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델라 토레의 회고록 제 2장
“이해하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이해하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 시나리오 요그소토스의 아이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미셸의 잡다한 생각을 적은 수첩에서 발췌했기에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작성되어 있습니다. 가끔 맥락에 어긋나거나 두서없는 내용이 마구잡이로 적혀 있거나, 실제 사실과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 2장
<미셸의 수첩>
XXXX년 X월 X일
(엉망진창인 실력으로 해와 구름이 그려져 있다.)
(유려한 필기체로 쓰여져 있다.)
교단을 나와서 본 하늘은, 언젠가의 기억처럼 보는 사람을 압도시킬 정도로 넓고, 아름다웠다. 이 세상 또한 그랬다.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 매대에 놓여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 어디선가 풍겨오는 비릿한 하수구 냄새.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인한 탁한 공기. 분명 아름답지만은 않은 그 광경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겠지.
교단에 관한 기억은 아이들과의 추억을 제외하고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떠올리지 않는 편이다.
아, 아니구나. 아이들과의 추억 말고 가끔씩 꺼내보는 기억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건 바로 노이만 사제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아이들과의 추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떠올려도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죄책감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고는 했다. 그 분은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셨는데. 내가 교단 사람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분의 순수한 호의를 묵살해버린 것 같아서.
...마지막에는 우리를 그냥 보내주기까지 하셨는데....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난 그냥 그분도 날 감시하는 사람일거라고. 교단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일거라고. 절대 우리를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오해를 했다고 사과하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고. 나는 사죄보다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해서, 비겁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교단 밖에 나온 지금은, 가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는 했다. 제멋대로 오해하고 제멋대로 실망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그분의 친절을 땅바닥에 버려왔던 게 죄송해서. 미약한 죄책감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곤 했다.
물론 죄책감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분에 대한 걱정이 이따금 치밀어 오르곤 했다. 우리를 내보내주신 것 때문에 혹시 위험해지셨을까봐. 교단 놈들이 그 분께 무슨 짓이라도 벌일까봐.
....하지만, 걱정해봤자 딱히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교단 밖으로 나왔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그렇게 정했고,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내가 사제님을 걱정하는 것은, 내가 멋대로 가지고 있는 죄악감 때문이겠지. 그분을 걱정하는 것으로, 그분을 의심했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면죄부라도 얻고 싶은 걸 거다. 적어도 나는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니, 후회할 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자위하는 거다.
....이딴 생각이나 하고 난 정말 멍청하구나.
후회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없고, 반성한다고 해도 용서해 줄 당사자가 눈앞에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용서를 해 주실 지는....
애초에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죄책감이다. 노이만 사제님은 내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할 인간 취급했다는 것도 모르겠지. 내가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 느끼는, 나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나의 죄. 그러니 이런 감정은 서둘러 잊어버리는 게 낫다. 나만 잊어버리면 애초부터 없었던 일이 되니까. 그걸, 그걸 알고는 있는데...
....그걸 안다고 해서,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죄의식을 지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미련하고 멍청하니까 계속 이런 생각이 나는 것 아닌가. 이성으로 감성을 제어 하는 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일 리가 없지 않은가. 잊어버리고 싶다고 잊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후회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난 정말.... 멍청해.... 바보 멍청이 미셸....
뭐, 그래도... 내가 하는 생각이 바보 같다는 걸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 적어도 모르는 것보다는 내 심리상태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으니까.
내가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나? 아무도 모르는, 심지어 죄책감의 당사자조차 모르는 일을 사과하려고 교단으로 가기라도 하려고?
아니면, 사제님의 안위가 걱정된답시고 무작정 교단에 가서 확인이라도 하려고?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난 그렇게 못한다. 그런 무모한 짓을 행동에 옮길 능력도, 마음도 없다.
사제님에게는 정말 죄송하지만, 나에게는 사제님보다는 아이들이 더 소중하다. 그깟 죄의식, 그깟 염려. 무시하면 그만이다. 나만 묻어두면 되는 일이야.
이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럽지만, 내가 사제님에게 가지는 감정은 그 정도였다. 살아가면서 이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딱 그 정도.
....그럼, 나에게 있어서 아이들은, 대체 뭘까?
세간에서 말하는 친구라고 하기에는... 우리의 관계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관계.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유일한 관계. 이런 건 친구라고는 안 한다.
무슨 단어로, 우리를 정의할 수 있을까.
(주변에 친구? 가족? 동료? 이건 아닌가? 하면서 흐물흐물한 글씨체로 물음표가 마구 그려져 있다.)
