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Right Now, Over Here

글리프 주간창작 주제 : 가지 않은 길

※ 미국에서 농구하는 종수 X 한국에서 대학농구 잘하고 있는 병찬

※ 주제 : 가지 않은 길

※ 공백포함 약 22,0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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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유스캠프 때 박병찬이 생각해낸 놀이 중 하나였다.

가장 연장자-프로선수 조형석을 제외한다면-인 박병찬의 앞에 야식으로 주문한 치킨이 총 일곱 마리 모여 있었다. 최소 금액으로 잡아도 각 2만원 씩, 총 14만원을 박병찬 부모님의 신용카드로 긁었다. 성준수가 “형 그렇게 카드 긁으면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해요?” 하고 물었는데 박병찬이 씩 웃었다. “뭐 카드 긁으면 엄마한테 알림 문자 가기는 하는데 잘 설명하면 돼.” 그러다 보니 일회용 종이 접시를 한장 씩 돌리고 그 위에 박병찬이 치킨을 하나하나 얹어주는 묘한 형태가 되었다. 그냥 집어먹으면 안 되나? 누군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옆사람에게 중얼거렸지만 박병찬은 개의치 않고 둘러앉은 남자애들에게 치킨을 나눠주었다.

“자 많이 먹어라. 콜라도 까서 마시고. 맥주 안 시켜줘서 미안. 나도 양심 상 그래도 학생이라서.”

주절주절 떠들던 박병찬에게 배식 받은 후 다들 얌전히 치킨을 베어 물었다. 비닐 장갑 낀 손으로 치킨을 잡아 제 옆에 앉은 이규에게 주면서 박병찬이 먼저 입을 열었는데,

“하 규야, 아까 너랑 같이 뛰어보니까 좋더라. 나 무릎 안 아팠으면 장도고 가려고 했는데. 어, 잠깐 이거 내가 못 간 거 아니다. 안 간 거다.”

온갖 자기합리화가 덕지덕지 묻은 말을 뱉은 것이 시작이었다.

듣고 있던 이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박병찬보다 환하고 뚜렷한 두 눈을 깜박이며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네? 하고 되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박병찬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건 상관 없었는데 그 말을 굳이 여기에서 한다는 게 최종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갑자기 건너건너 앉아있는 박병찬이 멍청해보이고 그 멍청함을 드러낸다는 게 존나 신기해서 종수는 고작 스물한 살이면서 어른 행세를 하는 남자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 낫지도 않은 무릎 병신 쿠크다스 주제에 장도고는 웃기지도 않을 꿈이다. 어처구니가 없으면 헛웃음이 나왔다. 종수의 인중 아래로 콧김이 픽 새는 걸 본 박병찬이 놀란 눈이 되었다.

“야, 최종수. 지금 웃었냐?”

발끈한 목소리에는 진지함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종수도 쫄지 않았다. 진지했더라도 최종수는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종수는 비닐장갑 낀 손으로 박병찬에게 종이 접시를 내밀었다.

“치킨이나 줘.”

제 종아리 앞에 놓인 치킨 상자 속을 한참 내려다보던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닭목뼈만 일곱 개를 골라서 접시 위에 얹어 주었다. 종수는 접시와 박병찬의 뚱한 얼굴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뭐야.”

“뭐가?”

“뭐냐고.”

“최종수 너는 그런 갈림길에 서 본 기억 없냐? 하긴 없겠다. 네가 뭔 고생을 해봤겠냐.”

박병찬은 저 혼자 묻고 저 혼자 답하더니 휙 고개를 돌렸다. 듣고 있던 종수는 미간을 콱 찌푸렸다. 박병찬의 턱 관절을 아프게 움켜잡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는 대신 얌전히 자신의 접시 위에 손을 얹었다. 튀긴 닭 목 뼈에 붙은 몇 없는 살점을 조용히 뜯어먹었다. 종수도 할 말은 많았다. 장도고에 입학한 이후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얼마나 좋은 선수가 되려고 땀 흘리며 노력했는지, 키를 키우려고, 몸집을 불리리려고 애썼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체육관에 남아서 연습했는지,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슛을 던지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입 안 곳곳에서 달싹거렸다. 그런데 그걸 박병찬한테 말해서 뭐해? 박병찬이 그 말을 들어준다고 한들 나에게 무슨 위안이 있는데? 내가 천재가 아니어서 고생하며 농구한다는 걸, 너 따위가 쉽게 말하지 말라고, 여기에서 윽박지른다고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종수의 머릿속에서 가볍게 일어난 박병찬과의 말싸움의 끝에 종지부를 찍는다. 종수는 그 질문에 대답할 기분이 되지 않는다. 앞니로 갉아서 발라먹은 뼈를 그릇 끄트머리에 내려놓았다.

박병찬이 시작하자 ‘내가 선택해서 이쪽 길을 선택하긴 했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에 대해서 아이들이 하나둘 씩 떠들기 시작했다. 박병찬이 민망할까 봐, 연장자에게 꽤나 깎듯한 이규가 먼저 “장도고 다니는 거 좋고, 불만도 없는데 1학년 때 B고교 농구부에서 스카웃 제의가 한 번 있었어요. 갔으면 지금과는 다른 플레이를 했을 것 같긴 한데. 지금이 좋아서 후회되지는 않아요.” 라고 말했다. 종수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목뼈를 뜯다가 손과 이가 멈췄다. 이규를 데려가려고 했다고? B고가? 그 농구부 애들 좆도 못하는 거 뻔히 아는 학교에서 이규를? 종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규가 자신에게 그것을 말해주지 않은 것도. 하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지. 장도고와 B고라니 비교할 가치도 없다. 이규가 현명했다.

그리고 한명씩 한명씩 자신의 앞에 놓였던 적 있으나 선택하지는 않았던 갈림길에 대해 한마디씩 놀이처럼 떠들었다. 이런 걸 넙죽 잘 받아주는 걸 보면 여기 애들이 종수보다 순했다.

지상고 공태성이 “공부 열라 잘했는데 농구부 들어온 거.” 라고 말했을 땐 멀리 앉아있던 성준수가 먹고 남은 닭뼈를 공태성 뺨에 던지려는 걸(“씨X거, 저 새X는 입만 열면 사람 열뻗치게 하네, 진짜!” / “준수, 참아라! 태서이 니도 그런 얘기 하는 거 아이다.” / “즈언하! 이건 그냥 분위기 상 다들 한 마디 씩 하는 이야기일 뿐인데 진심으로 빡쳐 하시느라 지금 존나 성질 X더러운 거 티내고 있사옵니다.” / “준수야. 선배가 얼마나 허접으로 보였으면 후배가 저런 소리를 해?”) 누가 붙잡아서 말렸다. 또 누가 한 마디 하고, 둘러 앉은 애들이 웃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던 성준수가 “너무 당연스럽게 지상고 선택한 거? 여러 곳 중에 어디로 가야 할 지 좀 더 찾아볼 걸 그랬나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후회 없어.” 그 말에 아주 잠깐 진재유의 얼굴은 새파래졌다가 다시 제 색을 띠었고, 전영중의 얼굴은 새빨개졌다가 창백해졌다.

이런 대화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종수는 세 번째 닭 목뼈를 뜯어먹었다. 이제 네 조각 더 남았다. 종수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해 봐도 자신의 인생에 이렇다 할 두 가지 선택사항이 놓인 적이 없었다.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종수는 삶에서는 단 한 번도 갈림길에 놓인 적이 없었나. 제 기억으로는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건 또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그냥 누구나 겪는 일인가. 그 정도의 어려움과 괴로움은 삶의 본질에 가깝다고?

