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ing L***
메이블 스튜어트와 악의 기원, 그리고 읽히지 않은 편지 (3)
※이 글에 등장하는 분과 학문적 지식은 단순히 서사 진행과 주제의식 표현을 위한 도구로, 전혀 학문적으로 고증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학문의 방법론과 연구 윤리를 밥 먹듯이 어깁니다. 판타지 아동 소설 기반의 2차 창작물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고 절대 현실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 공권력에 의한 폭력과 유혈 표현이 있습니다. 차별받는 가족 구성원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무성애 배제적·혐오적 발언이 있습니다. 오픈리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가 아닌 인물들이 미래 세대에 의해 미스젠더링(바이너리 패싱)됩니다.
※ 7학년 기간 중 역극 로그(https://glph.to/uiem2e) 일부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해당 부분은 *로 표시했습니다.
※ 창작 고유명사는 대부분 챗GPT로 만들었습니다.
고향의 그늘에 버려지는 것을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서 이 세계에서 소거되는 것보다 낫게 여겼으니 나의 전락이 누구와의 약속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느 누군가는 내게 미안하다며 눈물흘렸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기실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돌이키고픈 심정을 후회라고 한다면,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한다면 나는 셀 수 없이 자괴하고 탄석하였으나 끝내 인간의 마음을 얻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레아, 내가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당신과 눈이 마주쳤던 그 밤에 당신을 막아세웠어야 했는지, 당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맞았었는지, 그것만은 그 뒤로 수천 수만 번을 자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색 숙녀’의 목격담에는 메이블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은 그 문답 외에도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있었다. 자신을 보고 숨는 핀갈을 붙잡아 닦아세우다 그렇게 질문했던 레아 윈필드는, 어째서인지 그의 대답에 격노해 급소를 잡아뜯으며 화를 낸다. 말을 참 쉽게도 하네요.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죽을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핀갈 모레이는 마찬가지로 엉뚱한 말을 한다. 울지 마. 그냥 다 내가 미안해. 레아 윈필드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울지 않았어요. 당신이 미안해할 것도 없고요. 울기 시작한 건 소년 쪽이었는데, 알아. 넌 안 울잖아... 그런데 가끔은 그래서 내가 울고 싶어져. 그런 말을 듣자 소녀 쪽이 주저앉아 버렸다. 그럼 평생 그렇게 살아요.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물이나 대신 흘리면서, 그렇게. 그 어조는 마치 일생의 원수를 저주하듯 표독하고 증오에 차 있었다고 했다.
차를 몰고 홀워스를 떠나면서 메이블은 그 대화를 몇 번이나 생각했다. ‘마음이 없는heartless 마녀’. 레아 윈필드의 이름에 흔히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어른이 된 그녀는 실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무수한 사람들의 삶을 망치고 악행을 저질렀고, 죽을 때까지 양심의 가책이라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극도로 화가 나고 괴로운 상황이라고는 해도, 17세의 나이로 절절하게 매달리는 연인에게 그녀가 퍼부은 독설은 그런 수식어에 꼭 들어맞는 듯 보이기도 했다. 사랑을 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따뜻함이라고는 알지 못하는 영혼. 그녀가 살던 집은 넓고 고급스럽지만, 여기는 위장용 주소고 실제 은신처는 따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나왔을 정도로 싸늘하고 생활감이 없었다고 했다.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는 사진 속 어린아이의 무표정 역시 그러한 인상을 뒷받침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할머니가 타주던 코코아와 마시멜로를 가지고 갔어. 메이블은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속도를 조금 올리며 생각했다. 귀중품이나 오래 간직하기 좋은 물건들을 제치고, 코코아와 마시멜로를. 메이블의 기억이 맞다면, 그게 열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어리다면 어리다지만, 거의 성인에 가까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열 살만 넘어도 친족의 유품을 고를 때 그걸 먹을 때 기분이 좋았다는 이유로 가능한한 빨리 먹어치워야 할 식료품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렸을 때부터 조숙하고 머리가 좋았다는 레아 윈필드에게라면. 그건 오히려 아주 세계가 작고 미래보다 현재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어린아이가 할 만한 생각이었다.
혹은, 세상에서 친숙하고 따뜻한 것을 달리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메이블은 낡은 사진 속 일가족의 감추지 못한 서먹한 거리감을 생각했다. 어깨를 짚은 부모의 손길에 조금도 기대지 않고 정자세로 사진 밖을 똑바로 응시하는 소녀의 외롭고 짙푸른 눈동자를. 외롭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목초지의 능선을 등지고 핸들을 꺾으면서 메이블은 마음속으로 그 말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보았다. 외롭다. 레아 윈필드는 외롭다. 배내옷을 꼭 쥐고 놓지 않는 아기처럼 따뜻하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먼길에 한사코 끌어안고 가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외롭다. 그랬다. 메이블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악하거나, 차갑거나,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나 작은 아이였을 때부터 혼자뿐인 듯이 외로워 보였다. 잘 손질된 머리에 좋은 옷을 입고, 하나같이 온유하고 상냥한 얼굴을 한 셋이나 되는 어른들 사이에 감싸여 있는데도, 그토록이나 외로운 소녀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했지. 메이블은 그간 조사하고 정리했던 레아 윈필드의 생애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었다. 부모가 둘 다 바빠서. 함께 보낸 시간이 꼭 마음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이 찍은 사진에서조차 부자연스러운 티가 날 정도라면 사이가 소원했던 것은 맞을지도 모른다. 어린 레아에게 있어 엄마와 아빠는 친한 이웃보다도 낯선 타인이었을지도. 레아의 어머니 레베카 윈필드 역시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부터 그 애를 잘 알 수 없게 됐다고. 그렇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은 레아에게 있어서 열다섯 살에 보호자 없이 홀몸으로 세상에 남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자식이 되어 함께 살아야 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은 아니었을까? 멀었던 부모의 품으로 겨우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태어나서 겪어본 적 없는 낯설고 무서운 일이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 관계가 끝끝내 잘 풀리지 않은 결과가 아버지 윈필드를 밀고한 것이라면?
아이작 윈필드는 머글 태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한 정치가였고 불사조 기사단의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메이블은 바깥에서는 훌륭한 아버지가 가정에서는 괴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례를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머글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에게서도 몇 번이나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심지어 대학 수업에서도 그런 주제로 발표를 해오는 학생이 있었다. 그런 진실들은 많은 경우에 피해자들이 도움 받지 못하고 고립됨으로 인해, 혹은 스스로 수치스러워함으로 인해 사회에 알려지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혀 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그 가정의 아이들은 나무랄 데 없는 아버지를 두고도 별 이유도 없이 말을 듣지 않고 엇나가는 문제아처럼 여겨지게 된다. 머글 사회의 여러 가지 면면들 가운데 메이블이 세이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부분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핀갈 모레이의 표정이. 메이블은 하마터면 방향을 틀릴 뻔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급하게 핸들을 틀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을까. 물론 폭력을 가하던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항하는 것을 봤다면 연인으로서는 기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역시 어딘가 좀 아니다. 레아 윈필드라는 사람의 됨됨이와, 핀갈 모레이와의 관계와, 그녀의 이후 행적들이…… 어딘지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역시 들어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얼굴. 그 얼굴은 메이블이 아는 어떤 사람의 표정과도 같지 않았지만, 동시에 어딘지 마음 깊은 곳에서 알고 있는 기억을 건드려왔다. 피해자의 해방이나, 복수에 공감하는 얼굴이라기보다, 그것은…….
메이블은 요란하게 끽 소리가 날 만큼 갑작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것은 당신과 나의 일생에 가장 참혹하고 어두웠던 그 밤이 이 세계에 있어 결정적인 참화가 되었기 때문도 아니요, 그것이 나의 파멸을 완성했기 때문도 아니니, 단지 당신이 그렇게 부서져 지금까지도 줄곧 피흘리기를 그치지 않은 까닭입니다. 나의 작은 새여, 하늘 나는 것들은 몸 속에 바람을 넣어두는 곳간이 있어 바람결에 가벼이 떠오르고 자유롭게 날개를 칠 수 있다 하건만 타고 남은 폐허에 혼자 남은 당신은 곧잘 허파만으로 날아야 하는 불운한 생물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며 눈물 없이 울었고 나는 할 수 있다면 아파하는 당신의 모든 숨을 대신 쉬어주고만 싶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부질없는 희구나마 어찌 아니할 수 있었을까요.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모습으로 당신이 한 번이라도 날갯짓할 수 있다면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도 나는 단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상처입는 동안에 내 사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가 아닐 수 있었다면, 적어도 당신의 슬픔에 절망과 참담함과 죄의식이 집채만한 등짐처럼 얹어져 당신의 숨길을 짓누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면, 그러니까 만일 언젠가 당신과 내가 피와 저주에 젖지 않은 몸을 하고 이 세계의 어디에선가……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에요, 레아.
한때는 메이블의 첫 마법으로 착각하기도 했던, 아홉 살 즈음에 있었던 일화다.
메이블 바로 아래 여동생 그레이시를 임신했을 때 엘리자는 합병증을 심하게 앓았고, 산후에도 금방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마빈의 어머니와 엘리자의 자매들이 손을 보태주고, 마빈도 오래 휴가를 쓰고 병구완을 했기에 돌봄을 못 받지는 않았으나, 어머니와 동생이 서로 미묘하게 서먹해하는 것은 어린 메이블도 느낄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레이시는 예민하고 신경질이 많은 아이여서 부모님을 자주 진이 빠지게 했다.
