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그 소토스의 아이들

미셸 델라 토레의 회고록 제 3장

“이해를 한다고 해서, 자유는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 제 3장 

 

“이해를 한다고 해서, 자유는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학문은 페스트이며, 지식은 병원이다. 지식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 그리포에도프

 

* 공황 발작, 자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 트리거 워닝 (드래그)

* 시나리오 ‘요그소토스의 아이들’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난, 언제나 자유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이 오롯이 홀로 자유롭기를 바랐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자유롭기 원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너희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

 

 

벗어날 수 없어. 벗어날 수 없어.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어.

 

보기만 해도 안심이 되던 태양은 이제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빛이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공포가 파도처럼 나를 덮친다. 숨이 턱, 하고 막히면서 온 몸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어쩐지 시야도 흐려지고, 귀도 먹먹하다. 부족한 숨을 어떻게든 보충하고자 숨을 들이키면, 한없이 먹먹한 귀에 내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깊게 숨을 들이키는데도, 폐에는 공기가 차오르는 것 같지가 않다.

아, 이렇게 죽는 걸까.

차라리 의식이 끊어졌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고 있으면, 어느 순간 다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내가 미친 걸까? 하지만, 방금까지 느껴졌던 공포는, 진짜였다.

죽음을 겪어보지도 않은 내가 이정도인데 딜리스는, 페로치아는, 괜찮은 걸까? 에스텔은?

...우린, 정말 벗어날 수 없는 걸까?

 

 

*

 

 

이 세상이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하던 그 암흑과 같은 일주일. 그나마 그 끔찍한 일주일이 지나자, 햇빛을 보아도 심각하게 발작하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두렵고, 무섭고, 불안했다. 사소한 변화만 있어도 신경이 곤두서고, 날카로워졌다. 이따금 공포의 파도가 날 덮치면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서워. 무서워. 누가 나 좀 살려줘.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딜리스, 페로치아, 에스텔...

 

...딜리스.

페로치아.

에스텔.

 

이대로면, 그 아이들도 그 끔찍한 신한테 잡아먹힐 거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해... 그 신이 아이들을 잡아먹을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내버려둘 수는 없어. 내가, 내가, 찾아봐야해. 무력으로는, 절대 그 괴물 같은 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그냥 이대로 포기하면 안 되는 걸까? 너무, 무서워.

또 정신 못 차리지. 정신 차려! 애들을 그렇게 내버려 둘 거야?

몰라. 무서워. 그냥 포기하면 안 되는 거야?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정신 차려! 저번처럼, 또 정신 못 차릴 셈이야? 그 동굴 안에서, 이상한 짓 하면서 애들 발목이나 잡아놓고 혼자 다 잊어버리고? 무섭다고 또 아무것도 안하면서 가만히 있을 생각인거야?

.....

....폐가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엄청난 민폐를 끼쳐버리고 말았어. 그래, 이제는 발목 잡지 않기로 했잖아. 이제, 한 번 쯤은 나도 도움이 되어야할 때가 왔잖아. 지금은, 포기해도 될 때가 아니잖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법을... 그 신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보자.

 

입에서 올라오는 구역감과 공포를 억눌러 가며, 난 책을 다시 붙잡았다.

습관이라고 말해도 좋고, 간절함이라고 말해도 좋다. 무엇이든 좋았다. 그곳에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책 속의 지식이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곳에 해답이 있다고 굳게 믿고. 내가 하는 행동이, 이번에야말로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

 

미친 듯이 책만 읽고 지낸지 일 년, 아이들과 함께 치료를 받기로 했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이후에야, 내가 종종 겪던 증상이 공황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 공황발작이 어떤 것인지 알고야 있었지만 직접 겪을 때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난 정말 아둔하구나. 알고 있는 지식도 현실에서 써먹지를 못하니.

치료는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과호흡과 불안 증세는 거의 없어졌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다른 아이들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페로치아는, 생각해보니 우리만큼 심한 증상을 겪지는 않았었다. 정신 못 차리는 우리를 혼자서 돌봐주기까지 했던 것이 기억난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말 강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딜리스와 에스텔은... 많이 힘들어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둘 다 괜찮아진 것 같으니까. ...괜찮아, 진 거겠지.

