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4월 1일, 아토 하루키

하츠토리 하지메 탄신기념 릴레이 합작 「영속신전재래 지고천」참가글.

합작 주소 :

https://www.notion.so/02ebe8340c25473ea8ac25dc71410cd4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8

*

─오너라.

지고천 연구소 사건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연구소 사건의 피험자이자 생존자들의 상태는 순조롭게 안정을 되찾아, 지금은 일반인과 다른 점을 찾아보려 해도 꽤 머리를 굴려야 한다. 물론 손가락 끝이 종이에 베이거나 발목을 삐었다거나 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회복된다는 점은 존재하지만 그 정도야 연구소에서 겪은 험악한 일에 비하면 귀여운 보상이다. 덕분에 쿠마자키 부녀의 집에는 바르는 상처연고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오너라.

다시 4월이 가까워져 온다. 사건이 무사히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들은 그 무렵을 연상시키는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괜히 채팅방에 더 많은 글을 올렸다. 탈출을 기념하기에는 너무 많은 생명이 죽었다. 그날의 비극을 슬퍼하기에는 우리 모두가 훌륭히 살아남았다. 따라서 그들의 태도는 축하도 묵념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 위치했다. 사건 이틀 후가 이소이 레이지의 생일이라는 점은 그런 점에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인의 생일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지는 명백했으니까.

─오너라.

그나저나, 아까부터 누가 이렇게 장엄한 목소리로 부르는 거지. 하루키는 한참 단잠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맛보며 귀를 기울였다. 눈은 아직 감겨있고, 코끝에 달리 와 닿는 후각은 없다. 다만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몸속까지 울려 퍼졌다. 아마,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 아니… 나는 아닌가. 하지만 나야. 사고는 순조롭게 미로를 헤맨다. 하루키는 깊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주위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눈동자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리는 그 한순간, 아토 하루키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로지 직감에 의한 판단이었다. 틀리다. 단서는 있다. 이 넓고 황량한 공간에 있는 하얀 그림자. 연한 분홍빛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형태.

하츠토리 하지메가 있다.

처음에, 아토 하루키는 이것이 별난 꿈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츠토리 하지메가 지고천 연구소에서 분명한 끝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고세포의 감응, 혹은 오리진의 능력. 어느 쪽인지 굳이 분별할 필요 없을 비전은 더없이 명확했고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어쩌면 이건 내가 품은 불안감과 자기현시욕에 의한 걸지도 몰라….

아토 하루키의 뇌세포가 냉정하게 기능한다. 탐정의 두뇌란 그런 법이다. 감각을 통해 인식되는 현상을 의심하지 않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론한다. 그리하여 삼라만상을 이 세상의 이치에 맞는 형태로 재조정한다. 어떻게 보면 조각가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눈앞에 현상이 있다. 손에 이성의 끌과 논리의 망치가 있다…. 그걸 내리친다.

“이건 꿈이죠?”

하츠토리 하지메는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내부에 남은 지고세포가 마치 환상통처럼 사념을 보여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하츠토리 하지메는 아토 하루키 자신이 인식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답하지 않아도 좋다. 만약 답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다. 애초에 꿈인 시점에서 이 대화는 유용한 의미를 얻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의 예지몽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에야.

“오랜만이구나, 아토 하루키.”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질문에 적확한 내용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한 타인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감각과 생각에서 비롯된 하나의 덩어리일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꿈에 하츠토리 하지메가 나왔다고 하면 레이지나 시나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일단 지고천 연구소의 다른 생존자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하루키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의 긴장을 풀었을 때였다.

“오너라.”

같은 말이 반복된다. 하루키는 반문한다.

“어디로?”

“보이는 곳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보이게 될 거란다.”

선문답이었다. 아토 하루키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하츠토리 하지메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꿈이라면 어떻게 행동해도 손해는 보지 않으리란 판단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마치 렌즈의 초점을 맞추듯이 상대방의 모습이 또렷해진다. 하루키는 그제사 자신이 하츠토리 하지메의 모습을 뭉그러진 형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 걸음에 긴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한 걸음에 부드러운 표정이 분명히 보인다. 한 걸음에 머리에 쓴 면류관이 보였다.

걸음을 멈춘다. 아토 하루키는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지나치다. 그가 알고 있는 한 하츠토리 하지메는 면류관 따위를 쓰고 나타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흰 말을 타고… 흰 말?

“이제 보이니?”

하츠토리 하지메는 상냥한 어투로 말을 건다. 아토 하루키의 발치에서 서서히 어떤 것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서늘하고, 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무언가.

“더 가까이 오렴.”

아토 하루키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리하면 보일 거란다.”

아토 하루키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돌아가고 있으니.”

아토 하루키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오너라.”

아토 하루키는

*

눈을 뜬다. 침대는 푹신했고 공기는 딱 알맞게 건조했다. 이제 밤에 가습기를 틀고 잠들지 않아도 목이 따끔거리지 않는 계절이었다. 아토 하루키는 수면의 물기가 남은 눈을 깜박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의 전자시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정리해보면 시간은 오전 7시 2분. 날짜는 4월 1일. 만우절이다.

“무슨 이런 꿈을….”

