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그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시린 공기가 코끝에 감돈다. 차가운 여름의 공기. 그것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타인으로부터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코끝에 감도는 시린 공기는 단지 그 스스로 만들어낸 관념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느낌이 싫어 외쳤다.
“나는 그저 무서울 뿐이야.”
아무도 모르는 길을 걷는다는 그 사실이 무서울 뿐이었다. 앞장 서 나를 이끌어 줄 존재도, 나의 뒤를 따라올 존재가 있는 지도 모른 채 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괴롭고, 그를 고통스럽게 해서. 자의로 그 외롭고 힘든 길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없어서 그렇다.
그는 온몸을 떨며 외쳤다.
“누군가의 삶을 그대로 베끼고 싶을 뿐이야.
이미 누군가가 걸어간 길.
이미 누군가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 지 알려주었던 길.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살 수 있는 길을 원해.“
그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그의 마음에 닿는다. 그것은 비웃음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곧 나의 시선이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비웃는다. 경멸한다. 개척자가 아닌 자를 향해 질타를 가한다. 세상의 암초가 싫어 눈을 감은 자를 향해 실컷 소리높여 비웃는다. 한심하다. 제 발로 걷기 싫어 두 다리를 포기한 자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머저리, 버러지, 쓰레기.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유는 모른다. 단지 기도하였다. 광장 한복판에서 무방비하게 발가벗은 듯, 수치스러운 이 순간이 지나기를.
“이해합니다.”
“아니. 넌 이해하지 못해.”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청년의 말을 곧바로 부정한다.
“왜냐면 넌 내가 아니니까.”
온전한 나만의 수치심. 이것은 그런 것이었다. 타인의 공감을 구하지 못할 저열하고 추잡한 욕망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바라면서도 타인의 온전한 이해를 포기한 개인의 감상이다.
“내가 어렸을 적엔 무슨 꿈을 가졌더라?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아. 왜냐면 그건 너무나도 오래 된 꿈이거든. 먼지가 가득 쌓여서 잊혀진 꿈이거든. 지금은 절대로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지워진 것이거든. 너는 절대로 모를, 나만의 기억이거든.”
여울진 세계의 한복판에 한 청년이 우두커니 서있다. 청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떠올리지 못하는 시절의 표정이기에 볼 수 없었다. 청년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그래. 실망했나?”
청년은 답이 없었다.
“실망했겠지. 설마하니 알았겠어? 미래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견디기 힘들지는 않나. 나는 그저 늙어버린 존재일 뿐이고, 세상에서 기억되지 못하는 미물에 불과한데.”
청년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청년이 그를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대답을 좀 해!”
그는 어느순간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
“솔직히 말하라고. 내가 싫다고! 구역질 난다고! 그렇게 외치란 말이야. 너도 꿈이 있었을 거 아니야. 네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었잖아. 내게 원하는 게 있었잖아! 지금의 내가 하고 있기를 원하는 일이 있었잖아!”
“….”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안되겠니?”
그는 무릎을 꿇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 짓물린 어깨가 초라하다.
“나는 당신을 닮았죠.”
청년이 조심스레 그 어깨를 짚는다. 세상에 짓물린 어깨를 짚는다. 삶의 온도에 화상 입은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는다.
“당신은 나를 닮았고요.”
치솟는 구역질을 참아낸다.
“그러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선로를 벗어나 달리는 것에 포함될 수 있어요. 왜냐면 한 번 해본 일이니까요.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태어났고, 그러니 당신 또한 나에게서 태어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을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씩 사라지고 생겨날 때마다 그 개인은 무한한 탄생과 죽음, 소멸을 겪어요. 나 또한 죽겠죠. 미래의 내게 길을 묻고자 했던 나는 소멸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겠죠. 당신이 이끌지 않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나로서 나는 살아갈 것입니다.”
소멸.
“나는, 실패한 너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성공이 있기에 실패가 있는 것이고, 실패가 있는 것이기에 성공이 있는 것이니. 그것을 정의내리지 않는다면 당신을 정의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가보지 않은 길에 서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
내게도, 청년에게도 처음일 길.
“잘 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청년을 배웅하였다. 그렇게 수많은 내가, 내가 가보지 못한 길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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