계속해서 고민이 쌓여만 갔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뭐, 굳이 정의를 내리는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 이름이 없다고 해서 관계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일은 없다.
흠... 그래도 궁금하니까. 일단 천천히 생각해보는 걸로 할까.
XXXX년 X월 X일
노이만 사제님, 죄송합니다.
과거의 과오를 부끄러워하며 회한에 잠기기에는 아이들과 그려나갈 미래가 제게는 더 중요합니다.
이기적이고 수치를 모르는 못된 저를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못된 아이도 친절하게 대해주신 그 다정함에 경이를 표하며,
미셀 올림.
어짜피 전해주지도 못할 거 쓰는 나도 참 나다. 그리고 편지랍시고 썼는데 맥락은 개뿔. 만약 드린다고 해도 뭔 말인지 못 알아보시겠다!
XXXX년 X월 X일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들이 휘갈겨져 있다.)
옆 집에 사는 애는 정말 나쁜 놈이다! 내가 집에만 처박혀서 책만 읽는 미치광이라고? 머리에 뭐 하나라도 제대로 집어넣고 말해! 이 무식한 놈아!
(약간 날아가는 듯한, 휘갈겨 적은 필기체로 쓰여져 있다.)
교단을 나오자마자 난, 성격에 큰 변화가 있었다. 아니, 나의 본래의 성격이 변한 것은 아니라 이걸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좀 그런가. 정정하자, 나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내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난, 아직도 타인에게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저 사람들도 교단 사람들처럼 내 진정한 마음을 말하는 순간 돌변할지도 몰라. 그게 견딜 수 없이 두렵고, 무서워서. 그래서 나는 또 다시 ‘활발한 나’를 연기한다. 적어도 이 가면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 겉껍데기니까.
여전히 나는 교단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것이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이곳에서는 굳이 불편한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아도 되었다. 교단에서와는 달리 어떤 사람이 껄끄러우면 내 쪽에서 피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집 밖으로 나가는 빈도도 줄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귀찮고 불편하니까. 딱히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안 나가는 게 편하니까 안 나가게 된 것 뿐이었다. 만약 나가더라도 책을 사기 위해 한 번, 보고 싶은 건물이 생겼을 때 한 번. 나갈 일이 있더라도 사람이 많은 시간대는 피해서. 그게 편하니까. 나 편한대로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근데 내가 집 밖으로 안 나가고 책만 읽는 걸로 옆 집 놈은 날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그냥 니가 싫은 거라고!
친해지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과 친한 척하는 건 이제 사양이다. 난, 내가 좋아하는 내 사람들하고만 어울릴 거야. 아이들하고만 있으면, 말을 늘어지게 해도, 하루 종일 뒹굴거려도, 하기 싫은 건 대놓고 하기 싫다고 말해도 되었다. ‘가면’을 쓰지 않고,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난, 그게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전부 말해도. 우리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가식과 거짓말로 쌓아올린, 다른 관계들과는 달랐다.
너희가 날 애정하고 사랑해주었기에. 너희가 내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었기에.
아... 이런 관계를....
이런 관계를... 무엇이라고 부르려나... 가족? 글쎄... 책 읽어보니까 남보다 못한 가족도 있는 거 같던데. 친구라고 하기에도... 대체 뭐지... 동료는 서먹하고...
잘 모르겠다. 꽤 고민을 해봤지만 답은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고 느끼기도 했다.
굳이 단어 하나로 정의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
책에서 보니까 무엇 하나로 정리되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드물다고 하니까.
우리에게는 우리가 전부고,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하니까, 그냥...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튼 결론은, 우리 애들 빼고는 다 나쁜 놈들이라는 거다. 그 놈 반드시 복수하겠어!
XXXX년 X월 X일
실패했다. 함정이라도 파서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땅은 엄청 단단했다! 딜리스랑 페로치아한테 파달라고 할까.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복수하기에는 귀찮다. 애초에 삽을 잡는 것부터 귀찮았다. 귀찮은데 굳이 복수를 해야하나. 근데 소설에서 보면 다들 하는 것 같던데.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느니 하는 말을 옆에서 해도 아무도 안 들어먹었다!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모르겠다. 그건 소설이고. 이야기 전개하기에 좋고 매력적인 설정이라서 다들 넣는 거겠지.
