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 조각글 모음 05
!!세포신곡 본편DLC은자막간까지의 스포일러!!
#01 양키 하루키 AU
난 멍청하다. 이건 지극히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딱히 부끄럽게 여기진 않는다. 나에겐 그 이상으로 강한 주먹이 있으니까. 성적이 이게 뭐냐며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저 녀석은 머리가 안 좋다며 키득대는 녀석들도 주먹으로 몇 대 맞으면 금방 잘못했다고 빈다, 꼬리를 말고 도망간다.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안 해도 상관없다. 주변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녀석들이 몇몇인가 있었다. 나는 그들과 어울려 다니며 즐겁게 살았다.
중학생이 되었다. 당연히 수업에 제대로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학교에 와서도 나와 비슷한 부류와 뭉쳐 다녔고, 그러다 선배들에게 불려가 한바탕 얻어맞았고, 실력 차를 절절히 깨달은 후에 머리를 땅에 처박고 엎드려 빌며 그룹에 들어갔다. 선배들이 시키는 잔심부름은 지나가는 만만해 보이는 녀석을 붙잡아 대신 갔다 오게 시켰다. 당연히 돈은 주지 않았다.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선배를 만난 건 딱 그 무렵이었다.
평소처럼 지나가는 범생이를 붙잡아 심부름을 시킨 나는 그날 선배들에게 피 터지도록 맞았다. 감히 '아토 선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심부름꾼 취급을 했다는 이유였다. 다른 녀석들보다 고분고분해서 써먹을 만한 놈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눈치는 있다. 정말 죄송합니다. 눈이 썩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얼차려를 받은 뒤에야 풀려난 나에게 문제의 아토 선배가 다가왔다.
"이제 내 얼굴 잊어버릴 일은 없겠지?"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멍청하다. 하지만 약간의 눈치는 있다. 그래서 눈앞의 이 사람이 진짜 성깔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겉보기에는 염색도 교복 개조도 하지 않은 범생이지만, 결정적으로 눈이 조용히 맛이 가있었다. 그냥 바깥 벤치에 앉아 화단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눈빛이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말했다.
"넵, 죄송함다! 아토 선배!!"
"알면 됐어. 상처가 심하네. 같이 약국 갈까?"
"에, 됐…. 아뇨! 가겠슴다! 감사함다 선배!"
확신하건데, 그때 필요 없다고 했으면 나는 이번에야말로 팔다리 중 어디가 부러져 병원에서 눈을 떴을 것이다.
*
아토 선배는 몸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왜 양키 그룹에서 선배님 대접을 받는 건지 의아했는데, 3학년 선배 중에 리더격인 카와모토 선배가 총애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더불어 우리가 다른 패거리랑 싸울 때 전략? 절략? 적인 아이디어를 내주는 건 전부 그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 선배는 진짜 머리가 좋아. 상대편 생각 같은 건 다 꿰뚫어 본다니까.'라나.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몸이 좋지 않아서 자주 병원 신세를 지는 거라고 하는데, 이걸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간 카와모토 선배가 직접 나서서 두들겨 패러 올 테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들었다.
"그런 말 듣지 않았어?"
"제가 돌머리긴 하지만 또라이 새낀 아님다."
"그렇구나. 과일은 고마워. 병원 밥은 맛이 없거든."
과일 깎아줄래? 아토 선배는 천연덕스럽게 말했고 나는 생전 처음 쥐어보는 과도 앞에서 쩔쩔맸다. 아토 선배가 그걸 보고 키득키득 웃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왔어?"
"……그게, 저기."
"할 말 없다면, 나중에 올 카와모토에게 시간을 뺏은 거만한 후배가 있다고 말해줄까 하는데."
"아, 저기, 감사함다!"
"뭘?"
"그… 어제, 구해주신 거…."
아, 하고 선배는 짧게 반응한다.
"변덕이야."
"그래도 구해주셨슴다."
"그보다, 다른 할 말이 있지 않아?"
