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고양이와 용의 벚꽃 이중주

사문주

“우리 이제 그만해요.”

누가 먼저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그가 구해두었던 우리의 집에서 나는 짐을 챙겨들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현재까지 일어난 일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은 단지 그 두 줄이 전부였다. 어느 때와 다름 없는 일상이었고, 그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지나기를 몇 개월. 결국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청룡 님.”

“세상에, 아가. 대체 무슨 일이니?”

“…조금, 일이 있었어요. 당분간만 영역에서 지내도 될까요?”

짐을 든 채로 찾아간 제 상사이자 보호자인 그녀는 놀란 낯을 하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마든지 쉬다가렴. 네 영역이기도 하잖니. 현대 청룡은 그녀이기에 아직은 제 영역이 아님에도 후대에 청룡이 될 자신을 배려한 것인지 다정히 건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슬쩍 웃어버렸다.

깊은 심해 안의 유일하게 밝은 곳. 인간들에게는 용궁이라고도 불리는 ‘청룡’의 영역은 바다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함부로 누군가가 들어올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당대의 사신수 중에서도 청룡에게 주어지는 그곳은 제가 어릴 적에 지낸 곳이기도 했다. 현대의 청룡에게 허가를 받아낸 저는 익숙하게 제 짐을 들고 발을 들였다. 사특한 자를 거부하는 영역은 언제나 그랬듯 저를 반겨주었다. 영역에 오면 편안해지는 것이 제가 영락없는 청룡이 맞기는 한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조금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겨울잠에 들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기에는 그 시간은 너무도 짧았으니까.

🐈

“그, 요즘 주 씨가 안 보이네요…?”

“그 녀석이라면 요즘 영역에서 지낸다고 청룡이 그러던데.”

네에…. 청룡이 아닌 이들에게 영역이란 허가만 있다면 드나들 수 있는 상층부를 의미했다. 그보다 더욱 깊숙한 곳에 존재한 심층부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당대의 ‘청룡’과 그 후계에게만 공개되는 그곳은 다른 사신수나 수족이 절대 발을 들일 수 없는 절대영역과도 같았다. 물론 들어갈 수 있는 꼼수 정도야 있었다. 청룡의 손을 잡고 들어간다던가, 그의 가호를 받는다던가. 이 모든 방법은 동거중이던 연인에 불과하던 그 고양이가 할 수 없는 방법들이었다. 이제는 헤어지기까지 했으니, 더욱 방법이 없겠지. 축 쳐진 제 비서를 보며 백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럴 거면 대체 왜 헤어진 거야?

자신이라면 그 꼼수를 이용해 녀석을 보러 갈 수도 있었다. 하물며 청룡이 직접 제 힘을 형체화시켜 만들어준 귀걸이까지 있으니 더욱 수월하겠지. 다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평소라면 그렇게 꽁꽁 싸매고 비밀로 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너무도 쉽게 위치를 알렸다. 청룡과 상당히 오래 알고 지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그 속내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면서도 혹시나 하는 보험이겠지. 좀 솔직하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솔직하지도 못한 애인 탓에 백호의 한숨은 오늘도 늘어만 갔다.

백호의 비서, 사문은 서류를 처리해가면서도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한 상태였다. 헤어지기로 한 당일 짐을 싸서 곧장 나가더니 그 뒤로는 돌아오지 않는 제 전 애인 탓이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인지도 정확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스스로 먼저 짐을 싸서 나간 것이다. 그 뒤로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백호에게 듣기로는 벌써 겨울잠에 들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지낼 곳 없는 그녀가 이 시기에 영역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겨울잠을 자기 위함이겠지. 집을 구하는 것이 훨씬 낫겠지만, 영역의 심층부라면 말이 달라졌다. 절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 누군가를 피하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곳이니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괜히 불안해지기만 했다. 왜 헤어지기로 한 건지, 무엇이 문제였는지라도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제 문제를 알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인지, 그녀를 향한 미련인지 알지 못한 마음만 계속 쌓여만 갔다.

