가 묘사됩니다.

"수의는 우리가 입힐까요?"

오렌지가 잘 익었는데 한 바구니 가져가는 게 어때요? 라고 묻는 듯한 말투였다. 세오도아 리들은 반사적으로 감사 인사를 하려다 가까스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 제가. 제가 하고, 싶어요. 그, 그러고, 싶습니다. 마른 입술에서 제대로 뭉치지 못한 말이 푸슬푸슬 떨어져 나간다. 휴스 마을의 유일한 장의사는 딱히 곤란한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럼 세오도아 씨가 하는 걸 저희가 도와드리는 거로 하죠. 아뇨, 거절하지 마세요. 단호하게 말씀드리는데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옷 입히기는 천지 차이입니다."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정도로 차가운 편이 좋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루메르트가 이 자리의 문을 열고 뭘 하는 거냐고 고개를 들이밀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죽고 싶은 마음으로, 세오도아는 가까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계절은 7월이 한창인데 장례식을 상담하는 작은 방은 기이할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조금 서둘러야겠어요. 요즘은 날씨가 더우니까요. 이런 말씀이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7월이다 보니 부패가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부패. 그 말이 루메르트를 향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세오도아는 둘의 이미지를 결부시키지 못했다. 어쩌면 거부한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힘이 약하고 늙긴 했지만 오늘 아침까지는 분명히 살아있었던 루메르트가… 썩을 거라고? 왜? 그런 의문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장의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죽은 자들은 숨을 멈춘 그 순간부터 온 힘을 다해 흙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렇다면 되도록 생전과 같은 모습일 때 보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을에서 힘깨나 쓴다는 이들이 루메르트의 시신을 큰 관으로 옮기고 장례식장으로 옮기는 긴 행렬을 바로 뒤에서 따라왔는데도 그랬다. 상황이 너무 잘 꾸며지는 바람에 도리어 위화감이 이는 악질농담 같다. 세오도아는 문득,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루메르트가 멀쩡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망상에 빠졌다. 많이 놀랐어? 같은 말을 하면서….

명백한 현실도피였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못해도 내일 아침에는 본격적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명복을 빌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해야 합니다. 각오 단단히 하세요."

장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오도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과 의자 사이에 꾹 눌러있던 셔츠가 축축하게 떨어져 나왔다. 세오도아는 그제야 자신이 이 작은 방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서늘하다고 생각했건만 착각이었던 걸까. 아니면 전부 자신의 식은땀인 걸까.

장의사는 등불을 들고 상담실보다 더 아래에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작은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냉랭한 기운이 가득 찬 곳이었다. 땀으로 축축해져 있던 상의가 마를 새도 없이 단숨에 그 냉기를 집어삼키고 싸늘해진다. 세오도아는 저도 모르게 연거푸 재채기하고 말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다. 장의사는 익숙한 동작으로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작업용 로브입니다. 이걸 입고 소매는 전부 걷으세요."

받아들면 제법 묵직하다. 세오도아는 대체 어딜 어떻게 입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머리를 넣을 위치를 찾아냈다. 그걸 걸치자 주변을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맴돌던 추위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루는 지금 이런 추위 속에서 그냥 누워있는 걸까. 여름이라서 옷도 그리 두껍게 입지 않았는데. 오히려 엄청나게 얇을 텐데.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입술이 떨린다. 얼른 그를 깨워서 같이 손을 잡고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소매 걷으셔야죠."

대신에 장의사가 세오도아의 한쪽 팔을 잡아 소매를 걷어주었다. 이런 일이 드물지도 않은지 길이를 조절해주는 동작이 능숙했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장의사의 정수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세오도아는 통로 끝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로브를 입고 있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물었다.

"거기 그 사람은 누군고?"

"고인의 연인이에요."

"아."

짧은 납득의 말을 남기고 로브를 쓴 자가 방 안으로 사라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소매 걷는 작업을 끝낸 장의사가 저 안으로 들어가자며 세오도아를 재촉했다. 지하실이라기보다 커다란 동굴을 연상케 하는 공간은 당최 안에 든 것이 없어서 발소리가 유난히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발밑에서 밟히는 모래나 돌멩이가 본래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이었던가. 로브에 푹 파묻혀 두 팔만 내민 모양새가 된 세오도아는 장의사의 뒤를 따르며 멍하니 생각했다. 이런 조각들은 그냥 빗자루로 싹 쓸어서 청소해버리면 될 텐데….

