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별에게, 그리고 그들

서툰

부제 : 사랑니

“너나 나나 가끔 생각해보면 운이 좋아.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해주는 확률은 극히 낮잖아. 그런데 우리는 그게 됐어. 조금 어긋나버린 적이 있지만 다시 되돌아왔고. 안 그래 지우야?”

화면이 큰 티브이에서는 서준이 결제한 멜로 영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유명한 영화인데 정작 지우는 본 적이 없다기에 서준이가 강력히 추천한다며 바로 결제해 둘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소파에 편히 앉아 보는 중이었다. 눈물이 날 만한 장면도 꽤 등장했다. 서준이는 이미 몇 번 휴지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사실 지우도 슬프기는 했지만, 울만큼의 여운과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제 옆에 앉은 서준이가 우는 것이 더 신경 쓰였을 뿐이다. 저러다 탈수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어 결국 지우는 영화를 보다 말고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컵 떠왔다. 그리고 곧바로 서준이에게 먹였다. 서준이는 마치 아이처럼 지우가 챙겨준 대로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목이 탄 모양이었는지 제법 떠온 물을 한 번에 다 마신 서준을 보고 다시 물을 챙기러 가려는데 이번에는 그런 지우를 막은 서준이었다. 중요한 장면이야, 집중해. 배우답게 순간 집중력이 좋은 편인 서준이는 자신이 물 마셨던 것도 까먹은 것처럼 컵을 손에 쥔 채로 나오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덩달아 지우도 서준을 따라 그 중요한 장면을 보았다. 마음이 울리는 장면이었다. 해후한 연인이 서로를 향해 절절한 고백을 하는 장면이었다. 다시 눈물을 쏟아내는 서준을 보고 지우는 다음에 멜로 영화를 보게 된다면 꼭 앞에 물을 떠다 놔야겠다고 다짐했다.

눈이 이만큼 부은 서준이 눈이 안 떠진다며 영화가 끝나고 우는소리를 했다. 무언가 챙겨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서준의 가벼운 투정을 그냥 넘길 지우가 아니었기에 곧바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서준이의 두 눈을 살살 누르고 부기를 가라앉히게 도와주었다. 아직 서준의 휴식기는 한참 남았다. 들어간 영화가 촬영 회차가 긴데 하필 날씨도 도와주지 않아 자꾸 연기가 되고 있었다. 서준이는 저보다 스텝들이 걱정이라며 촬영장에 긴 패딩도 돌리고 커피차도 돌리며 기운을 북돋는 데 열심이었다. 누구보다 스텝과 감독을 생각하는 서준을 알기에 모두 다 날씨가 도와주길 기도했지만, 휴차 예정이 아니었던 오늘도 비 소식에 야외촬영이 무산됐다. 다행히 출발 직전 연락이 와 서준이는 조금 더 잠을 청할 수 있었고 지우는 서준이와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너 어디 아파 지우야?”

“아니?”

“아닌 게 아닌데?”

“사실 조금. 두통 있어.”

“아프면 말하라니까 왜 자꾸 숨겨.”

“이 정도 두통은 약 먹으면 나으니까 그렇지. 촬영하는데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우리 그러다가 어긋났잖아. 앞으로 숨기는 것 없이 다 말하기로 해놓고.”

“호 해줘 그럼.”

“어?”

“호 해달라고, 낫게.”

꼭 이렇게 지우가 한발 성큼 다가서면 당황하는 것은 서준이었다. 그런 서준이의 반응을 제법 즐기는 지우가 웃더니 얼른 해달라며 관자놀이를 보여준다. 그 바람에 얼굴이 새빨개진 서준이 결국 눈을 감고 호오 하는 시늉을 하자 지우가 참지 못하고 큭 웃음을 내뱉는다.

“짓궂다, 한지우!”

“아프면 말하라며. 아침에 두통약 먹었어. 가라앉는 중이야. 근데 강서준 신기하다. 나 포커페이스라 표정 읽히는 편 아닌데 잘 읽어.”

“배우잖아. 그리고 네 애인이기도 하고. 나는 온종일 지우만 보는데?”

이번 선방은 서준이었다. 일격을 당한 지우가 이번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예쁘고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을 갖다 대고 저렇게 깜찍한 말을 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지우는 그런 서준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코를 찡긋 부딪혔다. 그만하라는 의미였다. 서로의 소리 없는 사랑 전쟁은 이쯤 막을 내렸다. 비는 기온이 낮아져 어느새 눈으로 변해 있었다. 내일 지방으로 촬영하러 가는 서준이 걱정된 지우가 창에서 떠나지 못하는 걸 보았다. 바뀐 매니저가 운전을 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새벽 눈길 운전은 자칫 사고 나기에 십상이었다. 잠들기 전까지 창에서 떠나지 못하는 지우를 보고 서준이 웃으며 내일 기온 높아 아침에는 녹을 거라고 지우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아침에도 기온은 영하를 웃돌았고 결국 바닥은 영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항상 서준이보다 일찍 깨는 지우는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바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같아서 서준은 제 품 안에 두고 보고만 싶은 사람이었다. 지금은 제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는 걸 무엇보다 잘 알지만 이런 날에는 도움이 하나도 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 기운이 쭉 빠지는 지우였다.

“지우야. 밖에 나갔다 온 거야?”

“응. 날씨 봤어. 아직도 춥고 땅도 그대로 얼어 있네.”

“괜찮아. 조심해서 다녀오면 돼. 조금 더 자자. 아직 시간 좀 있잖아.”

“그래. 더 자자.”

사실 지우가 깬 것은 날씨를 확인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요 며칠 지독하게 따라붙는 두통 때문이었다. 아주 큰 통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신경이 쓰이는 통증이었다. 자다 깨서 물을 마시려 일어나자 다시금 이는 두통에 두통약 한 알을 다시 털어먹는 지우였다. 이 두통이 며칠 된 걸 알면 서준이는 당장 큰 병원에 인맥 동원해 각종 검사를 받으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 심한 통증은 아닌지라 말은 더 꺼내지 않았지만 어쨌든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서울에 재오픈하기로 한 티 아스페토 식자재 납품 계약을 하러 가야 하는 날이라 특히 중요한 날이었다. 지우 혼자 이 큰일을 덜컥 결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지라 서준이 소개해 준 사람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두통이 있으면 안 됐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 통증을 손으로 꾹꾹 눌러 마사지를 한 후 서준의 말대로 옆에 누워 잠을 조금 더 청하기로 했다. 제가 눕자마자 바로 안겨 오는 따뜻한 서준의 체온에 순식간에 두통이 잠재워짐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니 촬영이 딜레이 된 만큼 오래 찍는다며 먼저 자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안 그래도 눈길에 밤길 운전은 위험하다며 지우는 서준에게 근처 숙소에서 자길 권했다. 그러자 조금 우는소리 하던 서준도 상황이 여의찮은 걸 알고는 그러겠다고 답을 주었다. 오랜만에 서준이 없는 집은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순식간에 다참마을에서 혼자 지내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지우는 나빠지려는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애썼다. 서준에게 지금이라도 무리해서 오라고 하면 온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바로 전에까지 대화하던 창을 나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씻지도 않고 읽고 또 읽었다. 조금 기분이 나아진 지우는 씻고 자리에 누웠다가 도로 일어났다. 어차피 지우는 서준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을 혹사하고 자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잠을 청하게 될 것 같아 머릿속에 맴돌던 레시피를 생각해 내고 식자재 계약한 곳에서 받아온 재료를 냉장고에서 꺼내 한밤에 요리를 시작했다. 집중하면 잘게 일던 두통도, 허무함도, 쓸쓸함과 공허함도 사라졌다. 일순간인 것을 알지만 무언인가에 몰두하는 것으로밖에 불안함을 잠재우는 걸 모르는 지우였다.

