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델라 토레의 회고록 제 1장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동은 이해하기 위한 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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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동은 이해하기 위한 배움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교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서 태어난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희뿌옇게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뿐이었다.
그게, 몇 살 때였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보면, 나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부모’라고 생각되는 성인 남녀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붙잡은 채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나있는,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교단에서 나온 이후 그 기억을 떠올려가며 책을 찾아보니, 그 건축물의 명칭은 에펠탑이라고 했다.
그 기억이, 내가 교단이 아닌 ‘바깥’에서 왔다는 유일한 증거고, 증명이었다.
*
교단 안은 너무 답답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밖에서 왔다는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더 그랬다. 넓게 펼쳐진 하늘. 탁 트인 시야. 그곳에 막연하게 품은 동경. 하지만 교단 안은 답답하게 가로막힌 천장과 벽이 전부였다. 가끔 나가는 외출에서 보는 풍경들은 나에게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욕망을 증폭시켰다. 그래도 교단 안에 있는 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갇혀있는 건 답답하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상했기에.
교단 사람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항상 어디를 가든 따라붙는 시선만 제외하면, 그들은 무척이나 상냥한 사람들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무척이나 말재주도 없고 소심한 편이어서 나에게 쏟아지는 관심들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기꺼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라서 귀엽게 여긴다고 하기에는 다분히 과한 태도였지만, 그 당시의 나는 어려서, 그런 그들의 지나칠 정도의 호의가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정말 드물게 있는 외출 날. 화창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이 하늘을 매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무심코 해버렸다. 그러자 나의 보호자로 같이 나갔던 사제님들은 몹시 당혹스러워하면서, 너는 신의 아이라고, 이런 더러운 바깥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밖으로 나가봤자 위험하기만 하고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그런 말들을 계속해서 늘어놓으셨다.
도대체 신의 아이라는 게 뭔데. 신이 뭐기에 내가 나가는 걸 막아. 신은 나를 사랑한다며,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거를 막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다양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난 항상 다정하셨던 분들이 일제히 나의 말에 반대하는 모습에 약간 겁을 먹었다. 그래서 순순히 나가지 않겠다고. 내가 잘못 말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무언가 찝찝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느꼈기에.
그리고 그 사건 이후, 교단 사람들의 태도는 일변했다. 더 이상의 호의는 없었다. 남은 것은 친절을 가장한 감시의 시선뿐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그냥 내가 나가는 게 싫어서, 내가 나갈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하려고 친절하게 대해준 거였어.
물론, 노이만 사제님은……. 여전히 자상하시고 다정하셨지만……. 아니다. 그분도 그래봤자 교단 사람인데. 그분도 나보다는 교단이 소중하시겠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날 노골적으로 감시하는 시선을 그냥 내버려두는 거 아니야?
교단 사람들이 너무 미웠다. 일종의 배신감이었던 것 같다. 전부 거짓말쟁이들뿐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 놈의 신이라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자기가 뭐라고 날 못나가게 하는 건데. 사랑하면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사랑 필요 없었다. 다들 신이 존재한다고, 신은 우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너무 듣기가 싫었다.
다 거짓말쟁이들이야. 그럼, 신이 존재한다는 것도 거짓말일거야. 날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말이겠지. 다 멋대로 신이라는 걸 만들어 놓고 떠들어대는 거 아니야? 만약 있다고 해도 날 사랑하지는 않을 거야.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니까.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좀 궁금해졌지만 이내 그냥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숨이 막혔다. 이곳에 자유라고는 없었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난 나가고 싶은데, 아무도 날 나가지 못하게 해.
환상처럼 드넓고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거리의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던,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풍경.
나는 그 기억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거기로 가고 싶어. 근데, 나갈 수 없어. 아무도 내가 나가는 걸 원하지 않아. 아무도 내 말은 들어주지 않아.
외롭고, 외로웠다. 여기에 내 편이라고는 한명도 없어. 사람이 싫고, 밉고, 무서웠다. 사람들과 더 이상 어울리는 것 또한 무서워졌다. 그래서 무작정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이 교단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었고, 사람이 싫었던 나는 무작정 눈에 띈 길로 도망쳤다.
교단의 도서관에는 책이 아주 많았다. 물론, 바깥세상과 관련된 책은 적고, 태반이 신과 관련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래도 거짓말쟁이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는 거짓말쟁이들이 만들어낸 신에 관한 책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 나아서 무작정 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의 책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들이 태반이었다. 역사책도 있었는데, 역시나 교단의 역사에 관한 책이었고 읽기는 했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적당히 읽다가 덮어버렸다. 신에 관한 이야기들도 솔직히 말하면 어려워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는 철학책뿐이었다.
