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트위터 조각글 모음집 02 (퇴고X 시리즈)

세포신곡 본편DLC은자막간까지의 스포일러. / 불시에 재편될 수 있습니다.

#01

아토 하루키가 그의 죽음 앞에서 안경을 챙긴 이유는 간단했는데, 여길 떠나면 이 시체를 장사지낼 수 없으리란 예감 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훌륭하게 적중하여 카노 아오구는 묘비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고 아토 하루키가 주워든 금 간 안경과 피 묻은 쪽지는 유일한 유품이 되었다. 그리하여 아토 하루키는 작은 안경집에 그 유언과 안경을 함께 넣어두어 창가에 놓아두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까지 업무 서류를 가져와 읽던 아토 하루키는 물을 한 잔 떠오는 사이 실수로 제가 쓰던 안경을 밟아 부숴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탄해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는데 곤란한 것은 이 서류를 참고해서 내일 아침에는 내야 할 보고서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너무 늦었고 예비용 안경도 없어 전전긍긍하던 아토 하루키는 문득 창가의 안경집을 보았다.

"……."

파각, 하고 열린 안경집 안에는 안경이 있다. 예로부터 산 사람보다 무서운 유령은 없다고 했지. 아토 하루키는 그 말을 정중히 세 번 곱씹은 다음 카노의 안경집 앞에서 합장하듯 손을 모았다.

"좀 빌리겠습니다."

안경 도수는 그리 딱 맞지 않았으나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글자의 윤곽을 읽으며 서류를 처리하던 아토 하루키는 문득 느껴지는 피곤함에 고개를 들어 기지개를 켰다. 시계는 심야를 가리키고 있었고 서류는 거의 막바지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아아 정말, 조금만 더 하면 해방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몸을 늘어뜨렸을 때였다.

"아소 짱, 좀 쉬는 게 어때?"

…….

아토 하루키는 안경을 벗었다.

고개를 들면 아무것도 없다.

다시 안경을 쓴다.

고개를 든다.

카노 아오구가 빙긋 웃었다.

"방해하는 놈이 있으면 죽여줄 테니까."

"내가 이 서류를 안 하면 내일 내가 죽습니다."

"각박한 사회를 살고 있네, 아소 짱."

"그보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렇게 물으면 카노 아오구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아소 짱이 내 안경 가져갔잖아!"

#02

불멸자의 삶은 마치 맨발로 묘지를 걷는 것이라 이따금 나뭇가지나 작은 돌이 생생히 박혀왔다. 그럼에도 그걸 털어내지 않고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그들과 본 풍경이 눈앞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럴 때 보면 정말 몸서리쳐지지 않아? 그 사람들은 없는데 그 사람들이 사랑한 풍경만은 그대로라니."

"이 흔적들을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어? 라고 묻는 느낌이죠."

"교활해. 응, 정말로 교활한 세상이야."

"그래도 사랑하고 있죠?"

"끔찍할 정도로."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 위에서 사과는 붉어지고 포도는 여문다.

해는 저무는데 그들은 영원해서 가지를 장식하는 하얀 리본이 늘어만 갔다.

"아아, 죽고 싶어. 정말로."

"극독劇毒을 발견한다면 제일 먼저 세오 씨에게 드릴 테니까요."

"부디 그렇게 해줘. 아, 하루키의 몫도 제대로 남겨둘게."

"그건 감사하네요."

따라서 스러지지 않는 이들은 바람에 리본이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게 어떤 음색인지는 둘밖에 모를 것이다.

#03

…….

눈을 뜬다.

"루이! 괜찮아?"

"괜찮아, 하루"

까지 말하려다, 오토와 루이는 말을 멈춘다.

눈앞의 소년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미안하다, 디타. 폐를 끼친 모양이군."

"무슨 소리야!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지! 나를 지키려다가..."

"자신의 실력을 잘못 가늠했을 뿐이야."

자리에서 일어서면, 벽돌을 쌓아 올려 회반죽을 바른 듯한 새하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수녀복을 입고 근처를 지나가던 이가 루이의 모습을 보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일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별다른 문제는 없다. 이곳은 교회인가?"

"네, 성스러운 용사님들을 부활시켜드리는 곳이랍니다."

"…부활."

"그렇지만 조심하세요? 너무 잦은 부활은 영혼에 부담을 주게 되니까요."