아토 선배는 기본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회합 자리가 있을 때도 조금 떨어진 자리에 편하게 앉아있고, 우리끼리 술을 마실 때도 카와모토 선배와 간부들의 곁에 가까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그리고 옆 동네 놈들과 치고 받으러 갈 때는 냉정한 얼굴로 우리에게 여기서 저기로 가라, 같은 말밖에 하지 않는다. 첫 만남 때의 인상도 있어, 나는 그 사람은 우리 같은 말단 후배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어제, 골목에서 빌어먹을 놈들과 5대1로 붙는 바람에 이제 틀렸구나 싶던 순간에 나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쭉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선배가 현란한 싸움으로 나를 구해준 것은 아니다. 내가 본 것은 그 사람의 손짓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상대를 들어 올리던 덩굴식물의 모습이었다.
"없슴다. 저, 생명의 은인도 몰라볼 정도로 바보는 아님다."
"처음에는 나 몰라봤잖아."
"아, 선배, 그거는!!"
"농담이야."
"…암튼, 진짜 감사함다. 선배가 아니었으면 저 죽었을지도 모름다."
"넌 튼튼하니까 그렇게 쉽게 안 죽어."
"그래도요."
선배는 피식 웃고는 사과를 긁어내다시피 하는 나에게 사과 깎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내일도 와서 한번 깎아보라고 했다. 제대로 못 깎으면 사과껍질로 네 목을 졸라버릴 거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담담해서, 역시 이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구할 때의 그 표정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사람을 따를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02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바깥으로 나오자, 갑자기 아토 하루키가 자신을 바라보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우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려던 레이지는 하루키에게 끌어안긴 뒤에야 제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알았다. 몸은 뒤늦게 두려움을 몰아냈다. 갈 곳을 잃은 두려움이 눈물과 함께 흘러나왔다. 아아, 무서웠다. 무서웠는데도 살았어. 살아나온 거야. 목소리가 되지도 못한 오열이 아토 하루키의 어깨에서 번져나갔다.
#03 !!약고어 주의!!
https://fusetter.com/tw/R7HtoJCY
#04
이소이 사네미츠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날은 이소이 레이지가 일본으로 떠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소이 사네미츠라는 인간은 그 아이가 있었기에 정상적인 인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아이가 웃기에 웃었다. 그 아이가 먹기에 먹었다. 그 아이가 있어 달라고 하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아이가 없다면, 이소이 사네미츠도 없는 셈이었다. 실로 기이한 인격이라고, 사네미츠는 생각한다. 본래라면 어른은 아이를 지켜주고 채워줘야 하는데 그 벡터가 뒤집혀 버렸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구하고 싶어."
텅 빈 거울 속에서, 유령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그의 의지였다.
#05
"죽은 이들이 그리워? 그럼 묘지 위에서 잠들어보면 어때? 의외로 괜찮다고."
"전 그랬다간 다음날 폐렴 걸릴 테니까 그만두겠습니다. 걱정 끼치긴 싫고."
"아하하, 2대 오리진이 되어서 장생하는데도 아직 몸을 걱정하는 거야?"
"네, 장생한다 해서 모든 병에 면역이 생긴 건 아니니까요. 세오도아씨도 몸조심하세요."
"흐음~ 원한다면 지고세포가 모든 병에게서 너를 지켜줄 텐데."
"저는 제가 가진 모든 인자를 포기하거나 선별하고 싶지 않거든요."
"과연. 『내가 나로서 모든 것을 힘껏 연기한 이 희극의 결말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였나?"
"…그걸 말했습니까? 망할 민달팽이 땋은 머리 자식이?"
"아아~ 그렇게 되면 하루키 씨 앞에서 담배 피울 수 있는 날은 영영 없겠네. 유감이야!"
"네, 유감이죠. 미리 말하는데 장난삼아 제 앞에서 담배 피우면 앞으로 절대 설거지 당번 안 바꿔드릴 테니까요."
"앗, 눈이 무서워... 진심이구나...."
#06 (하라라이)
(중략)
라이. 나는 살고 싶어.
살아서 아들들과 웃고 싶어.
그런데 두려워.
아무것도 아니어야 할 것들이 인자로 뒤바뀌는 순간 나는 공포를 느껴.
내가 관측한 탓에 인과가 생겨버린 걸까?
아니면 내가 몰랐더라도 이미 성립되어 있었을까?
끔찍해.
불길해.
그렇지만 나는 아들들을 잃고 싶지 않아.
이제 와서 하는 말론 너무나 뻔뻔하지만.
지금이라도, 지금이야말로 지켜내고 싶어.