가을의 끝자락에는 청룡과 백호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봄을 관장하는 청룡은 겨울잠을 위한 준비를 해야했고, 가을을 관장하는 백호는 겨울이 다가올 때 즈음이면 일이 모두 끝나는 시점이었다. 이 시기의 용들은 잠에 드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겨울잠을 대비해 신체를 적응시키는 단계에 들어가고는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청룡은 결계를 강화하고 인간계의 기후를 최종적으로 확인한다. 그것이 사신수의 할 일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현대의 청룡인 영이 아닌 후계인 주가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인간계의 관리가 끝나고 나면 제대로 겨울잠에 들 시기가 찾아오고는 한다. 영역 내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면 그제서야 청룡은 잠자리에 든다. 이마저도 최근에는 주가 하는 일이기도 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청룡이 네 걱정을 하도 해서 보러 왔는데 잘 하는 것 같으니 가봐야겠군.”

“…….”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주를 보며 백호는 괜히 표정을 구겼다. 나라고 좋아서 온 줄 아나. 사문이가 네 걱정을 많이 하던데. 지나가듯 말하는 그의 소식에도 그녀는 태연히 그래서? 하고 답할 뿐이었다. 하여튼 청룡은 다 이러나. 솔직해지면 어디가 덧나냐고 진짜. 더욱 답답해지기만 한 백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잠이나 자라며 영역 밖으로 나섰다. 쟨 대체 뭐하러 온 거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주의 시선은 곧 영역 내부로 돌아갔다. …나도 이제 슬슬 자야지.

🐬

겨울잠을 위한 짐을 대충 풀고 영역 내에 존재하던 제 방에 들어가 이불을 꽁꽁 싸매 덮었다. 두툼한 솜이불에 꼭 안기고도 인형을 하나 꼭 끌어안고 나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은 듯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와 연애할 때 맞춘 모든 것들을 들고 나왔으니, 그는 집안을 정리할 필요도 없겠지. 이걸 어디에 어떻게 처분하지. 몇 백년을 살았음에도 연애는 처음이었던 탓에 이런 상황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청룡 님께 여쭤볼까? 아냐, 그 분도 이런 건 모를 거라고. 한숨을 푹 내쉬며 괜히 이불 안으로 꾸물거리며 들어갔다. 그냥 잘래. 조용히 흘러가는 바닷물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매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눈이 내리는 날이 늘어났다. 명백한 겨울이었다. 백호는 청룡의 곁에 붙어있으면서 종종 영역 심층부로 들어가 주를 살폈다. 좋든 싫든 제 누이와 같은 존재였고, 제 연인이 그렇게 걱정하는 이였으니 살피는 것 뿐이었다. 무엇보다 제 비서가 겨울 내내 축 쳐져서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소식이라도 들고 가서 알려주던가 해야지. 이전 “사문 씨가 자기 닮은 고양이 인형을 선물해준 거 알아? 너무 귀엽더라.” 라며 맑게 웃으며 애인을 자랑하던, 지금은 그저 깊게 잠든 제 누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그 인형인가본데. 이럴 거면 대체 왜 헤어진 거야? 백호는 다시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봄 되기만 해봐라. 무슨 꼴이 나는지 두고 보자고. 그런 생각은 덤이었다.

🐬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아직은 조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주는 작게 웅얼거리며 꾸물거리다 눈을 떴다. 새순이 돋아나는 봄이었다. 두툼한 이불 안에서 조금 더 꾸물거리며 밍기적거리다 인형을 한 번 꼭 안고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삼개월을 내리 누워만 있었더니 몸이 굳은 것 같아 가볍게 풀어주며 숨을 깊게 내뱉었다. 제가 자고 일어난 자리를 적당히 정리하고 몸단장 후에 심층부 밖으로 나왔다.

