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us] To. Berner
Extermination Order
당신이 언젠가, 사시사철 눈 덮인 그 땅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제 알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두 번을 더 볼 작정이라면 여기까지로 합시다. 저는 당신의 파멸에 그 풍경을 내어주진 않을 작정입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듣고 시시하다고 꺼져준다면 편리한 일이겠습니다마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용의 이름과 기억을 걸 것이라면 최소한의 명예는 꺼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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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헤집는 금서나 단장이 눈밭을 할퀴지 않더라도 인간이 삶을 살아가게 되는 터전은 쉽게도 망가집니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았으니 아마 그쪽도 보았을 겁니다. 국가의 패권을 쥔 자들이 땅을 집어삼키기 위해 무엇을 행하는지 말입니다. 예, 쉽게 말하자면 전쟁일 겁니다. 당신이 꿈에서 보았던 그 곳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400여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보아서 알 겁니다. 땅 위에 뿌리 박고 서 있던 침엽수 중 몇몇은 반천 년 이상을 버티어 살아왔다는 것을. 눈밭을 더럽히고 나무를 숯더미로 조형할 만한 전쟁의 화마가 그 땅을 결국 덮치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영주는 제 백성을 제 권세와 땅보다 아꼈으며 정복자는 먼저 칼을 들이밀기 전 상대가 들어올린 백기를 받고 흡족해할 줄 아는 자들이었기에 비껴갈 수 있었던 일입니다. 충정도 패기도 없었으나 사람은 살았고 풍경은 변함없었고, 지금까지도 특별히 다르진 않습니다.
백기를 받아내어 새로이 그 땅을 차지한 자가 제 아비의 아비였습니다. 각서와 서약 몇 개로 창과 칼날 대신 갈무리하여 자연과 사람을 존중한 그의 성을 따 그 땅의 이름이 모드럼이 되었고 그는 모드럼의 첫 영주가 됩니다. 자연스럽게 무혈투항을 받아낸 영주가 당시에는 얼굴조차 본 적 없던 손자들과 손녀들은 눈 덮인 땅을 고향으로 가진 첫 세대가 되었습니다.
모드럼의 두 번째 영주, 저의 아비 되는 자는 얼어붙은 이 땅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입이 마르도록 불평했습니다. 어느 계절에도 곡괭이 한 번 제대로 꽂아넣질 못하는 대지의 영주같은 것은 아비의 유지를 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고, 제 자식들도 이 끔찍한 겨울에 갇혀있으니 퍽 안쓰러워하며 말입니다. 그의 첫 자식에게는 잘 먹힌 언어였습니다.
저와 에일리는 태어나 처음 눈 뜨고 바라본 장소. 모드럼으로 명명된 땅과 산, 바다, 그 모든 것들을 그저 받아들였습니다. 한기에 숨이 얼어붙는 것을 차다 박하는 부친과 모친 대신, 그 서리숨을 몰고 온 정령이 새하얀 평원과 산을 뛰놀며 그 곳을 살아가는 이에게 축복을 건넨다 논하는 고용인이 양육을 도맡은 까닭일겁니다. 곁을 에워싼 자들이 대대로 이어온 설원과 별하늘, 가끔 찾아오는 극광과 백야와 그에 얽힌 전승.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의 마법같은 것들이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땅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차대 영주의 차남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그 곳의 아름다움을 쉽게 누릴 수 있었다면 퍽이나 동화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을테고 지금 당신을 쫓아내겠다는 목적으로 이렇게 대면할 일도 없었을텐데, 유감입니다. 당신 눈 앞에 선 자는 고작 차디찬 대지에서 살아온 자들이 이어가고 지켜온 민담과 설화와 햇빛에 눈 시리게 만드는 설경을 훼손 없이 얻어내고자 혈육 하나의 목을 치고 혈육 둘을 추방시킨 폭정자이니 말입니다. 그마저도 제 손으로 오래 쥐는 대신 갓 성인이 된 모드럼의 막내 여동생에게 모든 결정권을 내던지며 다음 대의 영주로 추대한 자이기까지 합니다.
손에 피 묻히지 않았기에 더 이상 외부에서 적을 만들어낼 여지없을, 자연스레 고향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모드럼의 영주 에일리 모드럼과 그들의 후예, 그들과 살아온 백성들 대신 침입자를 쳐내어 추방하는 것은 처음부터 제 소관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에게 새기는 모든 문장이 당신에게 걸 속박이자 저주입니다. 한 때 그 땅의 주인으로 자리했던 자는 당신의 머릿속에 박혀있을 풍경이 어떤 것일지 어떤 마법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그 몸이 제 기억속의 땅을 스쳐 지나는 것만으로도 제 기억과 언어가 기어이 발 들인 침입자를 찾아낸 뒤에는, 그에게 속한 ‘모드럼’을 앗아갈겁니다. 가지고 있는 기억이 아깝다면 단 한 번이라도, 실수로라도 들르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애초에 동의한 사안이 아닙니까? 발 들이지 말라고 전 말했습니다. 애초에 옛적에 집어치웠던 영주 행세를 하게 만들고 있는 게 누구 때문인지 모르십니까?
저의 소유가 아닌 제 고향에서 손 떼십시오, 용종. 서 있는 것만으로 화를 불러올 자들에게 내어주고자 세워두었던 성벽이 아닙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시시한 인간사와 망향에 있던 흥미까지 나가떨어졌다면 얼마든지 꺼져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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