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세포신곡 50제 완성본

2022.12.20~2023.05.03

세포신곡 50제 링크 :

https://butterflybox.postype.com/post/10216382

※세포신곡 본편DLC은자막간에 이르는 스포일러 주의!※


01. 재앙

아토 하루키는 완만한 둔덕을 건너듯 사람 아닌 것이 되어간다. 그의 의지는 대체로 안온하고 온화하여 가끔씩 발을 거칠게 놀리는 행동도 용인했다. 따라서 아토 하루키는 제 인간성을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다소 거칠게 발을 놀린다. 그 발길질에서 생명이 움튼다. 푸르른 재앙의 싹들.

02. 증식

교외 야외학습을 나간 박물관에서 어느 표지판 기둥에 버섯이 피어있던 것을 발견했을 때는 가을이었고 누군가가 말했다 저 표지판은 이제 뽑아야할거야 안에 버섯포자가 잔뜩 끼었을테니까 아토 하루키는 왜인지 그 말을 떠올린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입을 크게 벌린 어떤 형체에게 먹히면서

03. 악몽

야나기 니나는 좀처럼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하고 연인이 자신을 계속 병문안 오는걸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가 얼른 나아서 퇴원해야 하는데 왜 이러는걸까 결국 생각에 생각을 더한 그는 어느날 마음을 굳게 먹고 고한다 요우 나랑 헤어지지 않을래?

그건 어느 한 사람에게는 악몽이다

04. 재탄

그러고보면 당신 어릴 때는 어땠어? 궁금해. 아내의 질문에 그가 대답한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 많이 아팠으니까 이렇다할 친구도 없었고 식물만이 전부였지…. 그러자 아내가 묻는다. 정말로, 아무도 없었어? 그건 꼭 무언가를 생각해보라는 투였으나 그에게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05. 평온

연말이 가까워진다 루이는 평소처럼 하루키를 챙겨주려다 문득 그의 머리에 새치가 늘어난 것을 눈치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심하게 부려먹었나? 농담을 하면 하루키는 키득키득 웃는다 그걸 말이라고 해? 뭐, 슬슬 염색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네. 알려줘서 고마워 노리…. 루이.

06. 미래

미래는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 하루키가 내뱉은 말에 루이는 시선을 돌린다. 하루키는 사무소 의자에 거의 미끄러질 듯 누워있어 무릎이 반쯤 바닥에 닿아있다. 왜 그러지 하루키. 요즘 그런 말이 늘은 것 같다만. 하루키는 조금 말이 없다가 중얼거린다. 너는 과거가 되지 말아줘.

07. 지고천

천동설은 지구 중심적인 생각이죠. 지구가 우주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지구를 위해 돈다는 생각. 레이지의 말에 하루키는 홍차를 우리다가 별 생각없이 입을 연다. 그렇다면 천동설은 하나의 무대같은 거겠네. 지구를 위해 우주가 움직이는 대연극. 그렇다면 태양은 주연일까.

레이지가 웃는다. 아뇨, 주역은 형이잖아요.

08. 홍차

지난번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쪽에서도 실수를 깊이 통감하고 있으며 이번 사태에 대한 반성의 뜻으로 소소한 성의를 보내드리오니…. 레이지. 그 망할 민달팽이더러 직접 나오라고 해. 포트넘앤메이슨의 로얄 블랜드라도 안되나요. 로얄 블랜드고 뭐고 직접 안오면 평생 얼굴 안봐.

09. 핸드폰

루이 몇 번이나 말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일일이 전화를 걸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국내라면 핸드폰은 잘 연결되고 충전을 잊지도 않을테니까… . 아니 물론 그 사건때는 내가 좀 너무하긴 했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으니까 좀 이해해주면 안될까? 안된다고? 그렇겠지…. 미안합니다….

10. 손전등

그 사건 이후로 하루키는 손전등의 관리에 일주일의 하루는 투자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류별 손전등을 구해 최소 2종류 이상을 차량에 두고 다니게 되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어둠이 두려운거냐고 묻는다. 하루키가 답했다. 암흑 속에서는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힘드니까요.

11. 안경

어느 날에는 인상을 바꾸기 위해 안경을 써야할 일이 있었다. 당연히 도수는 없어서 아토 하루키의 시야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그걸 쓰고 며칠인가 지내던 아토 하루키는 문득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안경을 쓴 자신의 모습에 어느 개조의 모습이 살짝 겹쳐지다 사라졌다.

