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청춘과 벚꽃의 계절

Finding L***

메이블 스튜어트와 악의 기원, 그리고 읽히지 않은 편지 (2)

※ 이 글에 등장하는 분과 학문적 지식은 단순히 서사 진행과 주제의식 표현을 위한 도구로, 전혀 학문적으로 고증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학문의 방법론과 연구 윤리를 밥 먹듯이 어깁니다. 판타지 아동 소설 기반의 2차 창작물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고 절대 현실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 오픈리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가 아닌 인물들이 미래 세대에 의해 미스젠더링(바이너리 패싱)됩니다.

※ 7학년 기간 중 역극 로그(https://glph.to/uiem2e) 일부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해당 부분은 *로 표시했습니다.

※ 창작 고유명사는 대부분 챗GPT로 만들었습니다.


나의 가장 찬란한 시절이 저들이 퍼올린 죽음에 뒤덮여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연후에 죽지도 못한 시체의 꼬락서니로 내 것 아닌 세계를 배회하면서 내가 가장 무서워한 것은 그곳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아시지요, 레아. 이 바다에서 죽음은 언제고 여상하게 찾아드는 일과와도 같았고 나의 끝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는 데 별다른 감흥도 느끼지 않을 만큼 나는 오래전부터 거기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뭍 위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그리 다른지, 그리도 달라서 그렇게 모두들 죽음은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외면하고 잊어버리기에 급급한지, 기실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평생 당신에게 그림자처럼 매달려 있던, 그 세상이 나에게도 또한 짐지우려 하는 그 죄악이라는 것의 무게를 나는 아마도 영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지요.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을 밀어내고 먹어치우는 법입니다. 인간만은 거기에서 예외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면 나는 필경 그들의 말대로 심연에서 올라온 괴물이 맞을 겝니다.

하지만 레아, 우리가 죽음을 흔쾌히 맞이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치임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강한 것도, 영원히 승리하는 것도 없으매 언젠가는 더 강한 것이, 더 영리한 것이, 더 다채로우며 아름답고 더욱 번영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나 그 자리를 빼앗게 되는 법입니다. 그것이 종이든지, 부족이든지, 개체이든지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빼앗음과 빼앗김의 끝없는 연쇄를 인간은 비극이고 야만이라 부를지 모르나 우리는 경이이며 마법이라고 부릅니다. 제대로 빼앗기는 것은 곧 미래의 양분 됨이며, 새로운 존재의 일부가 되어 함께 그 시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우리는 그런 것을 좋은 죽음이라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죽음에는 반드시 전력을 다한 투쟁이 선행합니다.

고향에서 밀려나고, 바다를 잃고, 기어이 표류자의 처지로 전락할 때까지, 한 번이라도, 한 순간이라도 그런 것이 있었다면 나는 납득하고 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싸움 비슷한 것조차 해보지 못했다고 느꼈으며, 이 썩어들어 제풀에 무너져가는 뒤틀린 세계가 더 나은 미래라고는 도저히, 도저히 여겨지지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나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를, 기실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를 원했습니다.

물 아래 것들이 어둠의 마법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는 오염된 심신은 섭취한 자들에게 저주를 전파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은 그 몸과 더불어 그것이 살린 생명들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아갑니다. 어둠의 마법사는 그 선순환에 동참할 수 없기에 비참한 존재, 유수한 시간의 흐름에서 내버려져 그늘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군락에서 사람을 해치거나 질서를 어지럽힌 중죄인들도 어둠의 마법은 두려워하고 꺼리는 연유가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레아, 고백하건대 그 때 나는 여기서 죽는 것이 그보다도 더 두려웠습니다.


