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m spiro, spera.』
이소이 레이지+시나노 에이지
-세포신곡 전력 60분 「일기장」
-세포신곡 DLC 플레이 이후의 감상을 추천합니다.
"레이지 씨는 매일 일기를 쓰나요?"
4월이 가까운 시기, 오랜만에 만난 시나노 에이지는 문구점을 둘러보다 그런 소리를 하고 필기구를 구경할 생각으로 들어온 레이지는 뒤를 돌아본다. 전에 비하면 머리를 짧게 자른 시나노가 문구점에 마련된 노트들을 집어보다 자리에 내려 놓고 있었다.
"시나노 씨야말로 어떤가요.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슴까?"
"물론이죠! 디타검 감상 일기도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고요!"
"우리 단톡에 매주 올리는 그거 말이죠. 잘 쓰던데요, 시나노 씨. 한 번은 플랫폼 메인에도 올라가지 않았던가요?"
"아하하, 그땐 깜짝 놀랐어요~. 물론 기뻤지만!"
색색의 표지들. 한 무리의 학생들이 노트 몇 권을 손에 들고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눈다. 바로 옆에 놓인 포스트잇과 인덱스 코너에서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포스트잇 세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을 정했는지 각자가 집은 물건들을 소중히 안고 계산대로 향한다. 그 발걸음과 각종 속삭임, 웃음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려퍼졌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일기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생각이나 시간이란건 앗차 하는 사이에 주르륵 흘러가버리니까요."
"그렇네요. 정말로 그래요."
지고천 연구소 사건은 흘러서 흘러서 과거 어딘가의 물가에서 낙엽처럼 찰랑거리고 사건의 생존자들을 미래를 향해 걸어가며 봄의 바람결을 느낀다. 언젠가 이 햇살은 강해졌다가 다시 사그라들며 사계절을 순환시킬 것이고 사람들은 그 시간만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리라. 돌아가는 일만큼은 아무리 바라도 불가능하기에.
"그래도 그 사건을 적는 건 역시 힘들었어요."
"...무리는 아니죠."
"하지만 마주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아카네 씨랑 티나에게 힘을 달라고 부탁하면서 어떻게든 해냈어요."
"어떻게든 되던가요?"
"네. 레이지 씨도 그런 일 있지 않나요?"
예를 들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느낀 초조함이라던가.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라던가.
이걸로 전부 끝났음을 실감할 수 없었던 때라던가.
그러다 마침내 자신을 보러온 이들을 얼굴을 보았을 때 느낀 안도감이라던가.
"...다 적기 힘들 정도로 있었죠."
"역시!"
"다수는 당신 탓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거기서 제 탓을!"
너무해요 너무해! 기껏 레이지 씨를 따라서 문구점까지 들어왔는데! 시나노 에이지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투로 투덜거리기 시작하고 레이지는 짐짓 휘파람 따위를 부는 시늉을 하면서 필기구 코너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가볍게 쓸 수 있는 샤프 펜슬이나 3색 볼펜, 색색의 젤펜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숱한 상품들을 둘러보던 시선이 문득 한 구석에 가닿는다. 뒤를 따라온 시나노가 레이지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이거 터치펜으로 쓸 수 있는 볼펜이네요. 저희 사무소에서도 답례품으로 구비해뒀어요."
"끝부분에 고무를 붙여둔건가요. 소소한 아이디어지만 확실히 도움은 될 것 같네요. 몇 개 사갈까..."
그대로 시선을 내려보면 문구점 측에서 펜이 잘 나오는지 시험해보라고 준비해둔 메모장이 보인다. 온갖 낙서와 의미없는 선이 질주하는 메모장을 넘겨보다가, 레이지는 문득 떠오른 것을 말한다.
"그러고보면 일기를 쓴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자신을 위로한다고 들은 적이 있슴다."
"정말요?"
"네. 설령 그 내용이 저주와 한탄으로 차있다하더라도, 무언가를 쓰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미래에 살아서 그 기록을 볼 자신을 상정한다고요."
"어쩐지 철학적이네요."
"그래도 좋지 않나요?"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 설령 그 뿐인 일기장이라도 기록은 기록으로서 남는다. 기록으로 남아서 먼 미래의 언젠가에 돌아볼 수 있는 과거의 파편이 된다. 남겨진 문장들은 빛나기도 하고 어둑하게 녹슬어 있기도 하겠으나 그럼에도 미래의 씨앗이 되어 문득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미소지을 수 있는 자신을 상상하는 일은 마치 넓은 평원에서 발견한 이정표같은 것이어서.
막무가내의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하긴 옛날 일기장을 보다 보면 기억도 안 나는 일로 끙끙 앓아서 웃기기도 해요. 지금 고민하는 일도 미래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싶기도 하고."
"맞아요. 그런 체험을 주기 때문에 일기장을 쓰는 일을 권장한다는 상담사의 이야기도 들었음다."
"미래는 의외로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그 말대로."
미래는 특별하지 않다. 그저 당연한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그 앞에 도달하는 목적지이자 출발선일 뿐이다. 그러니까 너무 막연하게 여기며 압도당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일에 얽매여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우리는 조금씩 그 일로부터 멀어져 미래로 가고 있으므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레이지가 방금 본 펜 하나를 집는다.
그 손이 비어있는 공백에 문장 하나를 적었다.
"이탈리아어인가요? 무슨 뜻이에요?"
"라틴어로 「시나노 씨 바보」라고 적었슴다."
"아~! 그럼 저도 여기 「레이지 씨 바보」라고 적을 거에요!"
"...기다리는 동안 아무데나 들어가있으랬더니 너흰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보다 아무리 봐도 시나노의 이름이 안 적혀있잖아. 그치만 레이지 씨가 먼저 저 놀렸다구요! 마침내 합류한 세 사람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동안 그 소리도 문구점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 녹아든다.
누군가의 일기장에 적히기 좋은 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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