반면에 그레이시와 3년 터울을 두고 태어난 애나벨은 형제자매들 중 누구보다도 방긋방긋 잘 웃는 명랑하고 애교 많은 아이였다.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온 식구의 시선을 자기에게 붙들어두려 들기도 했다. 게다가 애나벨은 외모까지 눈에 띄게 예뻤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스튜어트네 아이들을 보면 단연 애나벨에게 먼저 눈이 갈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말 다한 셈이다.
그레이시는 그런 애나벨을 시샘해서 때리거나 괴롭히고 혼나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그레이시는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서 세상 서러운 듯이 바닥에 주저앉아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그런 그레이시를 달래고 위로해서 방으로 데리고 가면서 메이블은 동생을 지켜보고 놀아주는 것을 넘어서는 언니의 역할이라는 것을 처음 익혔다. 애나벨과 그레이시가 다투면 부모님이 아시기 전에 메이블이 중재하는 일도 생겼다.
어느날은 그레이시가 애나벨에게 유독 못되게 굴었다가 호되게 꾸중을 듣고 벌을 받았다. 악을 쓰고 울던 그레이시는 아무도 달래주지 않자 방에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반 시간 뒤에 엘리자가 방문을 열었을 때 그레이시는 사라지고 없었다. 메이블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는 온 식구들이 그레이시를 찾아 집 안팎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엘리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거의 과호흡을 일으키기 직전이었고, 마빈은 급기야 오러국에 보낼 실종 신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메이블은 그레이시 찾는 것을 도우며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다락으로 이어지는 쪽문의 잠금쇠가 풀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올라가는 사다리는 그레이시의 앙증맞은 체구로 오르기에는 너무 높았지만 메이블은 그래도 올라가 보았다. 그레이시는 쓰지 않고 쟁여둔 갖가지 마법 물품과 잡동사니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엇을 넣었는지 터질 듯이 가득찬 조그만 소풍 가방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꽉 끌어안고서.
“그레이시.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제 이름을 듣자 그레이시는 흠칫하며 일어나 앉았다. 어둡고 좁은 곳에 엎드려 있다 깜빡 잠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뾰족하게 말했다.
“언니 가. 난 집 나갈 거야. 나가서 영원히 안 돌아올 거야.”
“그레이시, 왜 그런 말을 해?”
이 귀여운 투정을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어렸던 메이블은 덜컥 놀라서 믿기지 않는 듯이 되물었다. 그레이시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 그 편이 좋잖아. 모두 그걸 바라잖아. 애나벨만 예뻐하고, 나 같은 건 아무도 필요없는걸. 그러니까 내가 없어져봤자 다들 신경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메이블은 발끈해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사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레이시가 놀라서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지만 메이블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흥분해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일도 안 하고 너만 찾고 있어.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쓰러지려고 하셔. 아빠는 네가 납치된 줄 알고 오러들을 부르려고 하고! 애나벨은 놀라고 겁 먹어서 계속 울고 있는데…… 신경쓰지 않을 리가 없잖아! 넌 애나벨이 없어지거나 잘못되면 좋아? 앨런이 맨날 놀리고 못되게 구니까 호그와트에서 영원히 안 돌아오면 좋겠어?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다락 천창으로 빗겨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 아래서 그레이시의 얼굴에 여러 가지의 감정이 차례로 스쳐가는 것이 보였다. 놀라면서도 기쁘고, 그것에 죄의식이 들고, 그러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거세게 저으며 부정했다가, 마지막 일침에는 가방을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몸을 움츠렸다. 사다리의 흔들림이 줄어들었다. 메이블도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내려가자, 그레이시.”
그레이시는 주저하다가, 이윽고 쭈삣쭈삣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이블의 몸이 공중에 붕 뜨며, 다락에서 날아들어오는 그레이시를 품 안에 받아안았다. 큰소리를 듣고 달려오던 가족들이 문간에 멈춰서서 탄성을 터뜨렸다. 마빈이 환한 얼굴로 메이블에게 달려와 칭찬과 축하의 말을 쏟아냈다. 옆에서는 엘리자가 그레이시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레이시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굳었다가, 점점 녹아내리듯이 풀리며 응석 섞인 울음으로 번졌다. 그것을 보며 메이블의 입가에도 비로소 미소가 걸렸다.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지. 메이블은 훗날 그 일에서부터 시작된 해프닝을 돌아보며 실소했다. 자매를 공중에 띄웠다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놓은 미풍은 메이블이 아니라 그레이시의 마법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그레이시는 식구들의 눈을 피해 높은 다락에 올라갔던 방법 그대로 거기에서 다시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시는 아직 자신의 힘을 스스로 지각하지 못했고, 호그와트에 입학할 나이가 다 되어가는데도 한 번도 마법적 능력의 징후를 보인 적 없는 메이블의 첫 마법을 간절히 기다리던 식구들의 마음은 사라진 동생을 맏딸이 ‘마법처럼’ 찾아서 극적으로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을 보고 너무도 놀라고 기뻤던 나머지 고대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고 의심 없이 믿어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엘리자는 호그와트에 몇 통이나 항의 편지를 쓰고, 마빈은 마법부에 달려가 메이블이 틀림없이 마법을 부린 적이 있다며 목청을 돋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모든 사랑을 제 손으로 찢어발기고 내 앞에서 실신해 쓰러진 그 날 밤에 나는 당신 아버지가 갇혀 있던 지하실에서 그와 나를 저울에 달아봤더랬습니다. 일어난 일은 무엇 하나 돌이킬 수 없어도, 나는 기사단 본부의 그 복도에서 당신이 줄곧 애닳게 기다리던 하얀 돛단배를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그 사람을 당신에게 데려가는 것은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지성에 대해 대체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으니 하려고 하면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 때의 나는 본질적으로 죽음을 둘 곳만을 애타게 찾아헤매는 부랑자나 진배없었으니 그것이 당신이 된다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돌아올 수 없으리라 믿어지는 곳에서 그 사람을 꺼내올 수 있는 기회가 그 순간의 나에게는 있었고, 나는 거기에 손 뻗음에 있어서 두려워할 것도 저어할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저울대를 기울여보고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갓길에 차를 대고 핸들에 엎드린 채, 메이블은 숨을 몰아쉬었다. 시가지로 접근하는 도로에는 간간이 차들이 오고갔으나 사위는 조용했다. 반쯤 열어둔 창문 틈으로 바람이 높이 자란 풀을 흔드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해는 멀리 숲의 우듬지 너머로 내려가고, 하늘에는 창백한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메이블은 방금 뇌리를 강타한 발상의 충격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호흡을 골랐다.
그럴 리 없어. 그녀가 머리속으로 되뇌었다. 지나친 추측이야. 억지야. 그 위키드 윈필드가, 마왕의 제일 악독했던 앞잡이가 사실 그냥 애정 결핍된 어린애였다고. 그런 여섯 살짜리나 할 법한 발상으로 기사단의 진지에 죽음을 먹는 자들을 끌어들였다고. 하지만 눈앞에서는 핀갈 모레이의 펜시브가 끝없이 되풀이해 재생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펜시브 속의 짧은 한 장면이. 메이블은 혹시 그쪽의 누군가 핀갈과 눈을 맞추지는 않는지 확인하느라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아주 주의깊게 보았다.
핀갈의 시선이 쫓아가는 것을 보고 그가 레아 윈필드를 보고 있었다고 결론내렸지만, 그 순간에 핀갈의 시선이 꽂혀 있던 곳은 사실 그녀의 뒷모습이 아니었다. 악한들에게 인질로 잡힌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딸을 보고 숨어있던 엄폐물 뒤에서 경황없이 뛰쳐나오는 아이작 윈필드의 얼굴이었다. 그것을 아주 벅차고, 애틋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먼발치에서 보고 있었다.
메이블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 머리속에서 자라난 작은 목소리가, 메이블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떠벌거렸다. 레아 윈필드의 부모는 일이 바빠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식을 할머니에게 완전히 맡겼다. 그 할머니가 열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레아는 여전히 유아적으로 할머니의 애정에 매달리는 결핍된 심리 상태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레아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일 때문에 시간이 없다며 자식을 시골의 할머니에게 보낸 부모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일이 줄어들거나 관심이 늘어났을까?
그레이시는 가족들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애나벨을 미워했다. 마빈과 엘리자는 물론 손윗형제자매들과 매일매일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데도. 만약 애나벨 때문에 그레이시만 가족들과 따로 살면서 얼굴도 잘 볼 수 없다면 어땠을까. 만약 메이블이 그레이시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기분일까. 애나벨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죽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 만약 그게 ‘언니, 언니’하면서 따라다니는 귀여운 동생이 아니라 뭔지도 잘 알 수 없는 ‘중요한 일’ 같은 거라면……. 아무리 그게 좋은 일이라고 들어도, 그런 마음이 나쁘다고 알고 있어도, 그냥 다 망했으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른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고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겠지만, 몸만 컸을 뿐 감정적으로는 어린아이의 마음이라면…….
귀를 막고 싶었다.
“그래서 그딴 이유로, 사람들을 배신하고, 죽게 만들고, 모두를 불행하게 했다는 거야?”
