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X하루]#매일매일_800자_챌린지(4)
이소이 레이지X아토 하루키
※2023.06.02~2023.06.15까지 작성한 레이X하루 연성 10편입니다.
!!세포신곡 본편델씨은자막간 스포일러 주의!!
01.
손톱이
자랐던가?
아토 하루키가 문득 상념에 잠겼을 때는 주말 오후였고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레이지가 손님방에서 짐을 풀고 있을 때였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손톱깎이를 빌릴 수 있겠냐는 물음에 거실을 찾아보던 손길이 멈춘다. 아니, 애초에 마지막으로 손톱을 자른게 언제였더라? 아토 하루키의 내부 어딘가에서 한기를 머금은 이끼가 자라난다. 손톱, 발톱, 머리카락, 일상적으로 자라나 제거되는 인간 생장의 증거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오리진은 그런 것조차 불필요한
"하루키 형."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아토 하루키는 콤마 몇 초의 판단으로 자신이 시간을 너무 지체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레이지가 자신의 이상함을 감지했으리라는 것도. 뒤늦게 눈동자를 굴려보면 손톱깎이는 자신의 손이 있는 곳과는 완전히 반대방향에 놓여있다. 그걸 레이지의 손가락이 집어갔다.
"무슨 일 있어요?"
나의 죽음이
"…아니, 별 건 아냐."
박탈되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했어
"정말로요?"
"……."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내가 박제되어가는게 아닌가 하는 감각
"형."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이소이 레이지의 눈동자는 다정한 녹색이고 아토 하루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질투는 녹색 눈을 가진 괴물이라고 한 셰익스피어는 색깔을 어쩜 이리 잘못 골라잡았는지.
결국 아토 하루키는 이소이 레이지가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그 이야기를 들은 레이지가 하루키의 손끝을 살폈다. 가지런하고 하얀 손가락. 손끝의 손톱은 매끈하고 갈라짐 하나 없다. 이게 자라지 않는다는 건가요? 레이지가 확인 차 되물으면 아토 하루키의 목소리가 다소 자신감을 잃는다. 아마도….
"아마도는 뭔가요."
"갑자기 든 생각이라 그래."
레이지는 한쪽 눈썹만 까딱 올린 채로 바라보다가, 하루키의 양손을 제 손에 모아쥐고는 마치 기도를 하듯이 이마를 가져다댄다. 레이지? 뭘 하려는 거야? 목소리가 건너간다. 레이지가 그 흐름에 응하여 입을 연다.
"저는 형이랑 같이 살아가고 싶으니까, 선처해주세요."
"……."
"인간으로서, 저와 살아가 주세요."
"레이지, 너,"
미인계는 반칙아냐?
얼토당토 않은 말에 레이지가 의혹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며칠 뒤, 하루키는 눈에 띄게 자른 손톱을 잘랐다.
02.
비가 오는 날에는 어쩐지 좀 기분이 센티멘탈해지는 경향이 있지. 아토 하루키는 자신이 겪어온 여러가지 일의 특성은 제쳐두고 일반적인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으로 판단한다. 사유, 원체 그런 비유가 미디어에서 많이 나와야지. 공연히 돌려보던 채널이 멈춘다. 비 내리는 밤바다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서로를 얼싸안는 장면이었다. 그 얼굴에 잘 알고있는 누군가를 덧씌울 정도의 뻔뻔함은 없다. 아토 하루키는 가벼운 손짓만으로 TV를 껐다.
솔직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초조한 기분이기는 했다. 물론 아토 하루키는 타고난 인간관찰자이자 탐정이므로 몇 가지의 근거는 마련되어 있었다. 하나, 비가 오면 공기가 공연히 무겁게 느껴진다. 둘, 최근에 업무를 수행하면서 별다른 사건이 없어 약간의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셋, 최근에 레이지랑 별로 통화를 못했다….