제대로 마주하고 끝내고 싶어.
…이렇게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꺾여버릴 것 같아.
한심하지.
그래도, 그래도 이번만큼은 해내겠어.
더는 도망치지 않아.
당신이 살아가라고 해주었잖아.
살아갈게.
…당신 몫의 웃음까지 합해서.
-당신의 미노루 군에게서.
#07 트친이_추천해주는_노래로_글을_써보자
[자상무색]
오토와 루이가 계단에서 넘어졌다. 물론 아토 하루키는 그게 넘어진 것이 아니라 떠밀려 넘어진 것임을 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루이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각인된다. 그 위에서 히죽이며 웃는 학생들의 얼굴도, 뱃속에서 울렁이던 끔찍한 감정까지도.
"죽여버리고 싶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잔잔하다. 오토와 루이는 석양 진 귀갓길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인 하루키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이런 인간인 거야."
"하루키."
"없애고 싶어, 고통스럽게 해주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 루이."
땅을 딛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키는 자신에게 떨어질 단죄의 말을 예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들린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괜찮아. 그건 정상이다."
"…정상?"
"나라도 네가 떠밀려서 넘어지면 화날 거다. 상대를 처벌하고 싶겠지. 게다가 너에게는 그럴 힘이 있어."
"……."
"하지만 너는 그 힘을 쓰지 않았지. 그것만으로 너는 훌륭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 했어."
"내일 교무실에 가서 같이 증언하는 것 정도야 해줄 수 있지 않나."
그걸로 충분해? 하루키는 고개를 든다. 오토와 루이는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아토 하루키를 이를 악물고, 그 표정을 따라 했다.
[밤과 별의 노래]
"노아 짱, 이거 받아주세요."
어느 날, 에노모토 노아가 평소처럼 이소이 하루키의 방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침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어린 동생에게 좋아하는 동화책이라도 읽어줄 심산으로 찾아간 노아는 알록달록 색종이로 접힌 무언가를 받았다. 노란색 겉봉투는 어른이 만들어준 것인지 제법 반듯했다. 의아하게 받아들고 안을 열어보니 삐뚤빼뚤 글자가 적힌 종이가 나왔다. 히라가나투성이의 글자였다.
「노아에게
나는 노아짠이 조아요
나란 친구가 되주세오」
"……."
"에헤헤."
편지를 읽고, 이소이 하루키를 본다. 갈색 머리의 아이는 딴에 부끄러운지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선 노아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 영락없는 어린애네.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똑같이 어린 아이라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 채로.
"글자 틀렸어, 바보야."
"어? 어어…. 미안해요."
"가르쳐줄 테니까. 다시 제대로 써와."
"그럼 친구 해줄 거야?"
"봐서."
꽤 새침한 대답이었는데도 이소이 하루키는 눈에 띄게 좋아했다. 에노모토 노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그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버렸다.
*
"……."
그래. 그러고 보면 그런 일도 있었지. 에노모토 노아는 싸늘한 마음으로, 제 화장대 서랍 안쪽에서 나온 색종이 편지를 바라본다. 며칠에 걸친 특훈 끝에 글자를 바르게 쓰게 된 이소이 하루키가 자신에게 정식으로 건넨 친구 편지. 오밀조밀한 글자를 한때는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같은데.
색종이는 맥없이 찢어졌다.
조각난 추억의 빛깔이 흩날렸다.
#08 멘션_온_대사로_연성하기
1.
"글쎄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님 힐리밋 좀 요.」 이러는 거예요! 거기서는 딜러가 3단 리밋을 넣어서 보스에게 폭딜을 넣어야 클리어되는 구간인데!"
"그래 그래, 진정하고 고기 먹어 시나노. 레이지가 다 먹겠다."
"계속 얘기하게 놔뒀어야죠, 형."
"아~ 레이지 씨 치사하게! 우리의 우정은 뭐였던 건가요!"
"고기 앞에 우정 없어요."
"냉정하네."
"애초에 그렇게 문제가 많으면 힐러? 를 하지 않으면 되지 않아?"
"하지만 전 직업 만렙을 찍으면 주는 타이틀이 『무지갯빛 전설』이라고요! 기껏 디타 커마도 했는데 그 타이틀을 놓칠 수는 없어요!"