머리속의 자기 목소리를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메이블이 소리쳤다. 양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친 바람에 손날이 얼얼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을 확인해서 기뻐? 당신 아버지도 그래서 죽잖아! 뒷일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아니면 결과가 이렇게 되어버린 데 절망해서 더 막나간 거야?”
말을 뱉어놓고 보니 그럴법하게 들려서 더 기가 막혔다. 메이블은 주먹 위에 머리를 포개며 진저리를 쳤다. 레아 윈필드는 이후 20년간을 모르가나 가민의 수족으로 살면서 머글 태생 마법사들과 이종족, 스큅들의 박해에 앞장서게 된다. 왜, 어떻게 해서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 가혹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인지 메이블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또 왜 거기 서서 아련하게 보고 있는데! 알고 있었으면 말려야 될 거 아니야. 바보야? 아님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는데 등을 밀어주는 게 당신에겐 사랑의 방식이야?”
둘 다 래번클로라며…… 메이블은 이번에는 핀갈 모레이를 탓하다가 그것도 지쳐 그냥 힘없이 늘어졌다. 지혜의 기숙사는 무슨. 다 엉터리야.
이해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 모든 일들을 무언가 좀더 좋은 빛 아래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마침내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는 지금, 모든 게 그저 형편없는 농담 같았다. 이 모든 비극과 희생을 초래한 게 그저 온 세상을 미워하며 악쓰는 어린아이 하나였다고 들으면,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인생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기분을 느낄까. 좋은 기분은 결코 아닐 것이다. 실망과 황당함과 모욕감만을 안겨줄 진실이라면, 애써 파헤쳐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들어봐야 더 화가 나고 미워하게 될 뿐인 진심이라면, 이미 그렇게나 증오와 저주를 받고 있는 레아 윈필드에게 그걸 밝히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의미라니. 메이블은 문득 실소했다. 도움이라니. 좀더 좋은 빛 아래서 볼 수 있다니…… 아, 그러니까 나도 결국 순수하게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은 아니었구나. 이해하는 것으로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랐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악’이라고 믿는 것이 불행과 불운이라고 증명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말하면서도 용서할 수 있게 되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사람도, 함께 살지 못할 사람도 없다고,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선한 존재들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은 것이 메이블의 마음을 추동해온 진짜 욕심이었는지도. 그래서 이 여정의 끝에는 그럴 수 있을 만한 답이, 들으면 화가 풀리고 연민이 싹틀 법한 그런 설득력 있는 답이 기다리고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한심해…….”
메이블은 겹친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레아 윈필드도, 핀갈 모레이도 자신들의 사랑이 훌륭했다고, 선성을 증명한다고, 사실은 이것이 그들의 진심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나쁜 면은 겉보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멋대로 기대하고 증명하려 애쓴 것은 메이블이었다. 사람은 그런 존재라고,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메이블이 믿고 싶었으니까. 내고 싶은 답을 미리 정해놓고 대상에 접근하지 말라는 것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맨 처음으로 배웠는데도. 연구의 객관성을 위해서도, 윤리적인 책무로서도. 당연한 말이라고 여기고 깊은 생각 없이 끄덕이고 말았던 것이 뼈저리게도 부끄러웠다.
그만할까. 당연한 수순처럼, 탈력한 마음의 밑바닥에서 그런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상상이다. 추측이다.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고,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 정도에서 끝낼 수 있다. 핀갈 모레이가 레아 윈필드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굳이 들추어서는 당사자들은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던 내밀한 사정을 멋대로 엿보고 끄집어내려고 한 메이블이 처음부터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나쁜 생각으로 나쁜 짓을 했다. 복잡하게 돌고 돌아서 결국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면 그냥 그런 걸로 둬도 되잖아. 하지만, 하지만 어쩐지 그건 어딘가……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메이블을 침울에서 흔들어 깨웠다.
“여, 공주님. 미안한데 연락 좀 돌려줘야겠다.”
가볍고 익살스럽지만 기저에 깔린 긴박감을 감추지 못하는, 약간의 외국 억양이 섞인 낮은 음성. 세이지였다.
레아, 나는 당신이 왜 당신이 한 모든 일들을 하기로 결심했는지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평생 나의 정신이 가장 해명하고 싶어했던 신비임에도, 우리는 이토록이나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다른 종인 탓에……
그럼에도 생명이 살아가는 이법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은 유한자가 삼킬 수 없는 보석, 탐내는 자를 파멸시키는 허상. 죽은 자조차도 그 살과 피를 취해 살아가는 자의 일부 되어 움직이는 바 산 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탄생 자체의 봉쇄, 투쟁으로 결착되지 못한 죽음보다도 더한 불합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흐르는 이치에 의해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한 당신은 그 불합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머나먼 별과 같은 이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열렬한 나머지 여태껏 당신을 혼자 남겨두고서 그것을 쫓아가느라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았다면 필경 같은 일을 반복하겠지요. 그는 또다시 떠나갈 테고 당신은 또다시 기다릴 테며 한 찰나 목도한 사랑의 현재顯在는 전보다 더 깊숙히 살을 파고드는 올가미가 되어 당신을 붙들어둘 터인 바, 남은 것은 온몸을 던져도 탈출할 수 없었다는 무력한 절망감뿐일 겁니다.
우리가 생부모를 여김은 당신들과 같지 않으며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사랑하고 소망함은 우리에게는 낯선 생리이니 그 심정을 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단지 나조차 그 결과를 내다볼 수 있을 만큼은 인간이라는 족속에 대해 보고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레아, 당신들은, 인간이라는 생물은 그런 꼴로 만들면 죽습니다. 철모르는 어린날 내가 믿었던 것처럼 당신이 나와 같은 것이었다면 그래도 괜찮았을지도 모르겠으나 당신은 실로 엄연한 인간임을 나는 오래전에 알았습니다.
창잡이를 울타리에 가둬두고 헤엄치지 못하게 하면 끼니때마다 배터지게 먹여줘도 머지않아 병이 들고 죽어버릴 겁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으로도 이루어진 존재이며 우리의 영혼은 자유와 투쟁을 유영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아온 인간이라는 생물은 그와 꼭 마찬가지로 사랑이 모자라다는 이유만으로 죽어버리고 마는 영혼을 가졌으며, 그렇기에 서로의 영혼을 조금씩 떼어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서 서로를 살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에게 그 방법을 가르치지 않은 채 항해에 나가버렸고 당신의 영혼은 당신이 모르는 바다에 그들과 함께 전부 실려갔으니, 당신은 자신을 건네준 자리에 누군가를 채워넣지 못하여 언제나 공허와 기갈에 허덕이고 바람이 불고 바다가 꿈틀거릴 때마다 금방이라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무력하게 죽음의 아가리에 삼켜질 것 같은 공포에 떨어야 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때까지 나는 내 꼴이 영혼이 있는 존재가 당할 수 있는 가장 부당하고 비참한 처지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되돌이켜보면 그 모든 수치와 죄악의 와중에서도 내 영혼은 언제나 나의 것이었고 좋든 싫든 그 운명은 내가 책임지고 행할 나의 몫으로 나의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이 세계가 어떻게 나를 잊고 지워버릴지언정 적어도 그 힘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살아있음에 틀림이 없는 셈입니다. 당신에게는 그런 자유가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걸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마법-머글 세계 교류를 위한 발명가 협회 ‘헤이즐턴회’는 지난 마법 전쟁 때 독창적인 주문과 마법 물품들을 발명해 불사조 기사단의 승리에 크게 공헌했던 아들레이드 헤이즐턴의 이름을 딴 양쪽 세계의 기술자들의 모임이었다. 대다수는 마녀와 마법사들이었지만 마법사 주변인을 두어 마법 세계의 존재를 아는 머글 공학도들도 몇 명 자문역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이 고안한 비통상 문자를 위한 조류통신원 F.L.O.O.T.(Feathered Liaison for Out-of-Ordinary Texts)는 실시간 영상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부엉이 발에 편지를 매달아 보내야 하는 느려터진 통신 방법에 대해 불만이 하늘을 찌르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즉각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발명된 지 6개월만에 마법부에 의해서 전격 도입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신기한 것만 보면 스마트폰부터 꺼내 영상을 찍어 공유하는 신세대 머글들의 등장은 그러지 않아도 비밀보호법령의 유지에 엄청난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화면 한 구석에서 부엉거리는 조류통신원 ‘플룻’은 전화번호를 입력하거나 머글 기지국을 경유하지 않고도 스마트폰의 통신 기능 대부분을 이용하게 해주었으며 머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전화기를 음소거하면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마법부는 부엉이 우체국과 연동하여 보다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마녀와 마법사들을 위해 ‘F.L.O.O.T.’ 통신을 편지로 치환하여 부엉이로 보내주는 체계를 구축했다. 안타깝게도 마법부는 자동 필기 깃펜이 단체 메시지의 개념을 이해하게 만드는 데 실패했고, 부엉이 우체국은 ‘플룻’이 단체 메시지를 가져오면 그것을 쉼표나 세미콜론이 많이 들어간 아주 기나긴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수신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인지하여 불쌍한 부엉이가 무익하게 바깥을 헤매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게 만들었다. 헤이즐턴회에서는 ‘플룻’을 다소 개량하여 단체 메시지 수신자 중에 ‘F.L.O.O.T.’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는 상대가 있으면 ‘플룻’이 알려주고 반송하도록 해주었다. 그러한 상대에게는 한 명 한 명 따로따로 메시지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C.R.U.M.P.E.T.은 스마트폰을 거부하는 정도는 흔하고 평범해 보이게 만드는 괴짜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메이블의 비상연락망에는 그런 상대가 제법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단체 메시지처럼 현대적이고 정중한 말투로는 소통이 되지도 않기가 일쑤라서, 수신자의 이름만 바꿔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내용 자체를 하나하나 새로 써야 했다.