고작해야 일주일 정도 통화 못한 걸로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젠장, 반복하건데 아토 하루키는 인간관찰이 특기이고 그건 자기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그가 느끼는 불만이나 불안 등은 한 치의 여분 없는 명확한 언어로 깎여나간다.
보고 싶어.
듣고 싶어.
만나고 싶어.
20대냐! 속으로 태클을 걸어봐도 그런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비까지 주룩주룩 내린다. 이 비구름 너머에 사랑하는 님은 내 생각을 하실까…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직도 임무가 안 끝난건가, 하고 살짝 원망하게 되는 것도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다. 레이지에게 아무런 잘못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나마 메일이나 부재중 통화 이력을 남기지 않은 것은 최대한의 자제심을 펼친 결과다.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너무 어리광을 부리면 안되지. 어쩌고 저쩌고. 그리하여 이전에 레이지가 말한대로 일주일쯤, 임무가 끝날 듯한 무렵에 괜시리 핸드폰을 들었다놨다하는 아토 하루키가 완성된다. 걸작이었다.
결국 아토 하루키는 어린 왕자의 여우가 된다. (일전에 레이지에게서 여우로 비유된 것을 기억하면 고약한 운명이었다) 네가 네 시에 전화를 건다면 난 오전 10시부터 두근거리겠지…. 그런데 레이지가 몇 시에 전화를 걸지도 알 수 없다. 생지옥이었다.
그대로, 어쩌면 천 년의 시간은 지난 것 같은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사실은 5분 정도만 지났을 뿐이지만) 핸드폰 화면에 누군가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토 하루키의 우울이 날아갔다.
03.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어본 적 있어? 그런 이야기가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기에 아토 하루키는 별 부담없이 입을 연다. 어둑어둑한 하늘, 도로를 달리는 차량, 타일 깔린 인도. 옆에서 같이 걸어가는 이소이 레이지. 딱히 화제를 가릴 만한 구성도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찾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슴다."
"귀엽네."
"결국 못 찾았지만요."
"무슨 소원 빌려고 했는데?"
"…들어도 화 안내신다고 하면 말할게요."
"화났어."
"듣지도 않고."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인도를 쓸고 지나간다. 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묵묵히 길을 걷던 하루키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민달팽이 관련 사안이지?"
"과연 명탐정."
"심각하게 추리하지 않아도 나오거든."
"쑥스럽네요."
칭찬 아냐. 아토 하루키가 팔꿈치로 툭 치면 이소이 레이지가 과도한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린다. 명백히 의도된 동작이었다.
"이번에는 찾으면 뭐라고 빌 건데?"
"아버지랑 형이 더 사이좋게 지내게 해주세요."
"안돼."
"즉결반려."
둘이서 가볍게 산책을 나온 길이었기에 횡단보도 즈음에서 방향이 바뀐다. 아토 하루키는 아까 자신의 왼편에 있던 버스정류장이 오른편으로 바뀌는 걸 보면서 입을 열었다.
"농담이야. 레이지의 소원은 레이지의 거니까, 어떻게 쓰던 레이지의 마음이지."
"정말요?"
"응, 정말로."
비가 한 차례 내리고 난 이후라서 신발 아래에서는 자박자박 소리가 난다. 그대로 얼마쯤 걸어가다보면 이소이 레이지가 살짝 망설이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비는 건 아님다."
"이유가 있다는 거야?"
"네."
밤은 맑고, 공기는 조용하고, 바람은 적당히 시원한 날에.
"형이랑은 뭐든지 직접 해결하고 싶으니까요."
바로 옆에 있는 연인은 조금 수줍은 얼굴로 말하고.
"별 같은거에 빌지 않고, 제대로 제 힘으로 하고 싶슴다."
아토 하루키는 이래서 이소이 레이지를 이길 수 없다고 탄식했다.