"알겠다. 조언에 감사하지."

수녀는 어디론가 바삐 사라진다. 루이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디타를 돌아보았다.

"나는 한 번 죽은 건가?"

"응. 그래서 급하게 마을로 돌아왔어."

"죽는다는 것의 정의는?"

"어? 아, 일단 의식을 잃고, 부활 의식을 받기 전까지 눈뜰 수 없는 상태를 말해. 보통 사람이라면 큰 상처를 입으면 죽지만… 루이는 나와 같은 용사의 힘을 가졌잖아? 그런 사람은 교회의 신성한 힘을 빌리면 다시 깨어날 수 있어."

"과연. 그런가. 프로세스는 이해했다."

"그렇지만 너무 무모한 행동은 금물이야! 잦은 부활은 영혼을 헐겁게 한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그래."

이후 장비를 바꾸고, 새로운 탐색로를 찾아보자는 방침을 수립하며 오토와 루이는 생각한다.

자신이 여기로 온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아토 하루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이 되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라고.

#04

"다리가 쑤셔."

방과 후 원예 부실. 분갈이도 끝나고 화단정리도 끝나고 가지치기 작업도 끝나 한가한 오후 햇살 속에서 아토 하루키가 중얼거렸다. 오토와 루이는 읽고 있던 문고본에 책갈피를 끼워두고는 시선을 들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하루키는 이쪽에 옆모습을 보이는 상태로 자리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짝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드디어 성장통인가. 많이 심한가?"

"그렇게 심하진 않아. 딱 오토와 만큼만 크면 좋겠는데."

하루키가 이쪽을 곁눈질한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순조롭게 성장한 오토와의 키는 고등학교 2학년인 지금 170대 후반을 달성한지라, 160 중반의 하루키와 바로 곁을 걷게 되면 모르는 사람에게서는 동생 내지 후배가 참 잘 따르네~같은 소리를 심심찮게 듣고 만다. 그런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티를 내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우유 한 팩을 비우려고 노력하는 하루키의 행동을 모르는 오토와 루이가 아니다. 그는 무릎께를 꾹꾹 누르는 하루키의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우왓, 뭐 하는 거야!"

"가만히."

그대로 하루키의 앞으로 돌아가, 한쪽 무릎을 꿇듯이 앉는다. 원예부로 오면 대체로 체육복을 입고 있는 오른쪽 종아리를 꾹꾹 주무르면 으하악,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 뭉친 근육의 딴딴한 감촉이 느껴졌다.

"지나친 운동은 좋지 않아."

"으으, 그렇지만."

"근육이 뭉쳐서 더 안 자랄 수도 있어."

"진짜?!"

"들었을 뿐이지만."

"열 받네… 키 178…."

꿍얼꿍얼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종아리를 풀어주고, 무릎을 두드려주고, 발목 아래의 아킬레스건을 자극한다. 마지막 작업은 특히 효과가 잘 들었는지 아까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풀린 목소리가 났다.

"으아, 거기 거기. 시원해~"

"노인 같은 말투."

"루이도 뒤지지 않거든?"

볼멘소리를 들으며 왼쪽 발도 똑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하루키의 핀잔을 듣고서야, 오토와 루이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그런 일도 있었지."

"그렇네~ 결국 고등학교 졸업하고서야 따라잡았던가."

"아침저녁으로 우유 먹은 보람이 있어 다행이군."

"그러ㄱ……. 야 너 그거 언제부터 알았어! 웃지 마! 말해!"

#05

이소이 사네미츠는 과거를 봉합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이 어떤 상황이었든 어린 하루키에게 정서적 학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니까. 탈출의 날 이후에 레이지를 안고 아끼고 사랑하는 동안 사네미츠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한 번도 편안히 잊은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아이를 외면해왔던 아비가 본래 다른 곳으로 갈 예정이었던 아이를 이탈리아로 같이 데려가려 했다고 해서 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기적처럼 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식이었다. 인생은 있었던 일을 쉽게 삭제해주지 않는다. 덮어쓰기도 되지 않는다. 저장의 기회도 없다. 그래서 사네미츠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터무니없는 어리광을 부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런 상처를 알아… 그건… 그건, 하루키."

"……."

"설마, 그때."