12. 도넛

불합리하지 않나요? 도넛에는 실제로 구멍이 없는데 구멍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된다니 말이에요. 인간의 인식은 그만큼 불완전하고 의존적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 불합리함까지 포함해서 인간인거야. 당신이 그런 이성적인 얘기를 하다니 이상하네요. 강습료는 도넛 더즌 3세트. 이봐요.

13. 색깔

그러고보면 그거 아시나요. 질투는 녹색 눈의 괴물이다. 분명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었지. 그래서 녹색은 질투나 독의 색으로 대표된다고 들었어. 조심하시는게 좋을걸요~ 동생이 질투의 괴물일지도 모른다구요~ 뭐야. 이제와서 그런 말 해도 안 믿겨. 게다가 질투라면 내가 우위라고.

14. 기도

있잖아. 역시 신은 없는게 아닐까. 왜 그런 말을 함까? 세상 일을 만드는 것은 결국 인간이니까. 인간이 기도하는건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거기에 신의 자리는 없다고 생각해. 단지 자리가 없을 뿐, 멀리서 관망할 뿐이라면요? 그것도 마찬가지지. 관망자는 없는 것과 같아.

"호오."

15. 바람

바람이 불면 당신을 떠올린다고 하면 무척이나 로맨틱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에게는 그 표현 이상으로 자신의 절망을 형체화할 말이 없다 당신은 바람과 같아 바람처럼 사라졌고 나는…. 나는. 간극 뒤에는 무엇도 떠올릴 수 없게 된다 모든 지나간 바람이 그러하듯이.

16. 별

하늘에서 빛나는 별은 이미 죽은 별 그 빛이 우리의 눈에 닿아 아름답게 빛날 무렵에는 이미 죽어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별은 빛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죽어서 사라져버린 잔상에 불과할까

"나는 그래서 너를 길잡이별로 생각했어. 테오도르."

17. 식물

비가 내린 뒤 사무소 앞 화단에 팬지꽃이 피었다 하루키는 그걸 보고는 다들 건강하네. 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어느 팬지는 기운을 잃어 시들시들했고 하루키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 꽃잎을 매만졌다 며칠 뒤 시들하던 꽃은 건강해지고 하루키는 화사한 얼굴로 꽃잎을 만진다

어떤 신처럼

18. 구원

쟈부치는 우리가 구원의 방주가 될 거라고 했지. 그거 진심으로 믿어? …아, 응. 그래. 그렇게 열심히 말할 거 없어. 당연하지. 우리에게는 실제로 힘이 있고, 하츠토리님이 있고, 지고천 연구소라는 형태도 있어. 우츠기? 그래 뭐, 우츠기도 있고. 근데 말야…. 그 다음엔 뭐가 있을까?

19. 지고세포

학생이 다쳤다. 니나는 아이를 양호실로 보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연구소에서 발휘했던 힘이 생각난 것은 그때였다. 그 힘은 아직 나에게 남아있을까. 그게 있다면 나는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지킬 수 있을까. 니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세포는 구원이 아니다.

20. 크리쳐

지고세포 투여에 실패한 크리쳐들을 처분하고 처분할 때마다 우츠기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 잡일을 하기에 그는 아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따금 그는 생각한다. 자신은 사실 지능이 있고 형태가 온전할 뿐인 크리쳐가 아닐까?

21. 코코아

평온한 날에는 코코아를 탈 여유가 있었다 데운 우유와 코코아 가루와 길쭉한 티스푼 코코아를 천천히 녹일 때마다 우츠기는 자신이 맛보지 못한 어떤 안온한 온기가 제 안에도 머무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이 온기는 언젠가 사라질까 사라지게 될까 사라진다면 제발 좀 더 오래 있어주기를

22.

나는 인간이야.

23. 호스트

쟈부치 요우가 처음으로 호스트의 힘을 각성한 날 우츠기 대주교가 찾아왔다 그는 새로운 호스트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다 물었다 개조님이 당신에게 어떤 힘을 주었지요? 그 말을 들은 쟈부치가 손끝에서 불을 피워올린다 우츠기의 표정에 그림자가 스쳤다

24. 편지

어버이날은 지옥이다. 하라다 미노루에게는 특히 그랬는데 써봤자 그걸 읽을 사람도 없거니와 무슨 내용을 써야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나는 당신들을 원망해야 하나요 용서해야 하나요 사실 나는 그저 당신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 말을 전부 담아낼 편지지가 없다

25. 일기

아토 하루키가 일기를 쓴 것은 중학교 무렵의 일인데 온통 루이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서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십 여년이 지난 뒤 하루키가 다시 일기장을 펼친다 잠시 머뭇거리던 펜 끝이 이내 문장 하나를 완성한다 '오늘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다'

26. 지하

여기서는 왼쪽으로 꺾어들어가야지. 아토 하루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노라면 카노가 뒤에서 신기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아소 짱 여기서 지낸 적 있어? 묘하게 길을 잘 찾네. 하루키는 되도록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하며 대답한다 전 이래보여도 길을 잘 찾거든요.

