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 인륜지대사

청연이가 호한테 혼인하지 말라고 하면 호는 어쩔 수 없지 기대하지 않았을까?

* 고증 거의 신경 쓰지 않음

* 시간대는 三. 저물어 가는 나라의 그림자

권호는 오늘도 슬슬 혼인해야 하지 않겠냐는 훈계를 들었다. 어제도, 그제도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였다. 몇 번 이야기를 꺼냈는데 호가 영 반응이 없으니 부모도 조바심이 난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귀찮았다. 차라리 무술이 조금이라도 늘었는지, 아니면 공을 세웠는지 지겹게 확인하던 이전이 나았다. 그건 성실하게 대답만 하면 해결이 됐다.

그러나 정말로 호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엄청난 공을 세워 입신양명하게 되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게 되었다.

가문의 살림이 팍팍할 때는 혼인이고 뭐고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혼례도 급이 맞는 사람들끼리 올리는 것인지라, 음서도 못 넣고 말단 무인으로 전전긍긍하던 호가 만날 수 있는 상대란 뻔했다.

권력욕 가득한 호의 부모님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스물도 충분히 혼기가 늦은 나이임에도 굳이 장남에게 짝을 중매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나중에 가문의 명예가 드높아지면 나이가 좀 있어도 줄을 대려는 사람이 우르르 몰려들 텐데 뭐가 걱정인가? 일단 출세해서 이름을 알리는 게 중요하지.

실제로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호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혼인이라니…….’

진심으로 관심 없었다. 그의 부모가 가문의 부흥과 권력에 온 관심이 쏠려 있다면, 호 역시 그토록 몰두하는 데가 존재했다.

바로 그가 모시는 신이었다.

“왔냐?”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신이 술병을 흔들며 인사했다. 호가 눈을 깜빡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좀 됐지.”

“죄송합니다.”

호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기껏 신이 자신을 만나러 와 주셨는데 기다리게 하다니 안 될 말이다. 엎드려서라도 사죄하려 했는데 그가 옆자리를 탁탁 쳤다.

“와서 한 잔 따라라.”

“예.”

호가 곧바로 술병을 받아 들고 잔을 채웠다. 사죄보다도 그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청연이 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언제 봐도 호쾌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뭐라고 잔소리 듣는 것 같던데?”

청연이 소매에서 술잔을 하나 더 꺼냈다. 잔을 호 쪽으로 밀어주더니 본인이 술을 따라 준다. 호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이상한 손짓을 했다. 감히 신이 따라 준 잔을 받다니 너무 과분하고, 그렇다고 감히 그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어서 그랬다.

청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마셔, 인마.”

“죄, 죄송합니다.”

“웃겼으니까 됐다.”

호가 눈을 꾹 감고 잔을 한 번에 털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경외하는 신이 건네준 잔이니 아껴 마시고 싶었으나, 좀스럽다고 싫어할 것을 알아서였다.

“옳지.”

예상대로 칭찬을 받았다. 감정표현이 크지 않은 그의 특성상 큰 기쁨을 뽐내지는 못하고 술잔을 쥔 손에만 힘이 들어갔다. 다만 뺨은 여전히 잔잔하게 상기된 차였다.

“그래서?”

호가 술병을 들었다. 잔을 다시 채우라는 뜻으로 이해한 탓이었다.

“말고. 무슨 일이길래 이 몸을 기다리게 했느냐, 이거지.”

“아.”

호의 표정에 당혹이 서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굴이 바뀌긴 바뀐 거냐고 물을 정도로 미세한 변화지만 가까운 사람이라면 확실히 알아볼 정도였다. 눈빛이 흔들린다.

“죄송, 합니다.”

“사과하라고 안 했는데?”

호가 엎드려 사죄하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청연이 무언가 주술로 막았는지 몸이 기울어지지 않았다.

호는 그대로 굳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잘못을 했으니 잘못을 빌고 싶건만 그것도 안 된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호가 초조하게 청연을 바라보았다.

“넌 애가 진짜 요령이 없다.”

“……죄송합니다.”

“뭐, 그게 귀엽다만.”

청연이 호의 뺨을 쓸었다. 호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몸을 떨었다. 몸이 불꽃으로 이루어진 그의 신은 원래 체온이 뜨겁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그 흰 손가락이 너무 부드러워서…….

잠시 멍하니 있던 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청연이 바란 게 뭔지 눈치챈 덕분이었다.

“제 혼례 이야기가 오가는 모양입니다.”

“뭐? 혼례?”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미 약관이 되고도 사 년이 지났고, 혼기가 차는 것을 넘어 한참 늦었다는 사실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 건 신이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안 돼. 하지 마.”

청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놀랐다는 뜻이다.

왜……?

