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아이바 이부키 교수님 현재 개인면담중.

아이바 이부키+아토 하루키 / 세포신곡 SS+ 루트 스포일러 있음.

-아이바 이부키의 전공, 아토 하루키의 취향 등에 대한 동인 설정이 존재합니다.

-비전공자입니다. 어긋나는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카미토모대학 인간과학부 사회복지학과 소속 신입생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이 있다. 그건 교수님의 외모에 혹해 아이바 이부키 교수의 수업을 수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단정한 외모에 늘 깔끔한 복장,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한 호감을 수업을 향한 열정으로 착각했다가 성적표가 너덜너덜해진 학부생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던가. 그러나 선배들의 진심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직 순수한 신입생들은 모닥불로 모여드는 부나방처럼 재앙 속에 스스로 뛰어들고 마는 것이니 사회복지학과 과실에는 언제나 한탄과 눈물이 끊이지 않았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으음."

응접용 테이블에 앉아 재밌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아토 하루키 앞에서 아이바 이부키가 침음을 낸다. 그 앞에 놓여있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로 커피를 별로 즐기지 않는 하루키를 위해 이부키가 준비해두는 홍차다. 어딜 어떻게 봐도 상당한 고가로 보이는 찻잔은 백색 바탕에 아름다운 흑록색 무늬가 그려져 있어, 안에 담겨있는 연주황빛 찻물을 도드라지게 한다. 하루키는 그 차로 잠시 입술을 축이곤 장난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교수님을 찾아뵐 생각이냐?!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차분하게 생각해! 라면서."

"그것참…. 무어라 해야 할지. 나름 학생들과는 양호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건가."

"아하하, 이부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보다는 신입생에게는 버거운 상대다, 같은 마음이겠지."

"어렵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교육의 길이란 건 역시 어려워." 

아이바 이부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찻잔을 들었다. 그 뒤에는 책으로 가득한 책장이 있다. 비단 그 뒤쪽만 아니라 연구실 전체를 감싸듯이 놓인 책장은 모두 그의 전공 혹은 연구와 관련된 서적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물론 방의 안쪽에 놓인 연구용 책상 위에도 몇 권인가의 책이 놓여있다. 언젠가 이 모든 책의 위치를 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가 책장의 위치별로 분류한 도서목록을 엑셀로 보여주던 이부키를 떠올리고, 하루키는 조금 그리운 기분에 잠겼다.

"그래도 잘 해내고 있잖아? 아이바 이부키 교수님."

"다 학생들이 지지해주는 덕분이지. 교육이란 받는 이가 저어하면 성립될 수 없으니."

"'아이바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울면서 나온 학생이 한둘이 아니라고!'라는 말에는 과연 놀랐지만."

"크흡."

이부키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하루키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칠칠치 못한 아이처럼 차를 마시다 사레가 들려버린 이부키가 일단 찻잔을 내려놓은 뒤 콜록콜록 기침하며 입가를 가렸다.

"아니, 으음~ 설명하게 해주게."

"해보세요."

"맹세하건데 모진 말을 하진 않았네. 연구실까지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각자의 고민을 안고 있는 법이기에 진지하게 마주하며 심도 있는 질문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자신의 내면 깊숙한 부분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 거기에 닿게 되면 대부분의 학생은 울어버리고 말더군. 학년이나 성별과 관계없이 말이야."

"그건 분명 이부키가 자신들의 결여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주어서겠지. 사람들은 그런 부분을 본능적으로 감추려고 하니까."

"그들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 부분에 발을 들였다는 자각은 있어. 이야기 도중에 항의하거나 화를 내면서 나가버린 학생도 있으니까. 가끔은 학생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그들을 단순한 상담 이론의 희생양으로 삼은 건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들어."

"……."

"그래도, 이따금 나를 다시 찾아와 '그때는 감사했습니다.'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학생들이 있어. 그때만큼은 나도 내가 교수가 되어 누군가를 이끌 수 있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끼네."  

"쑥스러워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학생들은 분명 많을 거야."

"그렇다면 기쁠 텐데."

이부키가 천천히 찻잔을 든다. 그 모습은 몇 년 전에 본 것과 같으면서도, 동시에 한없는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하루키는 담담히 찻잔을 들었다. 응접용 테이블에 놓인 전자시계가 아무런 소리 없이 오후 3시 24분을 띄웠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음, 실은 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여러모로 공사다망할 테니 택배로 보내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직접 건네고 싶어서 조금 욕심을 부렸어."

