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뜻은 구름 끝이 검은 것이요雨意雲端黑
E루트 스포일러 / 투신 묘사 / 아토 하루키 + 오토와 루이
아토 하루키가 난간 너머에 서 있다. 오토와 루이는 뻑뻑한 눈꺼풀을 깜박여 사태를 인식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하룻밤 내내 상대에게 내어준 팔이 약간 굳어있었다. 그걸 살짝 주무르면 감각이 없던 손가락 끝에 피가 돌았다. 일반적으로 살짝 금이 간 콘크리트 바닥은 침대의 대체품으로 고려될만한 대상조차 아니지만 그 이상의 끔찍한 둔통은 없었다. 콘크리트 위로 두꺼운 식물 덩굴과 잎사귀가 잔뜩 자라나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실로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동화 같기도 하고, 종말 문학의 한 장면 같기도 한 푸른 잠자리.
몸을 돌려 난간 쪽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걸어가며 오토와 루이는 생각한다. 식물이 다정하고 온화하게 그려지는 것은 인간의 편견에 불과하며, 실제 생태계에서의 식물은 고요한 만큼 끈질기며 결코 제 목표를 양보하지 않는 잔혹한 전사에 가깝다는 말을.
"이봐."
부르면, 하루키가 돌아본다. 연보라색 머리가 빌딩풍에 휩쓸려 엉망으로 뒤집어지고 있었다. 청명한 아침햇살 아래 최고조의 석양을 녹여 넣은 것처럼 붉은 눈동자는 깜박이지도 않았다. 오토와 루이는 난간을 코앞에 둔 자리에서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옷자락이 부질없이 나부꼈다.
"위험해. 돌아와라."
"여기서 보면 마을이 참 작아 보여."
오토와 루이는 서로의 대화가 맞물리지 않는 것을 일일이 분개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간극에서 맥락과 함의를 찾아내는 것이 직업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단서가 부족하다. 침묵하는 루이 앞에서 아토 하루키의 껍데기를 쓴 것이 허리보다 약간 높은 난간 위로 손을 뻗었다. 명백히, 난간 안쪽으로 건너오려는 기색이 아니었다.
"루이도 이쪽으로 올래?"
손을 마주 잡지 않는다. 대신 가볍게 난간을 짚고 아슬한 콘크리트 테두리 위에 선 루이를 보고 하루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모습을 감춘 빌딩풍이 용감한 이단자들의 뺨을 사정없이 긁었다. 오토와 루이는 먼 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며, 아아, 그러고 보면 저길 지난 지도 벌써 삼 일이나 지났군. 따위의 생각을 했다. 그 이상은 떠올리지 않았다.
"멋진 풍경이지?"
"내 주관에 의미가 있나?"
"기왕이면 나랑 같은 마음이었으면 한다고."
그편이 너도 나도 즐겁잖아.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얄궂게도 아주 예전에 보았던 표정을 닮아있었다. 오토와 루이는 막연하지만 확실하게 발밑이 무너져 추락하는 감각을 맛본다. 하지만 주변 풍경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추억이 자극받아 일어난 급격한 감정 변화. 그로 인해 야기된 호르몬 분비와 균형 감각의 일시적 붕괴. 두개골 속의 두뇌가 냉정하고 합당한 결론을 내놓는다. 탐정업에 익숙한 입술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건 하루키의 의사인가?"
"매번 나私와 나俺를 구분하려 들지 말아줘. 우린 이제 하나의 존재나 다름없다고 했잖아."
"……."
"정말이지 고집이 세다니까, 루이는."
하루키가 몇 걸음 멀어진다. 양팔을 벌린 위태로운 외길 건너기를 바라보는 루이의 귓가에서 성난 바람이 그르렁거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벌써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정상적인 생존본능과 안전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껏 마련된 난간을 무시하고 위험천만한 건너편으로 넘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짓을 벌이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아무것도 각오하지 않았거나, 무언가를 각오했거나. 자신은 과연 어느 쪽일까. 생각이 아주 잠깐 바람의 끝을 더듬는다. 그 순간 시야에서 뭔가가 사라졌다.