오래된 총상을 드러낸 채, 아토 하루키는 말없이 사네미츠를 응시한다. 하지만 안심해요. 조금 위험했을 뿐이지 생명에 지장은 없었어요. 사네미츠는 자신의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들으면서 자각한다. 자신이 터무니없는 환청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을 방어하려 한다는 것을. 둑은 무너지고 고여있던 물은 속절없이 흘러내린다. 사네미츠는 거기에 질식할 지경이 되었다.

"하루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내, 내가."

"일어나요. 그만 들어가죠."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내 잘못, 내 잘못이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

하루키는 길게 침묵한다. 아아, 그 삭막한 공간에서 실험에 실험을 거듭 받았을 때도 아버지가 목을 맨 걸 보았을 때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어. 라이가 모두를 죽이고 자신도 끝내겠다고 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끔찍한 기분은 아니었다고. 사네미츠는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과거의 죄 앞에 굴복한다. 그 행동이 아무것도 청산할 수 없는데도.

내.

내 아들이.

우리 아들이.

"아팠지, 무서웠지, 미안해, 미안해…."

아토 하루키의 표정은 감히 알 수 없다. 사네미츠는 오열밖에 할 수 없는 제 나약함에 손톱이라도 뽑아버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윽고 하루키가 제 앞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난다. 뻗어온 두 팔이 무너진 몸을 천천히 안아주었다. 목에서 슬픔에 참살당한 숨소리가 토막토막 굴러 나왔다.

(하루키)

"추한 모습 보이지 말아요."

(하루키.)

"난 당신 아들이에요."

(우리 하루키.)

"이렇게 살아있죠."

(우리 하루키가 왜?)

그러니까 일어나요. 하루키의 말에는 자신이 건넨 말에 대한 것은 쏙 빠져있다. 사네미츠는 글을 다듬는 자 특유의 감각으로 그걸 알아차렸으나 소금기에 잠식당한 뇌는 그걸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위화감은 침잠한다. 슬픔이 그 간극을 재빠르게 메꿨다.

"미안해, 미안해 우리 아들…."

"그러니까, 그만 울라고요."

아토 하루키가 위로하듯 사네미츠의 등을 두드린다. 그 행동이 조금 어색하다는 것을, 오열하는 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06

하루키가 입원한 병원의 제3병동은 대체로 조용하다. 외부인의 방문을 받아도 난동을 부리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안정되어있거나, 혹은 아예 그런 증상을 보이지 않는 환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부인의 출입이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도 아니어서, 오토와 루이는 병문안을 하러 갈 때마다 병원 접수처를 방문해 제3병동으로부터 방문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내야 했다. 사실상 형식만 남은 단계나 다름없었으나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병동으로 들어갈 수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제3병동으로 이어지는 하얀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오토와 루이는 그 단계가 가지는 의미를 되새김질한다.

자신의 친우가 이 복도 너머 병실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거기서.

제3병동으로 이어지는 문의 인터폰을 누른다. 「아토 하루키 환자의 면회를 왔습니다. 조금 전 연락드린 오토와입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간다. 기계 너머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 문은 조금 무겁고, 조금 차갑고, 조금 버겁다.

오토와 루이는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루이군. 안녕."

병실로 들어가면 평소와 같은 아토 하루키가 있다. 침대 시트 위에는 작은 나무 퍼즐이 있고, 병실 옆에는 튤립꽃이 담긴 꽃병이 있다. 얼마 전 오토와 루이가 병문안을 오면서 새로 갈아준 꽃이다. 긴 겨울을 버텨냈다는 튤립은 과연 오랫동안 생생하게 피어있었다. 루이는 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 하루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루이 군은?"

"난 건강하다."

"그렇구나."

"……."

계절은 이제 늦여름에 접어들어서, 바깥의 햇살은 강렬하다. 오토와 루이도 여기로 오는 동안 제법 땀을 흘렸다. 그러나 아토 하루키가 입원한 병실은 직사광선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각도에 있어 조금 선선했다. 천장에서 돌아가고 있는 에어 컨디셔너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토와 루이는 장소의 쾌적함과 상관없이, 이곳 이 자리에 앉으면 어김없이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그건 하루키를 향한 감정은 아니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하면 그건.

"요전에 수첩을 정리했다."

"응."

"중요한 정보가 없나 살펴보던 와중에 옛날 메모를 찾았어."

"응."

"……하루키."

"응?"