04.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아토 하루키가 사네미츠와 레이지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저녁이었다. 아버지에게 괜한 불똥이 튀지 않게 미리 인근 호텔로 피난을 보낸 레이지의 목으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얼핏 들으면 억양이 높지 않지만, 그 안에 압축되어있는 감정은 장인이 한계까지 벼리고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다. 진심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죽을지도 몰랐다.
"네, 결과적으로 이렇게 멀쩡하잖슴까."
"나는 결과론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잿빛 코트를 벗고 갈색 머플러를 벗는 아토 하루키의 손길이 침착하다. 손님들을 위한 코트걸이에 약간의 무채색이 덧발려졌다. 레이지는 저도 모르게 그걸 도우려다가, 장갑을 벗기 시작한 아토 하루키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오른팔이 복합골절에, 복부에 관통상이랬나? 화려하네, 레이지."
"저기, 형."
아토 하루키가 팔짱을 낀 채 레이지를 바라본다. 일단 할 말이 있으면 마음껏 해보라는 제스쳐였다. 그리고 끝나고나면 너를 차근차근 추궁할테니까. 그런 미소가 얼굴에 완연했다. 이소이 레이지의 머리 속에서 경계경보의 붉은 램프가 켜졌다.
"저 정말로 안 아팠으니까요. 아주 잠깐이었던데다가, 이렇게 멀쩡해졌고."
"그랬구나. 몰랐네. 이번에 잘 알게 됐어."
빨간 램프가 또 켜진다. 이번에 세 번째 경보등를 키게 되면 형은 당장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두르고 공항에서 밤을 세워서라도 당일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다. 거의 반 년만의 이탈리아 방문인데. 결국 레이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필연이다.
"죄송해요. 걱정끼쳤죠."
"엄청 많이. 산더미만큼 끼쳤어."
장갑을 탁, 내려놓은 아토 하루키가 다가와, 이소이 레이지의 바로 앞에 선다. 180cm의 키에 감겨있는 겨울 공기는 살짝 서늘하고 어째서인지 밤바람을 떠올리게 했다. 그 손이 뻗어올라와서, 사정없이 볼을 꼬집었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해홍해여."
"……."
아토 하루키의 손이 떨어져나간다. 이 사람이 이렇게 분노를 외부로 방출한다는 것은 그 내부에서 이것저것 정리된 논리회로가 냉각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는 뜻이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살짝 양팔을 벌리면 미간을 찌푸린 아토 하루키가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왔다. 한기와 온기가 뒤섞인, 이상한 감각.
"다음에 또 그러면 용서안해."
"노력할게요."
여기선 네, 라고 대답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자세 그대로, 레이지는 목덜미를 꼬집혔다.
05.
악기라도 배워볼까.
배워보시려구요? 그거 좋죠.
아토 하루키가 별 생각없이 꺼낸 말에 이소이 레이지가 필요 이상으로 크게 반색한다. 30년 남짓 살아온 인생의 가벼운 여흥거리쯤을 생각하고 입을 열었던 아토 하루키가 그 반응에 경계심을 표출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무슨 꿍꿍이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옛날부터 로망이 있었거든요.
어떤 거?
피아노 듀엣 연주.
얼씨구.
하지만 좋지 않나요, 피아노 듀엣 연주? 이소이 레이지는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물어보고 아토 하루키는 약간의 자숙 타임을 가졌다가 대답한다. 나쁘지 않긴 하지만, 레이지는 피아노 칠 줄 알아? 그러면 레이지가 겸연쩍게 대답한다. 배우고 싶긴 한데, 못 배웠어요.
피아노라는건 기본적으로 사치품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배우겠다는 말씀도 못 드린거예요. 이소이 레이지가 서둘러 변명을 말하고 상대를 심판하려는 얼굴로 사네미츠에게 전화를 걸려던 아토 하루키가 가까스로 진정한다. (하마터면 일본에서 이탈리아로 폭탄을 전달받을 뻔한 사네미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럼, 둘이서 같이 배울까? 그런데 우리 집에는 피아노 없는데. 너희 집에도 없지? 그럼 어디서 연주하지?