서류로 처리하는 일들은 몇 년 전부터 대체로 전부 제가 처리하고 있었던 덕에 청룡이 늦게 일어난다 해도 큰 우려는 없었다. 청룡 님은 대체 이런 걸 몇 백년을 어떻게 하신 걸까. 새삼 피어오른 의문을 꾹 눌러담아놓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 자리에 앉아 그간 쌓인 서류와 매 해 봄마다 해야하는 서류들을 익숙하게 정리해나갔다. 매 해마다 하루에 끝날 분량의 서류가 쏟아지는 것이 아니었던 탓에 겨울에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요약해서 정리하고 봄의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순서였다. 제가 어릴 적부터 자발적으로 돕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혼자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 일들은 몇 년 째 생각하는 것이지만 혼자 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봄은 청룡의 관할이었다. 동시에 여름의 물과 관련된 모든 것 또한 청룡의 관할이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이들이 초봄에는 겨울과 봄의 일을 동시에 해야했고, 늦봄에는 봄을 마무리하고 서류를 넘기면서 여름의 장마를 준비해야했다. 사계 중 이계(二季)가 청룡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룡의 영력이 물과 관련된 탓이었다. 그러니 몇 백년이나 이 자리에 앉아있던 청룡이 사신수의 수장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급한 불만 끄고 머리 좀 다듬을까.’

겨울잠을 자는 동안 길게 내려온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본래라면 이렇게까지 길게 내려올 일은 없었는데, 연애를 하면서 단발로 지낸 탓인지 이제는 조금 길게 늘어진 머리가 익숙할 지경이었다. 이젠 연애도 안 하고 단발로 하고 다닐 이유도 없으니, 이전처럼 짧게 자르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길게 늘어트린 머리를 관리할 자신도 없었던 탓에 확 잘라버려야겠다 생각할 뿐이었다. 사문 씨였다면…. 그런 생각이 들자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사람 생각을 왜 해. 미쳤어. 헤어진 사이인데 이제와서 생각하면 뭐하자는 거야.

‘어차피 그 사람은 다 잊었을텐데…….’

괜히 가라앉은 기분에 도저히 일을 못 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쨌든 오늘의 최소치는 다 끝냈다. 조금 즈음은 쉰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말을 할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심해에 자리잡은 영역에서 나와 제 권속이기도 한 돌고래의 등에 타 해수면 위로 올라왔다. 따스한 햇살에 시원한 물살에 개운한 느낌을 받았다. 제 아이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 등을 쓸어주자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내는 것에 저도 같이 웃었다. 그래, 너도 오랜만에 놀러 나오니 기분 좋지? 그렇게 잠시 시원한 바람을 느끼다가 해안가로 올라와 아이를 쓰다듬어 돌려보냈다. 손짓 한 번으로 물기를 날려보내고 본격적인 산책에 나섰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그렇게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

기분전환을 위해 산책을 나온 사문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헤어진 뒤로 3개월 하고도 몇 개월이 더 지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주를 보지 못했다. 잘 지내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것은 많았는데 얼굴 한 번 볼 수가 없었다. 피해다니는 건지, 아니면 그저 정말 바빠서 그럴 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호가 원래 용들은 겨울잠을 잘 때 준비할 것들이 많아서 그렇다 얘기해주었으나 그냥, 더 보고 싶어질 뿐이었다. 같이 살 때의 겨울잠은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제가 아직 어리다는 생각과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

“……오랜, 만이에요.”

“그, 러게요.”

우연히 나온 산책길에서 마주칠 거란 생각은 한 적이 없었던 탓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굳어버렸다. 그래, 이제 생각났다. 이 산책길은 연애할 적에 둘이 같이 손을 맞잡은 채로 자주 거닐었던 곳이었다. 식후 산책으로도, 그저 같이 퇴근을 할 때도 종종 들렸다 가는 곳이기도 했다. 멍때리고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발을 옮긴 모양이었다. 그것은 주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색해 보이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한참을 침묵하다가 주가 먼저 가보겠다며 발을 돌리는 것을 그가 잡았다. 저기, 그…!