뇌로 피가 뻗어 올라가는 것보다 빠르게 안구 근육이 뒤틀린다. 허파의 호흡 운동에 쓰여야 할 에너지가 일시적으로 끊어지고, 아토 하루키의 몸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건물 바깥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이 망막에 선명하게 잡혔다. 맑은 햇살이 그 등과 팔과 얼굴 위로 미끄러지며 연속적으로 기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시선이 마주친다. 멈춘 건가 싶던 심장은 보류된 에너지를 단숨에 집어삼키고 고동쳤다. 혈류가 가속한다. 다리 근육이 수축한다. 견고하게 구축되어있던 이성과 논리의 파이프라인이 박살 났다.
"하루키!"
단숨에 달려가, 손을 뻗어, 무방비한 팔을 붙잡는다. 하지만 이미 허공 너머로 기울어진 몸의 인력을 뿌리치는 것은 무리였다. 난간을 잡으려던 손가락이 간발의 차로 닿지 못했다. 최후의 생명선이 속절없이 멀어진다. 오토와 루이는 찰나를 천만분의 일로 조각낸 틈바구니에서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는 생존 본능을 버리고 아토 하루키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지상 15층에서의 투신은 두 인간의 뼈를 박살 내기에 충분한데도.
모든 물리법칙은 박애주의자이므로 중력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는다. 추락하는 두 사람을 향해 지면이 빠르게 질주해 들어오며 단단한 품을 벌려 보였고.
……….
….
…………….
"후."
…….
"후후, 아하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난다. 피안의 감각치고는 꽤 선연했다. 느릿느릿 눈을 뜬 오토와 루이는 제가 품에 꽉 끌어안은 아토 하루키가 웃고 있음을 알았다. 천천히, 전신을 도는 피의 감각으로 자신의 사지와 머리가 멀쩡하게 붙어있음을 인식한다. 몸은 마치 해먹에 누운 것 마냥 뜻밖에도 편안했다. 코에 짙은 녹음의 향기가 밀려들어왔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루이."
그들을 공중에서 낚아챈 나뭇가지와 덩굴은 그물 모양으로 촘촘하게 얽혀들어 잎사귀를 가득 피워내고 있었다. 어떤 일류 조경사도 감히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없고 그 어떤 식물도 이런 식으로는 자라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생존과는 일절 상관없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오토와 루이는 박살 난 논리의 파이프라인으로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다. 이제까지는 하나의 풍경, 이상 현상으로 인식했던 것이 구조와 인과를 갖춰나갔다.
"이제야 하루키라고 불러주네."
식물은 결코 다정하거나 온화하지 않다. 그들은 고요한 만큼 끈질기고, 절대 제 목표를 양보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에 충실할 뿐인 전사들이다. 협상은 없다. 합의도 없다. 애걸복걸해도 소용없다. 언어도 논리도 감정도 일체 통하지 않는 식물들은 차라리 무정하다. 그런 존재들이 어떤 의지를 갖추고 무언가에게 기꺼이 힘을 빌려주기로 했다면, 아무런 이해 관계 없이 아끼고 따르기로 정했다면 그 대상은 실로 어때야 마땅하겠는가.
"많이 놀랐어?"
녹음이 짙다. 눈동자는 붉다. 햇살은 기이할 정도로 따스했다. 이 삐걱거리는 나뭇가지와 덩굴, 바람에 바삭거리는 잎사귀 소리를 다정함으로 착각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오토와 루이는 조용히 인지한다. 이는 다정함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을 위한 광대한 충성과 총애이자, 결코 거두어질 일 없는 칼날이라는 것을. 힘을 가진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지닌 힘을 닮게 마련이고 그리하여 힘은 주인을 닮는다. 누군가를 총애한다. 총애하는 자 이외의 것은 배척한다. 단순한 구조는 모순이 없어서 단단했다. 마치 지금 그들을 감싸 안은 나무 그물처럼.
"걱정하지 마. 이렇게 무사하잖아."
아토 하루키가 꽃처럼 웃는다.
모든 푸르른 것들의 왕이 거기 있었다.
비의 뜻은 구름 끝이 검은 것이요雨意雲端黑
봄의 마음은 나무 끝이 푸른 것이니春心木末靑
-추구(推句), 작자 미상.
샤인바스켓님께서 멋진 그림을 그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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