하루키의 질문에 레이지가 눈을 깜빡인다.
어라, 그러게요.
그러게요, 가 아니잖아.
플랜 변경하겠슴다.
거기서 그 말을?
그래서 아토 하루키와 이소이 레이지는 통기타를 배우기로 한다. 그리 부피가 크지도 않고, 크게 비싸지도 않고, 배우기에 까다롭지 않은 것으로. 물론 기초적인 코드를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건 나라별로 악기를 연주하는 법이 다르다는 법은 없으니 두 사람의 연주가 어긋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저 한 가지 큰 실수를 했어요.
뭔데?
통기타는 연인에게 불러주는게 가장 낭만적인데 말이에요.
뭐 어때, 서로에게 불러주면 되잖아.
아토 하루키가 익숙하게 G코드를 잡는다. 이소이 레이지도 어깨만 으쓱이고는 현을 튕겼다.
두 사람의 합주가 시작되었다.
06.
형은 역시 너무 적게 먹지 않나. 모처럼 임무도 없어 한가한 시간, 가벼운 시간 떼우기라도 할 겸 책을 보고있던 레이지의 머리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난 김에 전화라도 해볼까 싶어 전화기를 들어보면… 이크, 한창 잠들어있을 시간이다. 바다를 끼고 멀리 떨어져있는 나라에 연인이 있다는 건 이런 점에서 곤란하다. 별 수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이미 날아가버린 집중력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골백번 읽었을 즈음에야 책을 내려놓는다. 나중에 하루키 씨랑 통화하게 되면 이거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아니면 매일매일 식단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한다던가. 일전에 한 번 생각했다가 아무래도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서 보류했던 안건이 떠오른다. 그치만 그 사람, 휴일 점심 메뉴를 물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전날 저녁을 이야기하니까 곤란하단 말이지.
원래부터 입이 짧았다는건 들어서 알고있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 짧음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를테면 아침에 우유 한 잔만 마시는 정도라면 레이지도 개인의 입장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저녁을 계란찜과 밥, 채소절임에 된장국으로만 넘겼으면서 아침을 굶고 점심도 먹지 않았다고 하면 아무리 레이지라도 조금은 힘줄이 꿈틀거리게 마련이다.
좋아, 그럼 다음에 일본 갈 때는 무조건 전통식당으로 가자고 우겨서 넓은 요리들을 전부 한 입씩 먹여줄까. 입이 짧다면 고급 음식들을 한 점씩 먹여드리지요.
바다 건너에서 레이지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일본의 아토 하루키가 잠을 자다 말고 몸을 부르르 떤다. 오리진이 가진 위기감지 능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07.
이를테면 텔레파시가 가능하다면 좋을텐데요.
두 사람이 휴가를 낸 날이었고 어디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쓸만한 자리도 아니었기에 이소이 레이지는 보란 듯이 하루키의 몸에 제 몸을 포개고 있었다. 보통 이런 어리광을 정중히 사양해야할 아토 하루키는 요 근래 전혀 만날 수 없었던 현실에 반기라도 들듯이 해당 업무를 완전히 방기했다. 그야 반년은 족히 못 만났는걸. 이 정도는 해줘야지. 따라서 두 사람은 압착된듯이 딱 달라붙게 되고 자연스레 나오는 말투가 나른해졌다.
텔레파시?
네, 그게 있다면 시간과 상관없이 곧장 통신할 수 있는 걸로.
그거 괜찮네. 이를 테면 4일 오후 2시에 곧장 이야기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요.
일본과 이탈리아라는 어마어마한 물리적 거리를 품은 장거리 연애이기에 서로에게 전화 한 통을 하려고 할 때조차 일일이 시차를 계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커플이 영 이뤄지기 어려운 몽상 이야기를 나눈다. 다만 그들이 지고세포의 순응자이자 오리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렇게까지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굳은 의지로 한 번 시도해볼래?
