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재아

01. 검은 눈과 노란 눈

“다울!”

저 멀리 혼자 걸어가는 회색머리 소녀를 불러세웠다. 높게 대충 묶은 포니테일이 그 아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메트로논처럼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다울이 내 목소리에 곧바로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니 긴 머리도 빙그르르 돌아서, 이젠 동그란 두상의 뒤통수가 아닌 노란 눈이 보였다.

“아, 재아야.”

나를 발견하고서야 살짝 웃으며 멀리 있는 날 기다려주는 그 아이가 좋아서, 나는 빠르게 달려가 다울에게 안겼다.

“여기서 만나네? 어디 가는 중이었어?”

“아, 그냥.. 서점에 들렀다 가는 중이야.”

다울이 자신이 안아든 책 몇 권을 들어올려보였다. 하나같이 길고 지루한 인생서적. 얘는 뭐가 좋다고 이런걸 사는건지..

문득 그저 웃음만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무것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무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보는 너는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였으니까.

“너는 어디 가는거야?”

“나는 꽃집 들렀어! 작약을 심어보려구. 5월엔 작약이 제일 아름답다잖아.”

“늘 꽃을 좋아하는구나.”

네가 ‘너 다워서 좋다’, 라는 시선으로 눈을 마주하며 웃어주었다. 처음엔 늘 무미건조한데다 짧게 툭툭 던지는 네 말에 당황했었는데 이젠 너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다른 친구들보다 더 편해졌달까? 속 빈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 좋아.

“작약이 피면 언제 한번 볼래? 집에 다른 꽃들도 많아!”

“좋아. 조만간 보고싶다. 먼저 가야해서 이만, 내일 학교에서 보자.”

그렇게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다울과 헤어졌다. 이제는 다울이 가끔 어느샌가 바쁘다며 자리를 피하거나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다울이 돌아서서 갈 길을 가려던 그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류재아?”

내가 늘 애정하는, 다정하고 세심한, 조용하고 부드러운 나의 소꿉친구이자 짝사랑 상대 강우주.

우연히 마주친 우리가 반가웠는지 우주의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다울이 다시 발걸음을 돌렸으나 표정은 늘 그렇듯 무미건조했지만 어딘가 알 수 없었다.

“재아, 또 꽃 사고 온거야?”

“응. 이번엔 작약꽃을 파종하려구!”

“작년엔 시기를 놓쳐서 못 키웠다는 그 꽃인가?”

“와, 기억하고 있네?”

사소하게 주고받는 대화가 좋았다. 우주와 함께 있다보면, 나는 어느샌가 들떠서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곤 했지.

“작약은 무슨 색이야?”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건 분홍색이야.”

“그래? 예쁘겠네. 너한테도 어울리겠다.”

너는 가벼히 한 말이겠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심박수가 올라가곤 해. 그렇게 무심하게 늘 나를 흔들어 놓고는,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만나 수다를 떨겠지. 그런 우리 사이가 편하지만 너에게 조금 더 욕심내고 싶고, 이 사이가 부서질까봐 안달나고, 그러면서도 또 갈망하게 돼.

“작약 피고 나면 너 몇 송이 줄게!”

“이미 네가 줬던 꽃들로 만든 책갈피가 많은데, 더 줘? 뭐 나야 고맙지만. ㅋㅋ”

이것 봐, 너는 또 아무렇지 않게 내가 줬던 꽃들을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며 나를 설레게 만들잖아.

“그럼 수고해라, 난 갈게!”

“응! 다음에 봐!”

너의 까만 눈동자를 꼭 닮은 꽃은 왜 드물까?

매일 보는 너와 눈을 맞추며 다음에는 검은 장미를 피워볼까, 그걸 한 송이라도 너에게 건넬수만 있다면, 그렇게 생각해버리지만 그것도 결국 수줍음에 못이겨 사그라들고 말아.

그래서 내가 건넬 수 있는 꽃은 작약이 전부인걸.

그런 내가 밉고 또 네가 좋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작약에 가려진 내 계획 속 검은 장미를 생각하며.

- - -

분홍 작약 꽃말: 수줍음

검은 장미 꽃말: 당신은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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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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