"같이 프랑스로 여행 가기로 했던 거, 기억하나?"

"흐랑스."

조금 흐린 발음으로 말하고, 아토 하루키는 오토와 루이를 바라본다. 그러나 동시에 루이를 보고 있지 않다. 오토와 루이는 이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하루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거긴 어디?"

여름 매미가 심하게 운다. 저러다 발성 기관이 찢어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07

전 아오기 카나오, 현 카노 아오구가 받는 혜택은 사실 혜택이란 표현이 옹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좁다. 의식주 제공, 실험 자율참여 가능, 제한된 복지와 교육. 그 정도가 끝이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원칙적으로 B등급 이상 직원에게만 의무적으로 허용된 사격 훈련도 포함되어있었다. 카노 아오구는 바로 그 지하 4층 사격훈련장에서 두 번째 탄창을 갈아 끼운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카노 씨."

"어라라~ 카즈 짱이잖아. 무슨 일?"

"의무 교육이랍니다. 카노 씨는 연습? 의무?"

"유흥."

"과연."

이후의 대화는 없었다. 자아 컨트롤 능력이 뛰어난 니이미 카즈야는 연구원 사이에서 퍽 사교성이 높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카노 아오구와 깊은 교우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역으로 카노도 그에게는 별생각이 없다. 실험에 별다른 제약을 걸지 않다가도 중요한 부분에 슬그머니 태클을 걸긴 하지만... 아, 역시 열 받네. 쏜 탄환이 종이 표적의 머리를 꿰뚫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카즈 짱. 연구소 내 오인사격사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좀 봐주세요. 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아아, 맞아. 그거 꽤 웃긴단 말이지. 둘이 결혼했는데 여전히 니이미랑 타나카잖아."

"니이미가 둘이면 부르기 곤란하잖습니까. 호적상으로는 제대로 니이미 유키랍니다."

"그런 말 하면서 사실은 아직 신고도 못 한 거 아냐?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잖아."

"나왔다, 괜한 괴롭힘."

니이미 카즈야는 목소리 톤 하나 변하지 않는다. 파티션으로 나눠진 옆자리에서 탄창을 갈아 끼우는 소리가 들렸다.

"분하면 카노 씨도 친구나 연인 정도는 만들어보세요."

"역시 오인 사격할래."

"흐음, 연구소 사람들이 과연 순순히 당신의 오인사격이라고 생각할까요?"

"나인 줄 모르게 하면 되지."

"들어올 때 ID카드 찍었잖아요."

과연 휘말리지 않는다. 카노가 짧게 코웃음을 치는 사이 니이미 카즈야가 화제를 바꿨다.

"사격 연습은 꽤 성실히 참여한다면서요?"

"재밌잖아? 그리고 목숨 보전도 되고. 난 시시하게 죽고 싶진 않거든."

"하하, 시시하게라."

시간이 지나 표적이 새로 교체된다. 규칙적인 기계음이 둘 사이를 바느질하려다 실패했다.

"그거 알아요? B등급 이상이 사격 훈련을 받는 건 비상사태에 하위 등급 직원을 대피시키고 크리쳐를 사살할 책임이 있어서예요."

"그게 왜?"

"즐기는 건 좋지만 책임은 제대로 다 해주세요."

카노 아오구는 코웃음을 치곤 다시 표적을 향해 총구를 당겼다.

과녁의 머리 한가운데가 정확하게 뚫렸다.

#08 (약고어)

우직.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와직. 와지직. 동시에 무언가가 단단한 바닥을 스치듯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뭉개져서 혈관이 다 터져버린 손가락을 누군가가 집어 든다. 터진 물풍선처럼 엉망이 된 피부가 너덜너덜한 상태로 끌어올려 진다. 기적처럼 유일하게 형체가 남아있던 안구가 방향을 잡지 못해 헤맸다.

"이쪽이야."

목소리가 들린다. 모든 감각이 그쪽으로 쏠리며 시신경이 꿈틀거렸다. 그곳에는 연한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한, 붉은 눈의 자신이 있었다. 그에 의문을 가지지 못한 것은 사고 활동을 해야 할 뇌가 현재 2차원적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비치긴 하지만 무無나 다름없는 감각 속에서 상대방이 팔꿈치만 간신히 남은 팔을 끌어당긴다. 그 움직임에 응하듯이 피부가 천천히 형태를 갖추고 쏟아져 있던 피부와 근육과 핏물이 사람 꼴로 엉겨붙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아토 하루키."