잘못 온 것 같다. 메이블은 몇 층을 올라왔는지도 잘 알 수 없는 나선형의 계단을 몇 바퀴나 돌고서야 깨달았다. 아스테르가 말한 사무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좁은 탑 안에 사무실이 있는 복도 같은 게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어딘가 옆의 회랑으로 빠지는 통로는 있을지도…… 메이블은 끌어안았던 가방을 고쳐 메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반대편 벽에서 튀어나온 반투명한 사람의 형상에 놀라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길을 잘못 든 것 같구나. 외부인은 여기 들어올 수 없어.”

예스런 복장에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 유령은 공중에 떠서 메이블을 내려다보며 냉엄하고 도도한 말씨로 말했다. 메이블은 눈을 깜빡거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쩐지 알아볼 것만 같았던 것이다.

“혹시 당신이 래번클로의 기숙사 유령…… ‘회색 숙녀’인가요?”

“그렇다만.”

여자 유령은 별로 감흥 없는 얼굴로 대꾸했지만, 메이블은 반가움에 펄쩍 뛰어올랐다.

“세이지에게 항상 이야기 들었어요! 당신이 개인 서고의 책들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시고, 여러 가지 궁금한 것도 가르쳐 주셨다고요. 세이지가 만든 책을 당신에게 보낼 때 제가 부엉이 우체국에 같이 갔는데…….”

“세이지…… 아아. 세이지 앨머레즈? 그 애와 친구라고. 그래, 책이라면 잘 받았다고 전해주렴. 헨 홉킨스는 학생 시절부터 흥미로운 정신이었지.”

‘회색 숙녀’는 잠깐 기억을 더듬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메이블은 달아오른 뺨에 손등을 대고 식혔다. 동화책 속의 인물을 실제로 맞닥뜨린 기분에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리길 꺼려하지만 어린 독수리들에게만은 친절하다는 ‘회색 숙녀’는 어딘가 나사 빠진 교장과 쿠피예를 두르고 깃펜으로 말하는 관리인, 괴짜 기숙사 사감과 엄격한 도서관 사서와 더불어 호그와트 생활에 대한 세이지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등장 인물이었다. 머글 형제자매들을 여럿 두었고 머글 세계와 자신을 좀처럼 분리하지 못하는 세이지는 이 기상천외한 일들로 가득한 황홀한 세계에서 가슴 설레어하고 즐거워하면서도 나아갈 방향을 잡기를 어려워했다. 지식욕이 강한 ‘회색 숙녀’는 늘 세이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관심 있게 들어주었고, 세이지의 고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개인 서재를 열어 (주로 래번클로 출신의) 많은 선배들의 행적을 접할 수 있도록 내주기까지 했다. 그 보답으로 세이지는 졸업 후 ‘야훼’의 글을 찾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을 때 관리인과 더불어 ‘회색 숙녀’에게도 한 부를 포장해 보내주었다.

그러나 지금 메이블이 환호하는 것은 유년의 환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당신은 오래전부터 쭉 래번클로의 기숙사 유령이셨던 거죠? 래번클로를 거쳐간 학생들은 다 알고, 지켜보셨던 거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회색 숙녀’는 왜 이런 걸 묻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짧게 대꾸했다. 빛이 바랜 듯이 새하얀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세이지가 있었다면. 메이블은 오늘 들어 벌써 두 번째로 생각했다. 메이블이 설령 마녀라서 호그와트 학생이 되었더라도, 아마 래번클로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들폰드 교수가 학생 하나하나를 얼마나 눈여겨보았는지는 미지수였고, 초상화가 얼마나 잘 그려졌을지도 아무런 담보가 없었다. 심하면 생전의 기억과 성품이 거의 재현되지 않은 채, 단순히 잘 알려진 습관만을 반복할 수도 있었다. 반면에 ‘회색 숙녀’는 생자만큼이나 확실한 기억을 가진, 학생들과 함께 지낸 보호자였다.

“저, 그러면, 하나만 여쭙고 싶은데…… 혹시 레아 윈필드를 기억하세요?”