내가 굳이 소설대로 할 필요는 없지. 결국 복수 안 하는 소설도 있고. 뭐... 복수가 인생을 망친다는 말도 있고. 용서가 가장 좋은 복수라는 말도 있고. 그래! 난 용서로 복수를 한 것이다! 절대로 귀찮아서가 아니다!
실실 웃고 있으니까 에스텔이 이상하게 바라본다. 왜 저렇게 한심한 철부지를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걸까? 하지만 난 그런 에스텔을 용서해 줄거다! 난 어른스러운 오빠니까!
XXXX년 X월 X일
(유려하지만 약간 옆으로 늘어진 필기체로 쓰여져 있다. 기울어지다 못해 옆으로 드러누운 글씨이다.)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한 것은 역시, 책을 읽는 것이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밖에 나가는 건, 사람 만나니까 싫고. 책을 읽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딱히 읽으면 안 되는 이유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책을 읽었다.
책은 여전히 재밌었다. 아! 아니지! 교단에 있던 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재밌었다. 교단의 책들은 그 놈의 신 얘기만 덕지덕지 있었는데. 바깥의 책들은 신에 관한 얘기가 있는 책도 있지만, 없는 책도 많았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새로웠다. 너무 재밌어서 참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돈은 모자랐지만.
...그래서 최대한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그래도 돈은 모자랐지만.
(흐느적거리는 의미불명의 낙서가 되어있다. 찌그러진 책과 같은 그림이 여러 개 그려져 있다.)
바깥의 책들은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내가 한 번도 읽은 적 없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역사, 새로운 사실들. 모든 것들이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인 것은 단연 ‘소설’ 이었다. 그 안에는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있는가하면,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도 있었다.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세상에 대해 써놓은 글들. 난 그 글들을 통해 내가 가본 적 없는 세상을 경험했다. 내가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새로운 자유의 세계였다.
교단 놈들은 이런 것도 못 읽게 하고 정말 나쁜 놈들이다!
그놈의 신은 이제 지긋지긋해!
물론 바깥에도 신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교단에서 말하는 그네들의 신과는 다른 신들이었지만 서로 자기들이 진짜라고 우기는 건 다 똑같았다. 대체 뭐가 진짜인 거야.
듣다보면 몇몇개를 제외하고는 하는 소리도 비슷비슷하곤 했다. 단체로 어디서 종교 창립에 대한 교육이라도 받는 건가?
뭐, 종교서적 말고 무신론자들이 쓴 책들도 있었지. 그런 건 좀 재밌었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들이 있긴 하구나, 동질감도 좀 들고. 나랑 똑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도 많았어!
(무언가 바짝 말라비틀어진 노란색 완두콩 같은 것들이 잔뜩 그려져 있다. 그 옆에 돈... 돈이 좀 더 있었으면... 책... 책 더 읽고 싶어... 라고 흐릿하게 써져 있다.)
XXXX년 X월 X일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종류는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수많은 활자들을 읽는 도중, 이런 문구를 읽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흠.... 난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라고 생각했는데. 흠....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과연, 내 생각이 좀 짧았을지도. 정답은 없는 문제 같기는 한데....
그 문구를 읽은 후, 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봤다.
(갑자기? 뜬끔없어...라고 흐릿하게 써져 있다.)
이건 뭐, 종종 하는 생각이니까. 애초에 난 일평생을 교단에서 지냈다. 그 사실을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오래 살아서 그런지 종종 모든 생각이 신으로 귀결되고는 한다. 하루 종일 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신에 관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적힌 책을 매일 같이 읽고 살았으니 어쩔 수 없다.
누구를 잡아다가 교단에 집어넣어놔도 10년을 그렇게 살면 내 꼴이 날 거라고 장담한다!
교단에서 나온 다음, 처음에는 모든 것을 신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사고회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이건 관성 같은 거니까. 언젠가 신에 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때가.... 오.... 겠지...? (물음표가 마구 그려져 있다.)
각설하고, 다시 그 문구에 대한 생각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난, 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신은 없다! 절대 있을 리가 없다!
근데 만약, 만약에, 진짜! 만약에! 있으면! 날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날 싫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옛날에 했던 생각은 집어치우고, 다시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그 놈의 신이 있으면, 날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해서. 만약, 만약에, 진짜 만약에, 신이 있더라도, 걔가 나한테 관심이나 있을까? 인간이 이렇게 드글드글 세상에 넘쳐나는데 그 중에서 굳이 나 하나를 콕 집어서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가 있다고?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딱히 신을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못 나가게 하는 핑계로 신의 아이들이니 뭐니 해서 귀찮고 짜증났을 뿐이다. 교단 사람들이 싫었을 뿐이지 그네들의 신을 싫어하는 건.... 음.... 지긋지긋하다? 질린다? 뭐 이정도? ....아닌가? 이건 그냥 싫어한다고 하는 게 맞나? 근데 호불호로 말하자면 딱히 아무 생각 없는데.... 호불호 없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잖아. 딱 그 정도인데 이걸 싫어한다고 해야 해?