물론 도서관의 모든 책들은 그것이 철학책이라고 할지라도 교단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책들뿐이었다. 하지만 난 그냥 책을 읽는 게 좋았다. 있지도 않은 신에 관한 내용이 섞여있어도 누군가가 써 놓은 글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책을 읽고 있으면 부담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평소보다 훨씬 적었다. 감시하는 시선들이 닿아도 책을 읽는 척 하며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백날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감시하더라도 나의 머릿속까지 감시하지는 못하니까.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들은 알 수 없으니까.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벌이는 조그마한 일탈은 나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좁디좁은 서면 위에서, 나의 자유가 피어났다.
그 작은 자유가 너무나 달콤해서. 나에게 자유란, 무언가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어서. 더더욱 그것에 매달렸다.
*
책으로 도망쳐 지낸지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처음 바깥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나서인지, 감시의 경계가 좀 약해졌다고 느꼈다. 그야, 그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읽고 지냈으니…….
……혹시, 이대로 그들의 경계가 옅어져 감시가 거의 없어졌다고 느낄 때 즈음엔, 여기서 몰래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을 문득 떠올렸다. 바깥에는 흥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마치 여기에 녹아든 것처럼. 이들에게 정을 붙인 것처럼 행동하면, 더 경계를 풀지 않을까?
난 문득 떠오른 대책 없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망상에서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자유를 얻고 싶어서.
*
난 사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난 말주변도 없고 낯도 많이 가리는 편이었기에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상황자체를 피하고 싶어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떻게든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친밀감 넘치는 말들을 쥐어짜냈다. 그들이, 내가 그들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도망칠 생각이 없다고 안심시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띠고, 가식으로 가득 찬 애교를 부리며. 그들에게 갖은 감언이설을 속삭이며. 그들의 오감이 부디 흐트러져서 틈을 보이게 되길 기원하며. 내가 정말 싫어하는 그들에게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난 그런 나의 모든 행동들이 역겹다고 느꼈다.
‘소심했지만 드디어 교단사람들에게 정을 붙여 활발해진 아이’라는 가면을 쓴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어떤 아이가 교단에 들어왔다. 교단에 어린 아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는데.
.....작아! 나보다 작은 애는 처음 봤다. 작, 작네....
....작다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은 역시, 낯설다. 살갑게 말을 걸긴 했지만, 낯선 건 낯선 거야.
이 아이도 다른 교단 사람들처럼 신앙심이 깊어보였다. 교단사람들 말도 엄청 고분고분하게 잘 따랐다. 있지도 않은 걸 잘도 믿는 구나 싶었다. 음... 그리고 4살인데 엄청 어른스러운 것 같았다. 4살인데 말이다. 4살은 완전 어린 애 아닌가? 난 6살에도 저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나도 저랬나?
흠....... 조금, 불편한가? 잘 모르겠다. 처음보는 사람은 항상 불편했으니까. 그래서 그런거 겠지. 얘도 있지도 않는 신 믿는 거 같으니까. 다른 교단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가면’이나 쓰고 대하자. 그럼 별 문제 없겠지?
......그렇게 겉으로만 친밀하게 구는 시간이 몇 번 반복되고, 그 시간이 쌓여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일상들 중 하루였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에게 살가운 척 말을 붙였고, 위 아래로 날 훑어보는 시선에 밀려오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교단 내부를 누볐다. 평소처럼 우연히 마주친 아이에게도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넸을 때였다. 문득, 나는 나를 쳐다보며 인사하는 아이의 시선에도 역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그날 방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상하다. 왜 그랬지. 모두 날 언제 나갈지 몰라서 경계하는 것 같은 눈으로 봤는데. 항상 그런 눈이 싫었는데. 그러고 보니 쟤가 쳐다볼 때는 한 번도 그런 걸 느낀 적이 없네. ....잠깐, 없다고? 진짜?
그제야 난 깨달았다. 이 교단에서 그 아이만은, 나를 사지를 옥죄는 것처럼 감시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딜리스였다.
*
딜리스가 교단에서 생활한지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또 다른 아이가 교단에 들어왔다. 에스텔이라는 여자 아이였다. ...얜 더 작아! 완전 꼬맹이네!
이 아이도 굉장히 신앙심이 깊어보였고.....정말 미안하지만 놀리는 맛이 있는 아이였다.