박병찬은 웃고 떠드느라 치킨에는 입에도 안 댔다. 다리 하나 접시에 얹어놓은 게 영 줄어들지 않았다. 그 많은 닭을 다 계산해놓고 박병찬은 닭다리 딱 하나를, 아주 조금씩 조금씩 결대로 찢어 먹었다. 캠프 내 구내식당에서 밥 먹을 땐 산처럼 쌓아서 먹는 것 같았는데 치킨을 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눈이 슬쩍 마주친다. 박병찬은 또 종수만 볼 수 있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바보 같아. 이상해. 종수는 왜 자신이 박병찬이 밥 먹는 양을 기억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1

오른손 약지 손톱이 깨져서 강제로 일주일 간 휴식이 생겼다.

평소에도 종수는 생각이 많고 신중하며 실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누군들 실수하길 원해서 하지는 않겠지만 종수는 실수로 인해 얻는 이득보다 실수로 인한 자책에 조금 더 힘겨워하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코트 위에서의 실수는 실점으로 이어지고 실점으로 이어지면 상황의 압박감에 고꾸라진다. 종수 스스로를 옭아맸다. 그래서 누구보다 오래 연습하고, 슛을 던지고, 알맞게 주어진 기회에 득점 찬스가 늦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살았다. 그리고 오늘 공에 맞은 손톱이 깨졌다.

자신의 입안에서 비린내가 퍼지고 있다는 걸 손톱의 피를 보며 종수는 느릿하게 알아챘다. 주변의 말소리가 형태를 언어로 들리지 않았다. 누가 종수의 어깨를 염려하듯 툭 잡았다. 이마에서 땀을 반질반질 흘리던 그는 종수보다 십센티미터는 더 컸다. 짙은 눈동자가 성큼 가까워지며 강한 체취가 풍겨왔다. 그제야 가라앉던 정신이 안쪽에서 바깥으로 열렸다. 종수가 수건으로 감싸고 있던 오른손 약지가 얼얼했다. 피는 멎은 것 같네. 이렇게 돼서 미안해. 나는 네가 볼을 잘 받아줄 거라 생각했어. 캠퍼스헬스룸에서 치료 잘 받고 약국에서 진통제와 소염제도 사서 챙겨 먹어. 종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 점심 뭐 먹을까. 마트에서 사려고 들여다 보는 이것과 저것 중에 무엇이 더 나을까. 농구를 하러 미국에 유학까지 왔는데 손톱이나 깨져버린다. 종수가 걷고 있던 진로도 진열된 상품 중에서 고를 수 있는 만큼의 가벼운 선택이었던가.

종수는 일주일 간 짧게 주어진 휴가에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인공호수 앞에 앉아 있었다. 손톱을 다쳐서 캠퍼스헬스룸을 들렸어야 했는데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잊어버리고 말았다.

종수가 선택해서 온 미국 행이었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은 종수의 선택이었고 이 선택을 부모님이 지지해주시고, 준비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입학 인터뷰도 잘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주변 농구부 부원들 다 한국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해도 종수는 제 할일을 묵묵히 잘 해냈다. 그 사이에도 미국 현지인들이랑 화상 통화 수업도 했다.

이규는 주익대를 갔다.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어도 처음부터 고등학교 농구부까지가 이규와 호흡을 맞추는 마지막 기간이 될 것이라고 서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규 다음으로 떠오르는 얼굴들은 하나 같이 썩 종수의 마음에 차는 인물이 없었는데 문득 조형고등학교 농구부의 박병찬이 떠올랐다. 몇 번 봤더라. 겨우 두 번. 아니, 세 번 정도. 종수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불리던, 점수 차가 큰 경기에서 덩크 하나 했다고 좋아 죽던, 이기는 건 자신에게 세 번째라고 하던, 유스캠프에서 종수에게 튀긴 닭 목 부위만 골라서 주고서 너는 고생한 적 없는 것 같다고 딱 잘라 말하던 박병찬. 그 때 치킨 시켰다고 불러도 나가지 말았어야 했어. 아직도 몇 년 전 유스캠프 때 일을 떠올리며 종수는 신발 끝으로 잔디를 문질렀다.

종수는 제 약지를 본다. 불편해질 만큼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살짝만 스쳐도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다. 피가 안쪽에 고여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손톱 깨진 것 하나 가지고 이토록 요란법석을 떨어대야 한다. 아무래도 교내에 위치한 파머시를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종수는 땀으로 젖은 유니폼이 든 더플백을 어깨에 메고 터덜터덜 걸었다.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핸드폰 사전 어플리케이션에 소염제를 검색했다. 앤티플로지스틱. 앤티플로지스틱…….

그렇구나. 종수는 미국에서 두번째로 맞는 3월의 부활절에, 오른손 약지가 손톱이 깨져서는, 자신의 현 상태를 깨달았다.

종수는 지금 외로웠다. 그야 말로 끔찍한 저주 같은 향수병이었다. 미국 생활 일 년 반 만에, 집채만한 크기의 이름 모를 그리움이 종수를 덮친다.

1-B

박병찬은 기숙사 낮은 침대에 구겨져 있었다. 넷플릭스에서 해외 영화를 틀어놓고 보는 중이었다. 여자애들이 “오빠 키싱부스 본 적 있어요? 농구부 이번 축제 때 정한 거 없으면 오빠가 나와서 키싱부스 하는 거 어때요?” 어쩌고저쩌고 하길래 궁금해서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생각보다 골때리는 영화였다. 박병찬이 허허 웃어주고 있으니까 당돌하게 헛소리 하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니다. 뽀뽀가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키스방이나 전화방 같은 거 한국에 좀 많지 않나. 그거 성매매로 분류 될 텐데. 어휴 애들이 겁도 없다. 싫증나는 생각을 하릴없이 이어가던 박병찬은 문득 웃고 있는 백인 배우의 얼굴을 보며 최종수를 생각했다. 아, 그럼 최종수는 이제 미국영화는 자막 없이 보나? 부럽다. 나도 영어공부 열심히 하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부모님께 미국 보내달라고 한 번 싹싹 빌어보는 생각까지 하다가 멈춘다. 넷플릭스 어플리케이션에서 빠져나와 내일 새벽에 울릴 알람을 체크한다. 이불을 펴고 그 안에서 웅크리며 소리 없이 푸흐흐 웃기만 했다. 여어 최종수. 농구부스 열래? 별 거 아니야. 넌 그냥 눈 가리고 농구하면 돼. 눈 가리고 농구를 어떻게 하냐고? 나도 몰라 인마. 농구는 바람과 기세 그리고 센스로 이루어져 있지……. 피곤했는지 어느새 박병찬은 입을 가늘게 벌리고 잠들었다. 커어.

