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다울

00. 연모 잃은 나그네의 독백

-결국, 생에서 너를 가진 적 없이 심장이 멎었다.

무리에서 떨어진 미친 늑대의 최후는, 이게 맞는것이다. 사후세계라는 곳에 당도하니 모든것이 편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시리도록 견뎌온 감정은 세상의 티끌과도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고, 놀랍게도 나는 미소지었다. 심지어 허탈하게 소리내어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고작 이렇게 훌훌 털고 일어날 감정을 싸안고 생을 내버릴 줄은 몰랐다.

나는 미치도록 괴로웠는데, 다 별 것 아니었구나.

물론 먼저 내게 마음을 준 건, 분명하게 해 두자면, 너였다.

어미늑대 없이 무리의 손길을 받아 살아남은 나에 대한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내게 친구가 없었기에 나온 너의 순진무구한 호기심이었을까.

늘 달을 보던 내 곁에 자리잡고 종알거리던 것도, 늘 너였다.

가끔 기분전환이 된다며 나를 찾아오던 너는 매일밤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근성을 칭찬하며 늘상 실없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대화에, 아니 너의 혼잣말에는 일관된 주제는 없었지만 서로가 불편해 하지 않았고, 결국 1년동안 이어진 밤중의 만남은 우리의 일과가 되어있었다.

못 견딜 정도로 성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대꾸해주기도 어색하여 그저 가만 두었을 뿐이었던 것이 결국 여기까지 왔었구나, 싶었을 뿐이다.

“그거 있지, 우리 무리는 조상부터 달의 마법을 빌려 살아간다는 것 들었어? 어쩐지. 그도 그럴게, 우리 무리가 회색늑대들에 비하면 더욱 크잖아.”

그날도 어김없이 네가 찾아왔던 날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편안히 느끼며 달을 바라보고 대화하고 있었지.

“너는 못 믿겠지만, 우리는 달이 뿜는 빛을 다룰 수 있다나봐. 신기하지 않아?”

천진하게 나를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네 형체로부터, 달큰한 바람이 불어와 네 체취가 실려 날아들었다. 무리에서 가장 강한 힘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으며,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진, 가장 새하얀 털과 마음을 가진 네가 싫지 않았다.

눈을 천천히 돌려, 네가 눈치채지 못하게 너를 응시했다. 달빛에 빛나고 바람에 나부끼는 새하얀 털을, 네가 무리에서 가장 강한 늑대라는 걸 증명하는 너의 근육을, 별과 달이 입 맞춘 빛을 셀 수 없이 머금은 너의 자줏빛 눈동자를, 쉴 틈도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은방울꽃 같은 목소리와 네 입을, 내 눈에 담았다.

나는, 달 대신 너를 눈에 담기로 했다.

***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

별 대화도 안 하고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넌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

"다음에.. 또 달 보러 올게.“

그리고, 너는 달을 보러 오지 않았다.

적어도 내 곁에서는.

***

“무리의 새로운 우두머리는 흰 늑대로 정해졌다!”

조만간 계승식이 있다고, 흘리듯 말한 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며 별처럼 반짝이는 기대로 잔뜩 젖어 있었지. 나는 그때도 늘 그랬듯 너의 표정과 털과 수염 움직임마저 모두 눈에 담고 있었다.

평소 내 곁에 있을때완 달리 긴장한 것이 한눈에 보여 우스웠다. 그렇게 자랑스레 이야기 해 놓고선. 한편으론 귀여웠다. 저런 우람한 수컷늑대도 어쩜 갓난 것처럼 사랑스러운지.

그날이었다. 축하를 전하려고 바위에 가까워졌을 때, 그 검은늑대를 처음 본 것은.

나뭇잎과 사냥감들의 뼈로 치장한 너의 곁에 한 마리 늑대가 다가섰다.

“축하해, 이제 어엿한 우리의 지도자이시네?”

“하하.. 아직 떨떠름해. 그래도 최선을 다할거야.”

“너다워서 좋네.”