이윽고 방 안쪽으로 들어선다.

그 순간 세오도아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생각이 얼어붙었다.

오늘 아침, 루메르트 오토마이어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소식을 들은 이들이 함께 힘을 모아 그를 관 안으로 넣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얼마 되지 않는 불빛을 받으며 차가운 철제 침대 위에 뉘어진 루메르트 오토마이어는 어딜 어떻게 보아도 생명의 기척이라고는 한 줌 느껴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린다. 뱃속에서 무언가가 세차게 울렁거렸다. 새된 숨소리를 내는 세오도아 앞에 둥글고 깊은 양동이 하나가 놓였다.

"토하고 싶으면 양동이에다 하쇼. 바닥에 얼어붙으면 냄새나고 치우기도 어려워."

세오도아는 화내지 않았다. 그 전에 역한 현기증이 목구멍을 깊숙이 찌른 탓이다. 끔찍한 냉기와 차가운 감촉을 지닌 양동이 안에 구역질하는 동안 멀리서 뭔가를 준비하는 무기질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뱃속에 든 것이라곤 완전히 없어져 애꿎은 위액만 혀끝을 타고 뚝뚝 떨어질 무렵, 누군가가 옆에 와 앉았다. 세오도아를 여기까지 이끌고 내려온 장의사였다.

"무리하지 마세요. 이만 위로 올라갈까요."

그건 어떤 배려였다. 당신은 이미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라. 이 정도는 늘 있는 일이며, 우리에게는 놀랍지도 않다. 사실 모두가 그렇다. 그런 감정이 담긴 조곤조곤한 말투. 누군가는 그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슬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을 수도 있겠지. 세오도아는 기침을 한 번 했다가, 위액에 번들거리는 입술을 한 차례 앙다물곤 입을 열었다.

"아뇨, 할게요."

위액에 젖은 탓인지 목소리가 일종의 점성을 되찾는다. 장의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후들거리던 다리에 천천히 피가 돌기 시작한다. 무력한 팔에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깃들었다. 세오도아는 쓴맛이 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고 천천히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늙은 목소리의 염장이가 그런 세오도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짜고짜 스펀지를 내밀었다.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 테니 고대로 따라만 하쇼."

장의사의 말대로였다. 세오도아 리들은 악착같이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내고자 했으나 몇몇 일들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을 벗기고, 몸을 한 차례 닦아내고, 하얀 수의를 입힌다. 글자로 적으면 실로 간단하게 끝나는 일들을 생전의 활기 그대로 묵직하게 굳어져 버린 신체가 묵묵히 방해했다. 세오도아는 작업을 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루, 조금만 움직여 봐요"라고 말하게 되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악전고투에 어울리는 작업이 끝났다. 세오도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수의의 마지막 매듭을 지은 뒤 다시 한번 루메르트 오토마이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정말로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세오도아는 노동의 피로와 주어진 작업에 쫓겨 마음 한구석으로 도망가있던 슬픔이 목구멍에서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지하실의 냉기는 어느새 피부를 딱 알맞게 식혀주는 정도가 되어있었다. 악물린 이 사이로 뭔가가 번져 나오려는 사이, 세오도아와 함께 시련을 넘어선 염장이가 말했다.

"귀에 저건 어쩔 거요."

그 손짓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루메르트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세오도아는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인 다음에야 염장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루메르트가 걷거나 말할 때마다 흔들리며 반짝이던, 금빛의 긴 피어스.

"무덤에 같이 넣을 거요?"

세오도아는 루메르트에게서 그것을 빼앗는다는 가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루메르트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고, 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 이외의 누군가에게 어울릴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하여 세오도아는 그 귀걸이를 그냥 두고자 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루메르트의 모습 그대로 그를 보내주고 싶었다. 비록 시간은 지났더라도 처음 만났을 때와 최대한 같은 모습으로.

그럼 나는?