내 이름.

"너의 유일한 아군이야."

재생은 느리고 엉성하지만 감각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팔을 끌어당긴 이는 어느새 다정하게 자신과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입안에선 분명 쇠 비린내가 가득했는데 어느샌가 진한 포도 향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향에 이끌리듯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애정을 갈구하듯이, 맞닿은 이마를 비빈다. 작은 웃음소리가 등을 토닥였다.

"많이 노력했구나. 이제 괜찮아. 쉬어도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런가.

그랬던가?

알 수 없는 말이 머리를 맴돈다. 상대가 손가락을 얽고는 천천히 뒤로 걸음을 옮겼다. 그걸 따라가듯이 걸음을 옮기면 갑자기 몸이 크게 당겨진다. 어설프게 세 발자국을 따라가고서야 그것이 스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춤은 엉망이다. 기억나는 것도 익힌 것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춤사위는 대단히 상냥했다. 마치 너른 풀밭에 뉘어진 듯한, 편안한 기분.

그렇다면 이대로.

"헛소리하네."

눈앞의 손목이 무언가에 잘려, 그대로 짙은 보랏빛을 터뜨린다. 단단히 이어져 있던 손에 순식간에 손가락만 남았다. 집게손가락, 중지 손가락, 약지가 차례로 힘을 잃고 투두둑 떨어진다. 그대로 무너지려는 허리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거칠게 끌려간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둠과 대비되는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소 짱, 여기서 한가하게 먹히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카, " "당신, 왜 여기 있어?"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들린다. 푸른 눈의 남자가 짧게 웃었다.

"찌꺼기는 닥쳐줄래? 카노 씨는 아소 짱이랑 얘기 중이거든."

"하루키를 돌려줘. 우리는 함께여야 해."

탕.

총소리가 들린다. 끊기지 않고 여러 번 들린다. 자신이 산산이 조각난다. 조각조각 부서져 식물과 뭉개진 포도 덩어리가 되어간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동시에 머리에 피가 돈다. 거대한 오리진 베타의 발에 짓이겨지던 순간에 보았던 풍경이 되살아난다. 들이쉰 숨이 폐를 타고 들어간 혈액 속으로 녹아들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렇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정말이지 아소 짱은 손이 많이 가네~."

"……카노 씨,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놀랍게도, 저스트 일 분."

"돌아갈 수 있나요?"

"아소 짱은 카노 씨가 그렇게나 만능이라고 믿어?"

"그런가요. 이대로 게임오버라니 아쉽네요. 그럼 안녕히."

"이 빌어먹을 쥐새끼야."

카노가 입가를 일그러뜨리곤 어둠 속에서 크게 팔을 휘둘렀다. 커튼이 잘려 나가듯이 빠끔히 열린 틈새로 익숙한 베타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뭐야, 하면 할 수 있네요."

"아소 짱, 여기서 숨통 끊기면 정말 재밌겠다, 그렇지?"

"안 그럴 거잖아요."

코웃음 소리가 들린다. 아토 하루키는 제 몸의 감각과 기능이 얼추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벌어진 틈새 사이에 발을 걸치고 뛰어나갈 준비를 했다. 그 전에 고개를 돌린다. 카노 아오구를 바라본다.

"감사합니다. 이래저래."

"소름 돋아. 카노 씨는 현물만 받거든?"

"알고 있어요."

웃어 보이고는 바깥으로 뛰어나간다.

허공을 헤매던 개의 눈이 다시금 표적을 찾아 번득였다.

#09

사네미츠는 어느 날 꿈을 꾼다 어느 세계선의 자신이 홀로 목숨을 버린 꿈이다 레이지는 이미 죽어서 슬퍼할 수도 없다 하루키와는 이별했다 이걸로 저주는 끝이다 끝난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이탈리아까지 바득바득 찾아온 것은 의외였다 LDL의 유일한 생존자인 세오도아는 그와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다 방으로 들여보냈다 하루키는 레이지의 방에선 의연했으나 그의 방에선 분노했다 왜 죽은 거야 왜 나에게 멋대로 미래를 주고 간 거야 분노의 폭풍에 책장이 침묵한다 하루키는 분풀이하듯이 서랍을 다 열고 모든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사네미츠는 제 실수를 알았다 만년필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암녹색의

안돼. 하루키. 그건 인계될 대상이 아니야.