한눈에 봐도 아름다운 늑대였다. 눈, 코에는 빛을 가져다 얹은 듯 윤이 났고, 털도 고왔으며 꼬리도 풍성하고 다리 근육도 보기 좋게 탄탄했다.

그 새카만 늑대가 다가가자, 너는 언제 떨었냐는 듯 즐거워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바보같이도, 나는 네가 행복한 모습을 보고 도망쳐 내달리고 말았지.

네가 행복해 하는 시간은 내 곁에 있던 밤 시간인 줄로만 알았다. 네가 오랜시간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와 대화하며 우리 사이가 특별해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의 너를 보니 깨닫게되었다.

난, 너에게 대꾸를 한 번도 한 적 없었어.

대화가 뭔지도 모르게, 너만 떠들게 두는 것이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루틴이라고 혼자서만 굳혀왔던 내가, 왜 너의 말을 듣고, 너를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만을 기다려 왔으면서도 가만 있었는지, 네가 살아가는 낮 시간엔 왜 나처럼 홀로 들짐승 몇몇을 사냥하면서 낮잠이나 자고 시간을 떼울 거라 생각했는지, 너처럼 완벽한 늑대에게 친구는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의문이었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동안 너는 내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아니, 혼자서 외롭게 떠드는 동안 즐거워 하는 줄 알았다. 너는 자주 웃었고 늘 친절했으니까.

그런데, 넌 검은 늑대 앞에서 잔뜩 흥분했다.

그정도로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봤다.

네 짝은 그녀였던 거야, 그렇지?

그렇게 나는 늘 멀리서, 너만을 바라보고, 또 너를 바라볼때마다 항상 보이던 검은 늑대를 바라보고, 또 그리며…

아무도 만나지 않고 나 혼자서만. 홀로 달을 바라보며 이슬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수차례 찾아오던 무리들을 물리니 곧 발길도 끊기더군. 너희의 자식들을 볼 자신이 없어 웅크리기만, 그저 웅크리기만 할 줄 아는 미쳐버린 늑대가 되고야 마는 인생을 살았어. 그리고,

혼자 곪아가니 내 끝은 여기더군.

이제 그만 너를 놓아주어야 할 것이다.

이젠 너도 나도 사후세계에서, 조금 더 속 터놓고 지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제와서 우습지만, 그래도 조금 더 용기 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환생 절차 완료되셨습니다. 두분은 다음 생에서도 연인의 명을 맺도록 붉은 실을 묶어주세요.”

자상하게, 둘은 마주보았다.

붉은 실이 둘을 매듭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로 떨어져도 기필코 함께일테니…

또다. 나는 또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어.

이토록 이기적일수가.

나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는데도.

그런데도, 네 곁에 서 있는 것 조차 안된다니,

너무 쓰리고 아파서…

“환생을 하시려면 해당 절차대로-”

이젠 네 멀리서, 네가 그녀 곁에서 행복해하는 모습만 바라보고 싶다.

그도 안된다면 속이 미어터져 문드러질 것만 같아서. 또다시 내 욕심 때문에, 나는 내게 정해진 바위 바깥을 또다시 넘고 만다. 그날 네 계승식에 찾아갔던 날처럼.

순전히 나를 위해서다. 그저 어떤 모습이든, 너를 보고싶어서.

그래서 무엇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버렸다.

“아니, 아직 그리로 가시면-..!”

네 행복을 빌어주는 것도 너무 큰 욕심이려나.

그러니 이만 여길 떠난다.

세계를 뒹굴다 드디어 찾아온 평안을 부유하는 낙원을, 너를 좇아 벗어나려 한다.

나는 이미, 달 대신 너를 눈에 담기로 했다.

ㅡ연모 잃은 나그네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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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4


  • 졸려하는 바다사자

    다음편!

  • 졸려하는 바다사자

    유성우까지 있으면...

  • 졸려하는 바다사자

    달의 힘이라면 가능하겠죠?

  • 호기심많은 조랑말

    요롤롤로 ㅌㅉㅌ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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