"이부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뭘까. 조금 기대해도 되려나?"

"그렇게까지 기대받을 만한 역작은 아니지만… 이거다."

 

그렇게 말하며 이부키가 미리 준비한 듯한 작은 종이봉투를 내민다. 그것을 받아든 하루키는 종이봉투가 작은 크기에 맞지 않게 의외로 묵직한 무게를 가졌음을 알아차렸다. 뒤이어 들여다본 내부에는 제법 두꺼운 책이 들어있었다. 손으로 잡아서 꺼내 보면, 단순하지만 세련된 표지에 새겨진 제목과 저자명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당신의 마음에 그림자가 지더라도 -저자 아이바 이부키』

"이전에 모 월간지에 1년간 실었던 칼럼을 한데 묶어 만든 책일세."

"아아, 그러고 보면 수업에 시험에 강의에 마감까지 겹쳐서 큰일이라고 했었지. 과연~ 책 한 권이 될 정도였구나. 이걸 나에게 그냥 줘도 되는 거야?"

"괜찮네. 저자 증정용으로 온 게 있으니까. 안에 사인도 했는데 한 번 볼 텐가?"

"이부키의 사인? 그건 궁금하네. 어디 보자~"

약간은 두꺼운 표지를 넘긴다. 차분한 회백색의 면지가 넘어가면 책의 제목과 저자명, 출판사명 등이 간략하게 적힌 표제지가 있었다. 거기에 적힌 '초판 인쇄'라는 문구를 다소 감명 깊게 바라본 뒤 또 한 장을 넘긴다. 그리고 하루키는 온통 새하얀 페이지 위에 도저히 놓칠 수 없을 정도로 검은 잉크로 새겨진 한 줄의 문장을 발견했다. 

【나의 친구 아토 하루키에게 바친다】

시야에 담기는 문자열은 더없이 간결한데도 뇌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다. 하루키는 일단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웃음은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한숨 비슷한 것이 되었다. 입가를 가리기 위해 들어 올린 손끝이 아주 약간 떨리고 있었다.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알 수 없는 열기가 모여든다. 하루키는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쉰 다음에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부키, 이건."

"그 칼럼은 출판사 측의 요청으로 쓴 것일세. 하지만 카미토모 대학의 사회복지학과 교수라기보다는 아이바 이부키라는 내 개인의 이름을 걸고 집필했어. 내용도 일종의 인간 심리 연구에 가까워."

"…내용을 요약하자면?"

"【자신을 잃지 말라】 정도일까."

아이바 이부키는 웃는다. 날은 흐린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누군가가 장난삼아 붓을 휘두른 듯한 새털구름들은 푸른 하늘을 더 높아 보이게 했다. 연구실 창가에 놓인 극락조 화분의 잎사귀는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맞아 잔잔하게 흔들렸다. 하루키는 문득, 웃는 이부키의 눈가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주름을 보았다.

이제는 그도 마흔다섯이다.

눈가를 스치는 바람이 시리다. 하루키는 창문을 닫을까,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고개를 숙였다. 내지 위의 글씨는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하얀 여백 위로 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정년퇴임하여 고향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 쿠라치 테루미,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된 야나기 니나, 검도 도장의 사범이 되어 늠름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쿠마자키 카렌, 자신만의 시스템 엔지니어링 회사를 꾸려나가는 쿠마자키 리쿠,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관록이 붙은 얼굴로 휘하의 직원들을 이끄는 친우 오토와 루이까지.

26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바뀌지 않았다.

"일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 하나의 시나리오였고 내가 그대를 도운 일이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저 시나리오가 원활히 흘러가기 위해서 짜여진 작위적 연출 중 하나라면 어떨 것 같냐고."

"그랬…었지."

"그때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하나?"

"너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등장인물을 살해하는 시나리오는 없어. 모든 일에는 크건 작건 나름의 인과가 존재하네. 그 날 그 장소에 존재했던 나는 그 순간 그대를 도울 수 밖에 없는 인과로 이루어져 있었던 거겠지. 나는 그렇게 행동했던 나 자신에게 큰 부끄러움과 동시에 약간의 자랑스러움을 느껴. 그때의 체험이 지금의 나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좋아.」 

「그러니 안심하고 들어주게, 하루키. 나는 그대를 만났기에 비로소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 모든 것이 시나리오의 연출이었다 하여 후회나 회의감같은 걸 느끼겠는가?」

"그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나는 그대를 만난 끝에 '아이바 이부키'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대도 우리를 만난 인과의 연장선에서 존재하고 있는 '아토 하루키'인거야."