한참 요리를 다 하고 나자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왔다. 한밤중에 뭘 먹기에는 부담이 되지만 그대로 버리기는 아까워 플레이팅까지 끝내고 사진을 찍은 후 식탁에 앉아 한입 먹으려는 찰나,

“지우야!”

당연히 오늘은 오지 못할 줄 안 상대가 나타났을 때 기분이란. 안도와 기쁨이 덮치는 기분에 스스로 또 죄책감이 드는 지우였다.

“헉, 뭐야 안 자고 요리했어? 나보고 자라더니. 거짓말쟁이네.”

“너 없으면 못 자는 거 알잖아. 마침 생각난 레시피도 있고 재료도 있어서 해봤어. 어떻게 왔어?”

“다들 으쌰으쌰 해서 빨리 촬영 끝냈어. 다행히 생각보다 도로도 안 얼어서 얼른 왔지. 내일 촬영 부분까지 다 끝내고 와서 촬영 하루 쉬어.”

“한 번에 다 끝내면 차라리 좋겠다. 하루걸러 한 번 촬영하니까 더 힘든 것 같아 네가.”

갔다 올 때마다 살이 내리는 것 같은 서준의 얼굴을 쉴 새 없이 쓰다듬으며 지우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런 지우의 걱정을 잠재우려는 듯 서준이는 따뜻한 지우 손에 제 얼굴을 맡기며 답했다.

“나는 너랑 하루라도 붙어 있는 게 더 좋아. 너도 거기 한번 가볼래? 경치 정말 좋아.”

“마지막 촬영 때 같이 가기로 했잖아.”

“맞아. 그랬지. 아 근데, 음식 냄새 대박이다.”

“배고파?”

“응.”

“먹을래?”

“진짜? 너 먹으려던 거 아니야?”

“아니야. 난 버리기 뭐 해서 먹으려던 참이야. 앉아.”

이 아까운 걸 왜 버리느냐며 플레이팅까지 다 끝나 손 하나 안 댄 음식을 서준이도 지우처럼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잘 먹겠다며 수저를 들더니 전투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긴 시간 촬영 대기하면 밥은 식기 마련이고 가뜩이나 밥에는 욕심 없는 사람이니 촬영 때는 예민해 밥을 거의 먹지 않는 서준인지라 오랜 시간 공복이었을 것이다. 촬영이 없는 지금이 배고픔을 느끼기에 적기라는 생각에 지우는 다른 것도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서준은 금세 지우에게는 그다지 많지 않은 양의 한 그릇을 끝내고 배가 부르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덩달아 지우의 기분이 한층 더 나아졌다. 얕게 일던 죄책감도 순식간에 증발했다. 포만감에 눈이 감기려는 서준을 샤워실로 밀어두고 설거지를 다 끝낸 지우가 두 사람이 잘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이는 불쾌한 두통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센 통증이었다. 짜증 나네…. 순간 표정을 굳혔는데 샤워하고 나온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서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너 아직도 아프구나 한지우.”

“응.”

“며칠이나 됐어. 오래됐지.”

“아냐 한 사흘쯤.”

“병원 가자. 예약할게.”

“그 정도는 아니야, 오늘이 좀 심한 거고 그동안은 신경 쓰이는 정도였어.”

지우의 말에 서준은 조금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성격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빨리 말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찌푸린 서준의 미간을 지우가 손으로 살살 눌러 펴주었다.

“두통 그냥 예사로 넘길 일 아니야. 삼차 신경통도 될 수 있댔어.”

“어떻게 잘 알아?”

“나도 한창 스트레스받았을 때 두통 심해서 병원 다녔었어. 이제는 좋아졌지만.”

“걱정 끼쳐서 미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우야. 그런 건 미안하다는 말 할 필요가 없어. 당장 일어나는 대로 오박사님 예약할게. 시간 빼놓으실 수 있을 거야.”

“무리하지 말고.”

“응. 안 되면 다른 데라도 가자. 병원은 꼭 가야 해.”

“너 쉬는 날인데.”

“그래서 더 다행이잖아.”

서준은 바로 전에 자신이 피곤하다고 했던 것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또다시 지우의 마음에는 생채기가 길고 가늘게 나버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은 일단 되도록 빨리 잠이 들기로 했다. 늦잠이라도 자서 일정이 어긋나면 서로 더 힘든 것을 알았다.

자고 일어나니 날은 맑게 개었다. 만약 오늘 서준이 없었더라도 지우는 병원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니 두통이 조금 더 심해졌고 얼굴이 얼얼한 느낌이 났다. 그렇다고 감각이 둔한 것은 아니었다. 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한 번 해보았다. 그런 지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서준이 보였다. 어느새 지우보다 빨리 깨어 병원 예약을 마친 모양이었다. 씻고 나오라는 서준의 등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지우는 그런 서준의 어깨를 주물렀다. 긴장하지 말고 더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자신이라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에 얼른 제대로 된 진료를 받고 서준의 걱정을 덜어주고만 싶었다. 둘 다 결연한 마음을 가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검사를 한 번에 다 대기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서준의 덕분이었다. 서준이 일전에 이 병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 영화는 소위 초대박이 났고 그 덕분에 병원은 호황을 누렸던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인연이 되어 서준은 건강검진부터 자잘하게 아픈 곳이 있으면 자연스레 이 병원을 찾았다. 자신의 두통을 봐줬던 교수는 서준의 연락에 한달음에 나와 지우에게 인사까지 건네며 여러 가지 검사를 빠르게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피검사며 CT, MRI까지 온갖 검사를 다 받은 지우는 처음에는 긴장이 사뭇 됐으나 나중에는 검사받느라 지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침에 있던 격통과도 같은 두통도 더는 없었다. 정말 스트레스 탓에 두통이 온 것일까. 그런데 최근 그렇게 큰 스트레스는 없었는데. 터를 옮겨 다시 레스토랑을 재오픈을 앞두기는 했지만, 그 일정은 순풍에 돛단 듯 순항을 이루고 있었다. 잠자코 생각에 빠진 지우를 보고 다시 통증이 있느냐며 걱정하는 서준에 지우가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정말 아니라고, 아픈 줄 모르겠다고 말하자 그제야 VIP 대기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지우 어깨에 기대는 서준이었다. 서준도 아침부터 저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웬만한 검사는 다 끝나고 이제 입원이 필요한 검사를 받아야 하면 입원해야 하기에 지우는 검사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곧 대기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둘을 호출했다.

