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그렇다면 그 노래를 불러줘 마지막 추억의 조각을

Vitis+하루키.

-SS+루트 스포일러 있습니다.


들려주지 않을래?

그저 길고 긴 이야기를.

*

식물은 인간처럼 모든 감각과 사고를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기관이 없어. 애초에 필요 없다고 해야 맞으려나? 식물의 존재의의는 도구를 쓰거나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개화하고 열매 맺어 다음 세대를 남기는 것. 무언가를 보고, 듣고, 웃고, 느끼는 활동은 식물에 걸맞지 않아.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는 세포에 각인된 프로세스를 중시하거든.

물론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는 식물도 있어. 하지만 그건 어떻게 해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우리의 씨앗을 더 멀리 퍼뜨릴 수 있을지에 대한 자가판단이야. 어딘가에 가고 싶다, 무언가를 듣고 싶다, 그런 자아 중심적인 마음은 우리에게 없어. 기억과 인식은 있지만 추억이나 감각은 없는 거지.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는 더운 피가 흐르지 않아. 겉으로 보기에 피 같은 것이 흐른다 해도 그건 결국 우리 줄기를 흐르는 수액의 일종일 뿐이지.

혹시 인간의 피가 붉은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어? 응, 적혈구에 포함된 헤모글로빈이라는 성분 때문이야. 그 세포에 포함된 철 성분이 혈관을 타고 인간의 몸 곳곳에 산소를 공급하여, 비로소 인간의 생명 활동이 기능하는 거지. 물과 햇빛만으로 살아가며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만들어내는 식물들과는 정반대지? 그래서인지 인간의 역사와 식물의 역사는 명백히 다른 궤적을 걷고 있어. 아, 물론 그렇다고 식물이 항상 평화롭게만 진화해온 건 아니야. 우리도 필요하다면 다른 종을 짓밟기도 하고 무자비하게 영양분을 빼앗기도 해. 동물의 생존경쟁에 비하면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그래, 사실 나의 의식은 하나뿐이었어. "살아남는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는다". 어쩌면 다른 방향성의 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의 세포와 일치화하는 시점에서 피의 격류에 녹아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알기 쉽게 말하자면 생존본능보다 약했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나는 네 몸에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뿌리를 내리고, 덥고 붉은 피를 가진 생명의 형태를 얻었어. 그건 자아를 얻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복잡한 사고회로를 얻었다는 뜻이기도 해. 그리고 내가 가진 본능이 너와 합쳐졌다는 뜻이기도 하지.

솔직하게 말할게. 네가 말하는 '죽고 싶다'는 마음을 나로선 이해할 수 없어. 식물의 프로세스에 '타나토스'는 입력되어있지 않거든. 죽음이란 어차피 우리가 맞이하는 결말이고, 이 세상이란 좋든 싫든 삶과 죽음의 연쇄반응으로 굴러가게 되어있어. 언젠가 네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었지? 생명이란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계속 돌고 돌아 존재하는 것이라고. 응, 그 말이 맞아. 영혼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야.

동시에 나는 너의 절망을 이해하고 있어. 아마도 붉은 피를 머금게 된 탓이겠지. 내가 너에게 섞여든 만큼 너의 세포 속에 섞인 추억과 감각도 나에게로 번져와서 피할 수 없어. 이건 식물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자 충동이야. 너는 죽 이런 마음을 안고 있었던 거구나.

하지만 내가 직접 너를 죽여줄 수는 없어. 그건 너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문제야. 애당초 나에게는 무언가를 살해한다는 프로세스는 입력되어있지 않거든…. 이건 너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해. 물론 지금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네 의식은 혈액 중의 산소 부족으로 서서히 희미해져 가겠지만, 그렇게 흘러가게 놔두는 건 역시 너무나 쓸쓸한 일이지.

그러니까 물을게.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

물속에서 눈을 뜬다. 거칠었던 물결은 어느새 잠잠해져 올려다보는 수면 위가 반짝거렸다. 그걸 바라보다 팔다리를 움직여 반짝임을 향해 나아간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푸하, 하는 소리가 났다. 그렇구나. 이게 '숨을 쉰다'는 감각인가. 그대로 용수로에 설치된 난간을 향하면 내가 일으킨 물결은 파도가 되었다. 철썩이는 소리, 반짝이는 햇살. '바다'에 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난간을 잡고 몸을 잡아당기면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무거워졌다. '물먹은 솜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기억과 의문과 지식은 갓 이사 온 집에 모르는 사람이 새로 배치한 서랍장을 뒤지는 것처럼 어설프게 얽혀있다. 그렇지만 아마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앞으로 '나'로서 살아갈 테니까.

흠뻑 젖은 신발과 옷의 물기를 짜낸다. 금세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 거기에 맑은 하늘이 비쳤다. 나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 용수로 바깥의 도로로 나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날은 선선해서 걷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렇게 걸어가는 도중에, 나는 느릿느릿 짧은 노래를 불렀다.

"피었네 피었네 튤립 꽃이 피었네…."

그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무정한 장송곡이었다.


제시 문장 : [내가 일으킨 물결은 파도가 되었다.] By bembem님

문장 제공 감사합니다!

참고 동요 :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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