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커플링Coupling

[하라라이]그렇지만 나 당신을 만나서 좋았어

-DLC 내용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이소이 라이에 대한 날조 설정이 있습니다.

-하라다 미노루×이소이 라이... 사실은 반 스푼밖에 안 들어갔습니다. 일단 표시는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소위 불량아라고 불리는 아이들은 직접 자신의 이름을 만들었다. 그건 호적상에 등록된 이름, 학교 출석부에 적힌 이름, 지긋지긋한 어른들이 부르는 이름에 대한 저항이었다. 물론 불량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아이도 있었다.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나, 불러주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우가 그랬다. 이소이 라이도 처음에는 그랬다. 라이가 지긋지긋해한 것은 추잡한 가정 사정이지 상냥한 할머니나 사랑스러운 동생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불길 속에 새까맣게 곱아들었다. 불길에 휩싸여 죽은 사람들의 잔해는 장례식장에서 또 한 번 하얗게 불살라졌다고 한다. 그동안 이소이 라이라는 이름에는 불티 하나 튀지 않아서 끔찍했다. 그것은 라이를 맡게 된 친척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서로가 끔찍하니 같이 얼굴을 볼 이유가 없었고 라이는 자신에게 그나마 익숙한 일을 했다. 거리로 나선 것이다.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에게 주먹을 꽂아주고 개싸움을 이기자 누군가가 이름을 물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습한 날이었다. 그런데도 이소이 라이라는 이름 가장자리에서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길이 일렁였다. 그걸 입에 올리면 같이 끌려 나온 불티가 사방팔방으로 들러붙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밤의 어둠 속에 서 있던 불량아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이름은 쿠루미くるみ, 이소이 쿠루미다."

그날부터 라이는 「쿠루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다. 쿠루 선배. 쿠루쨩, 쿠루밍, 그런 호칭들은 서서히 라이라는 발음을 어둠 속에 파묻어갔다. 물론 완전히 파묻히지는 않았다. 어른들이나 경찰들에게 불리는 이름은 여전히 이소이 라이였기 때문이다. 「쿠루미」는 그 이름을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내고 싶어서 더더욱 난폭하게 굴고 험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윽고 인근 경찰들이나 조직 사이에서「쿠루미」라는 이름이 더 선명하게 남게 되었을 무렵에는 이소이 라이라는 한자를 쓰는 방법조차 희미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행이다, 건강해졌구나. 기뻐."

처음 만남은 우연처럼 지나갔다. 두 번째 만남에서 「쿠루미」는 알 수 없는 이의 이름과 소속을 물었다.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려고 던진 질문에는 뒷골목에서 상대의 신원을 파악할 때 쓰던 버릇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자신을 「하츠토리 하지메」라고 소개한 뒤, 마치 물결이 이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이 「아카시아의 신민」이라는 조직의 개조(開祖)를 맡고 있다고 밝혔다. 척 들어도 뒷골목의 무슨 무슨 구미組라거나 어쩌고저쩌고 카이会라는 곳과는 연이 없는 발음이었다.

저도 거기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자리가 없다면 말단의 말단이라도 좋습니다! 이소이 쿠루미,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실로 양키답게도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제 뜻을 밝히는 「쿠루미」앞에서 하츠토리 하지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네 진짜 이름이니?

등줄기에 얼음물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저하며 고개를 들면, 온화하고 상냥한 미소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건 네 진짜 이름이니?"

하츠토리 하지메가 두 번째로 묻는다.

「쿠루미」는 입술을 뻐끔거리기만 하다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은인을 속이려던 건 아닙니다! 단지, 단지…."

"단지?"

"……본명을 쓴 건, 너무 오래되어서."

"그렇구나. 뭔가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을까."

"…네."

"그래."

하츠토리 하지메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쿠루미」는 무릎을 꿇고 여전히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머리 뒤쪽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거니와 하츠토리 하지메가 그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것도 아니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가득했다. 아니, 어쩌면 하츠토리라는 인물은 눈앞의 대상이 무언가 결의를 내리는 것을 기다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한한 인내심과 다정함으로.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어떤 결의가 형태를 이루었다. 경련하듯 움찔거리던 입술 사이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닌 음절이 흘러나왔다.

"…라이らい, 입니다."

"어떤 한자를 쓰니?"

"미래未來 할 때의 래来 자를 씁니다."

"라이来. 좋은 뜻이구나."

그만 고개를 들고 일어서주지 않으련.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소이 라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은인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은 말이야, 「아카시아의 신민」은 나 혼자만의 조직이 아니란다."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하여 내가 너의 입단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기는 힘들 것 같아."

"……."

"그러니 같이 가지 않을래?"

"네?"

"다행히 여기서 그리 멀지는 않은 곳에 있어. 조금 걷게 되겠지만."