“일단 두 분 다 너무 걱정하는 표정이라 말씀드리면 너무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지우야 정말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근데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어요, 나으려면.”

“네?”

별다른 질환은 아닌데 나으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선뜻 다가오지 않아 잘 보지도 못하는 뇌 영상을 둘 다 번갈아 가며 보고 있자니 노크 소리와 함께 다른 교수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명찰에는 ‘구강안면 외과’라는 다소 생소한 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우는 저도 모르게 서준의 손을 꼭 잡았다. 서준도 마찬가지로 지우의 손을 꼭 잡았다.

“안녕하세요. 흔히들 말하는 치과의사입니다.”

사람 좋은 인상과 부드러운 목소리에 지우와 서준이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제 방 가서 얘기 나눌까요, 두 분.”

그리고 그가 먼저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둘은 그를 따랐다.

교수의 방에는 안면의 뼈 구조를 설명하는 모형과 치과에서 흔히 보는 이 모형이 보였다. 치과라니. 생각하지 않은 쪽이라 지우와 서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에게 뇌 영상을 보여주고 얼굴을 찍은 영상을 두 개 띄워 보여주는 교수의 표정은 인자했다.

“한지우님?”

“네.”

“양쪽 사랑니 발치했나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했으면 아마 기억이 날 거예요. 치과에서는 수술로 발치하는 분야다 보니 기억이 생생하죠.”

“아….”

“지우야 사랑니 안 뺐어? 신기하다. 네 나이까지 안 빼기도 하는구나.”

“더 늦게까지 발치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평생 발치 안 하기도 해요. 케이스는 다양합니다.”

“그렇구나. 우리 지우 사랑니 때문에 두통이 있는 거예요?”

“네. 사랑니도 케이스가 여러 가지인데 이 사진 보시면 알겠지만, 치아는 머리로 이어지는 신경이 다수 분포가 되어 있어서 이가 아프면 흔히 두통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한지우님 케이스처럼 신경외과에 갔다가 치과로 오는 분도 더러 있어요. 한지우님의 경우가 그럴 수 있는 케이스에요. 보다시피 사랑니가 매복으로 나기도 했고 사랑니 밑에 염증이 조금 생겼는데 그게 하필 뇌 신경과 맞닿아 있어서 제법 두통이 있었을 겁니다. 다행히 한쪽은 사랑니가 잘 나고 있어서 그다지 아프지 않았을 거고요.”

양쪽을 비교해보니 확실히 한쪽은 이가 올바르게 자라고 있어 매복도 아니었고 잇몸이 붓지도 않았지만, 두통이 있는 쪽은 분명히 사랑니가 났음에도 잇몸 안으로 파고들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검게 보이는 부분이 염증이라고 교수는 설명했다.

“근데 왜 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예요? 사랑니 발치 오늘 바로 하면 안 되나요?”

“일단 염증이 있는 부분부터 발치를 하면 좋겠지만 아까도 설명했다시피 뇌 신경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 이쪽은 염증을 가라앉히고 수술하는 게 좋을 것 같고 다른 한쪽은 예방적으로 지금 발치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똑바로 사랑니가 난다고 해도 한지우님 케이스는 입안이 작기 때문에 사랑니가 굳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두통이 더 심해지면 어떡해요?”

어제 격통을 겪은 지우의 표정을 도무지 잊을 수 없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서준이 교수에게 물었다.

“어쩔 수 없이 발치는 할 수 있겠지만 양쪽을 한 번에 발치하면 생활하는 데 지장도 있을 테니 이쪽은 최대한 염증을 가라앉히는 방향으로 권고합니다.”

“항생제 복용하면 통증도 나아지겠죠?”

“네. 염증이 가라앉으니 좋아집니다.”

“그럼 오늘 한쪽 수술하고 일주일 후에 와서 반대쪽 수술할게요.”

“밖으로 나가 기다리시면 간호사와 코디네이터가 안내해줄 겁니다. 발치 자체는 오 분이면 끝나니 걱정하지 마세요.”

교수의 말에 지우와 서준은 나란히 다시 VIP 대기실로 향했고 보다 상세한 설명을 코디네이터가 말해주었다. 과정과 약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지우는 사실 두통의 원인을 알았다는 속 시원함에 다른 것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외려 서준이 당사자인 지우보다 더 열심히 경청하며 수술에 대한 설명과 약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마 지우가 서준이였다면 똑같이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지우가 첫사랑 상대가 나라서 사랑니도 지금 나나 봐.”

“맞아. 그런가 봐.”

속설에 사랑니는 첫사랑과 함께 찾아온다고 했다. 서준은 한껏 장난 섞인 말을 한 것이었지만 지우에게는 기실 정답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세상을 살며 자신이 이토록 깊은 사랑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저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랑을 할 줄이야. 그래서 그런가? 서른 해 넘도록 날 기미가 없던 사랑니가 뒤늦게 난 것 같았다.

둘은 VIP 대기실에서 이어진 수술실로 곧바로 향했다. 서준은 차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지우는 오랜만에 앉은 치과 의자에 잠시간 불안함이 일었다. 치과 특유의 향과 소리가 그를 자극했다. 치위생사가 지우를 보더니 상냥하게 마취 크림을 발라주었다. 요새는 마취도 잘 되어 있어서 발치하고 나서 진통제 조금 먹으면 통증도 좋아진다는 말에 지우는 알게 모르게 안심했다. 마취 크림을 바른 후 수 분 지나자 곧바로 자신에게 수술을 말하던 의사가 와 마취 주사를 아프지 않게 놔주었다. 마취가 들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교수는 다른 환자의 시술을 하러 갔다. 얼얼하고 느낌이 들지 않는 볼을 괜히 쿡쿡 찔렀다. 옆에 서준이 있었으면 제 볼을 갖고 장난쳤을 게 눈에 선했다. 서준의 생각을 하자 대번 불안감이 사라지고 웃음이 일었다. 얼얼하고 감각 없는 볼로 웃자니 이상한 표정이 지어졌을 것 같아 두리번거렸으나 다들 바빠 보여 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제 혀도 마취가 되어 얼얼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교수가 다시 자리에 앉아 지우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래위로 두 개의 이를 발치해야 해서 5분보다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러나 마취 탓인지 벌린 턱이 조금 뻐근한 걸 제외하면 아픈 줄도 모르게 수술은 끝이 났다. 마취가 드는데 기다린 시간이 오히려 더 길었다. 지우는 주의사항을 들으며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강아지처럼 저를 반기는 서준이 보였다. VIP 통로는 개별적으로 마련돼 있어 입구부터 달랐다.