유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 메이블을 성가셔하며 쫓아보내고 싶어하는 낯빛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면전에 모욕이라도 들은 것만 같은 반응이었다.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치부를 건드려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화를 낼 수도 있겠다고는 각오했지만 이런 반응을 예상한 것은 아니라서, 질문을 던져놓고 메이블도 메이블대로 놀랐다.

“왜 나에게 그런 걸 묻지?”

짧은 침묵이 있은 뒤에 한 박자 늦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메이블은 문득 레아 윈필드도 ‘회색 숙녀’의 개인 서재에 출입해본, 아끼던 학생 중의 하나였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지웠다. 그녀를 가르쳤던 로잘린드 에실도, 반장으로까지 임명한 아스테르도, 심지어 그녀의 친어머니조차도 그녀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가시를 세우고 벽을 치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냥 성격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들은 정말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제각기의 방식으로 반응하니까. 하지만 메이블은 기숙사 유령의 매서운 눈빛에서, 가늘게 떨려 나오는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더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깊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까지도 정리되지 않아 복잡한 무언가가. 그것이 메이블에게 답지않게도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요.” 메이블이 ‘회색 숙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는지를 알고 싶어요.”

“그런 것을 왜 알고 싶어하지? 넌 그녀의 딸이니? 아니면 후손? 이미 수십 년 전에 죽은 패륜아의 속마음이 왜 궁금한데? 이해할 만하면, 네가 용서라도 해주려고? 아니면 걔도 선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믿고 싶어서?”

‘회색 숙녀’는 공중을 스르르 헤엄쳐 메이블을 지나쳐갔다. 메이블보다도 몇 계단 아래, 내려다보일 법한 위치에서야 그녀가 겨우 뒤돌아보았다.

“네가 뭐 하는 앤지 모르겠지만, 얘야, 넌 온정을 낭비하고 있구나. 그 애는 작은 꼬마였을 때부터, 막 분류 모자를 벗고 기숙사 테이블로 아장아장 걸어왔을 때부터 줄곧 그랬어. 모두들 부모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반듯한 모범생인 줄로 여겼지만 나는 알아봤지. 그런 눈을 하고 있었거든. 그런 애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부모의 등에 비수를 꽂게 돼 있어. 부모를 선망하고 바라면 바랄수록 그것이 원망과 증오로 변해, 착하게 잘해내는 것처럼 보였던 만큼 지독하게 배신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나는 처음부터 그 애가 그럴 줄 알았단다. 그런 애한테 포용이니 이해심이니 베풀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야.”

메이블은 후드려맞은 기분으로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회색 숙녀’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종종걸음으로 뛰어야 했다.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게 아니라 내려가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메이블의 내면에서는 영국 머글 세계의 보통 교육을 받은 현대 시민이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했다. 마법 세계의 교육에서는 합의되어 있지 않을지언정, 머글 세계에서는 어떤 아이의 잠재성도 예단하지 않으며 모든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고 살려주는 것이 당연한 대원칙이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메이블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되물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그런 애들에게도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회색 숙녀’가 멈춰섰다. 그녀의 반투명한 머리카락이 연기처럼 끊임없이 일렁거렸다. 메이블은 걸음을 늦추며 덜렁거리는 가방을 한 팔에 끌어안았다.

“사람의 마음이 행동을 만든다면, …… 그렇다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에게도 이유는 있을 거에요……. 정말로 그렇게나 일찍부터 정해져 있을 정도라면 더욱, 그러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이유가요. 이유가 있다고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아니겠지만……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이해할 수는 있는 거잖아요. 이해한다고 해서 누구를 해치거나, 잘못을 숨겨주는 것도 아닌데. 죄인이니까 그것조차도 알아줄 수 없다고 하면, 그래서 누구도 모르는 마음을 안고 혼자 사라져야 한다고 하면…….”