‘……오러들이 그로먹을 산에서 내쫓으러 쳐들어왔어요. 동굴 앞으로 빨리 와주세요.’
‘……머글 오러들을 불러서 산을 지키던 젊은 머글들과 싸움 붙였대요. 그들이 아래쪽에서 싸우고 있으니 반대쪽으로 돌아오세요……’
‘……빗자루를 타고 오신다면 마법으로 모습을 숨기셔야 해요. 다른 머글들도 소식을 듣고 속속 찾아오고 있어요.……’
그로먹은 C.R.U.M.P.E.T.에서 돕고 있는 나이든 거인이었다. 그가 사는 산은 영국 정부에서 지으려는 새 고속도로의 한복판에 있어서 마법부에서는 그들의 요청으로 몇 번이나 그를 내쫓으려 시도했었다. 그러나 C.R.U.M.P.E.T.의 항의나 저항뿐만 아니라, 기후 운동을 하는 머글 대학생들이 산 아래에 캠프를 치고 공사를 저지하면서 이는 다소간 흐지부지되었다. 세이지는 (중간역인 레모르의 다대한 도움을 받아) 집요하고 끈기 있는 반복과 웅변 끝에 머글 경찰이 캠프를 철거하려고 할 때마다 최대한 온건한 방법으로 방해하도록 거인을 설득한다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했고, 캠프를 치우려고 하면 거인이 방해하고 거인을 치우려고 하면 캠프의 머글들이 목격자가 되어서 곤란하게 하는 기묘한 공생 관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 전까지. 세이지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토록 손발이 맞지 않는 영국 정부와 마법부가 웬일로 양쪽의 동시 공략에 나선 듯했다. 세이지의 부탁으로 이런 식의 연락을 돌리는 일은 전에도 몇 번쯤 있었지만, 상황과 용건이 이렇게나 급박한 것은 처음이었다. 메이블은 단체 대화방을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며 신호음이 울리는 틈틈이 마른 목을 축였다. 중간중간 레모르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레모르는 받지 않았다. 세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두 사람 다 전화를 받고 있을 상황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메이블은 불안했다. 평소에도 원래 제 할 말만 하고 연락이 끊어지기 일쑤인 세이지조차도 지금은 걱정되었다.
메이블의 마음과 달리 길은 멀었고 머글 자동차는 그 먼 거리를 달팽이처럼 우직하게 전부 밟아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포트키를 만들어둘걸. 하지만 마법부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무리가 그걸 더 편하게 하려고 포트키를 신청하면 담당자가 얼마나 황당한 얼굴을 했겠는가. 괜히 무허가 포트키를 만들었다가 포트키 사무소에 걸려서 마법부의 눈 밖에 나면 그게 더 큰일이었다. 메이블의 연구는 상당 부분 마법부와 유관 기관의 아카이브에 의존하고 있었다…….
다행히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메이블이 산 입구에 도착한 것은 시간이 제법 흐른 다음이었다. 이런 경로로 올라가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산 위에서부터 곳곳에 나무들이 꺾이고 쓰러져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커다란 바위가 군데군데 뒹굴었다. 땅 여기저기에는 움푹 패인 크레이터 같은 것이 보였다. 머리 위로 고함소리가 오가고 주문의 불빛이 번쩍거렸다.
허겁지겁 비탈을 올라가던 중, 귀청을 찢을 듯한 포효가 들려와 메이블은 몸을 움츠렸다. 다음 순간 지축을 뒤흔들며 무언가 거대한 것이 ‘쿵’ 쓰러지며 눈앞에 온통 뿌옇게 흙먼지가 날렸다. 메이블은 반동으로 풍뎅이처럼 뒤로 나자빠져 버둥거리다 나무 등걸을 짚고 일어나 달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땅바닥에 엎어진 거인을 향해 수많은 주문이 날아드는 것이, 근처의 나무들이 분질러진 덕분에 트인 시야로 선명히 보였다. 그 앞에는 레모르가 붉은 빛줄기에 밧줄처럼 칭칭 묶여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엉망진창인 꼴이었다.
“그만해!”
비명처럼 외치며 메이블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거처였던 동굴 앞에 쓰러져 땅에 박힌 여러 개의 말뚝에 밧줄로 사지가 포박된 거인을 스무 명쯤 되는 오러들이 둘러싸고 멀찍이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여남은 명의 마녀와 마법사들이 썩어가는 낙엽을 깔고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거나 마비되지 않은 이들은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손발이 묶인 채 일어나려고 애쓰며 몸부림쳤다. 아직 제압되지 않은 몇몇이 힘겹게 지팡이를 들고서 어떻게든 포위를 뚫어보려고 갈팡질팡하고 있다가 메이블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섰다. 세이지는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시선이 메이블을 향했다. 메이블의 정면에 서 있던 한 젊은 오러가 메이블을 향해 지팡이를 돌리려고 하다가 좀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다른 오러에게 제지당했다. “비무장이야.”
메이블은 짧게 안도감을 느꼈다. 지팡이를 들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히 메이블에게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다. 메이블에게는 들어올릴 지팡이가 없으니까. 하지만 레모르는? 그로먹은? 지팡이를 들지 않았는데 공격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지팡이를 들었는데, 그러니까 지팡이를 들었다고 공격한다. 그런데 이제 메이블은 또 지팡이를 들지 않는다고 공격하지 않는다. 어떻게 되는 건데. 알 수 없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왜, 왜 이런 심한 짓을 해요. 왜 이렇게까지 내쫓으려고 하는데. 왜……”
“이 거인은 머글들의 영토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도로를 지으려는 머글들을 위협해서 쫓아내고 있습니다. 비밀보호법령은 물론이고 머글보호법으도 중대 범죄라고요.”
젊은 오러가 소리쳤다. 그의 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소, 아가씨. 게다가 그는 지난 마법 전쟁에서 가민을 도와 사람들을 해치다가 가민이 패퇴하자 여기로 도망쳐온 거요. 여긴 원래 그의 땅도 아니오. 마음 착한 건 좋지만 저 거인은 아가씨 생각만큼 무고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오. 저것은 벌써 사람을 많이 해쳤고 지금도 계속 해치고 있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잖아요!”
메이블이 마주 소리쳤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머리속으로 폭죽 한 다발을 쏘아올린 것처럼 시계視界가 아찔하게 점멸했다.
“원래 그의 땅은 어떻게 됐는데요? 왜 가민 편이 되었는데요? 가민은 이종족을 미워하는데…… 그러고서는 왜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는데요? 어째서 이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었는데요? 왜……”
목소리가 꺽꺽대며 갈라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메이블은 헐떡거렸다. 아, 무언가가 속을 간질거린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하면 손이 닿을 것만 같은데. 내내 찾아왔던 아주 중요한 것이, 눈앞에 드러날 것 같은데.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투는 단단한 벽처럼 늘어선 마법사들에게 조금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측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나이든 오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지팡이 든 손을 늦추고 상황을 보고 있던 오러들이 다시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 메이블은 그가 언짢은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말이 안 통하는군. 사람을 해치는데 이해해줄 게 따로 있지…….”
그 순간, 메이블은 드디어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어째서 이 여행을 시작했고, 어째서 그렇게나 필사적이었던가를.
메이블의 이름은 1970-80년대에 활동했던 오러이며, 머글 태생들에게는 ‘마법 세계의 레 미제라블’이라고 불리는 명작 소설《뒤돌아보는 사람》의 저자 쥘 린드버그의 손윗누이였던 메이블 린드버그를 본따 붙여졌다. 마빈과 엘리자는 둘 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친동생의 손에 살해당한 그녀의 비극적인 최후를 몹시 슬퍼했기에 첫딸을 낳으면 메이블이라고 이름짓기로 약속했다. 메이블은 어린 시절에 그녀에게 이름을 준 메이블 린드버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지가 궁금해서 그 두꺼운 책을 붙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있었다.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몇 번이나 울다가 눈만 부었지만.
그러니까 메이블에게 오러는 메이블을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한 사람, 고마워하고 기려야 할 사람이었다. 거짓과 폭력과 죽음에 맞서서 모두를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두 세계의 경찰과 군대에 대한 세이지의 불온한 언명들은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때 그녀를 소스라치게 했다.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세이지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서 거기에 반론하기는 점점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메이블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영웅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블 린드버그는 오러였다. 이 사람들도 그렇다. 어린 마빈을 불길 속에서 꺼내줬던 메이블과 같은 오러들이 레모르를 땅바닥에 처박는다. 어머니를 잃은 엘리자의 손을 잡고 달래줬던 메이블과 같은 오러들이 세이지에게 분노와 슬픔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들을 선사한다. 메이블에게 이름을 준 메이블과 같은 오러들이 메이블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치고 메이블에게 지팡이를 겨누고 있다. 양립할 수 없는 모순처럼 보이던 두 측면이 합쳐지고 상이 겹쳐진다. 그것이 어째서 가능한지를 이제는 이해할 것 같았다.