음....
난 신이라는 존재를 안 싫어하는 것 같네.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10년간 지겨울 정도로 들어온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 대해 사랑이나 증오 같은 격렬한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흐음.....
만약 신이라는 게 있다고 해도 나한테 딱히 관심 없겠구나. 종교 믿는 애들은 어떻게 그렇게 신이 자기네들을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신기한 애들이야.
뭐... 내가 걔네 신앙생활까지 염려해줄 정도로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니고. 그 문구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납득한 것 같으니까 됐나. 아!! 좋은 탐구 시간이었어!
졸려. 근데 자기는 싫으니까. 책이나 읽어야겠다. (글자가 개발세발 써져있다.)
XXXX년 X월 X일
(늘어져 있지만 꾹꾹 눌러쓴 글씨다.)
....졸려.
근데 자기는 싫어.
자면, 그 때의 악몽이 현실처럼 내 눈 앞에 펼쳐지니까.
깊게 잠드는 것도 싫어.
깊게 잠들면, 그 끔찍한 기억이 꿈으로 나타나도, 도무지 깨어날 수가 없으니까.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형태의 끔찍한 괴물. 그리고 그 앞에 쓰러져 있던 한 구의 시체. 그 악몽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나.
잠들면 항상 나를 찾아오는, 차라리 내 망상이길 바라는 기억.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깊은 잠에 빠지면,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렇기에, 잠은 항상 나에게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시간아 빨리 가라. 언제 아침이 오나. 밤은 너무 무서워.
책을 읽고 싶어서 밤을 새는 것도 있었지만,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 것도 있었다.
아무리 자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눈꺼풀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더라. 기를 쓰고 졸음을 참다가도 순간 방심하면 깜빡 선잠에 들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적어도 그때는 얕게 잠들기 때문에 끔찍한 악몽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나마 낫다.
밤에 잠이 드는 것은 무서워. 어둠 속에 나 혼자인 것 같아. 그 악몽에서 나만 살아남은 것 같아.
밤이 무서워서.... 그래서....
난 항상 책을 읽으며 잠을 꾸역꾸역 참고 아침이 되길 기다린다.
(빨간색으로 바람 빠진 공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해야, 해야 빨리 떠라.
아침이 되어 태양이 떠오르는 걸 보면 안심이 되고는 했다. 교단에서 벗어났을 때 보았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하늘이 생각났기 때문에. 그 때의 기억은 악몽보다도 강렬해서 악몽도 제 기를 못 쓰고 슬그머니 물러나고는 했다.
일출을 보고 있을 때면, 아, 벗어났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했다.
.....페로치아는 죽지 않았다는, 살아서 곁에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그제야 안심하는 것이다.
그렇게 안도가 온 몸을 적시면, 지난 밤 동안에 참은 수마가 밀려온다.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수마에 몸을 맡겼다.
이곳은 교단이 아니었다.
이곳은, 태양 아래였다.
페로치아가 죽은 교단이 아닌, 밝은 태양이 비추는, 페로치아가 살아 움직이는 바깥이었다.
(두 개의 원통이 달린 흰색 원과 오렌지색 부스스한 털뭉치, 노란색으로 칠해진 떡과 검은색 해초같이 생긴 것이 그려져 있다.)
(아래에는 ‘에스텔 페로치아 딜리스 나’ 라고 유려한 필기체로 쓰여져 있다.)
....그렇다고 내가 매일 밤을 새는 건 아니었다. 졸린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며 책을 읽고 있으면, 에스텔이 같이 자자고 끌고 가는 날도 있었다. 딜리스랑 페로치아가 안 와서 불안한 마음에 내 손이라도 붙잡는 건가. 아니면 안 자고 밤새서 책만 보니까 자라고 시위하는 건가. 음.... 그냥 내가 안 자서 걱정되는 건가?
이유야 어쨌든 에스텔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어서 그런 날에는 에스텔의 옆에 누워있다가 잠에 들고는 했다. 항상 만성피로인 이 몸뚱아리는 누워만 있어도 잠이 오니까. 이상하게도 에스텔이 손을 잡아주는 날은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을 잤다. 그건 좀 괜찮았다.