그건 너무 외롭잖아요. 메이블이 조그맣게 맺었다. 스스로도 말하고 나서야 깨달은 진심이었다. 잠재성을 허비하고 나쁜 가능성을 골라버린,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실패한 아이들에게도, 그런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마음이 있다면. 마음이 있고 영혼이 있다면, 그것을 내버릴 수는 없는 거였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디멘터의 먹이로 던져주거나 사막 한가운데 버리고 오지 않듯이, 아무리 구제불능의 악인이라도 죽을 때까지 물을 주지 않거나 미쳐버릴 때까지 고문하지 않듯이, 어떤 마음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들 가운데 하나이므로.

‘회색 숙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니까 당신이 기숙사 휴게실에서 나를 붙드셨던 그 새벽에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겠지요. 당신이 물으신 것은 ‘이렇게 죽는 것이 두려운가’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살고 싶은가’였으니까요. 또다시 고백하건대 그것은 그 때의 내가 두번째로 두려워한 것이었고, 그것이 첫번째가 아닌 두번째인 이유는 적어도 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죽음다운 죽음을 찾아 발버둥이라도 쳐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건대 전쟁통에 내가 한 모든 일이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물으셨을 때, 지금이라면 죽음을 허락해줄 것처럼, 탓하지 않을 것처럼, 그런데 이런 몰골의 나라도 마치 할 수 있다면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물으셨을 때 나는 비로소 나에게 그 모든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레아…… 나는 이 순간도 그것이 두렵습니다.


풀이 무성한 언덕을 내려가며, 메이블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지독해.’ 그녀는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건 정말 너무해.’

‘회색 숙녀’가 비밀을 조건으로 들려준 목격담은 듣는 순간 왜 비밀이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이것을 혼자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터무니없는 무리로 느껴졌다.

‘회색 숙녀’의 증언에 따르면 레아 윈필드는 1년이 넘게 집요할 정도로 온갖 방법으로 핀갈 모레이를 찾아다녔다. 두 사람의 졸업반 시절― 그러니까 1977년 하반기, 또는 78년 상반기 언젠가, 레아는 기숙사에 드나드는 핀갈을 붙잡으려고 청동 독수리상 옆에서 밤새도록 지키고 서 있다가 거기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측은해진 기숙사 유령은 레아에게 아무도 없는 척하고 핀갈을 유도해보라는 조언을 귀띔해주었다. 레아는 래번클로 휴게실을 비우고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고, 핀갈은 휴게실이 빈 줄 알고 슬쩍 나왔다가 보기좋게 덜미가 잡혔다. 유령은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티나지 않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듣게 된 두 사람의 문답은 십대 소년소녀의 사랑의 술래잡기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참혹한 것이었다.

살고 싶어요? 이렇게라도……. 네가 원한다면.

‘어떻게 연인 사이에 이런 걸 묻고 답하게 할 수가 있어?’ 급기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메이블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속으로 따져물었다. ‘어떻게 열일곱 살짜리 애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 수가 있어?’

묻는 쪽의 마음도, 답하는 쪽의 마음도 메이블로서는 차마 헤아릴 수가 없다. 솔직히, 레아 윈필드가 이 대화 하나만으로 온 세상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에 열일곱 살의 메이블이 레모르를 앞에 두고 이런 걸 물어봐야만 했다면. 온 마법 세계가 여기에 무관심과 외면으로 일관한다면. 가민을 격퇴해봤자 이 상황은 좋아질 게 없고, 오히려 죽음을 먹는 자들이 전쟁에서 이겨야 연인에게 미래에 삶이 있다면.

‘나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아…… 테러리스트.’ 메이블은 몸서리를 쳤다. ‘물론 그러면 안 되지만…… 심정적으로…….’