"참고로 무지갯빛 전설 타이틀의 무기 이펙트를 적용하면 검의 외형이 디타의 검과 비슷해져서 저러는 겁니다."
"오타쿠 무서워."
"그러니까~ 아토 씨도 같이해요! 처음에는 딜러로 시작해도 좋으니까요! 같이 디타와 에이가와 가쥬라로 돌아다녀요!"
"에이가는 최종 보스 아니야?"
"셋이서 하나로 뭉쳐 다니면 다들 알아보니까요!"
"참고로 저는 가쥬라로 이미 생성했습니다냐."
"전파력 빨라. 그리고 그 말투는 뭐야?"
"어라, 잠시만. 그럼 내가 최종 보스야?"
"가끔은 직종 전환도 좋죠. 요즘은 100세 시대에요."
"최종 보스를 타 직종처럼 말하지 마."
"하루키 씨라면 힐러도 잘하실 것 같아요! 섬세한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하지만!"
"형 키보드 내리쳐서 고장 내면 안됨다."
"벌써 내가 한다는 전제로 얘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앗, 그리고 계정 생성 닉네임은 에이가=일리너로 부탁드립니다!"
"내 말 듣고 있어?"
이후, 닉네임이 이미 선점되어 있어서 에이가=일리너'가 되었다.
2.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는 말에 세오도아가 예상했다는 듯이 물을 건넨다. 처음 몇 모금으로 입을 헹구고 그대로 뱉어내면 찌륵찌륵 거리던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래, 너희도 슬슬 샤워는 해야지. 애니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는 물을 마셨다. 미지근한 감각이 목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는 아니었다. 방금 위의 내용물을 토해낸 목이 살짝 따끔거린다. 세오도가 입을 열었다.
"애니, 왜 그랬어?"
"뭘?"
"알면서도 삼켰잖아."
삼켰다는 것은 꽤 빌어먹을 중독성을 지닌 약물이 들어간 술을 마신 걸 가리키는 것이다. 애니는 어쩔 수 없었다던가, 작전상 뺄 수도 없었다던가, 어쨌건 임무 달성이니 괜찮지 않냐 던가 하는 말을 떠올린 다음, 세오도아의 얼굴을 보고 전부 폐기했다.
"맛이 궁금해서."
"……."
"걱정 마. 이제 와서 중독증상으로 빌빌댈 체력도 아니라고."
해독할 거니까 뒷좌석에서 좀 잔다. 공항 도착하면 깨워. 그렇게 말하고 차 문을 여는 애니의 등 뒤로 세오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마. 애니는 조금 침묵하다가, 풀벌레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을 무렵 어깨만 으쓱이고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차 안에서는 방향제의 냄새가 났다.
3.
골목길에서의 추억은 익숙해지지 않는 솜사탕의 맛이었다.
"거기 가는 아이, 잠깐만."
심부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이소이 레이지는 골목길에서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화사한 꽃가게와 따뜻한 베이커리의 틈바구니, 에어컨 실외기나 배수관 파이프 따위가 늘어진 어두운 공간에 퀭한 얼굴의 청년이 한 명 서 있었다. 품에 안은 봉투에는 빵과 통조림이 들어있다. 이소이 레이지는 그의 행색을 경계하였으나 도망치진 않았다. 그와 자신 사이의 명암이 너무 뚜렷하여, 그가 자신을 낚아챌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가서 솜사탕을 두 개 사 와주지 않을래."
다만 이어진 말은 뜻밖이어서 레이지는 눈을 깜박인다. 청년은 레이지의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이 길과 이어진 광장 끄트머리에는 확실히 솜사탕을 파는 노점상인이 있긴 하다. 지금은 한가해 보이기도 하니 아직 어린 레이지의 걸음이라도 30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망설이던 레이지는 스승님이 단련시켜주신 자신의 체력을 믿으며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지폐가 순순히 넘어왔다.
솜사탕을 주실래요. 조심조심 말을 건네자 상인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분홍빛 솜사탕을 만들어주었다. 어찌나 큰지 짐 봉투를 안은 채로는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레이지는 조금 고민하다가 노점상인에게 짐을 맡기고는 청년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청년은 벽에 몸을 기대고 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솜사탕을 들고 돌아온 레이지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사 왔어요."
"고맙다."
