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에게 남은 일은 미치거나 죽는 것, 혹은
가명조(카노 아오구+아토 하루키) 예술가 AU
※카노 플래그 요소 스포일러.
※전공생이 아니어서 허술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관계가 다소 날조된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카노 아오구가 은빛 독수리 예술제에서 대상을 받고 돌아온 다음 날, 동거인이자 조수인 아소 코지는 하얀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아소 짱, 뭘 하고 있어? 곧은 햇살이 오후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뒤에야 방에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온 카노의 물음에 코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간단한 구도를 그려보고 있었어요."
"연인? 요즘 유행하는 말랑말랑한 그림이네. 아소 짱이랑 안 어울려."
"단언하시네요."
"나는 천재니까."
"네, 은빛 독수리 예술제 대상 수상 축하드려요."
"그 말은 어제 잔뜩 들었어."
지겨워! 카노 아오구가 몸에 대충 두르고 있던 담요를 집어던진다. 그걸 정통으로 맞은 은빛 독수리 트로피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물건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이걸 받고 싶어서 몇 년을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구요. 아소 코지가 타박을 하며 내팽개쳐진 담요를 걷어내고 쓰러진 트로피를 똑바로 세워, 미처 들어가지 못한 장식장 안에 조심스레 밀어넣는다. 예술대를 자퇴한 카노 아오구가 지난 몇 년간 숱하게 받아온 트로피와 상패, 상장 따위가 투명한 유리 속에서 침묵했다.
"예술제에선 이례적인 만장일치 대상 수상자. 분명 인터뷰 요청이 빗발치듯 들어올걸요."
"싫어, 귀찮아, 다 잘라버려."
"다음 작품에 정진하고 있으므로 거절하고 있다고 둘러댈게요."
"아소 짱은 쓸데없이 사회적이네."
"제멋대로인 천재 예술가 씨를 서포트하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식사는 뭐가 좋아요? 일단 버섯 스프 끓여뒀는데. 코지가 그리고 있던 것을 그만드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한다. 뒤에 남겨진 카노의 시선이 아소 코지가 그린 연인의 눈동자와, 맞잡은 손과, 주변에 피어난 꽃들, 부드러운 햇살을 바라보다가.
"카노 씨, 대답 안하면 소시지 구이에 계란이랑 빵으로 할거에요."
"도넛."
"소시지 구울게요."
"도-넛-! 대상 받았잖아!"
"카노 씨가 고혈압으로 사망하면 범인으로 의심되는건 저라구요."
주목받지 못하던 삼류 예술지망생. 자신을 거둬들여준 천재 예술가에게 시기심을 품고 그를 살찌워 무참히 살해하다! 신문마다 그런 헤드라인이 앞다퉈 걸리겠죠. 코지의 말에 카노는 낄낄 웃었다.
분하게도, 소시지 구이는 훌륭했다.
*
카노 아오구가 받은 온갖 수상경력만큼 괴팍한 성정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아소 코지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전략을 바꿔 자신에게서 카노 아오구의 정보를 어떻게든 캐내려는 각종 매체들의 권유를 적당히 받아치는 것이 더 골치 아팠다. 덕분에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코지는 문득 바깥이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내일 아침에 먹을 식료품을 사둬야 하는데.
"카노 씨,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작업실을 향해 소리쳐도 대답은 없다. 아마도 "집중하는" 중일 것이다. 코지는 스케치북을 뜯어 용건을 간단히 적어두고는 지갑과 장바구니를 챙겨들고 거리로 나섰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몸을 움츠리고, 하얀 숨을 내뱉고, 귀의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몇 가지 물건을 사고 이제 돌아가자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아소 코지 씨죠?"
초면에 남의 이름을 일방적으로 부르는 자는 대체로 성가신 타입이다. 허나 아소 코지가 여기서 날쎄게 도망치기에는 양손에 든 물건이 많았다. 전부 버리는 셈 치고 내팽개친 다음 다시 사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소의 소시민적 인격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코지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상대를 보았다. 꽤 나이 든 여성이었다.
"실례지만 어디의 누구시죠?"