다들, 괜찮아 진 걸거야. 그럴 거야. 우린 다 괜찮아 졌고, 괜찮아 진거고... 이제는 그 신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일만 남은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면 돼.

안일하게 아이들이 괜찮아진 것이라고 믿으며,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그렇게 주변에 빼곡히 쌓아놓은 신에 관한 서적들 사이에 파묻혀, 그 속에 있을 탈출로를 찾아, 자유를 찾아 헤맸다.

아무리 찾아도, 찾아도, 방법은 나오지 않았고, 난 점점 지쳐갔다. 지쳐가는 것과는 별개로 신경은 더욱더 날카롭게 곤두섰다. 스스로도 스스로가 예민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다른 책에는 있겠지, 다른 책에는 있을 거야, 아니, 있어야 해.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버릴 것 같아서. 그 아이들이 살 길을 찾는 것을, 내가 포기해버릴 것 같아서.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밖에서, 이따금은 옆에서 들리고는 했지만, 나는 시선을 글씨에 고정시키고, 귀를 막았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어리광이라도 부리게 될까봐 귀를 틀어막은 채 책에 집중했다. 지금은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때가 아니었다. 안 된다고 포기해도 될 때도 아니었다.

사실, 이제는 희망을 품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들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아이들이 곧, 내 자유니까.

 

*

 

 

 

...에스텔이, 보이지 않는다.

 

 

 

*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눈이 가득 쌓인 설원을 무작정 걷고, 걷고, 또 걷고. 손과 발은 파랗게 질리고, 입에서 나오는 입김마저 차갑다고 느끼게 될 때 까지. 가득 쌓인 눈을 헤치고, 헤치고, 그 속에서 그 하얀 아이를 찾고, 찾고, 또 찾다가.....

사지가 얼어붙을 듯한 추위 때문에 손과 발끝의 감각이 무뎌질 때쯤 나는, 더 이상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맨날 집에서 책만 읽은 몸뚱아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혼자 돌아온 게 아니었다. 딜리스가, 데려다 줬지.

딜리스는 나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에스텔을 찾으러 나갔고......

 

─아, 나는, 진짜, 왜 이렇게 무력하고 무능해서....

딜리스와 페로치아와 함께 그 아이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조차 못하는 구나.

어떻게 보면, 그 아이와 같이 있던 시간이 가장 길었던 건 나인데.

난 왜 그거 하나 눈치 채지를 못하고....

 

나도, 지켜지기만 하고 살았는데.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심하게 살았던 나 같은 것도 남아있는데. 누구보다도 게을러터지고, 책 사는 데에 돈만 낭비하던, 나도 여기에 남아있는데. 왜,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살았던 네가 떠나야 하는 건데.

...있는 것만으로도 폐를 끼치는 나도 남아있는데.

 

이 집에 내가 있어도 되는 이유가 있나?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책 사는데 돈이나 쓰고, 빈둥거리기만 하는 사람. 그게 내가 아니던가. 책을 본다고 해도 도움이 되면 다행이지, 단 한 번도 애들에게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사실은 그게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처럼 세상에 나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두려웠다. 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난 그냥 지식을 쌓는다는 핑계를 대고 무능한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예쁘게 포장하기에 바빴던 거다. 나도 무언가를 하고 있노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던 거다. 혼자, 안전한 집 안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말이다.

 

그 모든 그럴듯한 허물을 벗겨낸 나는, 나의 본질은, 이렇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놀고먹는 것뿐인 사람.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사람. ...잘난 척하면서 사실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

그게 나였다.

 

...인정하기 싫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또다시,

책을 붙잡았다.

그 신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면, 에스텔이 돌아올지도 몰라. 아니, 돌아올 거야.

 

...내가 걸어온 길이. 매달려 온 길이. 사실은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말.... 벗어날 수 없어? 정말로?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거야?

내가 살아온 방법은, 정말 무의미했던 것인가.