나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누군가를 그냥 괴물로, 악마로, 서사도 영혼도 없는 재앙으로 만들면, 인격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온전한 존재로서 이해하기를 포기하면, 그건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진다. ‘그냥 나쁘니까 나쁜 것’이, 마음이 없고 말이 없고 없애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고 여겨지는 한, 누군가는 반드시 그런 것으로 지목된다. ‘해로우니까 박멸해야 할 뿐인 대상’이 된다. 그런데 해와 불편 사이에는 사실 명확한 경계가 없다. 불편과 불쾌와 고통과 피해 사이에 누구도 분명한 구분선을 그을 수 없다. 도로를 짓는 것을 방해하는 일도 관점에 따라서는 사람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일과 얼마든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악을 무찔러야 한다’는 믿음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없어져야 한다’는 행동을 낳고 마는 것이다. 핀갈 모이레 모레이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오러들과, 마왕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던 오러들과, 지금 그로먹의 터전을 빼앗으러 쳐들어온 오러들은 모두 다 같은 오러들이다. 악과 싸우는 데 인생을 바치기로 한 이들이다. 그들이 그 신념을 배신해서 이렇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악’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다. 이해하고 타협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존재로, 시도할 필요조차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다.
메이블은 스마트폰을 꺼내 허공에 높이 들어올렸다. 지팡이를 꺼내는 줄 알고 몇몇 오러들이 이쪽을 향했다가 황당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충동에 휩쓸려 한 행동인데도 막상 저지르려고 하니 가슴이 콩알만하게 졸아들었다. 메이블은 눈을 질끈 감고 새된 소리로 외쳤다.
“다, 당신들의 사진을 찍었어요. 당장 지팡이를 치우고 물러나지 않으면, 이… 이걸 저 아래 있는 머글들에게 보낼 거에요!”
“뭐, 뭣―!”
나이든 오러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숨을 들이켰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협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황당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옆에 있는 동료와 두셋씩 낮은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가당찮은 듯이 웃었다. 멀리 산 아래서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발소리가 연기처럼 가늘게 이쪽으로 흘러왔다.
“그걸 협박이라고. 요새 사진 같은 건 망각술사 본부나 해명 사무실에서 하루에 백 건도―”
“경찰이 변장을 하고 산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할 거야!”
메이블이 찢어지는 소리로 내질렀다. 전화기를 꺼내들 때부터 머리속에 형성되어 있던 생각이었다.
“머글 세계에서는 그거 엄청난 스캔들이거든? 이 사진이 온갖 머글 단체들에 퍼질 때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다들 SNS에 마구 올릴걸! 진짜 경찰인가, 왜 이런 차림인가, 합성은 아닌가 엄청나게 유심히 보고 논쟁할 거라고! 그걸 본 사람들을 다 찾아내서 기억을 지우려면 마법사가 몇 명 필요할까?”
몇몇 오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아마도 머글 태생들일 것이다. 대체 SNS가 뭐냐? 한 오러가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사실 메이블이 아는 지금 인터넷의 분위기로는 이런 코스튬 플레이 같은 사진을 올려봐야 논쟁이 될 것도 없이 합성이라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지만 마법 세계로 한 번 넘어온 머글 태생들은 대개 등지고 온 세계의 동향을 따라잡는 데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더구나 오러라면 마법 세계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예상대로 메이블의 허세를 꿰뚫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아까 그 나이든 오러가 한층 침착하게 메이블을 만류해왔다.
“아가씨, 진정하시오. 범죄자를 비호하겠다고 스스로 범죄자가 될 셈인가? 동정심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마시게.”
“불사조 기사단도 범죄자였어!”
메이블이 다시 한 번 날카롭게 외쳤다.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나이든 오러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힌다는 듯한 얼굴로 메이블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지금 설마 모르가나 가민의 일당을 그로부터 마법 세계를 구한 용사들과 비교하는 것인가? 당신 제정신이오?”
“가민의 일당? 사람을 해쳐? 하,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잖아! 지금도 모르가나 가민이 시키는 대로 하던 때하고 똑같잖아!”
이번에는 한목소리로 노호성이 터져나왔다. 불사조 기사단 관계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친구, 친척, 동료들까지 무자비하게 박해하고 위협하면서 모르가나 가민의 수하 노릇을 했던 1980년대의 오러국은 모든 오러들의 역린이었다. 거기에 부역했던 자들이 아니라 쫓겨나거나 박차고 나갔던 오러들과 그 후예들도 오러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죄상들을 수치스러워했다. 가민 정부의 오러라는 말은 본분을 배신한 오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모욕이었다. 예상대로 여러 명의 오러들이 발끈해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한 명은 메이블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좀전에도 그러다가 사수에게 제지당한 젊은 오러였다.
“너 지금 감히―”
“내 말 틀려? 저 밑에서 지금 얻어맞고 밟히고 끌려가는 건 사람이 아니고 뭔데! 시키는 대로 잡으라는 사람을 잡을 뿐 생각이라곤 안 하지! 그런데 뭐가 달라!”
목구멍에서 수문이 터진 것 같았다.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가슴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쿵쾅거리는데, 큰소리는 막히지 않고 쏟아져나왔다.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숨이 찼다. 메이블은 휴대폰을 치켜든 팔이 휘청이려는 것을 느끼고 반대쪽 팔로 떠받쳤다.
“남의 토지를 무단 점거 중인 폭력배들이니까 그렇지! 머글들도 범죄자는 잡아야 할 거 아냐?”
명백하게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 일단 우기고 보는 사람 특유의 패기만만한 얼굴로 젊은 오러가 외쳤다. (메이블은 은밀하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을 듣는 몇몇 오러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무리 마법 세계로 완전히 삶의 터전을 옮긴 사람들이라고 해도, 금세기에 머글 사회에서 지내본 마녀나 마법사라면 아마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을 것이다. 아군의 동요를 느꼈는지 나이든 오러가 헛기침을 하며 온건하게 중재에 나섰다.
“머글들의 일에 판단하고 간섭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오. 우리는―”
“하지만 편을 들고 있잖아! 여기를 지키던 머글들을 공격해서 여길 밀어버리려는 머글들을 돕고 있잖아요!”
메이블이 자꾸 소리를 질러서 말을 끊자 성질이 나는지 나이든 오러도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단지 공식적인 머글 정부로부터 받은 요청에 의해―”
“공식적인 머글 정부가 뭔데? 모르가나 가민도 총리였는데 그럼 그 땐 그 사람이 마법사 대표야? 아무 머글이나 붙잡고 물어봐요, 지금 총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완전 뻥이다. 영국 시민들이 지금 총리를 아무리 싫어한대도 모르가나 가민에 대한 마법 세계의 공포와 증오와 비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세이지가 이야기해준, 바다 건너에서 영국이 후원한다는 독재 정권들에서나 찾으면 모를까. 하지만 지금의 메이블에겐 알 바 아니었다. 꼬우면 알아보든지. 애초에 고통받는 게 내 동료와 내 이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모르는 사람들이면 뭐가 다른가? 정말 그게 덜 나쁘고 덜 혐오스러운가? 과연 메이블의 호언장담이 먹혔는지, 오러들 일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산 아래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머글 세계의 정치 사회 상식이 남아 있는 오러가 사실을 지적해서 진정시키기 전에 메이블은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여기서 벌이려는 건 거대한 파멸을 가져올 어리석은 계획의 일부야. 저 아래에서 지키고 있던 건 그걸 저지해서 세계를 구하려는 사람들이고!”
거짓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 사실 영국 정부는 지구를 가열해서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사악한 음모의 일환으로 고속도로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고, 환경운동가들이 악의 조직을 격멸하기 위해 무장 투쟁을 벌이는 저항군 같은 것도 아니니 메이블이 묘사하는 그림은 현실과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다르지만, 사기를 쳤다고 비난을 받으면 최소한 그 정도의 변명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이지가 들으면 분명 웃다가 배를 잡고 뒤로 넘어가겠지. 그런데 세이지는 어디 있는 걸까?
“당신들이 누구를 돕고 있는지를 봐! 그건 멀리 있지 않아, 똑같다고요! 깨닫지 못하면 결국 누구라도―”
“메이, 너 머리에……!”
메이블은 웅변을 끝맺지 못했다. 순간이동할 때 나는 ‘펑’ 소리와 함께 뒤쪽에 나타난 세이지가 경악한 얼굴로 메이블을 보며 소리치는 말이 그것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만진 메이블은 끈적하게 묻어나는 손끝의 감촉에 놀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까맣게 보이는 선혈의 비린내를 맡은 순간 메이블은 비로소 뒤통수의 열상에서 쉼없이 흘러내리는 핏줄기의 존재를 깨달았다. 불현듯 온몸이 떨리는 으슬으슬한 오한이 머리 위를 덮쳤다. 발밑이 핑 돌면서 무릎이 허물어졌다.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까맣게 흐려지고 의식이 멀어지는 순간, 메이블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어째서인지 레아 윈필드였다. 이미 세상에 없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듣지도 못할 말을 간절하게 되뇌이며, 메이블은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사랑을 했다면, 우리가 그걸 잊어서는 안 되잖아요.