“약 사러 가야 해.”

“응응!”

“따라서 오지 말고 있어. 내가 금방 가서 사 올게.”

“응. 근데 지우 발음 이상하다.”

“마취해서 그래.”

“내가 대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그 정도로 이상하지는 않은데. 진짜 이상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매니저가 재빠르게 나서서 지우에게서 처방전을 가져갔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터라 다행히 약국은 한산했고 약 종류도 항생제와 진통제라 금방 조제가 되어 나왔다. 마취가 풀리기 전까지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하여 지우는 물고 있는 솜을 퉤 뱉었다. 피와 함께 마른침이 나왔다. 오랜 시간 금식해 침도 말라붙은 모양이었다. 물만 조금 마시고 헹구어 뱉어냈다. 여전히 피가 조금 나와 병원에서 여분으로 준 솜을 다시 입에 악물었다.

”안 아팠어?“

대화가 힘들어 지우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마취를 잘해서 안 아팠어’라고 썼다. 서준이는 약간 부어오른 지우의 뺨을 보더니 언젠가 지우가 자신에게 해준 것처럼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서 가져와 지우 볼에 대주었다. 한결 부기와 열기가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한 곳의 통증만 느낀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다른 쪽 두통이 전혀 없이 사랑니 발치한 부분만 얼얼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며칠만 버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지우는 안심했다. 두통의 원인도 알았고 이제 시간이 가기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잘못 난 사랑니는 지독하게 지우를 괴롭혔다.

”지우야, 아파?“

”응? 왜?“

서준이 이른 아침부터 지방으로 갈 준비를 하느라 드물게 지우보다 빨리 깬 날이었다. 지우가 끙끙 앓는 것을 알아차린 서준이 지우를 흔들어 깨웠다. 열도 있었다. 항생제가 듣고 있다는 증거라며 지우가 애써 괜찮다 말했지만 사실 깨자마자 느껴지는 두통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지우의 말과 달리 지우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서준이 매니저의 재촉에도 걸음을 떼지 못했다. 먼 길이 될 여정이라 지금 가도 늦을 시간이었다. 촬영장에 민폐 끼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서준으로서는 아픈 지우를 두고 나가는 일이 도통 쉽지 않았다.

”일단 촬영장 가. 너무 아프면 내가 응급실에라도 갈게.“

”진짜?“

”당연하지. 나도 아픈 거 잘 못 참아.“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었지만 당장 서준을 촬영장으로 보내려면 수가 없었다. 결국 서준은 지우가 여분의 진통제를 먹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뒤늦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아문 다른 쪽 사랑니는 이제 사라져 잇몸만 약간 부은 채였다. 혀로 살살 쓸어보니 없어진 이를 메우느라 잇몸이 솟아난 게 느껴졌다. 혀로 눌러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한쪽은 혀가 조금만 스쳐도 욱신거렸으며 특히 턱에 힘을 주면 격통의 두통이 생겼다. 결국 지우는 한 알의 진통제를 다시 입에 털어 넣었다. 혹시 너무 통증이 심하면 연락하라며 교수가 오지랖까지 넓혀가며 쥐여준 연락처가 있었으나 연락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봤자 사랑니 통증일 뿐이었다.

”밥 먹자는 약속 잊어버렸나, 한지우? 바빠?“

”미안. 못 갈 것 같은데.“

”뭐야, 너 아프구나.“

”음, 두통이 좀 심해서.“

이 나이에 사랑니가 나느라 아프다고 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이번에 티 아스페토를 재오픈하는 데 형기의 도움이 없지 않았다. 같이 일했던 시절 거래처의 상당수를 형기가 아직도 연락하며 지내고 있어 같이 발품을 팔아주기도 했고 또한 인테리어에 무지한 지우를 위해 유학 시절 만났던 인맥을 소개해주었다. 그런 도움을 받은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오늘 밥을 같이 한 끼 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두통과 치통에 정신이 없어 깜빡 약속을 잊어버렸다.

”괜찮아? 강서준씨도 알지?“

”알아. 근데 오늘 촬영이라. 어차피 대신 아파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옆에 있어봤자 걱정만 더 할 거야.“

”나라도 가?“

”와서 뭐 하게. 간병이라도 할 거야?“

”그럴 시간까지는 안 되고 안부 목적으로 방문하려고 했지. 너까지 해서 오랜만에 필현이까지 셋이 보려고 했는데.“

”언제 김필현이랑 말을 놨어?“

”몰랐어? 김필현 얘는 내 얘기를 도통 안 하나 보네. 말 놓은 지 좀 됐어. 그럼 하는 수 없네. 진통제 잘 듣기 바란다. 쾌차하고. 다음에 밥 한 끼 해. 나 제대로 얻어먹을 테니까 각오하고.“

”그래, 알았어.“

말하느라 더 느껴지는 두통에 전화를 끊자마자 그대로 자리에 누우려다가 겨우 일어나 아이스팩을 만들어 볼 옆에 두었다. 시원한 느낌에 열기가 가시기는 했으나 통증에는 그다지 큰 효과는 없었다. 진통제도 먹었고 항생제도 빈속이기는 하지만 먹었으니 이대로 버티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다시 약 기운에 잠에 빠진 지우였다.

”야, 한지우 괜찮아? 한지우.“

정신없이 잠이 들었던 터라 다시 깼을 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언뜻 가늠되지 않았다. 지우는 이미 다 녹아 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스팩을 보고 잠시 짜증이 났다. 저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필현이었다. 필현은 제가 본능적으로 안고 있던 아이스팩이 터져 물이 새는 것을 보고 곧바로 그것을 주워 들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바닥이 물로 흥건했다. 이게 무슨 난리냐며 급한 대로 화장실에서 수건을 꺼내 온 필현이 바닥을 대충 훔쳤다. 다행히 방수 코팅이 된 바닥이라 크게 문제는 없었다. 갑자기 이 시간에 필현이 자신에게 온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이미 사랑니가 나느라 부은 볼에 말하기 어려워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필현이 그런 지우에게 사정을 말했다.