만우절 기념이라고 하면 농담이 너무 심했어, 알파. 애꿎은 동거인의 이름을 부르며 침대를 정리한 뒤 방을 나온다. 그 혼자만 사는 집은 고요한 만큼 식물들로 둘러싸여 싱그러웠다. 하루키는 늘 그렇게 하듯 TV의 전원을 켜 오늘의 뉴스를 틀어두고는 식물의 상태를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긴박한 캐스터의 목소리가 하루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럼 아직까지 불길은 잡히지 않은 건가요?」

「네. 봄을 맞아 건조해진 날씨 탓에 진화 작업은 아직까지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나고야 소방당국은 추가 인력을 더 파견하여…」

화면에는 불길에 휩싸인 산등성이의 모습과 함께 「나고야 시 G현 대형 산불 발생! 원인은 아직까지 불명」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박혀있었다. 뉴스의 내용을 좀 더 들어보자면 새벽녘부터 시작된 불길이 밤새도록 이어져 현재까지 진화작업이 이어지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 거대한 규모에 할 말이 없어진 하루키는 분무기를 집으려던 생각조차 잊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물음과 새카만 연기, 보도 기자의 빠른 멘트가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를 향해 흘러간다. 그리고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인명피해는 없습니까?」

「네, 산불이 일어난 곳은 현재 휴식년을 맞이한 곳이기에 등산객의 왕래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또한 불의의 피해를 입는 이들이 없도록 G현의 경찰청도 인력을 파견하여…」

하얀 사각형.

아토 하루키는 TV 화면 앞으로 다가간다.

하얀 건물.

아토 하루키는 제 눈을 깜박인다.

창문 없는 하얀 건물.

아토 하루키는 마른 침을 삼킨다.

2015년 4월 8일. 원인불명의 폭발과 화재로 인해 잔해만이 남아있어야 할 폐허. 그곳에 새빨간 산불과 어둑한 연기를 마치 고급 옷감처럼 휘감은 지고천 연구소가 굳건히 서있었다. 불길 한가운데에 서있는 벽에는 그을음 하나 없다.

─오너라.

깊은 목소리가 들린다.

지옥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면 그러할 것이다.

*

「저랑 아빠도 봤어요.」

쿠마자키 카렌이 대답한다. 아토 하루키는 급하게 직장에 연차를 내고 노트북을 킨 채 초조하게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부터 각 보도국에서 가열차게 보도한 G현 대형 산불. 그 속에서 흠집 하나 없이 우뚝 서있는 건물을 목격한 이는 아무래도 아토 하루키 한 명 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신이 노이로제에 걸렸거나 하루 아침에 미쳐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감에 마음을 쓸어내릴 틈은 없었다.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 탓이다.

「곧바로 확인해보았네만, 아무래도 경시청의 인원들조차 지고천 연구소의 건재함이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 모양일세. 정확히 말하자면,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느낌이야.」

쿠라치 테루미의 메시지는 간결하지만 그 이상으로 묵직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무너지고 파괴된 지고천 연구소가 하루아침에 재생되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 이상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서 겨우 빠져나온 생존자들을 제외하고는.

「이건 대체 무슨 일일까요?」

「일단 침착하게 생각해보지. 혼란에 빠져서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어.」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야나기 니나, 아이바 이부키, 쿠마자키 리쿠…. 현재 상황을 알 수 없는 것은 다른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차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이소이 레이지에게 보낸 메일은 아직 수신확인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머나먼 바다 건너 의동생이 뭔가 답변을 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토 하루키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일단 한 가지는 분명하네요.」

「이 상황에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는 건 저희뿐이라는 것.」

채팅방에 침묵이 감돈다. 아마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는 중일 것이다. 하루키는 이어지는 말을 타이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지고천 연구소로 향할 필요는 없겠죠. 쿠라치 씨, 야나기 씨, 리쿠 씨와 카렌, 아이바 군은 이제 거의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아토 군. 자네 설마.」

「네, 저는 지고천 연구소로 향할 생각입니다.」

「위험해요!」

「괜찮아요 야나기 씨. 구태여 산불을 뚫고 갈 생각은 없어요. 혼자서 돌입할 마음도 없구요.」

「한 명은 시나노 군인가?」

역시 쿠라치 테루미는 상황 파악이 빠르다. 하루키는 화면 너머로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현재 다른 곳에서 의뢰를 마무리하고 있는 시나노는 사정상 핸드폰의 메시지를 일일이 체크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이 상황에서 눈을 돌리거나 도망칠 리 없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토 하루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은 거야? 너랑 시나노가 그 사건 이후로 특수한 체질이 된 건 알지만, 저렇게 대놓고 수상한 장소에 달랑 두 명만 들어간다는 것도 좀 그렇다고.」

「물론 경솔히 들어가진 않아요. 인원은 최대한 모을 겁니다. 이미 레이지에게도 연락을 넣어뒀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뜯어 말리고 싶네만, 그 외의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지고천 연구소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우리는 자네에게 빚만 지고 있는 기분이군.」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어수선하던 단체 채팅방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쿠라치 테루미를 비롯한 다섯 명의 생존자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최대한 정보를 모아 전달하고, 아토 하루키와 시나노 에이지, (그리고 연락이 닿는다면 이소이 레이지)는 지고천 연구소로 잠입한다. 뱀이 가득 찬 항아리에 심호흡 한 번 하고 맨손을 집어넣는 꼴이었지만, 이쪽에도 지고세포가 있는 이상 맥없는 최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키는 시나노에게 자신들의 방침을 간단히 설명하는 메일을 보낸 다음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산불이 서서히 소강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메일 알림이 도착했다.

이소이 레이지로부터 온 답장이었다.


>>4월 2일, 지고천 돌입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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