만약 핀갈 모레이가 레아 윈필드의 진짜 동기라면, 누구도 전조를 알지 못했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연인을 위해서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한다면, 펜시브에서 본 핀갈의 표정도 명쾌하게 설명이 되기는 했다. 가장 적은 가정만으로 설명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나무랄데없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건 아니라고 말한다. 숱한 자료들을 몇 번이나 뜯어봐도 레아 윈필드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는데도. 그녀가 걸었던 통로를 걸으며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과 이야기해도 여전히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오리무중인데도. 그런데도, 레아 윈필드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어떤 강력한 확신이 메이블을 사로잡고 있었다. 레아 윈필드는 타인을 위해, 타인에 대한 마음에 인생을 던져넣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언가 결단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서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메이블은 거기에 내기라도 걸 수 있었다.

머리속 한켠에서는 ‘회색 숙녀’의 말이 메아리쳤다. 그런 애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부모의 등에 비수를 꽂게 돼 있어. 부모를 선망하고 바라면 바랄수록 그것이 원망과 증오로 변해, 착하게 잘해내는 것처럼 보였던 만큼 지독하게 배신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그러니까, 레아 윈필드가 부모를 배반한 연유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거기에 핀갈 모레이가 어떻게 얽히는 건지 이렇게 되면 도로 미궁에 빠지게 되지만……. 그 간단한 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복잡하고 기묘한 모험에서야말로 메이블이 찾고 있는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메이블은 지금 그 직감을 따라 도싯에 왔다. 레아 윈필드가 자라났다는 집을 둘러보고 그 집의 전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 메이블은 잠시 짬을 내어 마을 근처의 묘지에 자리한 레아의 무덤을 찾았다. 반복해 파헤쳐진 나머지 풀이 자라지 않고 주변과 흙 빛깔이 다른 묘를 찾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을 깨졌다가 붙였는지 자잘한 금이 셀 수 없이 가 있는 묘석은 끈적거리는 액체와 정체 모를 고형물이 말라붙어 지저분했다. ‘Leah Winfield’라는 묘비명 위에 누군가가 페인트로 휘갈긴 ‘Wicked’라는 글씨가 보였다.

안타까움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걸까. 문 앞에서 밤새도록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쳐 잠들 수 있다는 것은, 아주아주 흉한 모습이 되어서 모두가 겁내고 꺼려하는 누군가를 그렇게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선한 마음을 조금쯤은 가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것도 그냥 이기심이나, 해로운 집착에 불과한 걸까. 혹은 어느 쪽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일까. 메이블은 결정할 수 없었다. 단지 주머니에 넣어온 조화를 묘석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머글 동네의 시장에서 파는, 평범한 플라스틱 꽃묶음이었다.


우리는 소년시절 내내 함께였으나 나는 그날 처음으로 당신의 세계를 한 조각 건네받은 듯했습니다. 그것은 새알처럼 작고, 맥동하며, 쉬이 부서질 것만 같아서 어떻게 손에 쥐어야 할지 나는 그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단지 그것을 간수하기 위해서 이 세계에 어떻게든 발을 붙이고자 하는 마음이 뿌리 뻗었을 뿐. 레아, 나는 사실은 할 수 있다면 홀몸으로라도 내 바다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 세계에 내가 무관한 만큼 이 세계를 내게 무관하게 여기고 내게 유관한 세계에서 힘껏 싸우다 거기로 귀의하는 죽음을 맞고팠습니다. 그럴 결심을 못 하게 된 스스로를, 이 세계를 잊고 깨끗하게 돌아서지 못할 만큼 이 세계에 마음과 영혼을 허락해버린 스스로를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새벽부터 그것은 내가 붙들 동앗줄이 되었습니다.

가라앉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면 표류하는 것조차도 기꺼웠던 겁니다. 당신이 그 해안에 혼자 남지 않는다면, 평생이라도.

나의 작고, 여리고, 날개 달린 것이여. 그러니 부디 더는 혼자 있지 말아요.