(‘에스텔 손 ➔ 뭐지 수면제인가 혹시’ 라고 낙서처럼 쓰여 있다.)
에스텔은 페로치아가 새벽에 들어오면 내 손을 놓고 페로치아의 방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갔다. 그러면 어김없이 나는 잠에서 깨고는 했다. 잠귀도 엄청 밝고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잘 깨서 아무리 에스텔이 조용히 나간다고 해도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뭐... 모른 척 해줬다.
음.... 모른 척 해준 나는 멋진 오빠인 것 같다! 이런 걸 성숙하다고 말하는 건가?
음... 페로치아는 나도 걱정되지만... 에스텔 혼자라면 모를까 나까지 일어나서 보러 가면 페로치아가 잠 다 깨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새벽에 들어오는데...
그것도 그렇고 나까지 페로치아를 걱정하는 티를 내면, 에스텔이 더 불안해 할 것 같고... 에스텔이 걱정할까봐 악몽 꾸는 것도 안 들키려고 하고 있는데.
(‘내가 페로치아 걱정 ➔ 에스텔 불안 ➔ 악몽 꾸는 거 숨겨서 덜 불안해하게 하는 거 말짱 도루묵!!! ➔ 이거 중요!!’ 이라고 적혀 있다. ‘중요!!’ 옆에는 별표가 마구 그려져 있다.)
....애들이 안 그래도 신경 쓰는 거 많은 거 같은데 나까지 더 신경 쓰이게 하면 안 되지... 신경.... 안 쓰이게 하고 있는 거 맞겠지?
...아닌가.
딜리스도 새벽에 들어오는데... 내가 나가보면 지금까지 왜 안 자고 있었냐고 걱정할 것 같아서... 가끔 책 보느라 안 잔 척하면서 나가보기는 했지만.
애들이 너무 늦게 들어오고 늦게 자. 늦게 자면 키 안 크는데.
근데! 딜리스는 엄청 컸다! 걔는 대체 성장판이 무슨 일이란 말이야! 잭한테 콩이라도 얻어먹고 다니는 게 분명하다! 뭐야! 나도 줘!
(초록색 타원이 달려있는 초록색 구렁이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걱정을 하는 걸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말하지 말고 있어? 걱정은 되는데. 근데 에스텔도 불안해하는데 나까지 그러면 애들이 더.... 음..... 정답이 뭘까. 정답이란 게 있을까? 너무 복잡해. 확실하게 답이 정해지는 문제는 없는 걸까. 책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면 다 이러고 사는 거란 말이야? 사람들 엄청 복잡하게 사네.
나는 또다시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있었다.
페로치아가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지? 에스텔은 잘 자고 있겠지? 맨날 그렇게 자는 도중에 깨면 건강에 안 좋은데... 책상에 앉아 있기 싫다. 누워서 책 읽고 싶어. 근데 에스텔이 빠져나간 침대에 혼자 누워있으면 외로워서... 그리고 이런 때 누워있으면 졸리고...
오늘은 유난히 생각이 이것저것 많이 들어서 의미 없는 글이나 휘갈기고 있기는 한데. 보통 이런 때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었지. 자기 싫었으니까.
애들이 옆에 없으면 밤에 잠을 자기는 싫어. 어두운 밤에 혼자 잠에 드는 건 무서우니까.
혼자가 된 것 같아서 쓸쓸하고 외로워. 고독해. 무서워. 두려워. 고요하고 적막한 어둠 속에서 찾아오는 섬뜩한 공포, 망상, 악몽.... 그런 것들을 털어버리기 위해 활자를 계속해서 읽고, 읽었다. 적어도 책을 읽으면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았다. 책의 세계에 빠져들어서, 악몽과는 다른 세계를 유영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책에 푹 빠져서, 이 세계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져서. 그렇게,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해가 뜨기 마련이....
아, 해 뜬다.
(옆에 커다랗게 침 자국이 나 있다.)
XXXX년 X월 X일
우리는 자주 집을 옮겨다녔다. 교단 사람들의 추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집을 옮겼다. 이사하기 귀찮아... 집은 되도록 같은 곳에서 오래 살고 싶은데...
근데 딜리스랑 페로치아가 집을 옮기자고 하면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난 집 밖에 잘 안 나가서 교단사람들의 추적이 얼마나 심한지 잘 모르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데 뭐라고 말을 얹기 그랬다. 물론 귀찮다고는 말했지만 짐 옮길 때는 별말 없이 따라갔다. 내가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게 낫지.
