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수풍
0.
청현, 너를 처음으로 본 날을 기억한다.
네가 처음으로 마주한 빛에 놀라 울음을 터뜨릴 때쯤 나는 문간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전까지 어머니께서 진통을 못 이기시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실 때마다 몸을 흠칫 떨며 손톱을 깨문 탓에 손은 이미 엉망이 되었던 채였지. 손톱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고, 피가 새어나오고 있을 때쯤에서야 네 울음소리가 들리더구나. 내게까지 들릴 정도로 우렁찬 소리였으니, 건강한 아이겠구나, 하고 마음을 조금쯤 놓을 수 있었어. 조금 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미소를 지은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어서 들어오거라, 무도. 나는 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문지방을 넘고 어머니께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땀으로 흥건해진 채로도 작은 포대기를 꼭 감싸안고 계셨는데, 누군가가 칼을 들이대며 그것을 넘기라 할지라도 결코 놓아주시지 않을 기세이시지 뭐냐. 그럼에도 내 얼굴을 보시고는 환히 웃으시며 품에 안은 것을 내밀어 보여주셨어. 그 안에 네가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입을 오물대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너무도 연약한 생명이 보였어. 네 동생이란다, 한 번 안아보렴. 어머니의 채근에 나는 조심스럽게 너를 안아들었다. 그러자 포대기 속의 아이는 제 혈육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이 배시시 웃더구나. 울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웃는 너의 모습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너를 바라보던 나의 귓가에 어머니께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어. 무도, 네 동생을 지켜주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희는 형제란다. 기억하렴…….
가지 않은 길
1.
사청현은 부호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인 사무도에 이어 여섯 해만에 본 둘째 아들이었으니, 그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교류가 적은 친척 어른들까지 몰려와 다들 축하의 말을 건네고 하루 온종일 강보에 싸인 아이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작고 연약한, 그러면서도 웃음 많은 그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한 몸에 사랑을 독차지하는 듯싶었다. 그 때는 사무도도 고작해야 여섯 살이었으니 제가 받을 사랑과 관심조차 빼앗아가는 그 모습에 내심 샘이 나거나 심통을 부릴 법도 했건만, 사무도는 군말 하나 없이 버티다 못해 동생인 사청현을 살뜰히 챙겼다. 저도 똑같이 어린 아이면서 형이라고 동생을 챙기는 모습에 가족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총기 있는 형에 사랑스러운 동생. 그들 사이 우애가 넘치니, 이 집안에는 걱정이 없겠구나!”
누군가가 그리 말했다. 모든 이들이 그 말에 동의하며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만 같았다. 백화진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 시작도 끝도 좋지 못하리라!
불미스러운 일로 잔치가 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 오른 사청현이 신물을 뱉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사무도 정도의 나이만 되어도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정도였으나, 갓 태어난 아이라면 당장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갑작스런 재난에 혼비백산한 그들 부모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모아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냈다. 그들은 점쟁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랐다. 여자아이의 옷을 입고, 여자아이인 척 자라는 아이는 적지 않았다. 조금쯤은 불길하고 또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그게 대수겠으랴. 금지옥엽인 막내아들이 죽지 않고 무사히 자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집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도련님이 아닌 아가씨였고, 그가 밖으로 나설 때는 늘 호위가 몇 명이나 동행했다. 심지어는 액운을 대신 받아주는 아이까지 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장난이 언제쯤 백화진선에게 들킬지는 모를 일이었고, 마찬가지로 사청현이 언제쯤 그 요괴의 손에 농락당하고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도 감히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씨 집안의 오랜 불안이었으며 공포였다.
그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사청현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포대기에 싸여 꼬물거리던 아이는 어느새 네 발로 기어다니더니 두 발로 걷고 뛸 줄 알게 됐고, 불편한 치마폭을 들어올리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천성이 정 많고 사랑 많으며 자유로운 아이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무도는 사청현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여자아이답게 처신하지 못하겠느냐며 꾸짖었지만 사청현은 히히 소리내어 웃을 뿐이었다. 빙긋 웃는 동생의 표정에는 자못 엄한 사무도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한참 동생을 바라보다가도 결국 한숨을 내쉬며 제가 졌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렇게 일 년, 이 년, 그리고 십 년이 지났다.
2.
십 년이란 세월은 천계 제일의 신관이라도 잊히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니 인간사야 어떻겠는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씨 집안의 영화도 스러져갔으니, 가장 큰 원인은 사씨 부부의 죽음과 그로 인한 친족 간의 불화였다. 저열한 욕설과 주먹다짐이 오가는 가운데 사무도는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떨고 있는 동생을 데리고 집안을 나왔다. 부모가 죽은 이상 그들 형제는 집안의 골칫거리나 다름 없었으니, 아무도 그들을 잡지 않았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청현과 달리, 사무도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코웃음을 치며 동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더 이상 믿을 것 하나 없었으니, 의지할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청현. 사무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너와 나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제 없으니 너와 나뿐이야. 이 형이 너를 책임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놓지 않으마. 사무도의 냉엄한 말에 사청현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울지만은 않았다.
사무도는 제게 선경에 오를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대단한 자신감이었고, 일종의 오만함이기도 했다. 그 백화진선조차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자의 천성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쟁취하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거머줬다. 자질도 있고, 야심도 있으니 고민할 것이 무언가? 선경에 오르기만 하면 이전의 삶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권세와 영광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사청현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백화진선이 그를 찾지 못한 지 십여 년이 지났다지만, 언젠가는 그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백화진선은 끔찍할 정도로 진득하게 달라붙는 요괴였고, 사청현은 무엇보다도 달콤한 먹잇감이었으므로. 백화진선이 사청현의 인생을 휘어잡고 몰락으로 끌고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하면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누구도 그에게 손댈 수 없다. 감히 누가, 감히 어떤 자가 이 사무도의 동생을! 으득 소리를 내며 이가 갈렸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선경에 오르리라. 그리고 사청현을 구해 내리라. 무슨 짓을 저질러서라도…….