"……."

"그대는 혼자가 아니야. 언제 어느 때라도, 결코."

"………그."

  

그렇다고 해도 너무, 너무 크잖아 이건.

하루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오열이 흘러내렸다.

*

아토 하루키는 늙지 않는다. 지고천 연구소 사건 당시에도 종종 학생으로 오인받던 외모는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아, 올해로 54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면 갓 학교를 입학한 신입생 혹은 재학생 정도로 인식되었다. 한 번은 오토와 루이와 같이 있다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냐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었다. 말을 건넨 사람은 사교를 위해, 혹은 아무 생각없이 의례적으로 건넨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 사건은 하루키의 마음에 꽤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자신이 자신으로서 발버둥치고 끝까지 연기해낸 희극의 마지막은 당연히 사랑스러웠다. 하츠토리 하지메에게서 오리진을 물려받은 일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과 점점 벌어져가는 어떤 격차는 하루키의 마음 속에 작은 확신을 심어주었다.

자신이 그들과 같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같이 존재하지 못할 시간보다 짧으리라는 확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음을 나눌 이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부러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로 쿠라치 테루마를 만나고, 야나기 니나를 만나고, 쿠마자키 카렌을 만나고, 쿠마자키 리쿠를 만나고, 오토와 루이를 만났다.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탐정이라고 해도 좋을 시나노는 얼굴이 젊어보이니 좋지 않냐며 이런저런 농담을 건네온다. 레이지는 이따금 일본으로 건너오거나 장문의 메세지를 보내왔다. 이탈리아로 건너와 같이 LDL 활동을 하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 하루키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까지는.

천천히, 한 걸음씩, 단절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모두의 장례식을 맞이해도 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긴 장례행렬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모든 사람들이 물러간 뒤에야 비로소 무덤 앞에 서서 몇 마디 말을 건넬 수 있겠지. 어떤 종류의 체념과 예감은 너무나 견고하여 그 자체로 완성된 미래도가 되기도 한다. 아토 하루키는 그 모든 것에 어떤 유감도 느끼지 않았다. 않을 생각이었다. 

쿠라치 테루미는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 샀는데 영 쓸 일이 없다며 금빛의 넥타이핀을 건넸다. 

야나기 니나는 보자마자 당신이 생각났다며 덩굴식물 모양의 커프스 단추를 선물했다.

쿠마자키 부녀는 효험 좋다는 부적과 함께 인상적인 열쇠고리를 보내왔다.

오토와 루이는, 그에게서 받은 것은 셀 수 조차 없다.

아아, 그렇다.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다.」

그 마음이 그들이라고 하여 다를 리가 없었는데.

"그대의 걸음은 분명 길겠지."

이부키의 목소리는 조용하다.

"하지만 그 걸음에 있는 모든 것이 그대의 일부가 되어갈거야. 한껏 끌어안고, 잊지말게."

다른 모든 학생들도 이런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대를 잊지 않아."

자신의 상처를 조용히 쓸어주고, 같이 아파하고, 그래도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이끌어주는 목소리를.

"…이부키… 완전히 달변가가 되버렸잖아."

"내면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화술도 필요하니까."

"정말이지, 뭐가 책에 사인을 해뒀다야. 보기 좋게 휘말려버렸잖아."

"기껏 준비한 말인데 바쁘다고 그냥 가버리면 의미없지 않은가."

"교활해졌어."

"연륜이라고 듣지."

찻잔은 비어버렸다. 그러나 전기포트에 남아있는 찻물은 아직 따뜻한 그대로였다.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비어있다면 다시 채우면 된다. 식어버렸다면 다시 데우면 된다. 모자라다면 채우면 된다. 남겨질 것 같다면 기억하면 된다. 잊어버릴 것 같다면 다시금 떠올리면 된다. 그것은 자신을 이루는 일부이므로,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세포이므로.

괜찮다고 했는데도 이부키는 굳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아토 하루키를 배웅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친구와 작별할 때 그리하듯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그를 보고, 아토 하루키는 살짝 충혈된 눈으로 웃어버렸다. 문이 닫히자 아이바 이부키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하루키의 한쪽 손에는 그가 준 책의 무게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루키는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마쉬고, 자세를 바로했다.

언젠가 어느 순간에, 이 때를 떠올리면 웃게 되리라.

상상해보면 썩 나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나왔을 때, 아이바 교수의 개인면담 피해자가 또 나왔다며 사회복지학과 과실로 불려가 많은 위로를 받은 것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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