2

억지로 손에 쥐어진 쉬는 날이라도 잘 자면 좋을 텐데. 고등학생 때 시작된 불면증은 시차를 한 번 요란하게 거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종수의 옆에 귀찮은 애인처럼 딱 달라붙었다. 종수는 경기가 없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꾸벅꾸벅 졸았고 밤에는 가슴이 쿵쾅거려서 잠들지 못했다. 지독하게 나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았다. 종수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잔혹한 무언가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농구 왜 하냐 넌? 아무도 너랑 같이 뛰고 싶어 하지 않을걸? 그런 식으로 하는 농구가 뭐가 재밌다고 여기 붙어있는지 모르겠네. 너한텐 아무런 미래도 없어. 이건 언젠가 종수의 입에서 비수처럼 날아가 사람을 찌르고 후비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종수의 말을 기억할까. 종수는 제가 한국에서 타인에게 내뱉어버린 모든 말이 미국에 있는 자신을 향해 돌아온다는 걸 절절히 알게 된다. 종수가 쌓은 업보 같은 것이다. 운명처럼 되돌아와 제가 날린 비수는 종수 자신에게 꽂혔다. 농구 왜 하냐 넌? 그런 식으로 하는 농구가 뭐가 재미있다고 여기 붙어있는지 모르겠네. 너한테는 아무런 미래도 없는데……. 종수 자신이 가장 너그럽지 못한 자기 자신이다. 누구나 그런 것 아니겠나.

*

미국에서 생활하는 종수의 유일한 도피처는 우주, 최근에는 NASA 에서 업로드한 영상이나 ‘토성의 실제 소리 ASMR 8시간’이였는데 그날은 토성의 실제 소리를 들어도 잠들 수 없었다. 누군가가 종수의 잠을 삭둑삭둑 잘라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우주에서 태양계로, 태양계의 지구로 내려온다. 종수를 바닥으로 처박는 향수병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모국어 영상을 찾는다. 덜 시끄럽고 조금은 정보 위주인 영상. 내셔널 지오그래픽 코리아를 검색했다. 이 계정은 또 15분 넘어가는 영상이 없다. 그렇다면 농구.

그렇게 종수는 한국 땅에서 농구를 하는 사람 중에 박병찬이 뛰는 준향대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한국대학스포츠협의회가 업로드한 영상으로, 약 두 시간 정도의 영상이었다. 준향대 주전으로 뛰는 박병찬을 카메라가 잡아준다. 준향대에는 익숙한 얼굴이 몇 보였다. 종수는 박병찬의 해맑은 얼굴보다 먼저 그가 신은 형광색 농구화를 먼저 발견했다.

경기 해설자 중 한명은 나른한 코맹맹이 목소리였고 다른 한 명은 어디에서나 들을 법한 남자 목소리였다. 이미 잠이 달아난 종수의 귀에는 누가 누구든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이야, 골 밑에서 박병찬 선수가 바로 득점을 넣어주네요.” / “멘트를 치기도 전에 각 상대팀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네요.” / “네, 맞습니다. 준향대에서는 특히 박병찬 선수가 요즘 잘해주고 있어요.” / “아 그래도 무릎 부상이 있는 선수가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아요.” / “그렇습니다. 뭐 준향대도 선수의 생활권은 보호하고 있고 실제로 박병찬 선수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바로 벤치로 돌아가기도 하던데 말이에요, 아 넘어졌어요. 심판이, 네. 파울은 아닌 듯하네요. 공은 다시 K선수로.” / “그 무릎 부상 완치라는 게 의지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야 박병찬 선수가 저번 경기에서는 초반에 많이 헤맸는데 그래도 후반부에는 득점이 터져서. 오늘은 무척 좋아보이네요. 연속 삼점 슛!” / “야 저게 들어갔어요. 네네. 잘해주고 있으니 그래도 믿음직하죠, 아 이번에도 박병찬 선수가 공을 잡고 본인이 득점, 하려다가 옆으로 패스해서……”)

준향대학교 유니폼을 입은 21번 박병찬의 재빠른 움직임을 좇는 동안 종수는 눈을 깜빡거렸다. 한 번 깜빡. 두 번 깜빡. 세 번……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환호성이 먹먹하게 흐려진다. 종수는 잠들었다.

*

눈을 뜨니 아침 11시였다. 새벽 4시부터 아침 11시. 깨지 않고 숙면. 한쪽은 벗겨지고 한쪽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이어폰에서는 한국 예능 방송 5분짜리 클립에서 깔깔 웃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종수는 손으로 이어폰을 빼고 유튜브 재생 버튼도 일시정지로 누른 후 어플에서 빠져나왔다. 배터리가 10퍼센트 정도 남았다. 손을 더듬거려 협탁 옆 충전기에 핸드폰을 꽂아둔다. 많이 잔 것 같은데 일어날 힘이 없다. 종수는 침대에 돌아누웠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푹 잤다. 뭘 보다가 잠든 건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박병찬이 나오는 대학농구를 보고 있지 않았던가. 가물가물했다. 한참을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던 종수는 기숙사 방 안 깊이 스며드는 햇볕을 만끽하며 기지개를 켰다.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

아직 종수는 체육관에서 만나는 동료들에게 손을 들고 하이, 인사 하는 게 어렵고 낯설었다. 자기도 모르게 꾸벅 목례를 하다가 다시 손을 올린다. 오른손 약지가 너무 아파서 슛 연습을 채 마무리하지 못 하고 돌아왔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종수 자신이 미국행을 택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봤다. 몇 시간을 생각하다가, 그 생각을 하기가 싫어서 핸드폰을 들여다 봤다가, 또 각성해서 잠을 놓치고, 불면은 제 옆에서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종수는 새벽 다섯 시에 눈 밑이 시커매진 홀쭉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손을 들고 존나 피곤한 제 얼굴을 향해 웃지도 않고 하이, 연습을 해봤다. 이 괴리감과 회의감을 토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사를 잘해야 농구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이곳에서 종수 제 위치를 실감하고 나면 같은 팀 부원들에게 인사라도 잘해야 할 것 같고 그렇다.

종수는 유튜브 시청기록을 한참 뒤져 어제 잠깐 봤던 준향대 경기를 재생했다. 작년 6월 경기였다. 그렇다면 올해도 경기를 하고 있나. 종수가 한국을 떠날 때부터 지금 껏 이어지는 인연은 이규 한 명 뿐이다. 나중에 이규 영상도 찾아봐야지, 마음먹었다. 이규는 주익대에서 새로운 농구부에서 새로운 부원들과 잘 지내겠지. 프로 준비도 착실히 하겠지. 이규처럼 성실한 애는 또 없으니까. 무엇보다 매일 같이 나랑 일대일을 해왔는데 선배들도 이규랑 일대일 하면 못 이길걸.

인연은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고, 이별이 있으면 새로운 만남도 있는 법인데 종수는 그런 건 다 모르겠고 그냥 붕 떠버린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사회적 인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팀에서도 그저그런 그런대로 봐줄 만한 동양인 선수에 불과하다. 한국에 있었으면 달랐을까.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후회와 미련이 쌓여간다.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다 쓸데 없어. 이제 그만 생각해야지, 견고하게 자리 잡은 생각을 밀어뜨려 버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하지 않은 길이었어. 뒤돌아볼 가치도 없는 길이야. 모두가 미국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데. 한국에서 농구로 미국에 간 사람도 몇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이건, 이규가 고1때 스카웃 제의 받았다던 B고와 장도고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준의 비효율적인 에너지 낭비일 뿐이야.

하지만 B고 농구부에 간 이규가 지금보다 농구를 더 잘할 수 있었다면? 말도 안 되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인지는 종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종수는 모른다. 모르는 일에 종수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종수는 고등학교 일학년 경기 때, 경기장 바깥에서 만난 중학교 농구부 동창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아직 기억한다. 아 씨발 뭐랬더라. 막상 떠올리려니까 또 뉘앙스와 그때 느꼈던 울렁거림만 선명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은 또 싹 날아갔다. 왜 좆같은 기억은 예리하고 깊게 파고 들어 종수에게 흔적을 남겨놓을까. 종수가 기뻐하는 감각들은 그토록 허무하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데.