그럴까요?
그래서 그들은 텔레파시를 시도한다.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해서, 상대에게서 날아오는 무형의 의지(같은 것)을 어떻게든 캐치해보기로 했다.
따라서 텔레파시가 통한다. 지금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 상대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안정감 같은 것들이 전달된 것이다. 아니, 이런 건 굳이 텔레파시로 전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아? 아토 하루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으면 이소이 레이지가 마찬가지로 키득키득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만 이게 전하고 싶은 마음걸요.
입맞춤이 스친다. 하루키는 이 귀여운 텔레파시(유사)를 기꺼이 받아주기로 했다.
08.
"그러고보면 형은 녹차는 별로인가요?"
"녹차라… 싫어하진 않는데."
아토 하루키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내던져버릴 수도 없는 보고서 작성을 위한 자료들이 책상 여기저기에 잔뜩 흐트러져있었다. 일이 도저히 안되니까 옆에서 적당한 잡담이라도 해줘. 그렇게 요청하며 건 전화 너머의 상대는 자신이 살아있는 ASMR이냐며 어이없어한 것 치고는 꽤 역할을 잘 수행해주고 있었다.
"그건 할머니의 영역이라는 느낌이었거든."
"아하, 상호불가침의 취미였다?"
"그렇다고 할까, 할머니가 가끔 맛보여주는 녹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듣는게 낙이었으니까."
살짝 열어두어서 바람이 통하는 베란다. 폭신폭신하게 잘 말려진 방석. 따뜻하게 잘 우러낸 녹차와 할머니가 어디선가 얻어온 것이라며 하나 둘 씩 꺼내 내밀어주시던 작은 다과들. 멀리서 들리는 일상의 소음.
그 풍경을 떠올리면 입 안에서 녹차의 맛이 천천히 되살아난다. 그럼에도 자신이 녹차가 아닌 홍차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루키는 자료를 뒤지던 손을 잠시 멈췄다가 마침내 떠올렸다.
"생각났다."
"뭐가요?"
"예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녹차를 마시려했던 적이 있어."
그런데 그 녹차에서는 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창문은 열려있고, 방석은 폭신하고, 차는 정말로 잘 우러났고, 창 밖에서는 평온한 소리가 울려퍼지는데.
"…그랬더니 뭔가, 좀 무서워져서."
"그런가요. 그럼 다음엔 저랑 같이 먹어봐요."
"내 얘기 들었어?"
"들었어요."
그러니까, 형이랑 같이 마시고 싶은 거에요. 아토 하루키는 나이가 벌써 서른을 넘겼기에 그 말에 담긴 위로의 뜻을 어렵잖게 눈치챈다. 창문은 닫혀있고 사방은 조용하고 의자는 푹신한 자신의 방에서.
"그럼 얼른 만나야겠네."
"말 나온 김에 일정 잡을까요?"
성질도 급하긴. 하루키는 작게 웃었다.
아직 정해지지도 않는 그 날이 아주 기대되는 것처럼.
09.
만약에 제가 형을 깨끗하게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당히 당돌한 질문이네, 레이지.
으레 농담이려니 생각하고 가볍게 되받아친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의아한 기분에 자세를 고쳐앉은 하루키는 반대편에 앉은 레이지의 심각한 안색을 발견했다. 왜 그래,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그제사 이상함을 느끼고 상대가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을 들여다보면.
『내가 당신을 잊더라도』
소설이나 만화책을 보고 상황을 대입해보는건 좋지만 너무 심각한거 아냐? 하루키의 어이없는 질문에 레이지가 가볍게 어깨를 움츠린다. 하지만 말이죠, 지고세포는 만능이긴 하지만 인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루키는 연인의 작은 고민에 기꺼이 어울려주기로 하고 일단 자세를 고쳐앉았다.