”너 아프다며. 서준이형은 왜 말을 안 해? 어쩐지 최대한 촬영 빨리하고 집 가야 한다고 연락해 오긴 했던데. 형기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 아냐. 형기 말로는 오늘 셋이 보기로 했는데 너 아파서 안 왔다기에 밥 먹다 말고 놀라서 뛰어온 거 아냐. 김형기는 안 왔어. 삐쳤는지 갔더라고. 제가 뭔데 삐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괜찮은 거 맞아? 상태가 영 아닌데. 응급실 갈래? 어디가 안 좋아. 두통 심하다던데 볼은 왜 부었어?“

일련의 상황을 다 말하기에는 몸이 받쳐주질 않았다. 결국 지우는 서준 대신 매니저에게 연락하는 것을 택했다. 마치 10분 대기조처럼 지우의 연락이 오면 바로 받으라고 서준에게 부탁이라도 받았는지 신호음이 채 두 번도 가기 전에 전화가 이어졌다. 지우는 말 없이 매니저와 필현이 통화하도록 해주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속이 쓰려 급한 대로 사둔 이온 음료를 먹고 다시 항생제와 진통제를 먹었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이 찝찝해 와중에 샤워를 대충이라도 하고 나오자 외출복을 들고 서 있는 필현이 보였다.

”병원 가자. 너 상태 안 좋으면 응급실 간다고 네 입으로 강서준에게 말했다며.“

그러나 지우는 그런 필현에게서 제 옷을 가져가 그대로 걸고 약 먹은 것을 보라며 힐끗 눈길을 주었다. 약으로 버틸 셈인 지우의 고집을 필현이 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서준의 말도 잘 안 듣는 지우였는데 필현의 말이라고 들을까.

”너 이러는 게 강서준에게 더 민폐야. 너에게 아픈 말이겠지만 좀 새겨들어. 일어나.“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우는 병원으로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일종의 이것은 지우가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근 일 년간 서준을 버려둔 저 자신에게 내리는 벌. 이 정도 아픔쯤은 일 년 내내 저를 찾으러 돌아다닌 서준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사랑니가 하필 이때 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제가 서준에게 모진 짓을 했으니 너도 그만큼의 진통을 겪으라는 운명일지도 몰랐다. 서준이 지우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았다면 단번에 무슨 헛소리냐고 했겠지만 지우는 지금이라도 자신이 이 벌을 받는 것에 한편 마음이 편했다. 마음에서부터 가시지 않은 죄책과 아직도 솟구치는 서준에 대한 독점욕과 소유욕이 단단히 지우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쾌한 악취가 나는 감정을 가지고 제대로 서준과 마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 번은 기어코 지나가야 하는 통증이라면 때는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는 다시 모로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쿡쿡 쑤시다 못해 열도 나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가자는 병원은 안 가고 미련하게 이불 뒤집어쓰고 오한을 견디고 있는 지우를 보자니 복장이 터질 것 같아 형기를 그대로 보내지 말고 데리고 와서 저 장정 하나를 들고 옮겼어야 했다고 필현은 뒤늦게 후회했다. 나중에 서준에게 들을 원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우는 서준의 애인이기 전 제 친구이기도 했다. 언제나 아픔은 속으로 삭이고 남에게 손 한번 내밀기도 어려운 놈. 알 수 없는 속내 끝에는 바보 같은 생각이 아마 넘쳐흐를 것 같아 최후의 수단으로 다시 매니저에게 연락을 넣어 서준에게 설득해보라고 말하려는 참에 지우가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턱을 애써 움직여 말했다.

”강서준한테 말하면 나 다시는 너 안 봐.“

”야, 너는 무슨. 나, 네 친구야.“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너도 내 성격 알잖아. 강서준 성격도 잘 알고. 지금 나 이렇게 아픈 것 알면 촬영이 제대로 되겠어?“

”하여간 진짜 둘 다 똑같아. 열만 좀 재보자. 너 열나서 오한 오는 것 같은데.“

”해열제 두 알 먹었어. 어차피 응급실 가도 당장 할 건 없어. 들어서 알겠지만, 염증이 낫는 중이라 이런 거야. 며칠만 더 참으면 돼.“

그 며칠이 지옥 같을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 네가 먼저 쓰러지겠다. 무슨 사랑니가 그렇게 골 아프게 나는데.“

”진짜 골은 내가 아파.“

”한지우. 넌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냐. 하여간 외곬수. 혼자 끙끙 앓지 말라니까. 너 이런 거 나중에라도 서준이형이 알면 속상해해.“

”일단 서준이 촬영부터 마치고. 몰아 찍어서 이제 몇 회차 안 남았다며.“

”오늘 아마 거기에서 묵고 올 텐데.“

”잘됐네.“

”그래서 아마 매니저에게 더 신신당부한 모양이야. 너에게 연락해 오면 곧바로 핫라인 연결하라고. 걔 지금 대기하는 중일 텐데.“

”가도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너도 이만 가고 매니저님에게도 그러지 말라고 전해.“

차라리 말을 하고 나니 턱관절이 풀려서 그런가? 덜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털어놓은 약이 이제야 효과가 조금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행이었다. 지나간 격통을 애써 잊으려 필현이 나가고 난 후 난장판이 된 방을 청소했다. 침구 정리며 바닥에 쏟은 물도 다시금 한 번 더 닦고 세탁기도 돌렸다. 필현이 보면 지독하다고 혀를 끌끌 찼을 제 모습이었으나 이게 자신이었다. 아파도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했다. 그리고 통증 따위야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조금 움직였다고 센 약 탓에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뭐라도 먹어야 하는데 도저히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아 난생처음으로 제 손으로 죽을 배달해 시켰다. 무엇인가 들어간 죽도 먹기 싫어 쌀죽을 시켰다. 무엇을 먹는 것이 부담됐으나 하는 수 없었다. 겨우 몇 수저 먹고 나서 조심스레 양치하고 누웠다. 확실히 약이 듣는 모양인지 덜 아프기는 했다. 하지만 역시 속이 문제였다. 갑자기 울렁거리는 속에 그대로 죽 먹은 것을 토했다. 많이 먹지 않길 다행이라 여기며 쓰린 속을 붙잡았다. 약까지 토한 것은 아니라 열과 통증이 조금 나아진 틈을 타 못 잔 잠을 다시 청하기 위해 누웠다. 마침 연락을 받은 것인지 서준이 전화가 왔다.