생각이 많은 것은 죄악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이 가진 대죄 중 하나일 것이다.

2-B

대학교에 입학하고, 농구부에 입단 후 제일 눈치 보이는 건 다름 아닌 매니저의 눈총일 것이다. 매니저는 박병찬만 겨눠서 한참을 뚫어지게 보았다. 고백 받고 점잖게 거절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것 때문에 저러나.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박병찬도 내버려두는 스타일이라서 따로 대화를 나눠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렇게 온갖 감정이 뭉쳐서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애들 한 둘이 아니긴 했다. 그 중에서도 최종수를 생각했다. 그애의 눈빛은 특별한 빛을 발하며 박병찬을 응시했는데, 최종수 걔도 알았을까. 자기가 맨날 사람 뚫릴 듯이 빤히 보는 습관이 있다는 걸. 타인은 너에게 조또 관심이 없어, 병찬아. 하고 중얼대며 내 자의식과잉이려니- 하고 넘겨도 어느 순간 최종수와 눈길이 겹친다는 것을. 의식하려 하지 않아도 서로의 시선이 공중에서 떡하니 마딱뜨려 버린다는 것을. 할 말 있나? 형아가 말이라도 걸어줄까, 다가가면 쌩 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박병찬은 최종수가 두려움 많은 어린 사슴 같다고 생각한 것을.

구내식당에서 밥을 푹푹 퍼먹다가 박병찬은 멍하니 주변을 살폈다. 고개를 들면 최종수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이었는데 아니다. 최종수와 더 많이 경기를 뛰었으면 좋았을 테다. 장도고가 조형고와 붙을 일이 드물기도 했지만 정말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고등학교 시절 박병찬은 정말로 장도고 최종수를 오래 기다렸다. 거의 짝사랑에 가까운 심정으로.

3

박병찬의 대학농구 영상을 보다가 잠드는 게 두 번째에도 효과를 발휘했다. 종수는 이번에도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이불 위에 충전기를 꼽은 핸드폰, 무선 이어폰은 양쪽 다 벗겨져 이불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침인 줄 알았는데 양치질을 하다가 본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를 보고 종수는 눈을 크게 끔벅거렸다.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1시 25분이었다.

체육관 내부에 따로 설비 되어 있는 트레이닝 룸에서 런닝하고, 다친 손으로 물건 잡기가 어려워 하체와 복근 운동을 끝냈다. 종수의 의식 아래에서부터 오늘은 반드시 공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발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첫날 손톱이 깨지고, 어제 이틀째는 통째로 쉬었고 오늘이 사흘째다. 그 감각은 가슴 아래까지 찰랑거렸지만 약지의 통증이 순간적으로 어깨를 타고 넘어가는 바람에 완전히 체념했다. 샤워를 하려고 밴드를 벗긴 약지 손가락은 퉁퉁 부어 있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에 닿기만 해도 쓰라렸다. 이리저리 만져 보는 것만으로 이마의 힘줄이 섰다. 다행이도 손톱이 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종수는 혼자 캠퍼스를 걸어다녔다.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몸이 멀쩡했다. 그러다가 학교 캠퍼스 동쪽 끝에 있는 인공호수 근처로 걸어갔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고 바람이 많이 불어 시원했다. 종수는 연습이 없는 날에는 인공호숫가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이 지역이 사시사철 날이 좋아 풀도 길게 자라고 나무도 크고 벌레도 크고 쥐도 잉어도 커다랬다.

종수는 이곳에서 농구가 아니면 할 일이 없었다. 농구만 죽어라고 할 생각으로 왔는데 사람들이 친절해서 손톱 하나 깨졌다고 휴가를 준다. 이러니까 농구를 하다가 죽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 거다. 아빠도 NBA 가서 죽지도 않고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던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소염제를 꺼냈다. 할 알씩 뜯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종수는 힘으로 눌러서 포장을 찢었다. 알약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카페테리아 내부 베이커리에서 사온 식빵을 물어 뜯었다. 빵은 한국에서 쉽게 먹을 수 있던 빵과는 다르게 퍽퍽하고 오래 씹어야 했다. 목이 금방 메어왔다. 종수는 식빵을 먹다가 잘게 찢었다. 인공호수 가까이에 다가가 슬쩍 내려다 보았다. 물이 투명하고 깨끗하게 관리 되고 있었다. 그 속에 알록달록 빛나는 잉어들이 살고 있다. 종수는 인공호수에 빵가루를 던져주었다.

물가 가까이에 앉았다. 엉덩이가 젖는 느낌은 없었다. 오른손으로는 빵 봉지를 잡고 왼손으로 불편하게 빵을 찢어 먹었다. 켈록켈록 기침이 나서 다시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가만히 앉아서 무릎을 다치지 않은 박병찬을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장도고 검은색 저지를 입은 박병찬은 또 어찌저찌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가 제 선배였을 걸 생각하면 기분이 팍 상해버리고 말았다. 주먹 사이사이로 식빵이 흘러낼 만큼 힘조절이 안 된다. 종수는 식빵을 또 북북 찢고 찢어서 호수에 뿌려준다. 주머니가 진동으로 징 울렸다. 누구지. 코치인가. 아니면 엄마나 아빠. 아 그런데 거기 지금 새벽 아닌가. 그럼 학교 자체에서 보내는 연락, 아니면 핸드폰을 개통한 가게에서 보내는 마케팅 관련 수신 문자, 그것도 아니라면 이규나 장도고에서 알고 지내던…….

[미국에서 농구하고 있는 슈퍼루키 최종수 카카오톡 맞나요?]

다 틀렸다. 박병찬에게서 온 연락이다.

종수는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다시 정신이 들어 급한 손길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박병찬은 카카오톡 저장된 이름도 정직하게 박병찬이다. 종수는 박병찬의 카톡을 읽어도 답장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먼저 파악해야 했다. 귀신 같아서 소름이 끼친다. 어쩌면 귀신이 아니라면 텔레파시. 다시 종수의 손바닥에서 핸드폰이 그 미지근하고 각진 몸을 징, 떨었다.

[맞겠지 뭐 규한테 받은 연락처인데ㅋㅋ]

[야 너 카톡 왜 읽씹하냐?]

그런데 텔레파시라는 건 경험해본적도 없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하물며 그런 게 종수와 박병찬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게 믿기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귀신. 종수는 이 연락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또 지잉, 핸드폰이 종수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어째서 식은땀이 나는 걸까. 종수는 제 발 밑에 모여든 잉어들의 지느러미가 튀기는 물방울이 거센 항의처럼 느껴졌다. 빵을 더 달라! 일용할 양식을 더 달라! 왜 그때 그렇게 말했는지 박병찬을 추궁하라! 네가 무슨 고생을 해봤겠냐고 납작하게 판단하던 스물한 살 박병찬을 타도하라! 타도하라!

[이번엔 안 읽씹이냐? 거기 오후 7시인 거 다 안다.]

아랫배가 싸늘해진 종수는 식빵 봉지를 주섬주섬 잠그고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단숨에 핸드폰 액정을 켜고 카카오톡 어플을 눌러 가장 상단에 있는 박병찬과의 채팅창을 눌렀다. 보이스톡을 이용하여 전화를 걸었다. 산뜻하고 익숙한 리듬이 핸드폰에서 흘러나온다. 가슴팍 아래에서부터 넘어오는 숨이 씨근덕거렸다. 박병찬은 전화를 금방 받았다.