다만, 그가 오판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에게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가 늦게 집으로 돌아가던 날, 그는 피에 젖은 얼굴로 멍하니 주저앉은 사청현을 보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덜컥 가슴이 주저앉은 것 같았다. 창백해진 얼굴의 사청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백화진선이 돌아온 것이다!
더 이상은 시간이 없었다. 사무도는 매일같이 수행에 매달렸다. 하루라도 빨리 선경에 올라야 했다. 백화진선이 사청현을 집어삼키기 전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 정성에 하늘이 감복하기라도 한 것인지, 사무도는 빠르게 선경에 올랐다. 그리고 곧장 사청현을 중천정으로 데려와 온갖 법보들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그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중천정으로는 백화진선을 떼어놓기에 부족했다. 사청현을 상천정으로 데려와야만 했다,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3.
“형!”
사청현이 반색하며 달려왔다. 사무도는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채 뒤에 숨기고 자못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사청현의 이마를 쳤다. 악! 사청현이 외마디소리를 냈지만 사무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는 훈계를 늘어놓았다. 처신을 잘 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이제 네 나이를 기억해야지……. 사청현은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는 잔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술을 삐죽이고는 말했다.
“나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야? 상천정에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어제 내가 비승했을 때는 보러 오지도 않고!”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비승 축하한다.”
“아, 고맙……아니, 이게 아니라! 동생이 비승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던 거야?”
사무도는 말없이 사청현을 응시했다. 사청현은 움찔 몸을 떨더니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게 있으면 말해 줬으면……. 나는 그냥 형을 제일 먼저 보고 싶어서……. 형은 기쁘지도 않은가 하고……. 웅얼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의 것이라, 화가 나지조차 않았다. 중요한 일이라.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지. 너는 영원히 몰라도 될 일이고. 사무도는 영영 말하지 않을 말들을 목 안에 눌러담았다. 어젯밤의 잔혹한 정경과 눈앞의 멀끔한 사청현의 모습이 대비되며 스멀스멀 승리감이 올라왔다. 어쩌면 그것이 사청현의 말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가! 사청현은 이리도 멀쩡하고, 앞으로도 자신의 곁에서 권세를 누릴 것이다. 이제 ‘사씨 형제’는 곧 수사 대인과 풍사 대인이었으니, 감히 자신들을 건드릴 만한 간 큰 이는 없을 터였다. 사무도는 미소를 지으며 사청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사청현은 오랜만에 보는 형의 기분 좋은 표정에 눈을 휘둥그레하니 뜨면서도 군소리 하지 않고 가만히 손길을 받았다.
“이제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응. 형도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는 내가 잘 할 테니까.”
사청현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섞여있어서, 사무도는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퍽이나 그렇겠구나. 첫날부터 처신도 제대로 하지 않은 녀석이.”
“아, 진짜! 또 그 얘기야? 그러는 형은 벌써 삼독류 소리나 듣던데. 꼭 그 두 사람이랑 같이 다녀야겠어?”
“배 장군과 영문진군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두 사람 앞에서는 예의를 차리거라.”
네, 네. 알겠어요. 사청현이 성의없이 대답했다. 사무도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면서도 별 말은 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당황한 사청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형? 나 두고 가는 거야?”
“두고 가긴 무슨. 따라 오지 않고 뭣 하느냐. 풍수 선부로 가야지.”
그러자 뒤따라오던 사청현의 얼굴이 활짝 폈다. 앞으로도 나 두고 가면 안 돼! 사청현의 낭랑한 목소리가 상천정 경내에 울려퍼졌다. 사무도는 이쪽을 기웃대는 신관들의 얼굴을 째려보면서 나직하게 대답했다. 내가 언제 너를 두고 갔다고 그러느냐.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사청현은 신나게 웃었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것처럼.
4.
― 넌 이제 영원히 네 형을 만나지 못할 게다!
5.
사무도는 제게로 향하는 흑수침주의 손을 응시하며, 생의 끝의 끝에서야 생각했다. 아니, 조소했다.
후회하지는 않느냐고? 그럴 리가! 가지 않은 길을 후회할 이유가 무엇 있으랴?
결국 그들은 수백 년의 권세와 안위를 얻어냈고, 그 끔찍한 하 공자는 흑귀가 되었을 뿐이다. 사무도의 선택으로 사청현은 수백 년간 불운과는 동떨어져 안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걸로 됐다. 그걸로 충분하다! 심지어 하현은 사청현을 죽이지조차 못한다! 이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사무도는 사청현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죄 없는 인간의 명격을 바꾸라면 바꿀 것이고, 머리에 피가 나도록 찧으라면 찧을 것이다. 그 어떤 일을 하든, 제가 원하는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가지 않은 길이라? 사무도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제가 명격을 바꾸지 않아 사청현이 거렁뱅이가 되고, 모든 인연을 잃고, 악귀나찰이 되어버리는 길? 그것을 제 두 눈으로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일?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그에게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그러니 청현, 울지 말아라.
너는 그저, 유랑하는 바람처럼, 어디서든 피어나는 꽃처럼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툭, 한때 수사대인이었던 자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얼굴에는 끝까지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 웃음은 분명, 승리자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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