냉기가 갑자기 이빨을 드러내며 품을 파고든다. 세오도아는 귀걸이를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한참이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새삼스럽게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가락이 루메르트의 식어버린 귓불을 더듬었다. 몸을 깨끗이 씻어내느라 체온은 물론 감각도 거의 잃어버린 손끝에 오래된 고무 같은 물렁한 감촉이 닿는다. 세오도아는 제 눈가로 모이려는 슬픔을 억지로 밟아 터뜨려대며 입술을 악물었다. 반은 호기심으로 그가 하고 있던 피어싱의 구조를 알아둔 것이 여기서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인생은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루메르트의 귀에서 피어스가 모두 빠져나왔다. 세오도아는 그제야 아껴두었던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해제한 부품 하나하나를 응시했다. 금빛의 피어스는 촛불과 냉기 속에서도 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슈?"

세오도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의사가 말없이 다가오더니 어디서 났을지 모를 가죽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그 안에 피어스를 넣어서 보관하라는 뜻임을 이해하는 동안, 염장이가 수의 입은 루메르트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세척 됐고, 수의 됐고, 유품 됐고…. 그가 중얼거리는 단어 사이로 묘하게 무게를 지닌 한 단어가 날카롭게 꽂혀 든다. 세오도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벙긋거리다 천천히 피어싱으로 시선을 떨궜다. 느슨하게 겹쳐진 그것들이 기울어진 십자가처럼 보이는 것은 신경이 너무 과민해진 탓일까.

"그건 가져가세요. 나머지는 굳이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의사가 담담하게 말한다. 세오도아는 눈을 깜박이려다가, 실수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걸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장의사가 앞서 방을 나간다. 염장이는 아직 자잘한 일이 남았는지 구석진 어딘가를 분주하게 뒤지고 있었다. 세오도아가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자, 제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던 염장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일 교회에서 마지막 인사를 할 테니 지금은 그냥 가쇼. 청승 떨지 말고."

"맞는 말입니다. 장례식을 치르며 다시 뵙게 될 테니 지금은 돌아가도록 하죠."

장의사도 한 술 거든다. 세오도아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루메르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득한 산맥의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

휴스 마을에서 가족 혹은 연인의 장례식을 치르는 이는 장례식 전날 밤을 교회의 방에서 보내게 된다.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비어있는 방으로 안내된 세오도아는 단순한 구조의 내부를 둘러보다 반들반들한 나무 탁자를 발견했다. 그 위에 팔 근육이 경직되도록 쥐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가죽 주머니 사이로도 달그락거리는 금속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풀어서, 내용물을 하나씩 꺼낸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반짝이는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또 숨이 괴로워진다. 악성 염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목구멍이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세오도아는 이를 악물며 그걸 참아내고는 피어싱의 고리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무언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고정되지 않는 구조였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다. 교회의 손님방은 정말로 단출해서 그 흔하디흔한 바늘이나 송곳조차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교회를 지키는 이에게 부탁한다면 아주 구할 수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공연히 이상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다. 세오도아는 마지노선 같은 상식에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좀 더 면밀하게 살폈다. 면밀하게, 면밀하게… 살펴보던 눈이 문득 한쪽 벽에 장식된 십자가를 발견했다. 신의 자식이 매달린 십자가는 이 공간의 속성을 생각하면 꽤 흔한 것이고, 어딘가가 뾰족하다고 해도 그가 원하는 기능에는 한참 못 미칠 테지만.

피어싱을 방의 침대 위로 옮기고, 질질 끌어당긴 탁자를 십자가 장식 아래로 움직인다. 이윽고 발을 디디고 올라가 십자가 장식을 건드려 본 세오도아는 자신이 예상했던 물건이 반쯤 벽에 박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입술 사이로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흘러나온다. 루가 이걸 봤더라면 분명 바보 같은 짓 하지 말라고 했겠지. 아니면 자신이 직접 해줄 테니 여기와 얌전히 앉아보라고 했을까? 하지만, 하지만 루. 당신은 이제. 이제 더 이상.

세오도아는 있는 힘껏 벽의 못을 뽑았다.

*

"그땐 좀 성급했지. 응, 나도 인정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잖아. 귓불은 과다출혈이 일어나는 부위도 아니고."

"그야 엄청 얼얼하긴 했지~ 게다가 완전 무겁고. 루는 귓불에도 근육이 있었던 거야?"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응. 할 리가 없지."

"……있잖아."

"어울려?"

답은 없다. 연인의 유품을 귀에 걸고 있던 이는 묘석에 뺨을 붙이고 누운 채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딘가의 꿈에서라면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마냥.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막간컾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