[“어? 최종수? 갑자기 전화는 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뭐, 뭐, 뭐가? 나 뭐 잘못했나? 읽씹했다고 뭐라고 해서? 미안하다. 아니 난 그저 안부 물으려고.”]

“왜 내가 고생 안 했다고 말해? 네가 날 알아?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어? 어엉?”]

“사과해, 나한테. 당장. 그렇게 말한 거 사과해!”

[“…… 진짜 갑작스럽고 네가 하는 말 지금 하나도 모르겠지만 형이 미안하다 종수야…….”]

“박병찬 XX 같은 XX! 너만 아팠고 너만 고생하고 너만 힘든 줄 알지? 이 이기적이고 XXXX 같은 X XXXX XXX……”

[“종수야. 일단 진정하고.”]

흥분한 종수는 얼굴이 시뻘게진다. 지나가는 학생들도 많고, 저녁이긴 하지만 아직 날이 밝았고, 종수는 백구십 센티미터에 몸무도 약 백킬로그램이 나가는 커다란 동양인 남자였다. 외적으로도 행동적으로도 너무 눈에 튀는데 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오른손 약지가 너무 아픈 이유가 아니다. 남탓을 거의 하지 않는 종수였지만 이번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종수야 울지 말고 무슨 말인지 말해보라니까?”]

이건 박병찬 때문이다. 전부 다.

3-B

박병찬은 기숙사 건물 비상계단에 앉아서 통화를 이어갔다.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은 발등을 내려다보았다. 울리는 보이스톡에 놀라서 정신없이 나오느라 룸메이트 슬리퍼 한쪽과 제 슬리퍼 한쪽을 꿰차고 나와버렸다.

“아, 그때 내가 유스캠프 때…… 으응. 아니 기억 못하는 거 아냐. 어? 아아…… 나보다 네 기억이 정확하겠지. 어어. 아니 대충 말하는 거 아니고. 종수야. 미국 생활 많이 힘들어? 오늘 뭐 했어. 뭐? 아, 손가락? 뼈 다친 건 아니지? 응……. 응응. 응 그래……. 걱정했네. 크게 다쳤다고 말할까 봐 내가 다 쫄았다. 그치 종수야…… 응. 너 고생 많이 한 거 내가 알지이. 그럼. 그냥 그때는, 종수야 형이 그때는 마음에 여유가 많이 없었던 것 같아. 왜 그랬냐고? 대학 때문에 그랬지. 미안하다. 그러니까 울지 말고. 응. 아 안 울었다고? 알겠어. 너야 뭐 언제나 문제가 없었으니까. 밥은 먹었어? 거기 저녁 시간이잖아. 식빵? 으응. 잘 챙겨 먹지. 나? 나는…… 알아서 잘 먹었어. 응.”

박병찬은 반쯤 감긴 눈으로 콧등을 긁었다.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했다. 전화 너머 울먹이던 최종수는 알아채지 못한다.

4

한 번 유튜브에 뜨기 시작한 박병찬의 경기 영상은 꽤 오랫동안 내려가지 않았다. 댓글을 보지 않으려고 해도 습관처럼 밑으로 쓱 내렸는데 얼굴 얘기가 태반이었다. 농구선수한테 얼굴 이야기만 하다니. 왜 경기력에 대해서는 말이 없지. 박병찬의 농구 실력이 얼굴에 밀린다고?

종수는 이유도 모르게 불쾌해져서 작은 냉장고 문을 열어 칼슘 함량이 높은 우유를 꺼냈다. 우유에 붙은 스티커에는 칼슘이라는 단어와 박병찬의 아이솔레이션 사인인 따봉을 한 젖소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여기저기 박병찬이네. 아주 난리다. 종수는 냉장고 위의 쟁반 위에 엎어둔 유리컵을 들었다. 오른손 약지 끝이 스쳐서 인상을 찡그렸다. 우유를 컵에 부어 마셨다. 컵 한쪽을 딱딱 깨물고 내려놓았다. 종수는 준향대 경기 영상 밑의 댓글창에 손가락을 올렸다. 박병찬에 대한 댓글을 남기려다가 할 말이 없어져서 관뒀다. 박병찬 욕만 쓸 게 뻔하다. 이 사람 후배들한테 치킨 쏘더니 마음에 안 드는 사람한테는 목 뼈만 주더라. 박병찬에게 종수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인가. 애초에 박병찬이 종수의 이름 뒤에 꼬리표 붙일 만큼 최종수라는 인간에 대해 호불호가 있기는 한가. 종수는 우유를 한 컵 더 마시지 않고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

아침 여덟 시에 종수는 기숙사를 빠져 나왔다. 이 시간에도 학교에는 사람이 있었다. 멀리서 해가 떴는데도 잔디가 이슬에 젖어 있었다. 종수는 인공호수 근처에 섰다. 이번에도 푸석푸석한 빵을 손으로 잘게 찢어 호수에 뿌려주었다. 질긴 빵을 한참 나눠먹고 있는데 누군가 종수의 곁에 다가왔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교내 미화원이었다. 그는 땅딸막한 키에 붉은 얼굴을 가졌고 눈썹이 짙고 치켜 올라가 있어서 종수에게 화가 난 건지 원래 표정이 그런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혀 종수에게 무슨 말을 했다. 멈칫거리던 종수가 빵봉투를 손으로 움킨 채 교내 미화원의 억양이 심한 발음에서 단어를 놓칠까 조마조마하며 귀를 기울였다. 교내 미화원은 종수에게 이 학교 학생인지 물어보았다. 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한층 사나워진 얼굴로 인공호수의 잉어들에게 빵을 던져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너는 지금 식빵일 뿐이지만, 어느 멍청이들은 핫도그 소시지나 반쯤 마신 콜라를 던져넣기도 한다고. 그러니까 그 빵은 네가 먹든지, 교내 쓰레기통에 가져가서 버리라고 했다. 종수는 잘 몰랐다. 미화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종수의 곁을 떠났다. 뒤돌아보지 않고 그가 손에 쥔 크고 까만 비닐봉지를 고쳐쥐었다.

미화원이 떠난 후 종수는 제 손에 들린 유통기한 남은 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빵이 바닥에 깔린 다섯 장 정도 남았다. 일반 남성보다 커다란 손의 한 뼘 정도 쌓여 있던 식빵을 전부 다 잉어에게 뿌려준 셈이었다.

쓰레기통에 던져두면, 비둘기가 와서 먹으려나. 교내 청소하는 분들께 민폐인 건 아니려나. 종수는 빵 봉투를 빙글빙글 돌려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묶어두었다.

4-B

“병찬이 형 어디 갔어?”

“고기 굽다 말고 갑자기 전화 받으러 나가던데?”

“오오, 여친 생겼나. 사진 본 적 있어? 그 형 뭔가 얼굴 많이 봐서 예쁜 사람이랑 사귈 것 같던데.”

“아 그래? 난 그 형이랑 여자 관련으로 얘기 해본 적이 없어서.”

“몰랐냐? 그 형 카더라 하는 소문 되게 많아. 고등학생 때부터 졸라 예쁜 유부녀랑 사귀었다고.”

성준수가 젓가락을 들고 앞에 놓인 계란말이를 퍽 찔렀다.

“그런 얘기 재미있냐? 당사자 앞에 놓고 말 못할 얘기는 하지 말지, 우리?”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데에 탁월한 소질이 있는 성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란말이를 으적으적 씹었다. 갑자기 누가 또 딴소리를 했다.