고작 부리는 도구가 혼례를 올리건 말건, 그에게 그런 사소한 일이 중요할까? 자신이 얼마나 그를 경외하고 숭배하는지 청연은 알고 있을 터였다.

앞으로도 청연이 바라는 대로 왜구를 토벌할 테고, 다른 바라는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다. 혼인을 하든 말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자신이 신을 아는 몸으로 다른 여인과 혼인할 마음이 들지 않을 뿐…….

‘혹시…….’

권호는 생각한다.

‘어쩌면.’

생각하려 한 것이 아닌데, 생각하고 말았다.

주제넘은 기대로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체온이 올라가, 손에 땀이 배어났다. 머리까지 열이 뻗쳐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저 척척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한다.

그것만으로 손가락 마디가 저릿저릿했다.

속절없이 몸이 떨린다. 긴장 때문에 남에게 심장이 억세게 쥐어 잡힌 느낌이었다. 박동 소리가 터질 듯한데도 어딘가 먹먹했다. 심장 소리가 귀에 울린다. 새어 나오는 숨소리마저 볼품없이 흔들렸다.

“어, 째서…….”

고작 한 마디를 뱉었다. 시선을 바로 맞추지도 못하고, 형편없이 동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서는 안 되는 상상을 한 탓에 정신이 혼탁했다.

“거야, 인간은 혼례를 치러 버리면 남이랑 안 자잖냐?”

청연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그리하여 무용한 기대를 한 번에 걷어찰 수 있을 만큼 싸늘했다.

“전에는 그런 거 신경 안 썼는데, 그러니까 귀찮은 일에 얽히더라고. 어차피 다 놀인데 인간은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하더란 말이야.”

호의 고개가 푹 꺾였다. 뺨이 확 달아올랐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여전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었다. 불경한 망상을 한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진정이 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 혀를 깨물었다. 아릿한 감각과 함께 피비린내가 입 안 점막에 스민다. 여전히 아찔했다.

“뭐야? 너 혼인하고 싶었어?”

청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호는 애써 고개를 들었다. 왜구의 수장을 상대하면서도 흐르지 않은 식은땀이 이마를 적셨다. 자신이 감히 어떤 교만한 생각을 했는지 들키면 경멸받을지도 모른다.

신을 모시고 있으면서.

인간이 아니라, 이 고려 땅을 다스리는 신에게 기쁘게 마음 바쳐 복종하고 있으면서. 그를 따르는 수족이 아니라 그보다 더 특별해지고 싶다는 망령된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의 방만한 태도에 실망을 금할 수가 없다. 마치, 그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인간인 것처럼.

아무리 그가 친근하고 다정하게 접해준다고 하지만, 저 하늘 높이 있는 신인데.

“아니, 뭐. 하고 싶으면 하든가. 진심으로 막는 건 아니고.”

청연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가 잔에도 따르지 않고 병을 들어 그대로 술을 목구멍에 때려 붓는다. 조금의 미련도 없는 가벼운 음성이다.

현재 그가 몰두하는 거라고는 술맛을 음미하는 것이 전부처럼 보였다. 술병을 다 비운 그가 젖은 입가를 쓱 닦아낸다. 툭 바닥에 병을 내려놓는다.

“너도 왜구들 처치하느라 굴렀으니까 번듯한 집안이랑 혼례 올리고 떵떵거리고 싶긴 하지? 이 나라 사내들은 결국 다 그게 꿈이잖냐. 인륜지대사니, 뭐니 하면서.”

호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래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쭈. 그럼 넌 꿈이 뭔데?”

“계속 주인님을 모시는 것이 제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주제넘은 기대는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전에 바닥에 처박혔다. 앞으로는 영영 그것이 말이 될 일도 없으리라. 그래도 호는 상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인 자신이 잠시 마음을 조절하지 못했을 뿐이다. 청연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든, 아무 상관 없다. 수많은 인간 중 하나로 여기든 귀여운 장난감으로 여기든 아무래도 좋다.

그를 만나서 이리 대화를 나누고 방에서 접대할 수 있는 것만으로 크나큰 영광이었다. 이대로 신에게 순종하며, 종종 그 상을 받는 것만으로 자신은 얼마든지.

“그러니 혼인은 할 생각 없습니다.”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

청연이 씩 웃었다.

그가 몸을 날려 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호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등이 배기는 것보다는 신이 흡족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아주 기뻤다.

“귀여운 녀석.”

청연이 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다. 머리가 온통 엉망으로 헝클어져도 호는 그저 웃었다.

“예.”

“내가 널 예뻐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말수도 없는 것이 참 듣기 좋게 얘기를 해요.”

뜨거운 입술이 뺨에 닿는다. 아직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호의 마음속 불길이 연약하게 일렁였다. 앞으로도 그것은 사소한 불씨로 크게 타오를 것이고, 금방 무참히 짓밟힐 것이다. 분명히 고통스러울 테지만,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행복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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