27. 지상

마침내 바깥으로 빠져나왔을 때 아토 하루키는 진한 흙냄새와 콘크리트 냄새와 살았다는 실감과 무언가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상실감을 느낀다 아아 나는 이제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거야…. 따라서 그에게 미래가 남는다 일방향의 시간선

28. 플래그

아소 짱, 플래그라는 거 알아? 이이상 당신의 이상한 지식을 밀어넣지 말아주세요. 하루키의 쌀쌀한 반응에도 카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건 말야, 어떤 행동에 의해 미래의 결과가 정해진다는 미신이야! 미신인가요. 그래, 그러니까.

후회 없도록 잘해봐?

29. 라이터

라이터라는 건 마찰을 일으켜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다. 니나는 며칠동안 그 라이터 키는 방법을 몇 번이고 연습했다 굳이 스위치를 보지 않고도 불을 킬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을 들은 요우가 웃는다 니나, 영화라도 찍으려는 거야? 그리고 먼 미래 니나는 다시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30. 앨범

아토 하루키에게는 12살 이전의 사진이 없다 아토 토모코는 그 사실을 이삿짐 센터의 실수라고 답했고 하루키는 그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날 아토 하루키는 사네미츠에게서 옛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가 나에게도 그런 사진이 있었구나

31. 배신

하루키는 먼 하늘을 본다 세상을 멸망시켜도 하늘은 여전히 노을빛으로 저물고 달이 뜨고 별이 떠오른다 이건 나에 대한 배신이야 어떻게 이 무수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세상의 거대한 틀은 여전히 그대로일 수 있어? 천사가 그 생각에 답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32. 약속

봄 바다를 보러갈까. 오토와 루이와 아토 하루키의 약속은 때로 즉흥적이고 따라서 예상치 못한 변수도 함께 했다. 날씨가 눈치가 없네. 휴가를 내고 바다를 보러 간 어느날에 비가 내리자 하루키가 투덜거린다. 루이는 옆에서 우산을 받쳐든 채 말한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않나.

33. 친구

아토 하루키는 신제품 도넛을 들고 가게를 나오며 생각한다. 하여간 이쪽이고 저쪽이고 막무가내인 건 똑같단 말이지. 그렇게 투덜대며 루이가 보증을 서준 집에 돌아와 방 한구석의 저주에게 공양을 올린 하루키는 햇살 따뜻한 거실에 앉아있다가 문득 중얼거린다. 그래도 나쁘진 않네.

34. 화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데 그럼 하츠토리 하지메의 포도가 화분이 오리진이 된 것도 필연이었을까. 아토 하루키는 과육 화분의 흙이 얼마나 말랐는지 짚어보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이내 피식 웃는다. 그게 진실이라면 지금쯤 그가 키우는 화분들은 불멸의 정원이다.

35. 비젼

하루키는 그 지고천 연구소에서 많은 비젼을 보았고 그들에게서 많은 말을 접했다. 그들이 누군지는 일일이 알 수 없었으나 어떤 것은 그를 저주했고 어떤 것은 그를 축복했다. 아마도 그 전부가, 그렇게 인식되는 형체 자체가 "나"라는 거겠지. 홍차 한 잔에 상념이 설탕처럼 녹았다.

36. 이름

다른 이름으로 자랐다면 어땠을까? 하루키의 말에 루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뭐, 그렇게 말하면 생각은 안 나지만. 하루키가 밍밍하게 굴자 바라보던 루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한다. 아토 유키미츠는 어때. 누군데 그건. 나도 모른다. 실없는 대화였다.

37. 인자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이 세상은 인자간의 인력으로 돌아가고 하루키라는 이름은 그에게 귀속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숙명처럼

38. 반지

무언가 형태를 남기는 것이 좋았을까. 노아는 막연히 생각할 때가 있다. 차라리 편지보다는 부모 두 사람의 결혼반지를 자신이 가지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때는 두 사람을 잇는 증거를 빼앗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그것이 정답이었다 믿기로 한다. 기실 인생에 정답은 없는데도.