“그 형 전에 매니저누나 고백,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래서 요즘 그 누나 표정 안 좋았나.”

“모르지. 솔직히 그런 거 무시한다고 해서 병찬이 형이 손해겠냐, 그 누나가 손해겠냐. 매니저가 선수 컨디션 망가뜨릴 수도 없고. 뭘 할 건데.”

“아 근데 전화를 언제 받으러 갔는데 아직도 안 와?”

“우리 먼저 먹어도 되나?”

물 한 모금 마신 성준수가 개의치 않고 젓가락을 들어 구운 삼겹살을 집었다.

“그 형 미국에 사는 멘탈 X신 된 씨XX랑 통화 중이니까 그냥 우리끼리 먹어.”

5

혼자서 잘해낼 수 있는 경기를 하려면 처음부터 1인 스포츠를 했어야 했다. 종수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침대에 엎드렸다.

[종수야, 형아가 명곡 보내줄게]

[지오디 - 길]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가사 곱씹어서 들어봐~]

종수가 웬일로 착실하게 대답했다. [박병찬 꺼져.] 노란 말풍선 옆에 붙었던 1이 곧바로 사라진다. 박병찬도 금방 답변했다. [최종수 왕싸가지ㅗ]

*

유스캠프 때 박병찬이 ‘지금의 우리가 갈림길에서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이야기 하자!’ 했을 땐 분위기가 가벼워서 그랬던 걸까. 사람이 많았던 덕분이었나. 걔가 그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서 얼결에 흘러간 걸까. 뭔 그런 얘기를 하자고 해요, 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고 모두가 순순히 그들 앞에 놓였던 갈림길을 떠올렸던 덕분일까. 그때는 놀이처럼 느껴지고 실제로도 놀이였는데. 그냥 다들 ‘이미 흘려보낸 것들을 굳이 건져와야 하나?’ 하는 의문까지 드는 말투와 목소리로 최대한 건성으로 대답했던 것만 같은데. 아무래도 주제가 찜찜하게 남은 과거의 선택이니까 혹여나 분위기가 어두워질까봐 말을 꺼낸 박병찬이 양념처럼 농담도 던져서 분위기도 적당히 부드럽게 흘러갔은데.

왜 종수가 생각하는, 종수가 선택하지 않은 과거의 갈림길만 돌이키면 기분이 좆같아지는 걸까. 왜 종수는 그것을 ‘놓쳤다’고 생각하게 될까. 곰곰이 생각해도 답도 없고 짜증만 솟구친다.

이불 안에서 뒹굴거리던 종수는 확 깨닫고 만다. 이규는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도 B고등학교 스카웃을 갈림길로 둔다는 거구나. 그게 고교 졸업을 앞둔 자신의 커다란 갈림길이었다고, 그 길을 갔으면 어땠을지 한 번쯤은 웃으며 돌이켜본다는 것이구나. 그 좆같이 못하는 농구부에 들어가면 어땠을까 하고. 종수는 이규에게 당장이라도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래도 채팅창이 최근 목록에 있었다. 종수는 빠르게 엄지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규. 너 정말로 그때. 거기까지 쓰고 다 지운다.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거 고1 때 스카웃 제의 받은 거잖아. 이규는 이제 주익대 대학농구부에 있고. 아직도 거기에서 허덕이며 못 빠져나오는 건 종수 자신이었다. 종수는 어딘가로부터 숨고 싶다. 가능하다면, 자기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남이 가지 않은 길에도,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도 이토록 집착하며 애타게 궁금해 하다니. 손가락을 다치지 않았어야 했다. 농구 훈련을 빠져서 그렇다. 농구를 못하면 생각이 증식하고 부풀어 종수의 몸을 짓눌렀다.

지금 한국에 돌아가면 NCAA 디비젼Ⅰ에서 지금까지 뛴 경력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여기에 더 오래 붙어 있으면, 더 견뎌보면, 참으면, 인내하면…….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다. 종수는 후회가 무섭다. 미련도 지긋지긋하다. 언제까지 방황할까. 팀에 도움이 되고 있긴 한 걸까. 에이스도 아니고 주전도 아니고. 점수차 30점 넘게 나는 경기에서 주전 들여보내고 벤치에 앉아 있다가 급하게 몸 덥히고 나오는 선수가 나인데. 종수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앞에 놓인 길이 무엇인지도. 걸음마를 막 익힌 아이처럼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마저 잊었다. 짚고 일어설 도구도 없다. 한치 앞도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미래는 캄캄하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평생을 준비하며 살아왔는데도.

종수는 박병찬이 보낸 2001년도에 발매한 남자 그룹 가수의 노래를 들어보지 않았다.

5-B

박병찬은 훈련에 충실히 참여했다. 경기 성적도 이 정도면 꽤 괜찮다. 매니저와의 사이도 여전히 썩 좋지 않았다. 박병찬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여서 매니저에 관한 건 일부러 모른 척한다. 이번에는 뭔가 좀 풀릴 것 같다며 기뻐하는 감독과 코치들의 대화에서 제 역할을 잘 한 것만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초조하게 농구하던 시절이 있다. 고등학교 때 잠깐 그랬다. 좁은 책상에 엎드려서 더는 운동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 잡았던 시기도 박병찬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박병찬은 수술자국이 남은 오른쪽 무릎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 때 박병찬은 농구를 선택하지 않는 길도 걸을 수 있었나. 박병찬이 정말로 ‘선택’할 수 있었던 걸까. ‘선택’ 후의 갈라진 다른 쪽의 길의 풍경이 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박병찬은 그런 게 궁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는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다는 착각이 있었을 뿐이다. 갖고 싶어도 주어지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선택할 수 없었지 않나. 그러니까 갈림길도 없었던 것이다. 그 길을 가거나 가지 않거나. 어라 잠시만. 그것은 그럼 또 선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박병찬은 농구와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을이 되어버리고 만다. 선택하지 않아도 저절로 낮은 자리에서 애정을 바랐다. 그래서 혼잣말이 늘었다. 괜찮아. 박병찬 괜찮아. 나 농구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아. 농구 때문에 무릎을 다쳐놓고, 아직도 농구를 하면서, 대학농구로 선수활동까지 하면서, 더는 무릎이 아프지 않길 원한다고 한들…… 뭐 그게 박병찬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6

빵 조각을 주면 안 된다고 해서 더는 제 손에 빵이 없는데도, 잉어들은 연못 근처에 선 종수의 인기척에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잉어들은 부지런히 물결을 일으키며 헤엄친다. 해가 비쳐 잉어들의 지느러미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호수의 수초들이 잉어들의 움직임에 흔들렸다. 종수가 던져주던 빵 덕분이었을까. 종수는 인공호수 속 잉어들과 제법 친근해졌다. 등의 점박이로 누가 누구인지 대충은 알아챌 수 있었다.

종수는 차라리 잉어가 되고 싶었다.

동물로 태어나 제 명대로 살며 주제파악 따위 할 일 없이 멍청하게 빵쪼가리나 찾으면서 입을 뻐금거리면 어땠을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의 형태로 기능한다는 것은 종수에게 가끔씩 버겁고 종종 어렵고 이따금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종수 자신은 빵조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잉어가 아니었을 것이다. 잉어로 태어나서 잉어의 삶에 한탄하는 종류의 개척자이길 원했을…… 종수가 바란다고 해도 잉어가 되지도 않고 될 일도 없는데 또 생각이 길어졌다. 종수는 찰랑이는 물 속에서 유연하게 헤엄치는 잉어의 등뼈를 바라보았다.