 

 

*

 

 

살아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면....

 

 

*

 

 

어... 살아있네.

멍 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몸을 축 늘어뜨리자 손에 잡고 있던 것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 두둥실, 하고 상념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왜 실패한 거지. 분명 잘 된 것 같았는데.

한동안 어딘지 모르게 까마득한 기억을 뒤지고 있자니, 그제야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딜리스에게 화를 내던, 에스텔과 페로치아의 모습. 그때... 죽어도 돌아온다는 내용을 말했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도 같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아무튼, 그게 진짜였구나.

이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정신이 매몰되어 있어서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그럼 진짜 어디에도 없는 거네. 벗어날 방법이. 책을 백날 뒤져봐도 없고,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도 못하고.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내가 시도했던 방법들은 모두 좌절되었노라고. 벗어날 수 없다고. 그리고... 난 너무나 무능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다고.

 

나는 그렇게, 손에서 책을 내려놓았다.

거기에 답 같은 건 나와 있지 않으니까.

무언가를 배운다고 해서, 이해를 한다고 해서, 자유는 손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지금 와서는 그런 상식 밖의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한낱 인간이 집필한 출간물에 나와 있었다고 생각했다니 너무 멍청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내가 무능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겠지. 당연한 사실 하나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었던 거다.

내가 해 왔던 건 전부, 부질없는 일이었던 거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제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인 것 같아서,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에스텔을 찾았다고 한다. 딜리스가 전해주는 소식을 그저 멍하니 듣고 있었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무사해서.

딜리스도, 에스텔을 찾으러 나간 이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근데 왜 에스텔은 옆에 없는 거지? 딜리스는, 또 나가는 거야?

딜리스는 나에게 에스텔이 전해주라고 했다며 몇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안 줘도 되는데... 이런 것보다는 그냥 같이 있어주면 안 되는 거야?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애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입을 다물고 책을 받아들었다. 옆에는 없지만, 그래도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서, 가슴 한 편이 욱신거렸다.

 

짧은 재회의 인사 후, 딜리스는 다시 집을 나섰다. 한동안 창밖으로 멀어지는 딜리스의 뒷모습을 쫓다가 그 아이의 머리털조차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방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시선이 가 닿은 곳은, 에스텔이 전해주라고 한 책이었다. 난 그 책을 보면서,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책을 펼쳤다. 책을 읽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살면서 활자를 이렇게 오랫동안 읽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책을 읽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행동인지 절절하게 깨달았으면서도, 난 다시 책을 펼쳤다.

변명을 하자면, 그 아이들이 건네주는 걱정과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다. 거절하기에는, 아이들의 걱정은 너무나 달콤했고, 아이들의 사랑이 고팠다. 지금은 내 옆에 없는 그 아이들의 흔적이라도 곱씹고 싶었다. ...내가 사랑받는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그렇다, 난... 단 한 번도 도움이 된 적은 없으면서, 사랑은 받고 싶었던 거다.

사실, 도움이 되고 싶었던 이유도...

폐를 끼치기 싫어서.

함께 있어도 되는 이유를 찾고 싶어서.

...가만히 있으면서 애정만 받아 마시는 게 미안해서.

...같이 있는 것에, 부채감을 느끼기 싫어서.

결국, 아이들보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내 마음이 우선이었던 건, 아닐까.

아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걱정해 주는데, 나는 내 감정이 우선이었던 건 아닐까.

...정말, 추악하기 짝이 없구나.

도움이 되고 싶다고 발버둥친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현실을 봐라. 예전이랑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들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그 아이들의 애정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를 영영 떠날 수 있나?

내가 지금 나가면... 페로치아가 날 찾으러 다니겠지. 아마, 소식을 듣는다면 딜리스와 에스텔도 찾으러 다니지 않을까.

나간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날 찾을 때까지 계속 찾아다니겠지. 그럼, 또 발목 잡으면서 민폐 끼치는 거잖아. 에스텔도,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나간 걸 텐데... 그것도 방해하게 되는 거잖아. 애들이 찾아다니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이루고 싶은,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저 바깥에 있나? 없잖아. 그래. 굳이 폐 끼지치 말고, 집 안에나....

