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춤춰 나와 함께
카노 아오구+아토 하루키.
-후세터 버젼을 약간(진짜 약간) 손보았습니다.
-카노 플래그 회수한 SS+ 루트 전제(스포주의)
그러니까, 햇수로만 따지만 몇 년 전이었더라. 아무튼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아토 하루키와 오토와 루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문화제가 끝나면 학년에 상관없이 운동장에서 포크 댄스를 추는 관례가 있었다. 그때 좋아하는 상대와 첫 번째 춤을 같이 추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던가, 4번째와 13번째 춤 상대는 사실 죽은 사람이라던가 하는 소문이 있었는데, 하루키에게는 그리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차피 스텝도 잘 모르는데 판에 끼어봤자 축제의 흥을 깰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내가 가르쳐주지."
"내 말 들었어?"
"스텝만 익히면 어렵지 않다."
"이봐~"
오토와 루이는 완고했고 아토 하루키는 졌다. 그때 속성으로 이뤄진 강의가 얼마나 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조용한 교실에서 서로 웃고 손을 잡고 서툴게 빙글빙글 돌다가 넘어지고 일으켜지고 했던 기억들이 밤의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릴 뿐.
그러니.
그러니까.
"남의 추억에 끼어들지 말라고!"
버럭 소리 지르면 상대방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턴을 유도해 잠깐 정신이 팔려있던 하루키의 몸이 그대로 리드에 끌려갔다. 이, 빌어먹을 인간아! 반사적으로 내뱉은 아토 하루키는 한 박자 늦게 제 실수를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무게중심 유지를 위해 꽉 붙잡을 수밖에 없는 손의 주인이 키득거렸다.
"아소 짱~ 카노 씨는 죽었어!"
"아무튼 인간으로서 죽었잖아요."
"둘러댄다, 둘러대~."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스텝이 아까와는 반대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세상천지 이렇게 난폭한 댄스 파트너가 어딨느냐고 항의하려고 하면, 이번에는 몰아붙여 지는 듯한 내추럴 스핀 턴에 쫓겨 입을 열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한쪽 팔은 살짝 굽힌 상태로 상대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팔은 그대로 쭉 뻗어 상대의 손을 맞잡은 클로즈드 포지션. 어디선가 들려오는 왈츠의 음색이 무색할 만큼 다루는 방식은 거칠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합을 맞추면 언젠가 배운 흐릿한 기억으로도 쫓아갈 수 있을 만큼 정석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리드가 한층 열 받았다.
그러다 문득, 언제부터 이 춤을 추었는지가 의아해진 순간이었다.
"아~소 짱, 그 추억이란 게 그렇게 소중해?"
"네, 소중해요. 사유재산이니까 넘보지 말아 주시죠."
"지금 아소 짱을 살려주고 있는건 나인데도?"
"무슨 소릴 "방금 주마등 보고 있었어. 아소짱."
얼굴은 필연적으로 가까웠다. 따라서 아토 하루키는 카노 아오구의 표정을 다른 어떤 때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안경과 피투성이 가운으로 춤추는 그의 얼굴에서 부러 거짓말로 상대를 속이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상대는 원한다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제 좋은 말만 내뱉을 수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뜬금없이 주마등이라니? 하루키가 입을 열려던 순간 느릿하게 이어지던 음악이 예고없이 돌변했다.
그때까지는 크게 인식하지 않았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위를 감싼다. 빠르게, 무엇인가가, 등 뒤를 바짝 쫓아오는 듯한 감각. 오한이 몸을 덮는다. 힘이 풀린 다리의 스텝이 꼬이려고 한다. 본능적으로 숨을 멈춰버린 하루키의 몸을 반강제적으로 회전시키며, 카노 아오구가 낮게 속삭였다.
"계속 춤춰."
반론이 가능할 리가 없다. 아토 하루키는 경직된 숨을 토해내며, 방금까지 놓아버리려 생각했던 손을 꽉 붙들고 가까스로 스텝을 옮겼다. 그 사이 슬쩍 주변을 훑어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으로 자아낸 베일이 밤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듯, 무언가가 일렁이는 듯한 감각은 있다. 하지만 윤곽이 없다. 질량이 없다. 그럼에도 거기에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하려 눈에 힘을 준 순간이었다.
"여기 집중."
정신차리라는 듯이 어깨가 앞으로 확 당겨진다. 얼결에 시선이 흔들려 무언가를 포착 할 수 있을 것 같던 촛점이 흐트러졌다. 하루키는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려다가,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가 짓고있는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순간 어딘가로 서늘한 눈빛을 보낸 카노 아오구가, 아주 약간 느려진 음색 사이에서 방긋 웃었다.
"넋놓지마, 아소짱. 놓으면 죽여버린다."
"이젠 협박이라니, 진짜 파트너 교체하고 싶네요."
"이미 늦었지롱."
위태롭게 끊어질 듯 하던 음악은 신경질적인 바이올린 소리를 타고 다시 기세를 높였다. 이것이 금방 끝나지 않으리란 예감과 함께, 아토 하루키는 꼬여있던 호흡을 천천히 조절하며 카노 아오구가 이끄는 페이스대로 자신의 스텝을 맞춰나갔다. 악단은 커녕 다른 이들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공간에서 발소리조차 울려퍼지지 않는 춤사위가 고요히 이어졌다. 불현듯, 하루키는 너무나 가까이에서 공전하고 있어 둘이서 하나인 쌍성雙星으로 분류된다는 어느 별을 떠올렸다. 물론 여기는 우주라기에는 너무 불길하고 빛 없는 공간이었으며, 눈 앞의 상대는 별에 비유하기에는 좀… 그런 존재였지만.
"아소 짱, 좋은 생각이 났는데."
"싫어요."
"이대로 영원히 춤출까?"
"싫다고."
"매정하긴."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잖아요."
카노 아오구가 힐쭉 웃었다.
그렇게 얼마를 춤췄을까. 그동안은 오기로 버텼지만 정말로, 이제는, 다리 근육이 마비될 것 같아 한참 전부터 이를 악물고 있던 하루키는 갑자기 바뀌는 동작에 흠칫 놀라 카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팔을 크게 들어올려 상대를 한 번 턴 시킨 뒤, 올려진 손을 마주잡은 그대로 몸의 무게중심을 뒤로 이동시켜 허리를 크게 젖히게 만드는 동작. 동시에 소름끼치는 음악이 멈추고, 등 뒤를 끈질기게 쫓던 싸늘한 감각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앞에서 생경해진 청각이 카노의 느긋한 목소리를 남김없이 주워담았다.
"네~ 끝. 수고했어, 아소 짱☆"
"...끝이라니?"
"타임 아웃. 이제까지 의식을 유지한 아소 짱과 포기하지 않은 카노 씨가 이겼다는 소리."
몸을 젖힌 채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카노가 말을 잇는다.
"아무리 그래도 의뢰인을 지키려 맨몸으로 뛰어들다니, 무모했어~"
"……."
"내 몫도 살라고 했잖아. 어디서 목숨을 버리려 들어, 망할 아소 짱."
"정말 묻고싶지 않은 말이지만…… 도와준 겁니까?"
카노 아오구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고마우면 알지?"
"……하."
그 이상 대답은 필요없다는 듯이 의식이 멀어진다.
마지막으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살아, 아소 짱.
그게 저주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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