”응. 촬영 잘하고 있어?“

”목소리 괜찮네. 좀 나아졌어?“

”어, 그럼. 아까 갑자기 필현이가 와서 상황 설명해야 하는데 말 길게 하기 그래서.“

”잘했어.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야 할 것 같은데. 혼자 괜찮겠어! 정말?“

”당연하지. 치통 때문에 혼자 못 있는 어른이 어딨어.“

”그게 그냥 치통이 아니잖아. 걱정돼. 너는 아프면 병원도 잘 안가잖아.“

”정말 아프면 무조건 병원 갈게. 약속해.“

”약속이라고 했다 너? 혼자 집에서 앓고 있으면 안 돼?“

필현에게 분명히 무슨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티는 내고 싶지 않은지 걱정되는 목소리가 앞에 없는데도 형태를 띠는 것 같아 지우는 괜히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렸다. 대체 강서준이 없던 지난 일 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일이었다. 애써 서로 울컥하는 마음을 다지며 아무렇지 않은 척 통화를 이어갔다. 지우도 서준도 눈앞에 서로가 없어야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남이 보면 둘은 이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에게 부재한 가족이라는 테두리와 사랑이라는 연결고리가 한데 뒤엉켜 또 다른 이름의 집착이 도사리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관계에 대해 건강하지 못하다고 표현할지언정 헤칠 생각은 없을 것이다. 둘의 관계는 서로 필요충분의 관계로 누구든 그 틈을 파고들 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한번 어긋나 새로 세워진 관계는 비록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반을 다지느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 견고함은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둘 다 이 통증을 이겨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것은 두사람의 일종의 숙제였다. 감정의 홀로서기를 상대가 없는 틈을 타 해내야만 했다. 특히 지우의 경우가 그러했다. 더는 감정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해야만 했다. 서준은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사실 토했어.“

”토했어? 왜? 울렁거려서?“

”아파서 약을 좀 빈 속에 많이 먹었더니 토했어.“

”아무래도 왕진 다니는 교수님 모셔다가 링거라도 맞자.“

”성인 남자가 한 끼 굶는다고 큰일 안 나. 밤까지 계속 이러면 꼭 병원 갈게. 그러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우선 촬영에 집중해 서준아.“

”고마워 말해줘서. 그럴게. 근데 정말 약속한 거야.“

”응.“

마치 감정을 새로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게 말을 내뱉는 법부터 가르치는 서준에게 지우는 기꺼이 응답하고자 했으나 아직은 어려웠다. 아직 속이 울렁거려 더 게워내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고 슬슬 오한이 다시 시작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마 토한 여파가 있어 그런 것일 텐데 토했다고 말하는 것도 지우 딴에는 큰 용기였다. 전화를 힘겹게 끊고 다시 한번 나오지 않는 토를 하고 나서야 드디어 속은 편안해졌으나 반대로 다시 열이 슬금슬금 오르고 있었다. 기운 없는 몸에 들어간 게 없으니 탈수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지우는 곧바로 이온 음료 한 병을 비웠다. 다행히 물 종류는 토하지 않고 얌전히 위에서 소화가 되었다. 바짝바짝 마르던 입이 조금 나아지자 다시 기운이 쭉 빠졌다. 눕자마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잠이 쏟아졌다.

하루 꼬박 잠이 들었던 걸까. 분명 조금 잔 줄 알았는데 왜 눈앞에 강서준이 있는 거지. 갑자기 깨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지우와 달리 서준의 표정은 침통했다. 병원은 아니고 집이었다. 장소 인지도 덜 된 상태인데 통증이 조금 가볍게 느껴져 다행이라고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다. 팔에는 링거가 놓아져 있었다.

”언제 왔어?“

”3시간 전쯤.“

”몇 시지. 일단 오늘 며칠이야?“

”얼마나 잔 건지 모르는구나. 하루 꼬박 잤어, 너.“

”그래? 몸은 좀 나은데.“

”방금 주사로 된 진통제 맞았으니까.“

”화났어?“

”응.“

”미안.“

”아프면 병원 가라고 했잖아. 근데 그럴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건 충분히 알겠어. 내가 왜 화가 났냐면 너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 돼서 화가 난 거야. 나 자신에게.“

”서준아, 그러지 마. 아픈 건 대신 해줄 수 없는 거야.“

”맞아. 그래서 화가 난다고.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일이라 화가 나. 억울하잖아. 왜 한지우가 아파야 하는데. 그깟 사랑니가 뭐라고. 그리고 너, 잠결에 뭐라고 했던 줄 알아?“

결국 지긋지긋하게 아픈 저 대신 서러운 눈물을 토해내는 것은 서준의 몫이 되어버렸다. 대체 잠결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기에 저토록 서럽게 우는 것인지 지우는 덜컥 겁이 났다. 헛소리를 제대로 했나 보다.

”아마 내가 열에 들떠서 헛소리했을 거야. 진심 아니었을 테니까 서준아, 상처받지 말고….“

”진심이었어. 그래서 그래.“

”내가 대체 뭐라고 했기에….“

”…한지우, 너 설마 지금 이렇게 아픈 거 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 서준아. 그건….“

”말 못하는 거 보니까 맞나보네.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해!“

지우는 제일 들키기 싫었던 진심을 들켰다. 그것도 열에 들떠서는 가장 들켜서는 안 될 상대에게.

어떻게 촬영을 끝마쳤는지 모르겠다. 오후에 통화한 후로 지우는 여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파서 못 잔 잠을 몰아서 자는 가보다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새벽에도 잠시 깨 연락했을 때도 받지 않았다. 앓느라 응급실 갈 틈도 없나보다 싶어 덜컥 걱정됐다. 동이 트자마자 필현에게 연락했다. 아무리 이 세계가 24시간 밤낮없이 일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상도덕이 있는 법이었다. 필현은 서준이 별말 없이 필현이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집으로 출발하겠다고 했다. 필현이 집에 가자 앓으며 자는 지우가 보였다. 119라도 불러서 응급실을 데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지우도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상태였기에 기사에 서준과 함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매니저가 가진 핫라인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서준이 부지런히 올라오는 동안 필현이 왕진하는 박사를 데려와 링거와 함께 진통제를 놓았다. 끙끙 앓던 신음이 조금 나아졌나 싶었을 때 오후를 넘겨 서준이 바쁘게 달려와 집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지우는 깨어나지 못했다. 의사에게 물으니 탈진과 함께 아마 통증과 고열로 앓느라 잠시 기력이 떨어진 상태일 거라고 했다. 아픈 것은 대신 해줄 수 없었다. 다른 건 돈이나 인맥을 동원해 어떻게든 해결을 할 수 있지만 아픈 건 달랐다. 또한 가족이라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몇 가지 없는 서준은 지우와 가족의 존재에 늘 한계에 부딪히는 기분이 들었다. 막막했다.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데 옆에 있어 줘봤자 무슨 소용인데.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사랑 타령일 때나 가능했다. 현실은 달랐다. 피와 살을 나눈 사이여도 패륜은 일어나기 마련이었고 사랑하는 사이에도 서로 온전히 솔직해질 수 없기도 했다.