"계간 문화잡지 『울새』의 기자 코마도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곤란합니다. 카노 씨 인터뷰는…."
"아뇨, 저희가 취재하고 싶은건 아소 코지 씨입니다."
망할, 또 이 수법이군.
"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카노 씨에 대한 이야기도요."
"3년 전에 『잠든 뜰의 그네』를 그리셨죠?"
자리를 지나치려던 코지의 걸음이 멈춘다. 코마도리라 이름을 밝힌 기자는 선뜻 코지의 한쪽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주기까지 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당시에는 「아무런 영혼이 담겨있지 않은 물감 덧칠」이라며 혹평이 쏟아졌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 그림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에요. 그보다 더 크고 거대한 부재를 증명하는…."
"그만두세요."
"네?"
"그런 말들도,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코마도리에게서 바구니를 빼앗는다. 스쳐지나 걸어간다. 기자는 하루키의 냉담한 반응에 눈을 깜박이다가, 떠나는 이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사람 마냥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소 코지 씨! 당신은 여기서 충분히 더 평가받을 수 있는 인재입니다! 미술계의 백색귀인이라 불리는 카노 아오구에게 눌려있지 않아도 돼요! 자신의 능력을 더 펼쳐보이고 싶지 않습니까?"
"……."
걸음을 멈춘다. 몸을 돌린다. 그 표정을 본 코마도리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저를 가장 잘 아는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카노 아오구 뿐입니다"
*
"그렇게 말해주느라 늦은거야?"
아소 코지가 사온 식재료들을 관심없다는 눈으로 뒤적거리는 카노 아오구 곁에서 간단한 스튜를 만들던 코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냄비 속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보글거림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네, 그 이후로도 계속 뭐라고 말하며 쫓아와서 피곤했지만요."
"그렇구나. 그럼 뭐 잘 되어가는 모양이네."
향신료를 던져넣는 손이 멈춘다. 바질 잎사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잘 되어가고 있다뇨?"
"세상이 아소짱을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어가는 중이란 거지~."
"……."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얼굴이네."
"네."
"근데 가능해. 왜냐면 카노씨는 만능이거든."
카노가 테이블에 놓인 사과를 굴린다. 완전한 원의 형태가 아닌 것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카노 씨의 그림을 통해, 멍청이들의 꼴값잖은 미학을 어떻게든 바득바득 끌어올려서, 간~신히 봐줄 만한 수준으로 만든 다음에."
데굴, 데구륵.
"아소 코지의 작품이 눈에 들어오게 하는거지."
…….
………….
"왜 그런 번거로운…."
"번거로워?"
사과가 테이블 아래로 추락한다. 카노 아오구의 목소리톤이 가라앉았다. 불 앞에서 스튜를 데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느껴지는 온도였다. 하루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북극 얼음의 가장 깊은 곳, 천년간 응고된 덩어리를 파묻은 것 마냥 싸늘한데도,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광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착각하지 마, 아소 짱. 나는 말이지, 예술은 삶의 철학이니 자아를 닦아내는 수련이니 하는 노친네들에겐 아무 관심없어."
"하지만 거장들은 모두 카노 씨의 작품을."
"알잖아. 그치들은 뜻 깊은 미학적 가치관을 지니고 예술작품을 평가하는게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이 가져올 영향력을 따져가며 한심한 머리를 굴려. 그들이 하는 「천재」란 말은 사실상 3살 어린애의 크레용 낙서보다 가치가 없지."
"신랄하네요."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진짜 「천재」가 있어."
"……."
"학연, 지연, 혈연, 이익과 상업성!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존재가 있는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하게 외치며 아소 코지의 코 앞으로 다가온 카노가 능숙하게 스튜의 불을 껐다. 과한 열기를 받아 부글거리던 냄비의 기세가 수그러들고 대량의 증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어떤 환상처럼.
"그게 너야, 하루키."
"네?"
"카노 아오구는 천재 흉내를 내는 범재 쪼가리지만, 아토 하루키는 정진정명한 시대의 천재라는 거지."
"……말을 못 따라가겠는데요. 어디서 웃어야 하는 장난인가요?"