난 사교성이 있어보이는 수단 중 하나로 사람들에게 장난을 자주치는 편이었다. 에스텔을 장난스럽게 놀린 것도 평소처럼 친밀감 있어보이게 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런데 얘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반응을 보였다. 살짝 놀렸더니 바로 눈가가 울망울망해지면서 울먹거리는 것이었다.
그 어떤 교단 사람들도 그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미안한 마음보다도 신기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앞섰다. 너무 놀리는가 싶으면 딜리스가 옆에서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난 그만두지 않았다. 그야 너무 재밌는걸. 절대 그만 둘 생각은 없다. 이 지루한 교단에서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교단을 탈주해버리고 말 것이다.
책을 읽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재미이었다. 깊게 생각하고 배우며 느긋하게 성취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과 달리 건드리자마자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웃긴 반응은 나에게 처음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심하게 놀려버린 것도 있는 것 같았다.
....그치만 재밌는걸.
얜, 정말 순수하다. 순수의 결정체인 것 같았다. 교단 사람들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고... 그렇게 순진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고작 9살인 주제에 난 그렇게 생각했다.
얘도, 날 감시하는 것 같지는 않네? 하긴 이런 애가 감시를 하긴 뭘 하겠어. 맨날 놀리면 놀리는 대로 울기만 하는 앤데. 감시 같은 걸 맡겨도 그, 그런 걸 어떻게 해요... 하고 울어버릴 것 같다. 오? 재밌겠는데? 나중에 비슷하게 한번 놀려볼까?
*
에스텔이 들어온 지 반년 정도 후, 페로치아라는 아이가 들어왔다. 걔는 나랑 동갑이었다. 대박. 나 동갑은 처음 봐. 신기한 마음에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 애도 신앙심이 깊은 애인 것 같았다. 여기서 신앙심이라고는 바닥을 치는 건 나뿐일지도.... 근데 신이 있다는 건 거짓말인걸. 있지도 않은 걸 왜 믿는 거지? ....몰라. 다 이상해.
페로치아와는 좀 서먹하다고 해야 하나, 곁을 잘 내주지 않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 애는 항상 그린 듯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 있었다. 낯을 가리는 건가, 아니면 그냥 어울리기 싫어서 선 긋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교단 사람들보다는 나으니까 뭐.
페로치아와 나는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도 그 아이도 서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떨어져 있었다. 그저 그 근처를 맴돌기만 할 뿐인 사이. 난 그 아이와의 관계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으니까.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딱히 날 감시하는 것도 아니잖아. 만약 페로치아가 날 감시하는 것 같았으면 기를 쓰고 친해지려고 했을 것이다. 경계를 허물고, 방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하지만 페로치아가 날 딱히 감시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뭐.... 몰라. 그냥 신경 끄자. 그 시간에 나갈 방법이나 고민해야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페로치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바깥은 어떤 곳인지 말해주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따뜻했다. 미소는 그 이상으로 다정했다.
대체 마음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페로치아는 우리에게 다가왔고, 아이들과 나는 그런 페로치아의 다정함에 익숙해졌다. 딱히 밀어낼 이유가 없었으니까. 안 친한 것보다는 친한 게 낫지. 억지로 웃는 건 싫지만 안 웃어서 싸우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얘랑도 그냥 친한 척하면서 지내야겠다. 딜리스랑 에스텔한테 친한 척하는 것처럼. 다른 교단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그렇지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아이들 사이에서 가식 따위는 담겨있지 않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얼굴에서 가면이 사라진 건 언제부터였던가? 그 아이들이 날 감시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아니면 그 아이들 사이에 있는 게 도서관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편하다고 느꼈을 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아이들이 나의 가면을 깨부쉈다는 것이다.
분명히 나보다 어린데 더 어른스러운 것 같은 딜리스. 눈물이 많고 상냥한 에스텔. 자상하고 다정한 페로치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웃고 있는, 나.
문득, 깨달았다. 아, 이게, 자유구나.
여전히 난 어른들이 싫었다. 그들은 날 속이고, 거짓말만 하는 족속들이다.
여전히 사람들과 말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 건 나에게 너무 어렵고 부담스러운 행위였다.
여전히, 나는 가면을 쓴다. ‘사교적인 나 자신.’ ‘교단에 정을 붙인 나 자신.’ 그 외 온갖 듣기 좋아 보이는 미사여구를 붙인 가면들을.
여전히, 책은 재밌다. 상상의 세계는, 언제나 자유롭고 행복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곳에서도 자유를 찾았다. 망상이 아닌, 현실에서.
나의 모든 역겨운 ‘가식’을 던지고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지면 위가 아닌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너희가, 나의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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