카렌 하산은 60이 넘는 나이에도 놀랍도록 정정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생강맛이 나는 쿠키와 스리 브룸스틱스의 버터맥주를 연상시키는 말간 빛깔의 보자를 준비해놓고 메이블을 맞아들였다. 장식이 화려한 천이 깔린 테이블에 앉으면서 메이블은 자신의 머글 분장이 충분히 전문직 여성처럼 보이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빌었다.

“그러니까, 변호사라고?”

“법률사무소 직원입니다. 법률 전문가는 아니에요.” 메이블은 도수 없는 뿔테 안경을 밀어올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희…… 앨머레즈 변호사님께 사정을 들으셨을 텐데. 맞나요?”

“솔직히 무슨 상속이 어쩌고 하는 것밖에 못 알아들 었는데, 아무튼 그 느티나무 집의 관리 일지를 보여달라는 거죠?”

작업복을 입은 하산의 딸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집 수리나 개조는 학생 때부터 거의 다 제가 했으니까 뭐든 설명드릴 수 있어요. 그 전은 모르겠지만. 근데 그 땐 집주인이 거의 안 왔을걸.”

“거의 안 왔다고요?”

메이블은 지나치게 실망한 티를 냈나 싶어 아차했지만, 모녀는 자기들끼리 옥신각신 정정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아냐, 얘. 그 어머니랑 싸우기 전까지는……”

“집에 불을 지르지만 않으면 되니까 알아서 하라고 그랬다면서. 그게 관심이 없는 거지.”

“그 아가씨 성격이 과격해서 그래, 그건. 그 어머니가 세간을 부수고 있다고 하니까 얼마나 서둘러서 달려오던지. 어디 런던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댔나, 그랬는데 글쎄 두 시간도 안 돼서 여기 나타났다니까.”

“어머니가 세간을 부숴요?”

메이블은 숨길 생각도 못하고 정직하게 놀랐다. 어머니 하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딸이 여기 와서 자기와 얘기해야 한다면서 접시를 집어던지고 화분을 깨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우. 무슨 아버지를 팔았다느니 죽였다느니 하는 험한 소리가 오고가는데, 원 참…… 그러고 딸은 돌아가버리고, 어머니는 울고. 얼마 안 있어서 그 아가씨가 집을 남한테 세 내주겠다고 하더라고.”

여기에 온 게 정답이었다. 메이블은 눈을 반짝이며 관리인의 회고에 귀를 기울였다. 유감스럽게도 카렌은 곧 원래의 대화 주제를 기억해내고 이야기를 끊어버렸다.

“아유, 참. 내가 중요한 일 보러 온 사람에게 남의 집안 싸움 이야기나 떠들고 주책없이…… 아무튼 여기 이게 일지거든.”

메이블은 마음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부동산 상속 관련 분쟁 때문에 집 수리 및 개조 내역을 확인하러 온 법률사무소 직원이 집주인 모녀의 싸움에 대해 캐물을 만한 적절한 명분이 짧은 순간에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아뇨, 재미있는데요. 혹시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도 아시나요?’라고 말할 걸 그랬다는 생각은 일지 첫장을 넘길 때서야 뒤늦게 떠올랐다.

“물품 일람을 적어놓으셨네요.”

“인수인계 전에 꼭 작성한다우. 있지도 않았던 물건을 가지고 관리인이 훔쳤다고 난리를 치는 이상한 집주인이 가끔 있거든.”

생각만 해도 학을 뗀다는 듯이 어머니 하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림에 취미가 있는지, 일지에는 글자로 정리된 물품 일람 외에도 방의 전개도나 가구 배치도 따위가 간간이 낙서되어 있었다. 부엌 찬장을 그린 여백을 확인하던 메이블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건 빈자린가요? 그런데 ‘코코아?’라고 적혀있네요. 옆에는…… ‘마시멜로?’”

