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넘앤메이슨 애프터눈 블랜드」
오토와 루이&아토 하루키+이소이 레이지
#세포신곡_전력_60분 『계기/시발점』
"그러고보면 하루키 형은 언제부터 홍차를 마셨나요?"
"대학생 무렵이야. 루이가 선물받은 거라고 나눠줘서, 그때부터 입문했지."
"이래저래 오토와 씨하고는 인연이 깊으시네요."
"뭐, 그렇지…. 그땐 여러모로 힘든 때이기도 해서 루이가 많이 챙겨줬어."
*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면, 익숙한 얼굴이 있다. 하루키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님을 받아들였다. 열린 문 사이로 봄의 따스한 공기와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음이 불어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내방객은 익숙한 동작으로 신발을 벗은 뒤, 자신이 들고 온 종이가방을 하루키에게 내밀었다.
"이게 말했던 물건이야? 루이."
"그래. 아버지가 사무소의 의뢰인에게서 보답으로 받았다는군."
"그런걸 나한테 줘도 되는거야?"
"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루이는 이상한데서 완고하다니까."
쇼핑백을 받은 채, 나란히 부엌으로 들어간다. 본래라면 손님을 거실로 안내하고 집주인인 하루키가 다과 등을 준비해야할 테지만 별써 5년간의 우정을 다져온 두 사람에게 그 정도의 거리감은 새삼스러웠다. 다만 그렇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준 루이에게 찻물을 끓여달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루키는 적당한 머그잔을 찾아서 꺼내달라는 말로 루이의 주의를 돌린 다음 전기 포트의 스위치를 올렸다.
"타구리는 어떻게 지내?"
"수험공부에 여념이 없어. 얼굴 보기도 힘들군."
"아하하, 의대 지망이랬지. 머리도 좋으니까 분명 합격할거야."
그리고 잠시, 침묵.
하루키는 전기 포트에 담긴 물이 서서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부엌의 창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흩날린 건지 연분홍빛의 벚꽃잎이 하늘거리며 시야를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벚꽃이 예쁘게 피었겠네.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 물이 다 끓었음을 알리는 전자음이 울려퍼졌다.
"루이, 물 다 끓었어…. 그건 뭐야?"
"인퓨저라는 거다. 홍차를 우릴 때 쓸 수 있지."
원뿔 모양의 금속도구를 열고, 루이가 그 안에 홍차잎을 집어넣는다. 두 사람 몫을 미리 준비해놨는지 두 잔의 머그컵 중 한 쪽에는 이미 기다란 사슬이 책갈피처럼 안에서 바깥으로 걸쳐져 있었다. 정말 별걸 다 아네. 하루키는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뜨거운 물을 여기에 바로 부으면 되는거야?"
"그래. 그럼 인퓨저에서 차가 우러나올 거다."
뜨거울 테니까 내가 하지. 하루키가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루이가 포트를 받아가, 머그잔에 따뜻한 물을 붓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던 하루키는 이내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과보호야."
"그런가."
홍차가 우러나기 위해서는 조금 기다려야 한다. 하루키는 텅 빈 전기 포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천천히 우러나오는 차를 바라보았다. 가장 따뜻한 순간의 봄 햇살을 잘라, 그대로 담아낸 듯한 빛깔이었다.
"아참, 쿠키를 좀 사놨는데 깜박했네."
부엌 선반으로 다가가, 미리 사두었던 버터 쿠키 세트를 꺼내든다. 찬장을 열어 작은 접시에 쿠키를 올린 하루키는 다시금 루이가 앉아있는 자리로 돌아와 둘 사이의 공간에 쿠키 접시를 내려두었다. 달그락.
"슬슬 마셔도 될 것 같군."
"잘 마실게~."
머그잔은 따스하다. 하루키는 잘 우러난 머그잔 속 찻물을 마시려다 멈칫했다. 잔 속에 담궈놓은 인퓨저가 잔이 기울어지는대로 따라오는 바람에 마시기가 조금 번거로웠던 것이다. 슬쩍 시선을 던져보면 루이도 비슷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하루키는 킥킥 웃고는, 인퓨저를 빼내어 쿠키 접시 한쪽에 올려두었다.
"루이도 여기 놔둬."
그리고 차를 마신다. 한 모금 입술을 축인 하루키는 제 몸을 간질이는 기이한 감각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따스한 기운이 천천히 식도를 통해 몸 안쪽으로 내려가 꽃처럼 피어나는 듯 했다. 그게 신기해서 조금 더 마시는 데에 집중하고 있던 하루키는 문득 맞은편의 시선을 느꼈다. 찻잎을 가져온 장본인인 루이가 잔을 테이블에 올려둔 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네. 향도 좋고. 무슨 홍차라고 했더라?"
"포트넘앤메이슨의 애프터눈 블랜드."
"그렇구나. 나도 한 번 사볼까…."
혼잣말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쿠키를 집어든다. 혀 위에서 홍차를 머금으며 녹아내리는 버터쿠키의 식감에 집중하던 하루키는 쿠키 한 덩어리가 입 안에서 전부 녹았을 무렵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루이."
"왜 그러지."
"이제 매일같이 챙겨주지 않아도 괜찮아."
"……."
"나도 익숙해졌어. 할머니가… 없는 생활에."
아토 토모코는 이제 이 집에 없다. 아토 하루키가 센터 시험을 끝내고 대학에 합격했을 무렵, 이걸로 남은 걱정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장례식은 조용히 치뤄졌다. 거기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오토와 가족들이었다. 만약 루이의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아니었다면, 아토 하루키는 사람의 죽음과 부재를 증명하는 수많은 행정절차와 서류 앞에서 한참을 헤맸어야 했겠지. 루이가 아니었더라면, 장례식이 끝난 뒤로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어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가 옆에서 다독여주는 것은 이제 충분하다. 이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하루키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미지근해진 차를 마셨을 때였다.
"하루키, 내가 널 만나러 오는 것이 어떤 의무감이나 책무에 의한 행동이라 생각하나?"
"아냐? 아버님이나 어머님께서 나를 신경쓰셔서, 루이가 봐주러 오는 거라 생각했는데."
"바보같긴."
딱 잘라 바보 취급당했다. 하루키의 사고가 정지한 사이 루이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친구가 단 하나뿐인 가족을 잃었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한다."
"……아니,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은 좀."
"그리고. 단 하나뿐인 친구를 만나러 오는 것은 나의 권리이기도 해."
"……."
"홍차는 마음에 드나? 향이 좋은 차라고 하더군."
뭐가 이렇게 뻔뻔해. 속으로 투덜거리던 하루키는 문득 차의 향이 조금 더 진해진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건 아니다. 향은 원래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걸 아토 하루키의 정신이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긴장이 느슨해졌을 뿐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하루키는, 짐짓 제 앞에 놓인 쿠키를 크게 베어물었다. 그대로 홍차를 마신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흘러내렸다.
"………좋네."
"잘됐군."
루이는 얼마간 잡담을 나누고 돌아갔다. 그리고 이후에도 종종 하루키의 집을 찾아왔다.
친한 친구들이 으레 그렇게 하듯이.
*
"아무튼 그런 느낌이었어. 첫 홍차는."
"좋은 추억담이잖아요. 마음이 찡하네요."
"히죽히죽 웃기는."
"뭐 어떻슴까. 덕분에 세상이 조금 넓어졌다는, 좋은 이야기잖아요."
찻잔 속의 찻물은 따스하고, 향기롭고, 부드럽다.
하루키는 그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 피식 웃었다.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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