종수는 박병찬의 단순함이 좋은 것 같다. 그런 결론에 다다른다. 박병찬의 단순함, 생각 없음은 정말로 타고나길 무심한 게 아니라 모든 걸 다 겪고 홀가분하게 털어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건강함과 결을 같이 했다. 종수는 그게 부럽다고 생각한다. 박병찬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대화의 흐름이 구덩이로 빠지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형태지만 완만히 흘러갔고 그 완만함의 끝에 도달하면 종수의 머릿속은 정적이 찾아온다.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켜켜이 쌓인 모든 것을 박병찬에서 전부 토해내고 마음 편히 잠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쁘지 않다. 박병찬은 괜찮다는 말을 많이 해줬는데 그 때문인지 종수도 혼자 괜찮다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농구하는 박병찬이 아직까지 종수의 투정을 받아줬고 종수는 그로 인해 편안하다. 하지만 이제 박병찬이 피곤하고 지치면. 더는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불치병처럼 끈질기게 무릎이 아프고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게 되면.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다가 뚝 멎는다. 귓가에 이명이 사이렌처럼 퍼졌다.

종수는 인공호수에 몸을 던져, 잉어들이 바글바글 모인 에메랄드 빛 물속을 헤엄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머리를 흔들어 떨쳐냈다. 종수는 수영에 자신이 없었다.

*

[너 내가 보낸 노래 안 들어봤지? 감동의 눈물 이모티콘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도 연락이 없어서.]

종수는 대답 없이 박병찬이 보낸 노래의 링크를 누르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서정적이고 느린 박자의 노래였다. 언젠가 들어본 적도 있는 듯했다. 종수의 세대가 아니긴 하지만 지오디는 꽤 유명하지 않았나.

손가락을 잘라내야만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을 만큼 아프던 약지가 슬슬 괜찮아진다. 아프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상처는 아문다. 종수도 대한민국 장도고 최종수에서 NCAA 디비젼Ⅰ에서 활약 중인 최종수 선수가 되었는데. 흘러가는 시간의 힘이란 그만큼 강렬한 데도 종수는 갈림길이라고 여겨진 길 앞에 거꾸로 매달려 고통 받고 있었다. 사실 갈림길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라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와야 했을 거야. 종수는 베개에 머리를 기대 다듬지 못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내일은 이발을 해야 했다.

종수는 이런 노래를 들어보라고 추천하는 박병찬의 선곡과 센스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박병찬의 단순함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은 취소다. 너무 싫어. 너무너무 싫어. 싫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게 답답할 만큼 싫어. 그러면서 노래는 또 종수가 핸드폰을 엎어두면서 뭘 잘못 건드렸는지 한 곡 반복으로 흘러나온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6-B

“여보세요. 종수야. 통화해도 돼? …… 어? 벌써 자? 아이고 깨워서 미안하다. 어어, 잘 자.”

7

종수는 약지에 감겨있던 세 장 씩 덧댄 밴드를 풀었다. 밴드를 손으로 뭉쳐 방 안의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에 자란 제 손톱도 티슈를 깔고 반듯하게 잘랐다. 아빠가 일본에서 사온 손톱깎이를 미국까지 가져온 게 종수 나름의 소소한 행복였다. 일본제 손톱깎이는 핸들처럼 움직여 매끈하게 손톱이 깎였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다 매만진 후 종수는 티슈를 꼭꼭 뭉쳤다. 세면대에서 흐르는 물에 손을 꼼꼼하게 씻은 후 핸드타올에 닦아내며 어딘가에 던져뒀을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열자 가장 마지막에 켜놓았던 카카오톡 화면이 액정에 떠올랐다. 박병찬과 주고 받는 채팅방이다. 종수는 심호흡을 후 내뱉고 박병찬, 이라고 이름 석자를 쳐서 메시지를 보내놓는다. 그리고 또 채팅 창에 혼자 도각도각 손톱을 부딪치며 할 말을 적었다. 전송 버튼을 아직 누르지 않고 기다린다. 1이 사라지고 박병찬에게서 답변이 왔다.

[야, 너 대체 싹퉁바가지 어쨌냐고ㅋㅋ 형이라고 안 부르냐? 어 근데 왜.]

박병찬이 나이로 한 마디씩 하는 건 아무런 타격 없다. 무시도 가능하다. 종수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너 아직도 장도고에 왔으면 어땠을지 생각해?]

박병찬은 좀 당황한 듯했다. 언제적 이야기를 아직도 하나 싶은 모양인지, 보지 않아도 핸드폰을 붙들고 눈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데굴 굴리며 답변을 생각하는게 종수 눈에 선했다.

[엥? 아니. 종수야 형아 이제 대학생이다ㅋㅋㅋ]

솔직하게 적힌 답을 전송 받자 종수는 조금 기운이 빠졌다. 나는 너 장도고에 왔으면 어땠을지, 주익대에 보낼지 가을까지 준비시켜서 미국에 보낼지, 그런 것까지 생각 다 해 봤는데. 네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나 혼자 헤쳐서 가느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이제 남아나지를 않는데. [이제 그런 생각 안 한다고?] 메시지를 보낸 후 종수는 왼손으로 오른손 약지를 꾹꾹 눌러본다. 미세한 아픔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98퍼센트 회복했다고 보면 된다. 정수리에 난 머리털까지 삐죽이게 하던 통증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소염제와 소독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당분간은 깨진 손톱이 더 벌어지지 않도록 밴드를 붙이고 다녀야겠지만 한장이면 충분한 것이다.

[엉. 와이??? 내가 생각해야 돼??? 아 요즘은 그거 말고 딴 생각해ㅋㅋ]

[너 따라서 미국 갈 걸, 하고~~]

오만상을 찡그리던 종수의 얼굴 근육이 스르르 풀렸다. 종수가 손가락을 머뭇거리는 동안 톡이 띡 올라온다.

[그런데 안 따라가길 잘 한 것 같아. 미국은 의료보험이 안 되잖냐ㅋㅋㅋ 무릎 나가리 되면 또 어떨지 모르는데. 한국에 콕 붙어 있어야지~]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솟는다. 얼굴 안쪽이 확 더워졌다. 박병찬은 유치하고 졸렬하다. 종수는 또 냅다 박병찬에게 보이스트톡을 걸었다. 띵리링띵 띵디링 띵띵. 띵리링.

[“여보세용?”]

“고작…….”

분명히 화를 낼 목적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나오는 목소리가 시무룩해서 종수 자신도 놀랐다.

[“응?”]

“너 고작 그런 이유로.”

[“어어. 종수야. 너 또 목소리가 왜 그래.”]

“고작 그런 이유로 미국에서 농구하는 걸 포기한다고?”

[“야 최종수.”]

종수는 부끄러웠다. 박병찬에게 연락이 온 이후로 종수는 계속 취약하다. 커다란 몸을 숨기지 못하고 전부 무방비하게 드러내 버리는 듯했다. 그래서 박병찬에게 화가 난다. 뭐든 다 제가 맞는 것 같고 박병찬은 다 틀린 것 같았다. 분명히 종수도 박병찬의 의지가 강하고 굳센 모습이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수는 혼란스럽다. 제 마음을 하나도 모르겠다. 그런 걸 명확하게 알기엔 종수는 너무 제 생각에 빠져 살았다. 박병찬의 그럭저럭 괜찮은 일상이 종수의 불행일 수는 없는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종수는 얼굴 안쪽이 뜨거워진다고 느꼈는데 그 열감이 눈썹과 눈꺼풀 뒤쪽으로 몰려들었다. 어깨를 움찔거리고 코가 절로 훌쩍거렸다.