괜찮을까? 그렇게 묻는 하츠토리 하지메 앞에서 라이가 돌려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

그리하여 이소이 라이는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냈다. 「아카시아의 신민」. 하츠토리 하지메. 신앙. 유대. 지고세포. 호스트. 의지. 그 모든 단어에는 뒷골목에 없는 정갈함이 있었고 라이는 기꺼이 그것들을 삼켜 자신의 역할로 삼았다. 하츠토리 하지메를 처음 만난 이후 6년간, 그 단어들은 말 그대로 이소이 라이의 피와 살이 되어 함께 숨 쉬었다. 1984년, 도서관에서 하라다 미노루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눌 때도 그러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예정이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이소이 라이는 로맨스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지 않았다. 대신에 당혹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은 아니었지만, 향후의 인생을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을 실제로 마주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이소이 라이의 혼란을 아는지, 하라다 미노루는 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다만 진중한 눈빛으로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안돼. 거절해야 해. 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하라다 미노루라는 인물은 「아카시아의 신민」이라는 단체에 신앙심을 품고 들어온 신자조차 아니다. 오컬트 방면의 기자치고는 드물게 객관적인 태도를 갖췄을 뿐인 외부인. 그것이 현재의 하라다 미노루를 정의할 수 있는 언어였다. 물론 하츠토리 하지메는 미노루를 친구라고 부르고, 우츠기 노리유키 또한 외부인인 그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자신 또한 그와 오랫동안 같이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다고 그와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이 세상의 최소단위로 존재하고 싶은가를 묻는다면.

"미안해요, 미노루 군. 나는, 나에게는 이곳이 전부예요. 정말로, 나에게는 이곳뿐이야."

"라이 씨. 괜찮아요, 알고 있어요."

"여길 버릴 순 없어요. 떠날 순 없어요. 나는 지고천 연구소의 「이소이 라이」니까."

"네,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이 가진 것은 무엇 하나 빼앗을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한심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라이 씨가 가진 것 이상으로 훌륭한 것이 없거든요. 하지만 만약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게 라이 씨를 곤란하게 만든다면 버렸을 겁니다. 그만큼, 저는 당신의 곁에 있고 싶어요. 전부 감내하겠습니다. 뭐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비난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다만… 곁에 있게 해주세요."

"……."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문득, 이소이 라이는 6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 자신을 거두어 달라며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박았던 일을 떠올린다. 물론 그때의 일과 지금의 상황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무심코 그때의 심정이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혼자 남겨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끔찍했다. 그래서 호소했다. 자신에게 있을 곳을 달라고 매달렸다. 말이 은혜를 갚겠다지 실상은 어린애처럼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비하면 이 남자는 얼마나 올곧은지.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리던 분명 이 하라다 미노루라는 이는 깨끗이 승복할 것이다. 거절의 뜻을 밝힌다면 자신의 의지를 존중하여 조용히 물러나겠지. 그리고 아마, 두 번 다시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걸 상상한 순간 이소이 라이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명치가 시큰거린다. 심장이 조여오는 듯 아프다. 하츠토리 님을 만나고부터는 거의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뒷골목에서 개싸움을 벌이던 시절 어쩌다 「라이」라고 불렸을 때마다 속절없이 밀려오던, 그런 감각들.

"정말로… 각오할 수 있나요? 나와 어디까지고 함께할 수 있어요? 무엇이든 이해해줄 거에요?"

"당신만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하라다 미노루가 웃는다. 이소이 라이는 천천히 웃으려다가, 표정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할머니와 동생의 장례식을 치룰 때조차 흐르지 않았던 오열이 이제야 오래된 빙하 조각처럼 떨어져나왔다. 그 등에 따스한 손길이 닿는다. 이소이 라이는 그 이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

바람이 되고 싶었다. 자신의 의지로 있을 곳을 선택하고, 때로는 자유로이 떠나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어디에서도 떠날 수 없었다. 무엇도 버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채 다가오는 것을 끌어안기만 한 이소이 라이는 결국 침몰했다. 침몰하여 불투명한 수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수조의 밑바닥은 어쩔 도리 없는 막다른 길이다. 돌이킬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좁은 공간. 이소이 라이는 그곳에서 자신이 버릴 수 없었던,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추억들을 반추한다.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들을 되감는다. 기억들은 형체 대부분을 잃은 몸을 버리고 천천히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후회는 없다. 자신이 선택하고 나아갔던 길을 취소하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는다. 다만 뒤늦게 생각한다. 이소이 라이라는 인간은 분명, 형태를 지닌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거라고. 대상이 신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그저 제 존재를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거라고. 그래서 초월자처럼 보였던 하츠토리 하지메에게 매달렸다. 아카시아의 신민, 지고천 연구소에 있던 모두를 동료로 여겼다. 같은 상처를 지녔던 하라다 미노루를 의지했다. 자신의 배에서 태어난 하루키와 레이지를 사랑했다.

결과적으로 이소이 라이는 자신의 존재를 승인해 준 그 모두를 배신하고 말았다. 올바른 삶은 아니다. 본보기로 삼을 만한 점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한 욕심꾸러기는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답니다.」 그런 우화에나 어울릴 법한 결말이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가 어리석은 우화寓話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하다못해 이 업보만이라도 빼앗지 말아줘. 이 결말을 비틀지 말아줘.

이 사죄의 말을 제대로 전할 수 있게 해줘.

내 행동에 휘말리게 해버린 것을,

함께 하자는 약속을 깨버린 것을,

무엇 하나 제대로 끝맺지 못한 것을.

그러나 사죄의 말을 소리내 발음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 상념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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