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호코즈]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
하루 지난 크리스마스 기념 소설~~ 짧습니다
의도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남들의 눈을 신경쓴다는 말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위선 보다 위악이 낫다는 말을 듣고만 있으면 화가 나지 않는가. 상대를 위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꼴사납게 나쁜 척만 하고.
카호는 어릴 적 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은 여러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사람을 경계하고 있어서 그저 눈으로 흘깃 바라보고 지나치는 아이,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는 것에 감동하여 신나서 양손을 흔드는 아이, 무미건조하게 인사만 받고 뒤를 돌아 뛰어가는 아이 등 유형은 다양했다. 카호는 그 중에서 곰인형을 품에 안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이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니?”
“언니는 산타의 조수야?”
이런 건 곤란한 질문이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카호는 자원봉사자들끼리 약속한 대로 자신 같은 사람이 ‘그’ 산타의 조수가 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러면 아이는 풀이 죽어서 돌아갔다. 휠체어를 밀고 있던 어머니가 카호를 향해 눈인사를 했다. 카호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카호 역시 슬픈 건 마찬가지였다.
당당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덧 봉사활동을 이어 나간 지 4년이 지났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건 언제나 자신을 향해 바라보는 아이들의 실망한 눈빛이었다.
“카호 쨩은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고생하네. 가족이나 친구들이랑 같이 놀고 싶을 텐데.”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 걸요.”
말을 건네온 사람도 꾸준히 자원봉사를 하러 오는 사람이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익숙한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말상대가 되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건실한 청년이 많아져야 한다고 뜬금 없이 호들갑을 떨기도 하는 아주머니셨다. 덕분에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니 조금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오늘 밤에 축하 공연이 온다지.”
“나참, 입원한 아이들을에겐 역시 뮤지컬이 더 나을 텐데.”
“뮤지컬 투표했다가 떨어져서 괜히 심술은.”
“공연이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호는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주머니를 필두로 사람들이 카호에게 상냥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왈, 이번에 큰 수술을 앞둔 아이들이 많았기에 홍보를 크게 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자원봉사를 신청한 단체가 여럿이라고 했다. 그 중에 저녁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왔고, 결정을 미룬 병원측이 사람들에게 투표를 받았다고 했다. 하나는 유명한 곡을 연주하는 작은 악단의 공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탄절을 기리는 뮤지컬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라서 평은 둘 다 좋았으나, 이야기 흐름을 모르면 즐기기 어려운 뮤지컬 보다 어느 타이밍에 들어도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아마 늦게 참석하는 아이들을 위한 표가 몇 개 있었으리라 예측한다고.
카호는 6층 병동에선 누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얘기해주려던 아주머니를 말리고 선물 포장을 재개했다. 아이들은 대개 산타를 믿지만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기계적으로 선물 포장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흥이 식은 지 오래였다. 조수인지 물어본 아이도 아마 나름의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은 또 다르겠지만.
이곳 병원측은 아주 사소한 과자-당연히 못 먹는 아이들을 위해 생김새만 흉내낸 음식들이다-만 전해준다고 대외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직접 과일을 깎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보고 내일은 특식이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런데 쨘. 아침엔 병실 침대에 선물이 와 있는 마법이!
카호는 과일을 팩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한 일인데 전날부터 준비하는 건 꽤 번거로운 일이니 서둘러야 했다. 이브는 바쁘다. 저녁 공연 전까지 마무리 지으려면 한눈 팔고 있을 새가 없었다. 옆에서 아이들이 와서 구경하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 될 텐데.
“언니, 난 바나나는 안 돼.”
“그래? 그러면 비밀인데, 너에게만 토마토 3개 넣어줄게.”
“응! 비밀!”
가끔 이렇게 친해진 아이에게 귓속말을 하고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 걸기를 못하는 아이에겐 대신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크리스마스 이브다. 즐거운 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로비에 모여 북적거렸다. 이미 1부 순서로 마술쇼가 끝났고, 저녁을 먹고 돌아온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카호는 제 손을 꼭 잡은 아이들에게 기대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저녁에 어머니가 바쁘셔서 오지 못하는 바람에 카호가 대신 휠체어를 밀어주기로 한 아이였다. 언제나 인력난이다.
“그러면 다 함께 감상해볼까요? 이 곡을 듣지 않으면 섭섭하죠. 징글벨!”
사회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시작을 알렸다. 아이들 눈이 반짝이는 게 느껴졌다. 카호도 오랜만에 듣는 캐롤에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잔잔하면서도 신나는 음색이 이어졌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이도 있었고, 박수를 치며 박자를 맞추는 아이도 있었다.
4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들으면 다 아는 만화영화 곡이라서 아이가 기뻐했다. 휠체어라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악기 이름을 이것저것 물어봐서 카호는 학창시절 기억을 되짚으며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마침 색소폰 소리가 거창하게 울려 퍼졌다. 멋진 소리라고 칭찬하다가 연주자와 눈이 마주쳤고, 숨을 죽였다.
다음 곡으로 고요한 밤이 준비되었다는 말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카호는 제 팔을 잡아당기는 아이의 힘에 이끌려 겨우 새하얀 세계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보면대를 치우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발견했다. 카호는 어딘지 들뜬 표정으로, 하지만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사람을 맞이했다. 오랜만이었다.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이 너무 옛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2년만인 것 같은데.
“카호 씨. 잘 지냈니?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네.”
“헤헤… 저도요.”
오토무네의 시선이 복장을 훑는 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나 이런 장소에서 그런 주제로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입원하지 않았다고 무엇하러 두 번이나 말하겠는가.
예의 상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는 상대방에게 두리뭉실하게 답했다. 학교는 여전히 다니고 있고, 취업은 아직 생각해놓은 게 없다. 그래도 몇 군데에서 러브콜이 온 적은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오토무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엇에 동의한 걸까. 불필요하게 정중한 것 같은 태도에 웃음을 참는 게 힘들었다.
혹시 이후에 시간이 있는지 물어볼 줄 알았다. 카호는 자신이 기대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같은 날 약속이 없는 게 이상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할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과의 일정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대해버렸는데. 당신과의 우연을 다시금 운명이라고 느끼고 싶었는데.
“코즈에 선배, 그, 그냥 가시나요?”
“응? 그래야지. 너무 오래 있으면 폐가 될 수도 있고. … 그나저나 선배 호칭은 오랜만에 듣는구나.”
“아...”
“조심해야지. 나는 더 이상… 네 선배가 아니니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다며 대화를 끊어내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었다. 카호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 뒤돌아서 가버리는 오토무네는 의연해 보였다.
히노시타 카호는 오토무네의 등을 처음 바라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일 때도 등 돌리지 않던 저 사람이, 먼저 태연하게 사라졌다.
크리스마스는 뜻밖의 일들이 일어난다. 히노시타 카호는 위선이 아닌 위악을 부렸던 자신을 반성하기 위한 자원봉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한 때 상처 입혔던 사람에게 속죄하기 위한 장소에서 다시 만난 그 사람이 홀가분해 보이는 건 좋은 일이어야 했는데.
병원 로비의 대형 TV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일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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