끊어져야 할 편린이야. 네 몫이 아냐.

그러나 하루키는 만년필을 발견하고 다가간다. 들여다보는 모습은 신중하다. 문득, 그 아이의 몸에 하츠토리의 인자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대로 내 것으로 하고 싶었을 정도야」

하루키가 괴로운 숨을 내쉰다. 위로해주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그보다 공포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냉담한 풍경 속에서 하루키가 말한다

"멋대로 사라졌잖아."

"멋대로 받아 가도 상관없겠지."

유령의 절규는 닿지 않았다.

#10

아, 슬슬 햇살이 강해지네. 세오도아는 빨래 가득 담긴 바구니를 밟으며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훔쳐냈다. 바지를 한껏 걷어붙인 다리 아래에서 하얀 거품이 잔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밟은 지 얼마나 됐는지 확인하려 모래시계를 확인해보면 이제 막 절반이 내려간 참이다. 세오도아는 살짝 앓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뒤집은 모래시계가 다 흘러내리는데 약 30분. 큰맘 먹고 시작한 이불 빨래니 구석구석 밟아서 먼지를 빼놓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이윽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내려갔다. 세오도아는 젖은 발을 탈탈 털고는 양동이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거품을 잔뜩 일으키며 세탁물을 밟아댄 다음에는 다시 물로 헹구어 깨끗하게 짜낸 다음 빨래 건조대에 너는 과정이 남아있다. 하루 만에 끝날 턱이 없는 대작업이었던 탓에 빨래터에는 이미 커튼이나 식탁보 같은 것들이 햇빛 아래 얌전히 건조되고 있었다. 개중 얇은 것들은 이미 바싹 말라 부는 바람에 흩날린다. 세오도아는 아주 잠깐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목이 간지럽다. 벌레라도 붙은 것일까?

"세오도아."

멀리서 목소리가 들린다. 세오도아는 고개를 돌려, 창가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루메르트를 바라보았다. 세탁한답시고 커튼을 다 떼어낸 덕분에 그가 있는 창틀이 어떤 화가가 그린 초상화처럼 보였다. 만일 화가가 그 그림에 이름을 붙인다고 하면.

"루, 무슨 일이야?"

"그냥 불러봤다."

"뭐야, 실없긴."

「루메르트 오토마이어의 노년」이라 이름 짓겠지.

실없긴. 정말로 실없어. 세오도아는 그런 말을 하며 빨랫감을 향해 다가간다. 마당에 널찍한 간격을 두고 세워둔 빨래 건조대 사이로 하얗고 붉고 검은 세탁물들이 휘날렸다. 그 사이로 숨어들어 가면 주변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루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빨래를 하느라 바쁜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바람이 분다. 단숨에 부풀어 오른 식탁보가 얼굴에 휘감겼다. 언젠가 루와 함께 시장에 가서 같이 샀던, 조금은 투박한 느낌의 체크무늬 식탁보다. 반질반질한 나무 탁자에 올려놓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 같아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질이 좋은 물건이니까 한 번 사면 오래오래 쓸 수 있어요. 그때 식탁보를 팔았던 이웃 주민의 말이 떠올라, 세오도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는 기껏해야 물건이 오래 가거나 잘 쓰일 수 있기를 바랬었다.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원하는 것이 있다. 미치도록 바라고 울고 싶도록 원하는 것이 있다. 말도 안 되고 이루어질 리도 없는 갈망이지만.

루와 같이 죽고 싶다.

그리고 루와 좀 더 오래 살고 싶다.

모순되는 소원을 흐르는 시간이 무자비하게 깎아낸다. 바스러진 조각들은 굴러떨어져 그 무엇도 아닌 먼지 조각이 되어갔다. 세오도아는 제 눈가를 세게 비비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아무도 그것을 긍정해주지 않아서 숨을 꾹 눌러 참는 동안 휘날리는 빨래들이 그의 머리를 스치며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문득 생각한다. 이 빨래의 경계를 빠져나갔을 때, 루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으면 좋겠다고.

동시에 누군가가 목에 서늘한 칼을 들이대듯이 깨닫는다. 그런 일은 없다.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오도아는 빌듯이 눈을 감는다.

바우키스와 필레몬을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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