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좋은 아침, 좋은 밤.
딸랑, 경쾌한 종 소리가 두 명의 손님을 맞이한다. 뒤이어 들리는 점원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적당한 음료를 시키고 자리를 잡는다. 한 쪽은 아메리카노, 한 쪽은 페퍼민트 티. 어딘 가의 병원 로고가 박혀 있는 흰 색의 가운을 입고 있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가운을 벗어내고 나면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된다.
데카루스, 그 소식 들었어?
소식이 뭔지 알려 주지도 않고 들었냐고 하네.
요즘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더라.
차가운 페퍼민트 티에 꽂힌 빨대를 한 바퀴 돌리던 이가 순간 동작을 멈춘다. 음, 못 들어본 소식이네. 높낮이 없이 내뱉어 진 문장은 상당히 딱딱하지만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 이의 귓가에는 큰 이상을 감지하지 못한 모양인지, 별로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모조리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최근 들어 혼자 귀가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범죄가 일어나는데, 유난히 젊고 건강한 사람들의 피가 완전히 빠진 채로 발견된다는 소문이다. 이상하게도 뉴스에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라 암암리에 소문으로만 도는 모양인데, 그들 또한 젊은 축에 속하는 이 들이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덧붙이며 웃는 이의 반대편에서 기껏 시킨 페퍼민트 티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휘젓기만 하는 이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흐리게 비친다.
충고 고마워, 겨우 내뱉은 문장을 끝으로 다시금 별 시답잖은 이야기가 흘러간다. 두 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병원의 이야기, 혹은 다음 주에 잡힌 세미나에 대한 준비 과정, 그도 아니라면 집에서 키우고 있는 반려 털 뭉치에 대한 이야기……. 평소라면 마지막 이야기에 호기심을 보였을 법 한데, 아까부터 멍하니 있는 상대 덕분에 이야기의 주도권은 완전히 한 사람의 몫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가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다.
내 얘기 어디까지 기억해?
어디까지부터.
전부 안 들었잖아.
짙은 푸른 색의 머리칼을 가진 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백색의 머리칼을 가진 이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다. ‘소문을 믿어?’ ‘에이, 범인이 뱀파이어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해.’ ‘그렇구나.’ 테이블 위를 고저 없이 두드리던 얇고 긴 손가락이 잠시 멈추었다가, 결국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이는 데카루스라 불렸던 쪽이다. 벗어 두었던 가운을 굉장히 튼튼한 가방 안에 넣어 두고, 동료에게는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카페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면 자리에 남은 것은 얼음이 다 녹아 버린 페퍼민트 티 뿐이다.
근무하고 있는 병원과 지내고 있는 오피스텔의 거리는 멀지 않아서, 특별히 주문 제작한 가방 안에 들어있는 혈액들의 신선도에 문제가 없음을 체크한 뒤에는 하나도 빠짐 없이 전용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하나 정도는 이따가 꺼내 둘까, 가벼운 고민을 하며 샤워까지 마치고 나오면 그제서야 자신이 급하게 귀가한 바람에 저녁을 사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어 볼 것이 늘었다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 이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암흑만이 가득한 방 안에 조용히 스며든다. 소리가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들어와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으면,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사이로 여즉 잠들어 있는 이의 모습이 들어온다.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러나 엄연히 이 곳에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는 것으로 그의 수면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
좋은 아침.
붉은 색의 눈동자가 몇 번 흐릿하게 깜박이다가 온전한 빛을 되찾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까지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가는 이를 바라보다 보면, 거울에 비치지 않는 강하고 이질적인 존재도 근본적으로는 별로 다를 바 없지 않냐 는 의문이 잠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내려간다.
별 일 없이 식사를 챙기고, 별 일 없이 구입한 혈액 팩을 챙기고, 별 일 없이 새벽 사냥을 나가야 하는 추후 일정을 다시금 체크하며 어두운 방에서 나오던 이가 문득 핸드폰을 확인한다. ‘너도 올 거야?’ ‘응.’ 간결한 질문에 간결한 답변을 마친다. 내일은 휴일이니, 별 일만 없다면 모처럼 그와 함께 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하자니 제법 기분이 좋아 진 편이라, 막 씻고 나온 이에게서 무슨 일 있었냐는 질문을 받는 와중에도 묘하게 들뜬 입매가 감춰 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현대를 살아가며 인간과 섞여 사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이질적인 존재와, 현대를 살아가며 이질적인 존재가 선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우호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각자의 종족에게 퍽 특이한 취급을 받는 편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지금 두 존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날의 식사 메뉴일 뿐인데.
식사 메뉴를 정하고, 가져온 혈액 팩이 몇 개인지도 공유하고, 새벽에는 상당수의 헌터들이 집결할 테니 오늘은 외출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전한 이가 문득 눈 앞의 존재를 바라본다. 만일 그가 다른 존재들과 같은 길을 걷다 사냥감이 된다면, 자신은 올 것이냐는 메시지에 어떻게 답을 해야 했을까. 아니, 애초에 함께 생활을 공유하지도 않았겠지. 생각조차 불필요한 가정을 털어 내기로 한다.
하지만, 정말로. 네가 그 길로 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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