움직인 적 없던 것이 사지를 뻗어 자유를 구할 적에, 나의 레아,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 부릅니다. 나는 당신이 태어나서 숨을 쉬고 팔다리를 뻗고 걷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알에서 깨지조차 못한 채로 숨이 끊겨 말라비틀어질 것이 예정된 자리에 당신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 번이라도 이 공기를 원껏 마시고 제 마음대로 제 몸을 놀려 가고 싶은 곳에 향하기를 바랐습니다. 어쩌면 그래요, 어쩌면 나는 이쪽을 보고 웃어주는 당신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생물도 부모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자식을 잡아먹는 법은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당신을 사산시키지 않는 미래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쪽이 살기 위해 다른쪽이 죽어야 할 때 응당 할 만한 선택처럼 그 사람을 죽게 뒀습니다. 그러나 레아,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몰골로 지상을 배회하던 어둠의 생명체가 당치않게 순리의 대변자 따위를 자임할 만큼 내가 주제 모르거나 물색 없진 않습니다. 나는 설령 그 자의 목숨에 세계 전체의 명운이 걸려있다 해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내 손으로 그를 죽여야 한다면, 내가 나서서 세계에 불을 지르고 멸망을 집행해야만 그럴 수 있다면 그 또한 그리했을 겁니다.
은원이나 긍지에 대한 내 일족의 가르침이 그렇게 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태어나고 살아있는 것을 내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살아있는 정물로 만들어서 숨쉬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묶어두고 끝없이 굶주리고 두려움에 떨게 해야만 지켜지고 번영할 수 있는 세계라면 그 세계는 영원히 나의 적입니다.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마왕이든지 기사들이든지 머글들이든지 나에게는 한가지일 겁니다. 이 한 가지에 관해서만은, 그 누구의 그 어떤 규율에 의해서도 나는 명령받지 않을 겁니다.
피와 오물을 뒤집어쓴 자유라도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줄 겁니다. 당신에게는 그보다 나은 것이 응당하매 나의 힘이 닿지 않는 것을 애석해할 뿐, 나는 아마 시간을 되돌아갈 수 있다 해도 몇 번을 돌아가든 같은 선택을 할 테지요. 내 영혼 하나를 건지고자 내가 저지른 온갖 일들과 다르게 여기엔 부끄러움도 죄악감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 오랜 세월을 지나 여전히 당신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무언가가 당신이 한 일을 미워하고 원망한다면, 당신에게는 자신 이외에도 한 사람 더, 그럴 상대가 있는 셈이겠습니다.
메이블은 어두운 공간에 서 있었다. 자잘한 꽃들이 흩뿌려진 풀밭이 사위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조그만 섬처럼 부유하는 것이 보였다. 초록으로 환한 곳에 발을 디디면, 저만치 아름드리 떡갈나무 아래에 메이블이 사진에서 보았던 새파란 눈동자의 소녀가 앉아있었다. 단정한 아동복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하나로 묶고, 꼭 맞는 구두를 신은 작은 두 발을 흔들며 유리로 만든 잼 항아리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에 든 무언가가 유리병이 꽉 차도록 은은한 붉은색으로 빛을 드리웠다.
“……레아.”
보는 순간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음에도 메이블은 조그맣게 불러보았다. 메이블은 발목까지 난 풀을 밟고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소녀는 웃지 않았다. 사진에서와 꼭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메이블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단지 안에는 팔딱거리며 맥박치는 조그만 심장이 들어 있었다.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에는 자신의 심장을 몸에서 꺼내 감춰둔 마법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몸에서 떨어져나간 심장은 털이 숭숭 나서 흉하게 쭈그러들어 버린다. 훗날 사랑을 하고 싶어진 마법사는 심장을 다시 몸에 넣으려 하지만 털 난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고 마법사는 결국 반려로 삼으려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만다.
하지만 메이블의 눈앞에 보이는 아이의 심장은 틀림없이 선명한 빨간색이었고, 겁을 먹은 작은 동물처럼 바삐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부글거리며 가슴께까지 차올랐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너 걸음쯤 떨어져서 마주선 거리에서 더 이상 발길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있는 힘껏 애를 써서 메이블이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은 고작 꺼져가는 듯한 한 음절뿐이었다.
“왜……?”
“이렇게 해야 울지 않으니까요.”
소녀가 말했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메이블이 묻고 싶은 모든 것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도자기 인형이 말을 하는 것마냥 조용하고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심장이 있어야 할 소녀의 왼쪽 가슴에는 블랙홀 같은 새까만 공동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울고 싶었어? 메이블은 묻고 싶었다. 그런데 울지 않고 참아야 했어? 어째서냐고, 어쩌면 생전의 본인조차 알지 못했을 답을 캐묻고 싶었다. 동시에 그런 건 알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어떤 중요하고 바꿀 수 없는 이유가 있든지 그걸 납득해서 조용히 참는 것이 어린아이가 할 일일 수는 없다고.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녀를 꼭 끌어안고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하려고 애쓸수록 목구멍은 더욱 고집스럽게 틀어막히고, 서 있는 자리에 못으로 박히기라도 한 듯 발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울어도 돼, 레아. 슬프면 울어도 돼. 메이블은 입을 벙긋거리며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이걸 봐, 너에게도 마음heart이 있잖아.
소녀는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제 심장을 옆에 치워두고서는, 일어나서 옷에 붙은 흙과 풀잎을 털어내다 문득 색유리 같은 파란 눈으로 메이블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있잖아요…… 왜 자꾸만 없는 게 아플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소녀는 가슴에 난 커다란 구멍을 쥐어뜯으려는 듯이 연신 헛손질을 거듭했다. 미간이 잔뜩 찡그려지고 입가가 괴로운 듯 뒤틀리는데도 푸른 두 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고 무감정한, 기괴하고 부조화스러운 얼굴로 몇 번이고. 그것은 꼭 울고 싶은데 우는 법을 빼앗긴 사람이 몸부림치는 것만 같은 광경이어서 메이블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울지 못하는 사람의 몫까지.
“이게 있어서 그런가봐요.”
소녀가 심장이 든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메이블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러지 마, 레아. 제발 그러지 마. 하지만 입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소녀는 일어서서 유리병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오르고, 어느새 소녀의 얼굴은 인터뷰 기사의 사진에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던 젊은 여자의 얼굴로 변했다. 저 너머의 어둠 속으로 있는 힘껏 유리병을 내리꽂으며, 그녀가 낭랑한 어른의 목소리로 인터뷰에서 읽었던 제 발언을 표독하게 읊었다.
“어떤 일들은 할 수밖에 없어요.”
그 순간 딛고 있던 발밑이 훅 꺼지며, 메이블은 유리병과 함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머리부터 떨어져내렸다. 추락하는 메이블의 옆으로 그간에 메이블이 읽고 들었던 레아 윈필드의 일생이 영화 필름처럼 펼쳐졌다. 메이블은 레아가 태어나고, 부모의 품에 안기고, 할머니의 손에 넘겨지는 모습을 보았다. 느티나무에 매인 그네를 흔들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를, 떡갈나무 아래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있는 파란 눈동자의 외로운 소녀를 보았다. 조용하고 단정하고 결코 울지 않는 호그와트의 모범생을 보았고 그래서 이따금 제가 울고 싶어하는 기묘한 소년과의 만남을 보았다. 온 세상이 두렵고 외로워서 다른 아이들의 마음에 닿는 대신 머리속을 헤집으며 모진 말을 쏟아내는 독이 오른 여자아이를. 불사조 기사단의 본부에서 아버지와 동료들을 지켜보는 딸을, 그들을 한 명 한 명 기억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을 보았다. 그것은 눈물 없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울지 않기 위해 자기 손으로 모든 것을 부숴버린, 그런 방식 말고는 자신이 살아있고 분노하는 사람임을 주장할 방법을 알지 못했던 가엾고 어리석은 마음을.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끝없이 밀고 나가며 만인의 증오와 원한을 쌓아갔던 잔인하고 슬픈 생애를. 핀갈 모레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세상에게서 숨겼는지, 어째서 그 두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렸다.
심장이 담긴 유리병은 몇 번이나 공중에서 재주를 넘으면서 메이블의 낙하를 함께했다. 그것은 불안한 소동물처럼 쉴새없이 파닥이며 신선한 피처럼 붉은 빛을 뿌렸다. 레아 윈필드의 죽음과 함께 마지막 필름이 끊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섬광처럼 메이블의 뇌리를 관통했다. 심장. 메이블은 소리없이 탄식했다. 심장이 있었어.