“박병찬 너 거기서 행복하게 농구하지 마.”

[“아이고, 알았다. 종수야 알겠으니까.”]

“재미있는 농구도 하지 마.”

[“으응, 그럴게.”]

“야 박병찬,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라니까.”

[“형아 완전 진심이다, 종수야. 요즘 농구 딱 재미없었거든? 최종수 족집게네, 완전히. 자리 깔아라.”]

최근에 올라온 영상에서도 박병찬은 농구코트에서 존나 날아다녔다. 그러니까 지금 저 말은 박병찬의 개소리다. 종수를 달래려고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이었다. 종수가 사람을 그리워한다고 지금 그것을 약점을 잡아, 되는 대로, 입 열리는 대로, 뚫린 주둥이라고 마구. 종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박병찬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어보았다.

[“종수야. 그런데 너 농구 좀 재미있어 하면서 미국 간 거 아니었어? 더 재미있으려고?”]

그 말에도 종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허를 찔렸다는 생각보다는 박병찬이 무례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종수가 떨리는 숨만 내쉬고 별 다른 말이 없자 박병찬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 할 말을 또 툭 던졌다.

[“거기 새벽이지?”]

“어.”

[“잘 거야?”]

“응.”

[“잘 자라.”]

“…… 박병찬.”

[“엉?”]

“보이스톡 끊을 거야?”

박병찬이 대답 대신 엥?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전화 너머에서 부시럭부시럭 소리가 났다.

[“나랑 더 할 말 있어?”]

“너 지금 뭐 하는데.”

[“나? 너랑 톡하기 전에는 책 읽고 있었어.”]

“무슨 책.”

[“뭔 취조하냐. 어…… ‘누가 최종수 머리 위에 똥 쌌어.’ 들어본 적 있어?”]

“야. 그런 책이 어디 있어.”

[“작가는 나랑 동명이인인 박병찬이야. 우리 종수, 이 책에 대해 들어본 적 없구나. 완전 베스트셀러인데.”]

훌쩍이던 종수가 픽 웃었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병찬도 낄낄 웃었다.

[“거 봐. 역시 국적불문하고 애새끼는 똥이랑 방구 이야기에 넘어간다니까.”]

박병찬의 말은 매번 종수의 심기가 거슬린다. 젖은 얼굴에 얕게 피어오르던 웃음이 싹 들어간다.

“씨발.”

[“종수야. 너 미국 갔더니 입이 걸다, 응? 욕을 왜 하냐?”]

“끊어.”

종수는 무표정하게 보이스톡 빨간 버튼을 눌러 통화를 끊는다. 이불을 끌어와 목까지 덮었다. 박병찬이 메시지를 보냈는지 징, 하고 핸드폰이 두 번 정도 더 울렸다. 종수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7-B

[종수야]

[형아가 잘못했당]

[종종종쪼ㅈ쫑조조종수야]

[아 방금 위에 톡 보내면서 큰 실수 할 뻔ㅋㅋ]

[잘장ㅋㅋㅋ 난 운동하러 가께]

0-B

다음 날 새벽, 화장실에서 속옷과 타이즈 빨래를 마치고 돌아온 박병찬의 핸드폰이 때마침 징- 울렸다. 최종수가 보낸 사진 한 장이 카카오톡으로 띡 전송되었다. 박병찬은 시계를 확인했다. 미국이 지금 몇 시더라. 저도 모르게 또 픽 웃고는 젖은 손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낸다. 기숙사 방 창가 밑에 건조대를 펼친다. 빨래를 탈탈 털어서 가지런히 널었다. 제 자리로 오니 다시 한 번 핸드폰 진동이 징- 울렸다.

박병찬은 핸드폰 화면을 열어서 카카오톡 메시지를 눌렀다. 최종수가 보낸 사진과 메시지였다.

사진은 눈이 퉁퉁 부은 최종수 본인의 더럽게 못 찍은 셀피였는데, 뒤로 보이는 배경이 옥색 빛깔 물결의 인공호수였다. 물이 깨끗해서 사진으로 보고 있자니 놀랍기만 했다. 와, 얘 다니는 학교에 호수가 있어? 물 색깔 봐. 관리도 장난 아니다. 박병찬은 사진을 키웠다가 줄이며 순진하게 감탄했다. 인공호수 속에는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의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었고 최종수의 다른 한손에는 찌그러진 식빵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그 안에 빵가루가 조금 남아있긴 해도 빵은 없었다.

흰색 말풍선에 적힌 말은 바로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이거 마지막이야. 이젠 안 해. 그런데 너였으면 잉어한테 빵 몰래 다 줬을 것 같아서.] 박병찬은 한참 종수가 보낸 메시지를 꼼꼼히 읽었다. 두 번 읽고 세 번 쯤 읽고도 못 알아 먹겠어서 손바닥으로 수염이 뾰족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턱을 슥슥 문질렀다. 뭐래는 거야. 얘 미국 갔더니 한국말 다 까먹었네. 흰 말풍선에 적힌 글자를 눈으로 한참 들여다 보았다. 그래서 이걸 대체 왜 보낸 거지. 얘 지금 나한테 하려는 말이 뭐야? 박병찬은 의아해 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러다 눈을 반짝인다. 캔버스에 흐트러진 점선들이 찍힌 그림 속에서 어떤 동물의 형태를 발견하게 되는 미술작품 앞에 선 것처럼, 최종수가 보낸 문장의 뜻이 박병찬의 뇌리에 콕 박힌다.

아.

아아.

박병찬은 활짝 웃으며 손으로 ㅋ 자판을 잔뜩 눌러서 메시지를 보냈다. 종수야ㅋㅋㅋㅋㅋ…….

최종수는 박병찬이 선택하지 않은 길의 아주 작은 틈새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진을 보내왔다. 내가 걷고 있는 이 호수도 너의 호수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나란히 서서 누가 볼까 무섭게 재빠르게 빵을 찢어 호수에 흩뿌리고 도망치듯 체육관으로 가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학교 호수 잉어들 다 먹여 키웠다, 종수야.’ 너와 내가 그런 우스갯소리를 하며 씩 웃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고 한쪽을 선택하면 필연적으로 미련이 남을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내가 경험하는 이곳의 경험을 너에게 사진으로나마 전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너도 이곳에 올 수 있었다’는 것을.

박병찬은 사진 속 퉁퉁 부은 최종수의 얼굴을 보며 혼자서 소리 죽여 킬킬댔다. 뻐근하던 무릎이 최종수가 보낸 사진 한 장에 싹 낫는 기분이었다. 최종수가 시작한 놀이였고 리딩 능력이 좋고 눈치 빠른 박병찬이 그걸 또 얼른 알아먹었다. 최종수는 그 많고 많은 말을 꾸역꾸역 사진 한장에 눌러담아 함축적인 메시지의 형태로 보낸다. 앞으로 최종수의 카톡방에는 사진이 자주 전송 되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히려 좋다.

[우리 종수 개떡같이 톡 보내도 형아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이렇게 투박하고 못생긴 방식으로, 온 마음을 다해 찍은 열렬한 사진은 박병찬의 취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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