"괜찮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 이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긴, 원래대로라면 비운의 천재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하루키의 사후 50년에서 100년 정도는 걸렸으려나."
"………."
"하지만~ 그래, 앞으로 5년… 아니 3년만 지나면 평가는 완전히 뒤집히겠지. 너는 누구도 반론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거야!"
"……………………그럼, 그럼 당신은?"
"나?"
약간 떨리는 목소리에도 아랑곳않고 아오기 카나오가 어깨를 으쓱인다.
"나는 제 실력도 모르고 까불던, 그저 그렇고 시시한 삼류 화가로 전락하겠지."
"그런 걸… 원해요?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과시욕이 강하고 제멋대로인 당신이?"
"응. 원해, 하루키. 왜냐면 나는 네가 나를 절대 잊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거든."
양볼을 잡힌다. 시선과 시선이 얽힌다. 하루키는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기분으로 새파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귀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가 앞으로 이어질 미래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시시한 미술계 놈들에게 천재니 만재니 이름을 남겨봤자, 새로운 신예의 영광에 덧칠되어 금방 사라질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한 사람에게 남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어?"
"카나오 씨……."
"나는 지금 아소 코지라는 이름의 천재를 만들어내고 있어."
"당신 설마…."
"이건 내 생애 최고의 작업이야!"
"……죽을 생각이야?"
얇은 침묵.
"이 계획이 성공하면, 예술가 카노 아오구는 영원히 죽겠지."
"아오기 카나오는?"
"내가 자기 일 앞가림도 못하는 것처럼 보여? 걱정 마, 언젠가…."
"언젠가?"
"천재 아소 코지를, 영광의 최고 자리에서 더 빛나게 해줄테니까."
"………."
그 말의 의미를, 아토 하루키가 곱씹는다. 아오기 카나오는 천천히 상대의 얼굴을 잡고있던 손을 떼어냈다.
"부디, 기대하도록 해."
"아프게는 안 할거죠?"
"당연한 말을."
배고파, 이제 밥 먹자! 카노 아오구가 경쾌하게 외치며 식탁에 앉는다. 아소 코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그릇에 스튜를 담았다.
달그락.
*
3년 뒤, 아소 코지는 시대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보석같은 천재로 불리며 각광받았다.
반면 카노 아오구라는 이름은 대중성과 상업성에 편승했을 뿐인 시시한 예술가로 빠르게 추락했다.
5년 뒤, 예술가의 긍지이자 명예라고 불리는 금빛 올리브 예술제 대상 수상자로 기대되던 아소 코지의 작업실에서 화재가 발생. 아소 씨는 중태로 발견되어 빠르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방화의 범인으로는 (비록 아소 코지가 부인하였지만) 과거 그와 악연이 있었던 카노 아오구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다 할 증거는 수집되지 못했고, 같은 시기 일어난 흉악 살인사건에 수사력이 이동되면서 천재 예술가 작업실 방화 사건은 유야무야 마무리 되었다.
더불어 아소 코지가 금빛 올리브 예술제를 위해 만들었던 작품은 이 사건으로 흔적도 없이 모두 불타버렸고, 화가 본인이 복원의 의지를 보이지 않음으로서 완전한 미지의 역작으로 남겨졌다. 이후 아소 코지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들어 공식적으로 예술계를 은퇴했지만, "아직 방점이 찍히지 않은 천재"의 명성을 유지하며 이후에도 적지 않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그리하여,
아소 코지의 마지막 작품을 아는 이는 없다.
아주 먼 곳에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마음대로 도넛을 집어먹으며 벽 한 켠의 액자틀을 바라보는 이를 제외하고는.
"시시해. 시시해. 정말이지 너무 시시한 구도잖아, 하루키."
그림 속의 두 사람이 웃고 있다.
엉망으로 늘어진 작업실 속에서, 아무렇게나 기대 앉은 모습으로.
"진짜 머릿 속이 꽃밭인거 아냐? 어이가 없어서. 내가 아니었으면 당장에 탈락나가리였어."
"네, 그러니까 감사하고 있잖아요."
두 사람은 정돈된 방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다가, 키득키득 웃는다.
얼핏 어딘가에서 빌린 듯한 구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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