“거기만 부자연스럽게 비어있길래. 뭐가 있나 봤더니 둥근 병 자국이 있더라고. 코코아 가루가 좀 떨어져있는 걸로 봐서 하나는 코코아고, 옆에 있을 만한 건 마시멜로 아닐까? 다른 잼이나 차 같은 건 다 제자리에 있길래 참 희한한 게 없어졌다 싶었는데, 그 아가씨도 별 말 안 하길래 넘어갔지. 할머니와 살던 집이라던데 그 양반이 입원할 때 가져갔는지도 모르겠수.”

메이블은 가늘게 눈을 찌푸렸다. 정말 사소하다. 아무것도 아닌 세부다. 수십수백 가지의 우연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작은 위화감이다. 좀전에 들었던 레베카 윈필드와 레아 윈필드의 말다툼에 대해 다시 파고들어보는 게 명백히 더 얻을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코코아와 마시멜로. 찬장에 자국이 남을 만큼 오랫동안 할머니가 손녀에게 타주던, 마음을 달래주는 달콤한 음료.

위키드 윈필드. 불사조 기사단의 배신자. 피도 눈물도 없이 아버지를 팔아넘긴 악마. 머글태생등록위원회의 의장.

맞물리지 않는다. 무언가가 맞물리지 않았다. 꼭 포악한 살육전의 한복판에서 한순간 지나간 애틋하고 연약한 누군가의 얼굴처럼, 한사코 찜찜하게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이 놓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놓치는 듯한 느낌이…….

그 때 딸 하산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아무튼 잘됐네요. 당신 고객이던가 그 소송 상대던가 아무튼 둘 중 하나가 그 첫번째 집주인의 먼 친척? 같은 거라면서요. 이거 그 여자가 안 챙겨간 건데, 그 뒤로는 어디서 뭘 하는지 연락도 안 되어서…… 그냥 버리자고 했는데 엄마가 세상에, 중요한 사진인 것 같다고 혹시 모른다고 이사할 때까지 가지고 오잖아. 하여튼 도토리 묻어놓고 까먹는 다람쥐도 아니고 쓸데도 없는 오만 물건 모셔두는 것 좀 그만두래도 절대 안 듣지. 이거 당신이 가지고 가서 손님 주든, 그 소송 상대 주든 해요. ”

“얘는, 참 말버릇도…… 남의 가족사진인데 연락이 안 된다고 함부로 쓰레기처럼 버리긴 그렇잖수. 이렇게라도 다시 인연이 닿아서 후손에게 전해지게 되면 좋은 거 아니니. 우리도 몰랐던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 찾으면 좋잖니. 그 시절에는 사진이 지금처럼 흔하지도 않았단다, 얘.”

모녀가 다시 옥신각신하는 동안 메이블은 문제의 사진을 손에 들고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검은 액자에 끼운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는 메이블이 기사와 인터뷰에서 본 아이작 윈필드와 레베카 윈필드의 젊은 시절 같은 남녀와 모르는 노인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레아. 메이블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찾고 있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익숙한 것을 넘어 하도 몰두하여 이제는 하루의 중심처럼 느껴지는 울림이 이 순간 문득 너무나도 생경했다. 낯모르는 누군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어설프게 불러보는 것처럼. 가족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어설프게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은 어깨와 서먹한 간격, 어색한 미소에서는 감출 수 없는 거리감이 배어나왔다.

아이의 얼굴은 단정하고 무기질적이었다. 어렸을 적 자매들과 가지고 놀았던 도자기 인형처럼. 발갛게 볼에 분칠을 하고 말을 걸면 인형은 방긋방긋 웃으며 아장아장 걸어서 품에 안겨왔다. 그러나 그레이시와 애나벨이 잠들어 메이블만 인형과 혼자 남으면, 그것은 희고, 싸늘하고, 생기 없는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 무감정하고 불친절한 얼굴이 어쩐지 무척 불행하고 외로워보여서, 메이블은 다가오지도 않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동생들의 옆에 누웠다. 체온에 미지근히 식은 도자기가 더는 차갑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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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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