청년은 솜사탕 하나를 받고는 몸을 돌렸다. 어, 저기. 아직 하나 남았어요. 거스름돈도…. 허둥지둥 말하는 레이지를 두고, 뒷골목의 어둠에 잠긴 청년이 말했다. 심부름 값이야. 남은 건 네가 먹어라. 그 이상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청년이 사라진다. 레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하얀 덩어리를 베어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당히 달았다. 그 이상 무어라 말할 것도 없는 추억이었다.
4.
애초에 도피처 따위를 찾을 생각조차 없었다. 도피하고 회피한 결과가 여기인데 거기서 또 도망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름을 바꿨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속죄하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사람은 결국 적응하고 순응하는 동물이다. LDL에서 웃고 떠들고 약간의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행복을 느낀 만큼 분명한 자괴감이 돌아왔다. 또 도망쳤다, 이렇게 안주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무거운 자괴감. 다른 이들도 이런 감정을 느낄까. 아니면 이건 아직도 미숙하고 어리석은 자신만이 마주하는 악몽 같은 감정일까.
이런 식이었으니 마감에 쫓겨 키보드를 두드릴 때가 차라리 나았다. 마감이 없을 때면, 사네미츠는 제 방의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곤 하는 일이 잦았다. 상념, 추억, 망상 같은 것들이 하얀 천장 위를 얼룩처럼 떠돌다가 가라앉는다. 그러면 사네미츠는 마치 자신을 합리화하듯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잊지 않았어.
잊지 않았어.
이번엔 제대로 해낼 테니까.
"사네미츠 씨? 저녁밥 드세요."
레이지가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고 보면 츠바이크가 출판사로 가면서 저녁으로 먹어두라고 무언가를 만들어두고 갔었지. 사네미츠는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가, 자신의 행동이 레이지의 눈에 보일 리가 없음을 깨닫고 대답했다. 금방 갈게. 문 너머로 들릴 그 목소리가 걱정을 살 만큼 힘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빌 수밖에 없었다.
#09 첫번째로_멘션온_캐릭터가_두번째로_멘션온_캐릭터의_상황에서_세번째로_멘션온_캐릭터의_대사를_한다
하라다 미노루는 꿈을 꾼다. 자신의 아버지가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멀리 가버리는 꿈이다. 손을 뻗어도 소리쳐도 닿지 않는다.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미소 짓지도 않고 걸어가는가 싶더니.
미노루.
널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퍼뜩 깨어난다. 등줄기는 이미 땀으로 젖어서 축축했다. 여기 이 좁은 방에 처넣어진 뒤로 잠자리는 한시라도 편했던 적이 없다. 모든 것은 그가 저지른 업보, 되돌릴 수 없는 하나의 기록이다. 하라다 미노루는 이제 붓다 못해 짓물러버린 눈가를 문질렀다. 지고세포를 받아들인 몸인데도 눈가는 여느 인간처럼 붓고 짓무른다는 점이 어쩐지 우스웠다.
자신은 왜 살아있는 걸까. 숨을 쉴 때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웅크린 몸의 온기를 느낄 때마다 도돌이표처럼 의문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누가 지우개처럼 자신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지워지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다른 모든 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차라리 수지에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하라다 미노루는 또 꿈을 꾼다. 자신이 내버리다시피 한 아이의 악몽을, 자신을 두고 사라지는 아버지의 악몽을, 사랑했음에도 지켜주지 못한 아내와 작은 아이의 악몽을. 그리고 깨어난다. 악몽보다 더한 현실이었다.
"부디 죽여주세요…."
며칠인지 모를 날에는 그렇게 애원했다. 물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
[하라다 미노루]가 [이소이 하루키]의 상황에서 [세오도아 리들]의 대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10 트친의_글을_내_문체로_써보기
원본 :
https://noname131.postype.com/post/10164327
[재편.Ver]
소설 본 적 있어 아소 짱? 그건 피투성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하다는 듯이 시체들을 머금고 어딘가에는 괴물들을 숨겨둔 공간에서 듣기에는 아주 적절한 의문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머리를 붙잡으려다 굴러다니는 시체의 머리를 걷어찬다. 너무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서 비위가 되려 굳어버리는 것은 인간이 지닌 방어본능 혹은 비정한 마음 탓이리라. 명백히 자신이 가한 현장 앞에서 시야가 따끔거린다. 카노 아오구의 말이 귓가에서 쨍하니 울렸다. 주변 상황은 눈곱만치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기적의 화법. 아소 코지는 빳빳한 미간을 구겼다.