건강한 관계? 엿 먹으라고 해. 그런 관계를 처음 명명한 사람은 자신이야말로 건강한 관계를 동경해 그런 같잖은 말을 썼으리라 서준은 생각했다. 확실히 진통제를 주사로 맞으니 통증이 한결 나아졌는지 끙끙 조용히 앓던 신음이 줄다 못해 사라졌다. 그제야 지우의 손을 잡고 기도하듯 이름 모를 신에게 빌던 서준의 어깨도 긴장이 풀렸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다시 한번 지우의 수술 스케줄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일어나려는데 서준의 손을 잡는 지우가 눈을 떴다. 깼다고 하기에는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어린아이 같았다.

”지우야 괜찮아?“

”미안, 미안해 서준아. 내가 벌 받나 봐. 너 힘들게 해서 하늘에서 내린 벌이는가 봐. 괜찮아. 벌 받을게. 그러니까, 미안해 서준아 나 용서해 줘.“

”뭐, 뭐라고?“

”염치없지만 나 용서해 줘. 미안. 평생 걸쳐 사죄하고 갚을게. 미안해….“

그리고 마치 다시 재회해 마음을 나눈 그날처럼 펑펑 우는 지우였다. 어린아이처럼 제 손을 꼭 붙잡고 열에 들떠서는 땀까지 흘려가며 열심히 우는 지우에게 서준은 그저 먹먹함이 더해질 뿐이었다. 그래, 이것이 그토록 지우가 숨겨온 진심이었다. 지우는 서준과 재회한 순간부터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새 지우를 잡아먹고 있었다. 물론 전과 같은 색의 죄책감은 아니었다. 그때는 첫사랑의 생경함에서 오는 이름 모를 죄책감이었다면 이번에는 확실히 죄가 분명한 죄책감이었다. 서준도 한동안 지우가 옆에 있는 것을 알고도 자다가 깨서 지우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했다. 하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우가 서준을 지켰고 재회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참 마을을 떠나 서울로 같이 터를 옮겼던 터라 서준의 불안은 잠재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둘은 같이 잠을 자지 않으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잠시간의 이별은 그런 불안함을 촉진 시키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사랑의 부재는 후유증이 남는 법이다. 흉터는 길게 갈 것이고 어쩌면 둘은 평생에 걸쳐 이것을 같이 해결해야 할지도 몰랐다. 머리로는 서로가 온전히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서 시작된 불안은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서준은 지우와 함께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지우는 여전히 아픈 상태였다. 교수에게 연락했다. 아무래도 지우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전에 했던 사랑니 발치와는 달리 이번에는 수술실에서 수술을 진행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서준이 수술 스케줄을 조절하고 지우의 입원 준비를 하는 동안 지우는 고요히 잠이 빠진 채였다.

펑펑 우는 서준에 지우는 제 무릎이 흠뻑 젖은 것을 느꼈다. 이제야 정신을 제대로 차린 지우가 서준이 애처럼 목놓아 우는 것을 보았다.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서준은 지우에게 이렇게 애처럼 우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이제야 얇았던 막이 탁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둘은 기어코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바보 같은 생각 좀 하지 마! 왜 네가 아픈 게 벌이 되어야 해. 이상한 생각 그만 해 한지우!“

”…….“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어려우면 연습해. 이상해 보여도 연습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 있어. 알아. 그러니까 이제부터 연습해서 솔직해져!“

”알았어. 정말 네 말대로 할게. 약속할게. 약속이라는 말 한 이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킬게.“

”너 진짜 나쁜 놈이야 한지우. 알아? 말없이 떠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빠.“

”응. 맞아, 나 나쁜 놈이야. 혼자 곪아 터져서 사랑 쌓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죄책감만 쌓은 놈이야.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

”죄책감이 사랑보다 앞서면 안 돼. 알았어?“

”응, 알았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 울어. 응? 너도 나랑 같이 나란히 입원할 거야?“

그 말에 서준이 지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땀이 많이 나서 냄새 날 텐데. 와중에도 그런 걱정을 하는 지우는 자신이 우스웠다. 서준에게 어떻게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이 마음은 뿌리째 흔들어도 뽑히지 않을 것이다. 우느라 뜨끈해진 서준의 몸을 하염없이 쓰다듬어주었다. 지우가 자는 틈에 연락을 다 해놓아 병원 측에서 차를 보내주기로 했다. 둘 다 운전할 정신은 없고 회사 인력을 쓰기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라 서준도 더는 손 내밀고 싶지 않았다. 병원 측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다며 둘은 차를 타고 움직였다. 간단하게 입원 준비를 다 손수 마친 서준이 익숙해 보여 가슴이 아팠다. 아팠을 때 누구도 챙겨주지 않아 아픈 몸을 이끌고 스스로 입원 물품을 챙겼을 어린 날의 서준을 생각하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아픈 것은 역시나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입원 준비하는 데 익숙해, 서준아.“

”촬영하며 병원 다니는 게 예사였어. 여기저기 좀 부러지기도 했고. 그때마다 부모님은 바빠서 나 챙길 정신 없으니까 내가 그냥 혼자 다 했어.“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일찍 태어나 너를 만났어야 했는데.“

”맞아. 한지우 그랬어야지. 나보다 더 일찍 태어나서 나를 만나러 왔어야지.“

그리고 그런 지우에게 장난스럽게 볼을 꼬집으려다 놀라 도로 손을 내리는 서준에 지우가 다른 뺨을 내밀어 서준의 손을 이끌어 대게 한다. 그러자 말랑한 볼의 촉감이 느껴져 서준이 싱긋 웃는다. 비록 둘 다 눈이 퉁퉁 부어 볼품은 없었지만, 오늘만큼 개운한 날이 있을까 싶었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지우는 링거를 맞고 주사로 된 항생제를 맞았다. 수술은 밤으로 예정돼 있었다. 내일을 넘기기에는 지금 컨디션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교수는 병원에 지우가 도착하자마자 다시 영상을 찍었고 전보다 더 파고들게 난 사랑니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염증은 다소 나아졌으나 아무래도 사랑니가 제대로 똬리를 틀고 앉아버린다면 더 큰 일이었다. 더 자리를 잡기 전에 서둘러 한시라도 빨리 수술해야겠다고 계획을 변경한 교수는 상세히 수술 설명을 하고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 병원에서 놔주는 진통제와 항생제는 효과가 좋아 집에서 혼자 앓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서준은 지우의 넓은 침대에 옆으로 앉아 같이 병실에 설치된 티브이를 보며 시간 때우기를 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일 입원할걸. 한마디 지나가는 것을 들은 서준이 또! 하며 이번에는 정말 세게 지우의 등을 때렸다. 지우는 저도 모르게 억 소리를 냈다.