“같이, 저녁이라도 먹지 않을래요…?”

🐈🐬

그럼 자주가던 그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들은 산책길에서 헤어졌다. 주와 사문은 각자의 장소로 돌아가자마자 냅다 제 옷부터 체크하고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만져댔다. 산책 나간 김에 자르고 올 걸 그랬나? 조금 다듬는게 나았을까? 꼭 첫 데이트를 하는 연인마냥 설레어 하는 것 같다가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면 뭐해. 그 사람은 벌써 잊었을텐데. 헤어졌으면 했던 것은 자신인 것 같으면서도 미련이 남는 마음에 괜히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그 사람은 다 잊었을텐데…. 이래봤자 나한테 좋은 건 하나도 없는데. 꼴값을 떠는 사문이를 보며 백호는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쟤넨 대체 저럴 거면 왜 헤어진 거야? 저 꼴을 보아하니 주도 같은 상황이겠거니 하는 것이 훤히 보여 더욱 어이가 없어질 뿐이었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그들은 약속했던 식당 앞에서 마주쳤다. 신경쓴 듯 안 쓴 듯 애매한 그 차림새에 기대했다 실망하기를 똑같이 하던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메뉴를 받아들고 살펴보던 그가 항상 먹던 거죠? 하고 묻는 말에 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쩐지 조금 기뻐지는 마음을 꾹꾹 억눌렀다. 익숙하게 주문을 끝마치고 괜히 물잔을 만지작거리던 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네, 뭐. 일하고… 똑같았죠.”

아뇨, 사실 당신이 걱정돼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안 보이니까 더 생각나더라구요. 그런 마음을 억누르며 사문은 그녀를 향해 웃어보였다. 주 씨는요? 되묻는 말에 주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겨울잠 자느라 바빴죠. 우스갯소리를 하는 듯한 말에 그 역시 작게 웃었다. 아니, 사실 꿈에서도 당신을 봤어요. 진심을 감춘 채로 그들은 그저 웃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농담도 주고받았다.

서로의 앞에 내온 음식을 먹고 반주를 곁들이면서도 그들은 끝까지 본심을 숨기려했다. 어색한 공기가 여전히 그들 사이에 머물렀으나 애써 모른 척하고 눈을 돌리며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일부러 더욱 농담도 주고받았다. 청룡 님은 여전히 늦잠이시라던가, 백호 님은 여전히 일 중독이시라던가. 그런 이야기에 시시덕거리며 술을 한 잔씩 곁들였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정신을 더욱 꽉 붙잡아야 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옛 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조금씩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꽉 붙들고 있던 정신줄이 조금씩 느슨해지자 그들 사이에서는 금기가 되었어야 하는 말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 왜 바로 나갔어요? 이야기라도 해보면 좋았을텐데….”

“그치만, 그게 맞잖아요…. 헤어지자고 해놓고, 남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도…, 내가 그 이후로 얼마나 후회했는데요…. 그렇게 말하지 말 걸, 다른 말을 할 걸….”

응? 잠시만. 그의 말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주가 마시던 술을 멈칫하고 내려두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헤어지자고 한 거, 나잖아요…? 하고 물었으나 사문은 되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잖아요…? …….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누가 한 말인지도 서로가 정확하지 않았다. 애초에 환청을 들었던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무언가가 어긋나 있었다. 근데 무엇보다 저 사람, 후회했댔지. 술잔을 바라보다 단 번에 입 안에 털어넣었다. 술김에 한 번 물어보자. 아니라고 하면 술김에 헛소리 했다고 하면 되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결연한 얼굴로 주가 입을 열었다.

“사문 씨는, 나한테 미련 있어요?”

“네. 그치만, 주 씨는 아닐 수 있으니까….”