보통 이럴 때에는 기억을 잊더라도 다시 반할 거라고 하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형은 너무 미인이라서 대쉬하기 어려울지도.
내가 고백하면 되잖아.
네? 형이요? 저한테요? 농담이죠?
왜 그렇게 정색하는 건데?
그야, 형은 저보다 훨씬 감정 숨기기에 능하잖아요. 만약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저한테 먼저 고백하는 일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고백하는 데에도 그렇게 시간이 걸렸잖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방대한 분량의 답변이 논리적으로 돌아온다. 아토 하루키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긴 한숨을 내쉬고, 천장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바보같은 연인의 입을 쭈우욱 늘렸다.
그걸 그렇게까지 부정하냐고 보통!
하히한효.
괜찮아! 나는 레이지가 좋고 레이지도 어차피 날 좋아하게 될 거니까!!
엄청난 자신감.
여기선 이렇게 밀어붙여야 한답니다, 바보 레이지 씨.
가볍게 콧등을 때린다. 기습을 받고 얼굴을 찌푸렸던 레이지가 이내 특유의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뭐, 좋아요. 그럼 형이 그 정도로 저를 좋아한다는 걸로.
여기선 마땅히 나에게 돌아와야 할 말이 있을텐데?
크케켓.
다 알고 있는 주제에 레이지가 모르는 척 책으로 얼굴을 덮는다. 하루키는 한쪽 입꼬리만 들어올려 웃고는, 교활하게 머리를 굴린 제 애인에게로 다가갔다.
10.
아토 하루키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신발 끈을 풀 사이도 없이 현관에 엎어지다시피한 몸뚱아리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 젠장. 여기서 잠들면 내일 아침에 몸이 엄청 배길텐데. 그치만 몸이 안 움직여. 죽겠다. 간단한 미행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경찰서에서 취조까지 받게 될 줄이야….
범인이 아니라 목격자 신분이었던 탓에 경찰차로 정중하게 바래다지긴 했지만 아무튼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어떻게든 팔로 상체를 짚어 일으켜세운 뒤 신발을 벗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고 옷갈아입기고 간에 침실로 직행한 하루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짜가 하루 넘게 바뀌어있는 상태였다. 단순 계산으로 12시간은 잠들어있었던 건가. 뻣뻣한 눈동자를 깜빡이다가 화면 아래에 떠올라 있는 부재중 통화 알림을 확인해보면….
[이소이 레이지 12건]
음~ 완전히 망했네. 아토 하루키는 은은하게 사태가 꼬이는 걸 느끼며 일단 화면의 잠금을 해제했다. 잠금 상태에서는 표시되지 않는 알람이 메신저며 문자, 메일 어플의 끄트머리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아, 이거 완전히 걱정하게 해버린 패턴이네. 사태가 너무 심각해져서 도리어 여유로워진 머리가 그런 반응을 도출했다.
이대로 기다리게 하는 것도 어쩐지 미안해서 곧바로 전화를 걸어본다. 이탈리아에서라면 지금이 새벽 언저리일거라는 데 생각이 다다른 건 연결음이 한참 이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어쩌지, 일단 끊고 메일로 연락할까. 그렇게 생각할 즈음에.
"하루키 형!"
단숨에 전화가 걸린다. 하루키는 일단 그 목소리를 진정시켜주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지, 목소리가 너무 험악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노라면 전화기 너머에서 레이지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건데요. 괜찮은거 맞아요?"
"응. 괜찮아. 걱정끼쳐서 미안. 좀 피곤했거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슴다."
"미안."
어쩔 수 없이 또 웃음이 샌다. 그걸 듣고 안심했는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아, 나는 정말로 사랑받고있구나. 그런 생각에 입꼬리를 느슨해진 하루키가 천천히 레이지와 대화를 이어나간다.
조금은 흘려보내기 아까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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