다음 순간, 메이블은 머리부터 어딘가에 부딪히며, 무언가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는 맑고 쨍한 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아십니까, 레아. 나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를 무엇보다 혐오하고 두려워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머글들의 권태와 무감각을 증오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모욕이고 조롱처럼 느껴지던 시절 나를 가장 비참하게 한 것은 썩어가는 살도 흩어지는 머리칼도 구역질을 일으키는 악취도 아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지리멸렬하게 서서히 변질되고 쇠락하는 감각이었습니다. 그 때에 나의 삶과 존재는 축소되고 축소된 끝에 생사를 걸고 힘을 겨루어 생명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와 올바르게 죽을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가고픈 열망이 두 손을 잡고 돌아가는 원환으로까지 작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울지 않은 모든 눈물이 나에게로 쏟아져내리던 날에 나는 살아있는 것이 다행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대로 된 인간의 행복이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행복과 아주 비슷한, 내가 손 닿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어쩌면 가장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거친 끝에 비로소라도, 당신이 있는 것과 같은 세계에서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눈을 뜬 메이블이 가장 먼저 본 것은 걱정스러운 세이지의 얼굴이었다. 사방에 약초와 소독약의 냄새가 진동하고, 덜거덕거리며 트롤리가 굴러가는 소리와 분주한 발소리, 고함과 비명, 그리고 심벌즈와 캐스터네츠로 서로 다른 곡을 동시에 합주하는 듯한 소음과 귀를 찌르는 귀뚜라미 울음, 여러 겹으로 화음을 이루는 자동차 경적소리 등 그 외에도 온갖 기기묘묘한 시끄러운 소리들이 귓속을 메웠다. 메이블의 몸은 뻣뻣한 시트와 얇은 환자용 담요 사이에, 마찬가지로 얇고 뻣뻣한 환자복에 감싸여 불편한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병원이구나, 메이블은 생각했다. 두피가, 그리고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뇌 안쪽이 간질거렸다. 치유 마법이 남기고 가는 특유의 감촉이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넘어지면서 뒤통수를 찧은 모양이던데. 기억 안 나? 피를 줄줄 흘리면서 20명의 오러들을 단신으로 물리치다니, 네 안에 그런 용맹한 부분도 있는 줄은 몰랐는데. 하하. 이런 전설은 불사조 기사단에도 없을걸.”
너스레를 떨지만, 눈동자가 쉼없이 움직이며 이쪽을 살피는 것이 불안해하는 티가 났다. 메이블은 팔꿈치를 괴고 몸을 조금 일으켰다. 평소라면 부끄러워하거나 타박할 계제였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시야 한켠에서 두 명의 치유사들이 복도를 다급하게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노란색 소독 가스가 몽글몽글 병동에 퍼졌다.
“어떻게 됐어? 그로먹은? 레모르는? 다들……”
“말했잖아. 네가 물리쳤다니까.”
세이지의 얼굴에 비로소 긴장이 조금 가시고 느슨하고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메이블을 향해 세이지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오러들이 주위를 에워싼 가운데 피를 흘리며 쓰러진 메이블을 어딘가 위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메이블의 머리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려 웅덩이를 이뤘다.
“우리 사진사가 톡톡히 한 건 했지. 이 사진이 내일 예언자일보에 실리면 마법 세계는 뒤집어질걸. 머글들 뒤를 닦아주느라 오러들 수십 명이 몰려가서는 무장도 하지 않은 마녀를 피흘리게 하다니. 보수 총리에겐 특히 치명적인 실수야.”
“난 마녀도 아니고 그 사람들은 나한테 손가락 하나 안 댔는데.”
“중요한 건 네가 마법 사회의 구성원이란 거지, 주문을 쓸 수 있는가가 아니고. 그리고 널 겨누고 저주를 쓰지 않았어도 난폭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네가 휘말려서 넘어지게 된 거니 결과적으론 마찬가지야.”
심지어 50년 전의 골수순혈주의자들도 ‘머글들을 돕기 위해 스큅을 해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나간 짓이라고 분노할 거라는 둥, 마법부 총리는 본인이 조장하고 있는 것에 발목 잡히게 되었다는 둥, 잘하면 이걸 빌미로 각하와 협상해서 그 산을 완전히 포기시킬 수도 있을 거라는 둥 세이지의 의기양양한 장광설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마법사들은 대개 ‘진보’나 ‘보수’ 같은 머글 사회의 분류를 따르지 않았지만, 세이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썼다. 메이블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마키아벨리주의적인 협잡의 선수가 기자를 해도 괜찮은 걸까? 언론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레미는?”
“좀 다치긴 했지만 팔팔해. 네가 쓰러지는 걸 보고 날뛰기 시작해서, 카메라 소리를 듣고 당황하던 오러들이 꽁무니를 빼게 만들었지. 지금은 진정 물약을 마시고 위층에서 치료받는 중이고.”
네가 그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하고 히죽 웃는 세이지의 무릎을 찰싹 때리면서도 메이블은 물밀듯이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세이지는 양쪽의 세계에서 다 급진주의 신문에 투고하는 기자고, 또한 양쪽 세계에 다 간여하는 사회운동가고, 아마 오러들이 물러가기까지 세이지가 한 역할이 카메라 소리를 낸 것보단 좀 많을 테지만 메이블은 굳이 캐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중에 다 듣게 될 텐데 뭐. 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캠프는 어떻게 됐어?”
“많이 무너지고 밟히긴 했지만, 대부분 무사해.”
세이지가 기묘하게 방관자적인 투로 대꾸했다.
“경찰에서 끌고 온 중장비가 도랑에 처박혀서 못쓰게 됐거든.”
“그거 하느라고 늦게 도착했구나.”
메이블이 환하게 외쳤다. 세이지는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정색을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나는 선량한 기자의 본분을 다하며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게 열심히 취재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경찰에서 데려온 운전수가 왠지 엄청나게 형편없었지 뭐야. 얼마나 형편없으면 글쎄, 일이 그렇게 되자마자 잽싸게 자취를 감춰서 여태까지 아무도 못 찾고 있겠어. 나 참, 이래서 영혼 없는 관료제란…….”
메이블은 소리내 웃고 말았다. 세이지의 이 ‘정의로운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세이지의 친구나 동료들, 심지어 가족들도 대부분 알지 못했다. 자신의 행위가 도덕적, 법적으로 얼마나 위태로운지 세이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세이지가 메이블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메이블이 전적으로 찬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밀을 지켜줄 정도의 신뢰가 두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세이지의 방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메이블은 지금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통쾌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이지는 깔깔거리며 배를 잡는 메이블을 보고 비로소 편안한 얼굴이 되어 병상 옆에 놓여 있던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그래,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다. 난 또 네가 자면서 힘들어 보이고, 무슨 고문당하는 것처럼 잠꼬대를 하길래…… ‘그만둬, 레아, 제발 그러지 마’라니, 나 참. 이제 급기야 레아 윈필드가 꿈에― 으왁?!”
“심장 브로치!”
메이블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세이지가 겨우 중심을 잡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메이블을 쳐다보았다. 옆 침대에 누워있던 환자가 시끄럽다며 고함을 질렀지만 메이블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메이블은 머리속으로 기억에서 떠나가려던 꿈의 꼬리를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지는 데 너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뭐, 무슨, 심장, 뭐……?”
“그 사람, 엄청 못생긴 브로치를 하고 있었어.”
메이블이 양손으로 세이지의 손을 꽉 잡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말로 할 수 있는 속도보다 생각이 쏟아지는 것이 훨씬 빨라서 정신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세이지의 표정이 점점 혼란스러워지는데도 설명할 짬조차도 나지 않았다.
“진짜진짜 충격적으로 못생긴 심장 모양 브로치. 있잖아, 그냥 새빨-간 원색이고, 복숭아 모양 말고 진짜 장기 모양 심장이고, 크기도 무식하게 크고, 그 사람 머리나 눈동자 색깔하고 대놓고 충돌하거든? 그 사람이 평소에 입고 다니던 옷하고도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 무슨 50년쯤 전에 사람 피로 어둠의 마법 같은 거 부리는 죽음을 먹는 자가 과시하려고 달고 나타날 것 같은, 완전 흉측하게 생긴, 아니 물론 그 사람은 50년쯤 전에 살았던 죽음을 먹는 자긴 한데, 그렇지만 그 사람은 모든 사진에서 옷을 완전 세련되게,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을 만큼 잘 입고 있단 말이야. 알겠어? 근데 죽을 때만 그 무진장 이상한 브로치를 한가운데다 달고 있었어. 왜 그랬을까?”
“모르겠고 내 생각엔 다시 누워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 역시 너 머리가―”
“나 마법부에 가야 해!”
비명처럼 메이블이 외쳤다. 세이지가 어깨를 움츠렸다. 메이블이 붙잡은 두 손을 바싹 당겨오며 애원하는 눈길을 쏟아냈다.
“언론부 보존서고를 봐야 해. 데려다줘, 세이지. 응? 부탁이야. 나 그거 못 보면 죽어버릴 거야!”
“그래, 회복되면 꼭 데려가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진정하고……”
“당장 가야 해!”
메이블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난 것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였다.
“마법부에서 나한테 더 이상 출입허가를 안 내주면 어떡해? 나 오러들을 방해했잖아. 비밀보호법령 가지고 협박도 하고. 모르가나 가민 때랑 똑같다고 막말도 막 했는데……”
“넌 그런 걸 겁내는 애가 이런…….”
세이지는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대체 간이 작은 건지 큰 건지 알 수가 없어, 같은 소리를 투덜거리며 이윽고 지팡이를 꺼낸 세이지가 진중한 어조로 마지막 한 번 만류를 시도했다.
“난 이거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해.”
메이블은 확고부동한 눈빛으로 답했다. 세이지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가끔은 네가 나보다 훨씬 대책이 없어.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순간이동 특유의 공감각적 속도감에 휩싸이기 직전, 메이블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막 트롤리를 몰고 병실 입구에 당도해서는 황망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연녹색 망토의 치유사였다.