…어떡하지. 이 바보 같은 고양이를 어쩌면 좋지. 술김에 답한 듯 웅얼거리는 그를 보며 주는 괜히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짜, 정말 바보야. 이런 걸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미련이 있다는 거잖아. 어려, 어리고 귀여워. 그럼, 그럼 아직 기회는 있다는 뜻 아닐까? 짧은 시간동안 머리를 빠르게 굴린 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먹었죠? 우리 그럼 나가요. 이제부터는 완전 도박이었다. 주사위는 구를 것이다. 나오는 숫자가 꽝일지 당첨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 어? 갑자기 왜요?”

“가고 싶은 곳 있으니까 같이 가달라구요.”

여전히 술이 덜 깬 듯 보이는 그를 보며 주가 살짝 웃었다. 이미 술기운은 다 날아갔다. 싫다고 하면 술김이었다고 사과하면 될 일이다. 그러고 다신 안 보면 된다. …마음이 조금 아프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주가 그의 손을 잡고 해안가까지 거닐었다. 같이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 하던 중 볼이 잡혔다.

“싫으면 밀어요. 어차피 바다라서 안 다쳐.”

“네, 네?”

그대로 쭉 당겨져서 입술이 포개어졌다. 까치발이라도 든 건지 조금 높아진 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참을 질척하게 입을 맞추고 숨결을 섞다가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떼었다. 싫었어요? 아뇨, 너무 좋았는데요. 나랑 다시 연애해달라고 하면 해줄 거예요? …왜 그런 당연한 걸 물어봐요. 그의 대답에 주가 푸스스 웃었다. 뭐야, 정말. 괜히 맘고생만 했잖아. 선선한 바닷바람과 달빛 아래서 다시 한 번 입술을 포개었다.

🐈🐬

“그래서, 둘이 재결합을 했다고.”

“응, 그렇게 됐어. 청룡 님께는 말씀 드렸으니까 걱정 말고.”

태연히 사문에게 팔짱을 끼고 기대어 웃는 주를 보며 백호는 이마를 짚었다. 진짜 너네는 이럴 거면서 대체 왜 헤어진 거냐? 그간 생각만 하던 것을 기어코 내뱉어버린 백호를 보며 그들은 서로 마주보다 푸스스 웃었다. 그러게, 우리 왜 헤어진 걸까요. 그러게요. 저 염병천병할 커플을 봤나. 걱정해서 괜히 손해본 느낌에 백호는 서류를 작성하던 펜을 내려놓고 슬쩍 웃었다. 그 모습에 주가 어쩐지 소름이 돋으며 불길함을 느낀 것은 덤이었다. 쟤 저러면 꼭 이상한 말 하던데….

“그거 아나? 저 자식 겨울잠 잘 때 네가 줬다고 자랑하던 인형 껴안고 자던데.”

“야, 야! 야 이, 망할 고양이가…!”

“정말요…?”

“그, 아니, 그게, 그러니까….”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당황하는 주를 보며 백호는 약간의 승리감에 훗, 하고 웃었다. 저, 저걸 진짜. 부끄러움과 백호를 향한 분노가 섞여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서 사문은 그저 좋은 듯 헤실거리고 웃으며 주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그랬어요?”

사문의 말에 주가 차마 답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감춘 채로 작게 끄덕였다. 주변에 꽃이라도 필 것 같이 활짝 웃으며 그는 주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나 정말 주 씨가 날 잊었을까봐 걱정했는데. 전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라며 어리광 부리듯 부비적거리는 그의 행동에 슬쩍 볼에 입을 맞춰주며 그럴리가 있겠어요? 하고 답하며 웃었다. 꼴값을 떠는 연인을 보며 백호는 표정을 확 구겼다.

“지랄 염병을 떨 거면 나가서 해라. 신성한 집무실에서 무슨 꼴값을 떠는 거냐.”

그의 말에 푸하핫, 하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새순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 따스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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