그래도 역시 이사는 귀찮아. 새로운 집에서는 또 어떻게 적응하려나... 적응하자마자 또 이사 가겠지? 우리는 평생 이러고 사는 걸까? 우리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집이 생겼으면 좋겠어.
(네모에 삼각형을 얹은 것 같은 그림이 찌그러져서 그려져 있다.)
XXXX년 X월 X일
딜리스랑 페로치아가 또 다쳐왔다. 맨날 다쳐오고, 맨날 늦게 들어와. 대체 어디를 돌아다니길래 돌아올 때마다 몸에 상처가 늘어있어. 몸에 붕대가 감겨져 있는 걸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 제발 좀 나가지 말고 집에 있었으면...
너무 걱정돼. 페로치아도, 딜리스도.
페로치아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있었, 으니까 특히 더...(약간 글자가 번져 있다.)
근데 또 얘네가 밖에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돈이 없어서 굶어죽겠지. 대체 돈은 또 어디서 벌어오는 걸까? 제대로 된 일터에서 돈을 버는 건 아닌 것 같다. 제대로 된 곳이었으면 저렇게 다쳐오지 않았겠지. 어디서 벌어온 지 모르는 돈을 들고 온 애들은 그 돈을 에스텔에게 쥐어주고는 했다. ....이런 돈을 내가 책 사는 데 써도... 아니다... 기껏 힘들게 벌어왔는데 안 쓰려고 하면 애들이 더 마음 상하겠지.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척 해야겠다. 그러면, 애들도 오히려 부담 없이 생각하지 않을까? 돈이 없다는 것을 너무 의식하면서 행동하면 애들이 더 신경 쓸지도 몰라. 그냥 조금 용돈이 모자라다는 것처럼 행동하면, 애들이 그냥 좀 한심하게 보면서도 부담은 안 가질 것 같은데. ....돈 관리는 에스텔이 하니까. 적당한 선에서 관리해주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려나?
XXXX년 X월 X일
그 이후로 고민을 해보았다. 굉장히 심사숙고한 끝에, 나는 나 나름대로 신중히 결론을 내렸다.
일단 현재, 내가 딜리스와 페로치아를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딱히 없었다.
난 몸을 쓰는 건.... 항상 쥐약이었다.... 이건.... 솔직히 타고난 것 같은... 몸 쓰는 건 재능 차이가 커 아무래도... 보아하니 몸 쓰는 위험한 일 하는 것 같은데....
냉정하게 말하면, 도와준답시고 따라갔다가 짐만 될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내가 발목 잡아서 애들이 더 다치겠지. ....음.... 그래도.... 음.... 아니야. 역시 짐만 되겠지. 난 아직도 당근 하나 썰려고 식칼을 잡았을 때 손가락을 다져버릴 뻔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몸을 쓰는 일에는 재능이 전혀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하는 것.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 거였다.
...그리고 그게,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나만의 답이었다.
....물론, 아이들은 무척이나 머리가 좋다. 어떤 때는 내가 가장 멍청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머리가 좋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거랑 지식을 많이 쌓는 거랑은 다르니까.
이 세상에서 아는 것은 힘이고, 무지는 죄가 된다. 그저 앎과 모름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건 생각보다 이 세상에서 크게 작용한다. 많이 알면 지식인이 되고, 아는 게 없으면 무식한 놈이 된다. 그 무식한 놈이 사실 지식인보다 똑똑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그냥 모르면 멍청한 놈 취급받는 게 이 세상이다.
지금 당장은 이 미지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급급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우리가 이곳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지금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지식도,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위협 또한,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도사리고 있으니까. ......그 때, 페로치아에게 있었던 일처럼.
언젠가 그런 위협이 우리에게 찾아올지도 모른다. 칼로는 베어버릴 수 없는 위협이. 그런 무서운 일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런 위협이 찾아온다면, 지식이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오지 않으리라고 낙관하는 것보다는 그에 대비하는 것이 낫겠지. 나의 지식은 그런 예측하지 못하는 사태의 대비책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아이들의 무력이 소용없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럼, 그때는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는 방패막이 되리라.
그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내 지식이 우리를 지켜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정말, 정말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런 날이.... 차라리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나의 배움이, 나의 이해가, 너희에게도 삶이라는 자유를 가져다주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나만의 답을, 오늘도 실천해보고자 한다.
새 책 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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