당신이 심해의 어둠 속으로 내 손을 놓고 헤엄쳐들어가시던 날 당신을 억지로 건져내놓고 내가 드린 당부를 기억합니까. 아마도 당신을 만류하고자 하는 청원처럼 들렸겠지만, 레아, 그건 사실 오랫동안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당신이 염려하고 사랑하는 영웅들이 한 번만 뒤돌아봐주기를 하염없이 바라고만 있는 당신에게, 당신을 기다리는 등뒤의 장소를 주고 싶은, 어쩌면 그런 것이 되고 싶은 바람을, 열네 살의 그 때부터 줄곧…… 오늘이 아무리 그곳에서 멀어도, 굴욕과 고통으로 점철되어도, 지상의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먼 별을 바라보듯이 좇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듭니다.
에스마일의 일족이 해방을 구하듯이. 아이작 윈필드와 그의 사람들이 암흑을 밝히듯이.
나에게 있어서 당신이 꼭 그만큼, 그보다 더 가치로운 존재이므로…… 이것이 인간이 필멸성을 초월하여 영원을 얻는 방법이라면, 그렇다면 틀림없이 나에겐 당신이 하나뿐인 영원일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파멸이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레아, 나는 아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보석을 올바르게 다루는 방법은 삼키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이 인간이 완악해지지 않으면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비결이고, 나는 이제 그 이치를 압니다.
언론부의 보존서고에는 예언자일보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문이나 잡지, 포스터와 책자까지도 보존 마법이 걸린 채로 쌓여 있다. 라디오 방송의 녹음, 최근에는 심지어 영상 녹화 자료들까지 채록되고 있었다. 20세기 후반의 양차 마법 전쟁 당시 지하 라디오나 비밀 신문 등 독립 언론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기에, 이를 보존하고 계승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전쟁 후에 힘을 얻은 결과 2000년대에 들어 서고는 대폭 확장되었다. 99년 이후의 아카이브에는 언론을 자칭하고 배포된 자료라면 거의 전수에 가깝게 수집되어 있었고, 70~80년대의 자료들도 중요한 보도나 사진은 상당 부분 남아있었다. 메이블도 조사할 때 이 보존서고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낮 시간대라면 사서가 근무하며 자료 찾기를 도와주지만, 지금은 새벽이었고 두 사람은 세이지의 기자용 출입증을 빌어서야 겨우 들어올 수 있었던 차였다. 의심쩍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입구의 동상에 대고 ‘제가 사실 스큅이라 마법을 못 쓰는데 조사를 좀 도와주세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대신 메이블은 세이지를 쳐다보았다. 세이지는 깊은 한숨을 쉬며, 황량하게 텅 빈 프런트데스크 너머로 종이가 빽빽하게 들어찬 선반과 책장들이 미로처럼 늘어선 공간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검색 주문을 외웠다.
“스코보 스크립툼scobo scriptum 레아 윈필드, 심장 모양 브로치.”
여기저기에서 신문 뭉치들이 들썩거리며 낡은 종이와 잉크 냄새가 끼쳐왔다. 90년대와 2000년대 섹션이 있는 방향에서 신문과 책자들이 줄을 지어 날아와 입구에 자리한 책상에 펼쳐져 쌓였다. 메이블은 자료들이 다 날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선 채로 허겁지겁 페이지를 훑어넘겼다. 죽음을 먹는 자들의 유품과 재산 처리에 관한 논쟁, 레아 윈필드의 최후를 묘사한 기사, 심장 모양 브로치가 나오는 광고와 레아 윈필드에 대한 기사가 한 페이지에 나왔을 뿐 아무 상관없는 잡지 페이지 등 수십 개의 쭉정이를 걸러낸 끝에 메이블은 2000년에 나온 괴상한 가십지에서 마침내 원하던 이야기를 찾았다.
「……윈필드가 단골로 이용했다는 런던의 한 보석상 주인 K씨는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아주 이상야릇한 일을 목격했다고 한다. 평생 애인 한 명 만든 적 없는 이 차갑고 비정한 마음의 마녀가 수수께끼의 낯모르는 남성을 대동하고 장신구를 사러 온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아주 열렬하고 인상적이면서도 섬뜩하고 괴기한 데가 있어서, 온갖 상상을 다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본지는 K씨와의 독점 인터뷰를 통해 이 남녀의 대화를 최대한 생생히 복원해 보았다. 윈필드의 말은 이니셜W로 표시하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분은 할 수 없이 일단 M이라고 칭했다. 키와 몸집이 매우 크고 회색 긴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쓴 이 남자는 호그와트에서 죽음을 먹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목격된 바 있으나 정체와 행방 모두 베일에 싸여 있다. 혹시 그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짚이는 데가 있는 동료 염탐꾼께서는 적극 제보해주시기를!
W: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 그러니까 그걸 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저 지금 굉장히 노력하는 거예요.
M: 네 것이 다른 누군가를 건드리는 건? 침해받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를 침습하고 싶었던 적은 없어?
W: 그 대상이 되는 '다른 누군가'는 제가 신경쓸 이유가 없는 타인이라서요. 그리고…… 그런다고 해서 세계가 바뀌어 주지도 않는걸요. 지금이 그나마 제 최선이에요. 침해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자꾸만 내 걸 빼앗아가는 세상에 화풀이하기. (이때쯤 K씨는 반갑게 인사했으나 두 사람 다 무시했다.) 하하. 당신이 그랬잖아요. 살아있고자 죽이고 죽기 마련이라고…….
M: 응, 너는 그렇게 믿지.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피를 흘린다. 피를 흘리므로 두려움을 알지……. 그 두려움이 안정되어 존중이 된다. 인간은 여러모로 다른 존재지만, 이것만은 차이가 없다고 봐.
그리고 남자는 진열대 위로 허리를 굽히고 브로치 하나를 집어들어 살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새빨간 루비가 박힌 심장 모양으로 사실 연인에게 선물하기보다는 모험이나 결투에 차고 나갈 부적에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K씨는 거기에 피를 많이 흘려도 목숨을 잃지 않는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있다고 막 자랑을 하려 했으나 남자는 K씨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것을 윈필드의 망토에 달아주면서 다음과 같은 강렬하고 열정적인 구애의 언사를 늘어놓았다.
M: 레아 세네카 윈필드, 내가 너의 세계를 상처입히는 걸 허락해줘. 나는 그 피로 네 이름을 쓰고 싶다. 너와 내가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 잘못이 되지 않는 세계를, 힘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증명하게 해줘. 그러면 나는, 세상 누구보다도 어깨를 바로 펼 수 있어.
W: (말을 잃은 듯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이윽고 겁을 집어먹은 어린아이처럼, 기어들어가는 듯한 소리로)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는 거라면. 뒤 돌아보지 마요.
M: 레아. (부드럽게, 달래는 것처럼)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 네가 보석을 원한다면 달아줄 거고, 네 취향의 못생긴 돌이 가지고 싶다면 주머니에 넣어줄 거야. 나는 (힘주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양보하지 마. 잠시도 더 기다리지 마.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은 원하는 데로 걸어줘.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W: 말했잖아요. 저는 못생긴 돌도 보석도 별로 가지고 싶던 적이 없다고. 돌멩이라면 이미 가지고 있어요. 당신 집으로 보내주는 그 돌멩이잖아요. 보석도, 많이는 어렵겠지만 사고 싶다면 살 수 있어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건…… (남자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M:레아, 레아. (그녀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든 일의 결과들로부터 너를 지키기에는 내 힘이 모자라네. 그래도 우리에게 남은 '지금'에 네가 가능한한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내가 이 모양이라 그게 죽거나, 죽이거나 둘뿐인 것은 미안해. 그래도 받아준다면, 어느 쪽이든 열심히 할게.
W: 괜찮아요. 괜찮지 않지만. 괜찮아요……. 이걸로도 됐어요. 너무 많은 걸 받았어요.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요. 저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하는데…….
그리고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아버지를 팔아넘긴 배신자, 모르가나 가민의 제일가는 부역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세기의 냉혈……」
글자 위로 물기가 번져 다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메이블은 황급히 소매로 종이 위를 훔쳤다. 메이블의 양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세이지가 놀란 눈으로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지만 메이블은 대답하지도 못했다. 대신 그녀는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한 손으로 닦으며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시선을 향했다.
「……
M: 너는 네 아버지를 너무 닮았어. 조금은 덜 닮았어도 좋았을걸.
그리고 그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K씨에게 브로치 값을 치르고 그대로 그녀와 함께 가게를 나가버렸다. 두 사람이 문 밖으로 사라지기 전 K씨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가자, 레아. 돌아가기 전에 마실 거라도 사줄게. 너무 마음 쓰지 마, 나 지금은 제법 행복해.”」
소싯적 나는 직접,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고 당신에게 자주 투덜거렸지요. 하지만 어떤 것들은 내가 투미해서가 아니라 본래가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그냥 당신이 굳이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기도 했지만, 실은 그보다도 당신이 믿어줄 만큼 말주변이 좋지 않은 탓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혼자 여기에 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상황이 된다면, 역시 한 번은 어떻게든 제대로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당신을 향해 있어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당신이 그것을 알아주신다면 하많던 나의 오욕과 과오도 헛되지만은 않을 텝니다.
당신의,
L.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이지러진 조각을 품에 간직하고 더 나은 소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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