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돌고 도는 꿈은 길몽
오토와 루이+아토 하루키
※비현실적 고어 소재가 등장합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루이!"
밝은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든다. 멀리서 하루키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긴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낙엽처럼 흩날렸다. 하루키 쪽에서 저렇게 소리를 내서 나를 부르다니 별일이군…. 그런 생각을 하던 루이의 시선이 문득 하루키의 발치에 놓인 쓰레기더미에 가닿는다. 쓰레기? 아니, 저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표정이 굳는다. 땅을 박차는 걸음에 힘이 실린다. 고작해야 세 걸음 내지 네 걸음 정도 되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 견딜 수 없었다. 그동안 하루키는 계속 미소짓고 있다.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마치 고장난 영사기에서 필름 영화의 한 컷만이 무수히 반복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현실은 질량을 가지고 있어서 손끝이 하루키에게 닿는다. 루이는 그대로 체구가 작은 하루키를 제 몸뒤로 숨기며 바닥에 나뒹구는 흔적을 본다. 마른 흙에 번진 녹색 얼룩을, 사람의 옷을 걸친 채 무수히 뻗어나가는 줄기와 잎사귀를 목격한다. 그 형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났다.
"굉장하지, 루이!"
등 뒤에는 하루키가 있다. 눈 앞에는 아직도 꿈틀꿈틀 생장하는 식물 덩어리가 있다. 그 순간 오토와 루이는 앞과 뒤의 무게 차이를 실감할 수 없게 된다. 중심이 되어야할 무게추가 가라앉는다. 무언가가 솟아오른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죽일 수 없어서, 어떻게 해도 죽일 수 없어서, 그런데도 어떻게든 하고 싶다고 바랐더니, 그렇게 됐어!"
덩굴 덩어리가 한데 뭉친다. 뭉친 곳에서 색색의 꽃이 피어난다. 하얗고 노랗고 푸르고 주홍빛의 선명한 꽃이 각양각색으로 피어난다. 그 색채는 봄의 노을처럼 온화한데도 오토와 루이는 현기증을 느꼈다. 막연히 구토기가 올라오는 가운데 그저 어떤 보호본능을 따라 아토 하루키를 가린 등을 경직시킨다. 하루키가 제 몸에 닿는 감각은 없고 목소리만이 계속 들려왔다.
"있잖아, 다나카는 죽지 않았어! 아직 살아있어!"
꽃이 피어난다. 한바탕 향기를 퍼뜨렸다가 순식간에 시들어간다. 그 끄트머리에 작은 열매가 맺혔다. 오토와 루이는 손쉽게 자신의 머리 속에 저장된 생물 지식을 떠올린다. 생물의 생장과 번식. 아무래도 이 식물은 새나 벌레의 수분이 필요없었던 모양이지. 머리를 스쳐나가는 토막지식이 오히려 기분을 진정시킨다. 모든 꽃들이 시들어버린 덩굴 끝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제 뒤의 하루키가 살짝 제 팔뚝을 잡고 덩굴을 내다보는 기색이 있었다.
"굉장하지, 루이. 다나카는 살아있어. 저런 모습이 되고서도 살아있는거야."
어쩌면 저게 다나카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었을지도 몰라. 하루키는 속삭이듯이 말한다. 오토와 루이는 그제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덩굴은 이제 웅덩이라 불러도 좋을만큼 가득 자라났다. 그들이 다니는 중학교의 교복은 저 먼 덩굴 사이에서 오래된 헝겊처럼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살아있다고?"
"응."
잘 봐, 루이. 하루키의 말에 맞춰 덩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덩굴 끝에 맺힌 열매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 줄기가 되는 덩굴은 점점 마르고 시들어 갔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그렇게나 찬란하게 피어있던 꽃들이 있던 자리에 각양각색의 형태를 지닌 과실들이 맺힌다. 그리고 마침내 색색으로 물든 과실이 크기를 불렸을 무렵, 덩굴들은 거기에 흡수되듯 바스라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곳에 남은 것은 가지나 애호박을 닮은 무언가 뿐이다.
"…끝난건가?"
"끝나지는 않았어."
하루키가 루이의 등 사이로 빠져나와 바닥에 놓인 것들을 집어든다. 애호박, 가지, 토마토를 닮은 그것들은 마트에 진열하면 어느 게 어느 것이었는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오토와 루이는 제 눈썹 끝이 조금 경련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다나카는, 여전히 살아있나?"
"살아있어.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없을 뿐."
과육들은 모두 탐스럽게 자라있다. 루이는 조금 끔찍한 상상을 했다.
"먹을 건가?"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아."
"그럼?"
"그렇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까마귀들의 먹이로 줄까?"
바람은 조금 거칠게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간다. 루이는 하루키의 품에 얌전히 들린 과실들을 본다. 어딘가에 널부러져있던 교복은 바람을 타고 데굴데굴 구르며 먼지투성이로 사라져갔다. 그러고보면 교복에는 이름이 새겨져있으니 발견되면 누구 것인지 금방 알겠군. 서서히 냉정해진 오토와 루이의 뇌가 현실감각의 위에 더께처럼 얹힌 어지럼증을 덜어낸다. 하지만 상처도 저항한 흔적도 없어…. 그래. 아무런 흔적도 없는거야.
"그럴까."
따라서 나온 대답은 조금 평온하다. 하루키는 빙긋 웃고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잘됐다, 다나카. 계속 살아있을 수 있어."
과실은 답이 없다. 오토와 루이는 그걸 바라보다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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