39. 침식률

그래서 생화를 만졌다니 나아졌어. 그렇게 말하면 눈 앞의 의동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당신 대체 얼마나 식물계 인간인검까. 그치만 레이지도 그런 대비는 했을 거 아냐. 되물으면 동생은 어깨를 으쓱인다. 저는 사네미츠 씨에게서 받은 이름으로 충분했거든요.

40. 선혈

인간의 피는 금방 검어진다. 그러니까 옷에 묻은 선혈은 실상 크리쳐의 검은 체액과 닮은 셈이다. 카노 아오구는 잠시 생각하다 픽 웃는다. 아니, 인간은 인간. 크리쳐는 크리쳐. 두 개를 혼동할 순 없지. 그 순간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난다. 짧은 평온이 깨졌다.

41. 비밀

그러고보면 하루키는 하츠토리님에게서 이름을 받았다면서? 나도 하츠토리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노아의 투정에 라이가 웃는다. 그래? 그럼 어떤 이름을 받는 편이 좋았어? 그렇게 물으면 아이는 몹시도 고민하다가 계책을 생각해낸 듯 웃는다. 비밀이야!

42. 레코드

레이지네에는 레코드는 없더라. 하루키가 지나가듯 던진 말에 레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는 음악 전반을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서. 흐음, 그러면 다음 생일 선물에 레코드는 빼야겠네. 그 말에 레이지의 고개가 빙글 돌아간다. 하루키는 고집스럽게도 그걸 마주보지 않았다.

43. 실험

그래서 제가 사네미츠 씨를 데리고 실험한 결과, 레이지는 대략 500미터 내에 있는 사네미츠 반응을 곧바로 캐치하는 것으로 판별났습니다. 츠바이크의 안내는 간결하고 세오도아는 더없이 질린 표정을 짓는다. 그거 너무 비인도적이지 않아? 인도적 양육을 위한 실험입니다.

44. 천사

천사가 정말 존재할까요? 아까 장보러 간 길에는 보이지 않던데. 레이지의 질문은 추상적이고 하루키의 대답은 다른 의미로 초현실적이다. 그걸 의식하고 있는지 뒤에 또 다른 말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쪽도 그쪽대로 고생중이겠지.

45. 음악

사실 나 음악이 쥐약이었어. 느닷없이 나온 화제에 시나노와 레이지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중학교 처음 들어가서는 스승의 은혜 노래도 가사도 몰라서 헤맸다니까. 그거 때문에 왕따당했는지도 모르겠어. 시나노가 묻는다. 소장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나요? 답. 그땐 모르는 사이였어.

46. 총

현대 화기의 마스코트. 밀리터리 분야의 필수품. 방아쇠와 탄약과 매캐한 화약연기의 아이돌. 아무렴 하루키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인데 가끔 손에 그게 와닿는다. 하루키는 한숨을 내쉬고는 총을 쥐어 목표를 겨누었다. 서늘하고 창백한 손길이 각도를 조정한다. 저승으로부터의 조율.

47. 카레

고기 당근 양파 감자를 썰어서 프라이팬에서 볶은 다음 카레 가루를 넣고 약간의 물을 부어 자글자글. 그런 가정적인 리듬이 하루키의 부엌에 퍼져나간다. 완성된 식사를 식탁에 올리면 따스한 기운이 모락모락. 이 모습을 볼 때마다 하루키는 묘한 서늘함이 목을 스치는 감각을 느낀다 ?

48. 귀걸이

귀걸이라도 해볼까. 루이는 하루키의 둥근 귀를 바라보며 방금의 단어를 되새김질한다. 귀걸이라. 심경의 변화라도 있나? 그런건 없지만~ 헤매던 말이 착륙한다. 우정 페어링이라는거 재밌을 것 같잖아. 그래서 결국 몇 년 후 오토와 소장님의 귓불에는 구멍을 뚫은 자국이 남는다.

49. 담배

몇 십 여년간 금기처럼 여기던 물건이라. 피울 수 있을까. 근데 이게 또 수월하게 피워지는 탓에 하루키는 속으로 놀라고만다. 나이스 지고세포. 너의 백업을 잊지 않을게.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서 오토와 루이의 발인시간이 된다. 하루키는 먼 연기를 보며 생각한다. 허탈해.

50. 유언

죽는 사람들이 산 사람에 남겨줄 수 있는 건 유언정도일거야. 아니, 반대인가. 산 사람이 받아들 수 있는 죽은 사람의 흔적이 유언뿐인거지. 그래서 아토 하루키는 사람들의 유언을 신중히 채집하여 제 심장에 수납한다. 맥동과 함께 유언이 숨을 몰아쉰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심장이 무거워진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추가태그
#50제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