”그런 말 하지 마. 잠깐 좋아진 거지 계속 좋다는 보장 없어. 또 그 사랑니가 조금이라도 더 자란다고 움직이면 너 그대로 응급 수술이야.“

”알았어. 말이 그렇다는 거였어.“

“말이라도.”

“옆에 너 있으니까 좋아. 안심돼.”

“나도. 너 안 아프니까 좋아. 아파지려면 내 앞에서 아파.”

“너도. 촬영장에서 이제 어디 다치고 그러면 혼자 아프지 마.”

“어, 그러면. 음…. 나 와이어 타다가 여기 까졌어.”

그리고 훌러덩 윗옷을 걷더니 옆구리 쪽에 멍과 함께 까진 흔적이 보였다. 왜 못 봤을까 싶은 정도로 커다란 상처였다. 놀란 지우가 턱이 빠지게 소리도 못 낸 채 눈이 커지자 서준이 웃었다. 며칠 전에 다친 건데 깜찍하게 잘도 숨겼다. 멍으로 봐서는 최소한 일주일 전이었다.

“나 아프기 전이잖아. 왜 말 안 했어.”

“이거야말로 정말 별것 아니니까. 액션씬 찍으면서 다치는 일 부지기수인데 그때마다 말하면 너 질릴걸.”

“내가 네 얘기에 왜 질려?”

“나도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라도.”

꼭 지우를 따라 하는 모양새로 지우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지우 어깨에 기댔다. 정신없이 촬영하고 와 걱정이라던 것이 무색하게 서준의 휴대폰에서는 연기 좋았다는 메시지만 잔뜩이었다. 서준은 제 휴대폰 메시지를 꺼놓지 않고 지우와 공유하고 있었다. 쑥스러운 서준이 배우에게 으레 하는 말이라고 말했지만,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볼이 두둥실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서준이 귀여워 지우는 서준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평소 같으면 되돌려 주었을 서준이 지우의 상태를 감안해 멀쩡한 볼에 뽀뽀만 했다.

지우 몫의 저녁까지 야무지게 먹은 서준이 곧 있을 지우의 수술을 기다렸다. 밤이 되자 한껏 한산해진 병원은 복도조차 조용했다. 깊은 밤, 드디어 수술이 준비됐다는 연락과 함께 서준과 지우가 움직였다. 잘하고 오라는 서준의 말에 지우가 답 대신 웃었다.

생각보다 수술이 조금 길어졌다. 염증은 그런 데로 걷어냈으나 아무래도 자리 잡힌 사랑니가 신경을 건드릴 수 있어 세심한 수술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교수는 땀을 훔치며 근래에 사랑니 발치 케이스 중 가장 힘든 케이스였다고 말했다. 다행히 윗니에 난 사랑니는 반대와 같이 바르게 나아 손쉽게 발치할 수 있었다. 머리 쪽과 연결된 수술이기에 부분마취는 힘들어 수면 마취를 하고 수술을 진행했다. 아직 마취해서 덜 깬 지우가 서준을 보자마자 씩 웃더니 서준의 대뜸 껴안았다. 다행히 병실에는 저와 지우뿐이었다. 대뜸 저를 껴안는 지우가 또다시 가슴 아픈 말을 할까 걱정이 됐다.

“서준아, 사랑해.”

하지만 걱정과 달리 아주 예쁜 말을 깜찍하게도 뱉어 놓고 다시 잠에 빠진 지우를 보였다. 서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잠시 옷만 갈아입고 오겠다던 교수가 돌아오자 지우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고 서준이 웃음을 띠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발치가 깔끔하게 된 영상을 보여주고 일주일만 고생하면 잘 나을 거라는 말을 남긴 의사에게 지우가 대뜸 잠에서 덜 깬 채 일어나 물었다.

“키스는 언제부터 가능해요?”

“아, 키스는 항생제 다 복용 끝나면 가능합니다.”

교수는 엉뚱한 질문을 받았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답을 했다. 외려 당황한 것은 서준이었다. 갑자기 자다 깨서 하는 말이 키스는 언제부터 할 수 있느냐니. 녹음이나 영상 남겨둘 걸 후회가 됐다. 하지만 다시 영상 촬영하러 한번은 병원에 와야 한다는 교수의 말에 여차하면 교수에게 사실관계를 물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서준이 짓궂게 웃었다.

몇 시간 푹 자고 깬 지우가 눈에 띄게 부기와 열기가 줄어든 볼이 신기한지 혀로 툭툭 건드려보았다. 이제 건드려도 두통은커녕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통증에서 해방이었다.

“지우야.”

“응?”

“우리 키스 언제부터 가능하게.”

“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게.”

“키스 말이야. 키스. 언제부터 가능한지 안 궁금해?”

“궁금하지…. 근데 갑자기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갑작스러운 키스 얘기에 지우가 당황을 넘어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묻더라고.”

“누가?”

“한지우가.”

“어? 내가? 언제? 나 그런 말 한 기억 안 나는데.”

“당연히 안 나지. 수면 마취하고 완전히 깨기 전에 갑자기 네가 교수님께 물었어. 교수님께서 항생제 다 복용 끝나면 해도 된다고 답도 해주시고.”

“거짓말.”

“내가 왜 그런 거짓말 해?”

“나 놀리려고?”

“교수님께 물어볼까?”

“안 돼!”

서준은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 정말 교수님께 전화해서 사실에 관해 물을 것 같았기에 지우가 서준의 입을 대뜸 손으로 막았다. 그런 지우가 귀여워 서준은 이제 멀쩡해진 양쪽 볼을 손으로 주물러 마사지 겸 만졌다. 저의 힐링 포인트를 되찾은 서준이 오랜만에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과거에 얽매였던 지난날을 벗어나 이제는 현실에서 똬리 틀 뻔한 죄책감을 벗어던진 두 사람의 얼굴에는 사랑만이 남아 있었다.

“와~ 오늘부터 지우가 그렇게도 궁금해하던 키스 해도 되는 날이네?”

“강서준.”

“왜?”

“내가 키스만으로 끝낼 것 같지.”

“어? 아니, 그게. 나 내일 촬영인데!”

“씁. 어디서 안 먹힐 거짓말. 지금 여기가 어딘데. 너 촬영하던 촬영장이잖아. 마지막 촬영이라 같이 왔으면서.”

“아니 그게, 내일 안 찍은 비하인드나 이런 거 더 찍어야 하고….”

“안 잡아먹어. 키스만 하자.”

“정말 키스만?”

“일정 있으시다며.”

“농담이었지. 그걸 곧이곧대로 들어?”

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서로 입술이 부르트도록 키스를 나누었다. 서준이 상처 확인 겸 양쪽 사랑니가 났던 부분을 살짝 혀로 쓰다듬었으나 아픈 기색 하나 없는 지우를 보고 안심했다는 듯 키스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둘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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