...아니지. 사실 그 아이들이 찾아다닐 거라는 핑계를 대서라도 나가기 싫은 것뿐이잖아. 그냥,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운 것뿐이잖아.

 

...그럼,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곳에서 나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바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과 잡념, 온갖 합리화와 그에 대한 부정, 그것들을 모두 냉정하게 분석한 결과, 나가도 결국 도움 따위는 되지 않는다는 결론만 나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겁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나, 미셸은... 무능한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겁쟁이라서, 민폐인 스스로를 이곳에서 치우는 것도 못하고, 하다못해, 죽어서 사라지는 것조차 못한다. 겁쟁이더라도 유능하기만 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텐데, 유능하지도 못하다.

...그냥 죽은 듯이 살아가는 것만이 그 아이들의 발목을 잡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 마치는 이야기 

 

 

난 그 이후로 더더욱 밖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에스텔이 준 책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외에 하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창문 너머로 페로치아가 오고가는 걸, 가끔은 딜리스가 오는 걸 보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버린 ‘우리’의 집에서, 창밖만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했다.

 

딜리스는 에스텔의 책을 전달해주기 위해 가끔 집에 들렀다. 딜리스는, 힘들었던 예전과는 달리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아, 너라도 괜찮아서 다행이다. 라고 안도하고는 했다.

활기가 도는 딜리스의 얼굴을 보다보면, 아무것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내가 그래도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나보다, 하고 안심하고는 했다. 안도할 자격조차 없는 주제에, 비겁하게도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시켰다.

딜리스의 환한 얼굴을 볼 때면, 나까지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딜리스가 에스텔이 준 책을 전해 줄때면, 에스텔과 딜리스의 다정함에 절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자격은 없겠지. 딜리스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워서 금방 시선을 피하고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밝은 얼굴을 볼 때마다 스스로가 행복해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더욱 그 아이의 얼굴을 오래 마주할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페로치아는 창문으로 바라보는 것을 제외하고도 매일 얼굴을 보곤 했다. 방에 틀어박힌 나에게 식사를 전해주는 것이 페로치아였으니까.

그렇게 매일같이 만나는 페로치아는 여전해 보였다. 여전히 담담하고, 여전히 굳건해보였다. 그 아이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그대로. 우리의 버팀목으로서 존재해줄 것만 같았다.

그 아이는 여전히 강건해서, 방 안에만 박혀있는 나를 챙기는 것 또한 잊어버리지 않았다. ...슬슬, 나에 대한 건 잊어버려도 괜찮은데 말이다. 페로치아의 자상함이 절로 느껴져서 더욱 죄책감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옆에서 얼쩡거리면서 방해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오히려 더 신경 쓰이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또 너무 겁쟁이여서, 방에서 나가 페로치아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역시, 내가 다 잘못한 것 같았다. 내가 그 신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답시고, 애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게... 이렇게 우리가 뿔뿔이 흩어진 원인인 것만 같았다.

도저히, 너희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미안하고, 미안해서... 차라리 방에 틀어박히는 것을 선택했는데. 너희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스스로를 가두었는데. 너흰 자꾸 나에게 다가와서 다정하게 대해줘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희의 옆에 있어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너희의 옆에 있는 것에, 어떠한 자격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

너희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날 사랑하고 있어서. 그리고 그걸, 매순간마다 깨닫게 되어서. 그리고, 못난 나는 그게, 못내 기뻐서...

결국, 비겁한 나는 어느 날 문득,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이대로,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딱히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그 아이들의 옆에 있어도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내가 멍청하고 무능해서 미안해.

그래도... 난 최선을 다해 너희를 진심으로 사랑했어.

부디, 이대로, 옆에만 있게 해줘.

 

 

미셸이를 상징하는 계절은 가을이 아닐까 싶네요.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고,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기도 하며, 가장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지요.

 

학문은 페스트이며, 지식은 병원이다. 지식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 그리포에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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