11. #분위기가_닮았다고_멘션_온_캐릭터한테_뭐하지
"숙제가 있습니다."
2학기 기말고사도 끝내서 한껏 느슨해진 분위기의 교실에서, 그 말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아이는 없었다. 장난 섞인 야유가 울려 퍼진다. 교단 앞의 선생님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교단을 한 번 두드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유서를 써보세요."
반이 조용해진다. 선생님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한 줄이라도 좋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누군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없는 세상을 돌이켜보고, 천천히 써보도록 하세요. 일주일 뒤 오늘 이 시간까지, 다들 써올 수 있도록. 그날의 윤리 시간은 정규 수업 시간보다 10분 일찍 끝났다. 선생님이 나간 뒤 아이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숙제 음침해~
유서라니 오십 년은 이르지 않아?
근데 재밌을 것 같아!
하루키는 펼친 노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적은 『유서』라는 단어가 침묵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아토 하루키는 책상 앞에 편지지를 펼쳤다. 돌아오는 길에는 루이의 눈치가 보여서 일부러 집에 돌아온 다음에 문방구로 나가서 사 온 심플한 편지지 세트였다. 내용은 썼다 지울 수 있는 것으로 쓰는 편이 좋을 것 같아 필통에서 연필을 꺼낸다. 그대로 편지지를 바라본 것이 무색하게도, 연필 끝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 초침만이 째깍거린다.
*
"유서는 다들 써보았나요?"
일주일이 지났다. 다시금 교단 앞에 선 선생님이 묻자 아이들은 대답하는 대신 서로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아토 하루키는 일부러 윤리 교과서의 몇 페이지를 펼친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겨울바람이 교실 창문을 한 번 흔들고 지나간다.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는 여러분에겐 많이 생소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죽음은 미리 약속을 잡고 찾아오지 않아요. 우리는 정말로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어요."
그리고.
"죽은 사람은 산 사람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하루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교단에 한쪽 팔을 짚고 선 채 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금 읽어보세요. 이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세요. 만약 그 속에 누군가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던 말이 있다면."
"오늘 전하세요."
수업이 끝났다.
*
"그러고 보면 그런 일도 있었지. 그립네."
하루키는 옛 노트 틈새에서 나온 오래된 편지 봉투를 뒤집어보며 웃었다. 풀을 발라 붙인 입구가 납작하다. 이젠 10년은 훌쩍 넘은 유서다 보니 그 안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키는 본인 찬스를 쓰기로 했다.
유서 봉투가 맥없이 뜯기고 편지지가 나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필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그럴 수 있을 사람은 두 명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와, 엄청 점잖은 체하고 있잖아. 중학생이면서."
『만약 읽는 분이 토모코 할머니라면, 죄송합니다. 폐를 끼치게 되었네요.』
『혹은 이걸 읽는 사람의 이름이 오토와 루이라면』
"너에게도 미안해. 여러모로. 먼저 죽어버려서…."
"으아악!!"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하루키는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편지를 숨기며 몸을 뒤로 돌렸다. 이삿짐 포장을 돕기 위해 편한 옷차림으로 찾아온 오토와 루이가 천천히 미소지었다.
"퍽 흥미로운 내용이군."
"아 무 것 도 아 니 야 !!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중학생 때 쓴 거니까 십 년 이상 묵은 흑역사라고!"
"내용상으로 보면 유서 같은데."
정확하게 찔러 드는 탐정사무소 영업소장의 공격에 하루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걸 남길 생각을 했었나?"
"학교 숙제였어. …루이는 그때 나랑 반이 달랐으니까 몰랐으려나."
"숙제라, 과연."
"아무래도 누구에게 선뜻 보여줄 만한 게 아니니까 그대로 잊어버렸지."
"나도 네 앞으로 쓴 유서가 있다만."
"어?"
"농담이다."
"있잖아. 루이는 정색하고 말하면 농담으로 안 들리거든?"
"내일 써서 줄 테니까 나한테도 보여줘."
"절-대-싫-어-."
한 음절 한 음절 소리내 말하며 유서를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오토와 루이는 딱히 포기한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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